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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생태관광 1번지 창원 주남저수지의 모든 것(연재) 두 번째 글. (⏳3분)

일러두기

경남 창원에는 주남저수지가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일찍이 철새 도래지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일부러 만든 저수지이지만 자연경관이 인공저수지답지 않게 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주변에는 드넓은 평야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120년 전만 해도 흔적조차 없었다는 사실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창원 주남저수지와 일대 평야가 어떻게 해서 들어서고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한 번 알아보았습니다. 모르고 보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반면 조금이라도 알고 보면 아 그렇구나 하면서 한 번 더 돌아보고 살펴보는 보람과 즐거움이 더해집니다.

2021년 12월 발행한 창원시의 비매품 책자 ‘주남저수지 이야기-주남저수지의 역사와 생태’에 담았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비매품은 제대로 유통이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고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점에 맞추어 일부 내용을 보완해서 열두 차례에 걸쳐 연재해 보려고 합니다.

근대농업유산의 역사

지금 사람들은 제방을 걷거나 철새들을 탐조하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하는 장소로 주남저수지를 생각합니다. 주변에 너르게 조성된 대산평야에 물을 대는 인공 저수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원시 동읍·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 일대에 걸쳐 있는 넓은 들판을 대산평야라고 합니다. 김해평야나 호남평야는 들어봤는데 대산평야도 있었네, 아마 그리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그러니 주남저수지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문화재 지정이 되지 않은 까닭에 보호와 관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 일대에는 근대농업유산이 널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사람들의 피땀으로 조성된 근대 수리시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지금도 그대로 농업 생산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벚꽃이 어우러지는 봄날의 본포양수장.

저수지보다 먼저 만들어진 제방

주남저수지는 원래 모습은 자연 상태의 저습지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는 1905년 전후부터 192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대략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거의 완성된 것은 1936년 병자년 대홍수를 겪으면서 무너지고 부서진 제방과 수문을 새로 만들거나 보강하고 나서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의 농업과 농민 수탈을 위해 일대 황무지를 농토로 바꾸면서 시작된 주남저수지의 역사는 대산평야와 더불어 100년이 넘는 세월을 안은 채 지금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저수지와 제방이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싶지만, 당시 사정은 달랐습니다. 저수지는 1920년대 이후에야 조성되었지만 제방은 그보다 훨씬 일찍 만들어졌습니다. 창원시 동읍·대산면과 김해시 진영읍 일대가 대규모로 평야를 일구어지기 시작한 것이 1905년인데 제방은 이때부터 가장 먼저 안팎에 쌓아지기 시작했습니다.

3-2 부산일보 1914년 12월 15일자에 실린 촌정농장의 제방 사진. 위에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때 제방은 물을 모아두는 기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서남쪽 산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언제나 흥건하게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남·산남·동판저수지가 있는 일대입니다. 농지조차 사철 물에 잠겨 있어서 벼 말고는 다른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보통 천수답이라 하면 여름철 가뭄에 땅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 터지는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여기 주남 일대의 천수답은 이처럼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이들 제방은 여름철 홍수 때 그 물이 농지로 흘러넘쳐 들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 쌓았던 것입니다.

무라이 기치베에의 촌정농장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는 일제강점 이전부터 일본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고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은 일본 사람은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 1864~1926년)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담배로 큰돈을 벌어 담배왕이라고도 일컬어졌던 무라이는 1904년 12월 무라이은행 설립으로 금융업에 나서는 동시에 무라이본점을 창설해 다른 신사업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낙동강 유역 일대의 황무지와 농경지를 사들여 식민지 농장을 경영하는 것은 이 무라이본점의 최초 사업이었습니다.

1904년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한 무라이는 1905년부터 개간과 경작을 함께 진행시켰습니다. 그해 11월 김해시 진영읍 진영리 주천강변에 사무소를 차리고 1906년까지 이태 동안 2600정보(町步, 1정보=3000평)를 집중 매입했습니다.

촌정농장의 1925년 현재 지도. 남동쪽 일대가 촌정농장이며 서쪽은 촌정농장이 사실상 지배했던 동면수리조합의 영역이다.

제 때에 물을 대고 빼기가 어렵고 그래서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잦은 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땅값은 쌌습니다. 이를테면 157명에게서 6만2000 마지기 남짓을 사들이는 데 8만1000냥을 지출했으니 마지기당 평균 1.3냥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강제적으로 더 싸게 사려고 했기에 조선인들의 반발과 저항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무라이는 때로는 불법적인 방법을 썼고 필요하면 무력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법정에서 소송을 통해 분쟁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과정에 창원군수나 마산이사청도 배후에서 개입했고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 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도 지원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무라이의 대규모 농장 개발은 농민들의 일상을 바꿔놨습니다. 이전에는 하천이나 소택지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임야나 황무지에서는 갈대·억새나 잡목을 베어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라이가 금지하면서 일상에 필요한 물품을 자급하던 주민들의 생활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동읍과 진영읍을 합친 크기

2600정보나 되는 넓은 면적을 한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당시 조선 전체에서도 드문 일이었습니다. 지금 동읍과 진영읍에 있는 농지 거의 전부에 맞먹는 면적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때 농지는 10%도 되지 않는 밭 200정보가 전부였으며 갈대나 잡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지금 주남저수지가 있는 일대는 낙동강 배후습지로 해발 3m 안팎이어서 소택지가 드문드문한 가운데 나머지는 온통 수풀과 잡목만 우거져 있었습니다.

주남저수지와 대산평야 일대의 일제강점기 지도. 북쪽에 낙동강이 흐르고 왼쪽 아래의 산남 주남 동판저수지 자리에 다섯 개의 소택지.

그래도 낙동강의 범람 덕분에 토질은 비옥했으니 황무지의 개간은 가성비가 높은 매력적인 사업 아이템이었습니다. 일본의 근대토목 기술과 조선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경지로 개간하고 기반시설을 갖추면 더 큰 이문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던 겁니다.

촌정농장은 1907년에 겉모습을 대체로 갖추고 물을 대거나 빼내는 시설의 설치를 마무리했습니다. 조선인과 일본인 소작농에게 개간과 경작을 시키는 한편 미국 농기계를 들여와 직영 개간도 대규모로 진행했습니다. 농장의 기본 체계가 나름 갖추어진 1913년까지 투자한 사업비는 모두 75만 엔이었습니다. (계속)

🏞️ 생태관광 1번지 창원 주남저수지의 모든 것(연재)
  1. 더 깊고 넓어진 여행, 창원 주남저수지를 아십니까?
  2. 세 군데 저수지의 저마다 다른 멋과 맛
  3. 일제강점 아래 조선인 피땀으로 이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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