[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생태관광 1번지 창원 주남저수지의 모든 것(연재) (⏳3분)
일러두기
경남 창원에는 주남저수지가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일찍이 철새 도래지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만든 저수지이지만 자연경관이 인공저수지답지 않게 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주변에는 드넓은 평야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120년 전만 해도 흔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창원 주남저수지와 일대 평야가 어떻게 해서 들어서고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한 번 알아보았습니다. 모르고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반면 조금이라도 알고 보면 아 그렇구나 하면서 한 번 더 돌아보고 살펴보는 보람과 즐거움이 더해집니다.
2021년 12월 발행한 창원시의 비매품 책자 ‘주남저수지 이야기-주남저수지의 역사와 생태’에 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비매품은 제대로 유통이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고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 맞추어 일부 내용을 보완해서 열두 차례에 걸쳐 연재해 보려고 합니다.
낙동강변의 자연암반 두 곳을 뚫고
목적은 재래논 200정보와 재래밭 1070정보, 그리고 황무지 80정보 등 전체 1350정보를 새 논으로 바꾸는 데 있었습니다. 황무지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촌정농장·동면수리조합과 달리 이미 농사를 짓고 있던 땅이 많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황무지를 농지로 바꾸는 개간보다는 밭을 논으로 바꾸는 사업의 비중이 훨씬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산수리조합의 핵심 과제는 홍수 때 낙동강의 범람과 역류를 막는 것과 평소 농사에 쓸 물을 마련하는 것 두 가지였습니다. 촌정농장과 동면수리조합은 낮은 땅이 많아서 물이 빠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면 대산수리조합은 낙동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자연제방 일대의 높은 땅에 물을 대는 것이 문제였던 거지요.
대산수리조합은 1927년에 문제 해결을 위해 여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어지간한 홍수에도 끄떡하지 않도록 낙동강 강변의 천연암반을 뚫어 터널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물을 안으로 길어올리는 본포양수장 수문과 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유등배수장 수문을 모두 그렇게 해서 만들었습니다. 북쪽 낙동강 강변과 동쪽 주천강 강변을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는 구릉을 이어 제1호부터 제9호까지 9km 남짓 제방을 쌓아 범람과 역류를 막은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조선인의 피땀으로 일군, 단순한 수탈보다 지독한
대산평야는 이처럼 일제강점 직전인 1905년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대략 25년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촌정농장과 동면수리조합 그리고 대산수리조합이 황무지를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대산평야를 개척하는 세 주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겉모습만 보고 말하면 절반의 진실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무라이의 개간 계획은 일본의 근대 토목기술과 조선인 노동력의 결합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농민과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없었다면 대산평야도 주남저수지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얘기지요.
일제강점기 지어진 이런 근대농업유산들은 지금도 대부분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튼튼하게 지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일본을 칭찬하는 듯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대부분 일제가 조선에 대한 영구 지배를 꾀한 결과였다고 말합니다. 촌정농장은 여기에 더해 일본인의 조선 이주까지 추진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탈을 넘어서는 지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될 것을 예상하면서 한국인더러 나중에 오래오래 써먹으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무라이 손자 부부의 반성과 사과
이를 두고 촌정농장과 관련해 흥미로우면서도 뜻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라이의 손자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1943~2013)가 2010년 5월 할아버지가 경영하던 촌정농장 자리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요시노리는 주민들에게 일본말로 “100년 만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한국말로 “미안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요시노리는 와세다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일제강점기와 그에 뒤이은 시기에 벌어진, 아시아 전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수탈을 연구·고발하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벌였습니다.


요시노리의 아내이면서 무라이의 손자며느리인 우츠미 아이코(內海愛子, 1941~ )도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2019년 10월 15일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누구를 위한 식민지 개발인가’ 한일학술회의에서 시할아버지의 식민지 농장 경영의 본질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무라이본점과 촌정농장 사이에 오간 편지 가운데 ‘조선(인)을 위하여’라는 말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무라이는 사업가였고 촌정농장도 경영의 하나로 생각해서 철저하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운영했습니다.”
무라이의 손자며느리, 우츠미 아이코(內海愛子, 1941~ )
어설픈 식민지 근대화론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촌철살인 발언이었습니다. 일본평화학회 전 회장이면서 일본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아이코는 남편 요시노리와 함께 같은 주제를 평생에 걸쳐 연구한 학문적 동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본인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우리가 눈 뜨고 보는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