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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코리아 칼럼] 6·3 지방선거와 민주진영에 필요한 상상력은 무엇인가. 민주화 시대의 ‘성공의 그늘’을 직시하자. (조희연 / 전 서울시 교육감) (⌚7분)

6·3 지방선거가 끝났다. 어떤 이는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한 결과라고 평가하고, 어떤 이는 주요 격전지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점에 주목하며 절반의 실패라고 말한다. 어떤 평가든 대통령의 표현처럼 “최소한 성공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 선거를 단순한 승패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드러내는 사회의 심층적 변화다.

이번 선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누가 이겼는가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이다.

탄핵에도 변하지 않는 고착화된 좌우 경계

이번 선거 결과를 통해 우리가 더 근원적인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여당과 야당 사이의 사회심리적·정치사회적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게 고착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49.42%를 얻어 41.15%를 얻은 김문수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이준석 후보의 8.34%를 더하면 범보수와 범진보의 지지 규모는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2022년 대선에서 범보수 대 범진보의 구도가 약 48.56% 대 50.02%였다면, 2025년 대선에서는 약 49.49% 대 50.4%로 나타난다.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통과했음에도 한국 사회의 정치적 균형추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특히 서울의 경우는 더욱 흥미롭다. 2025년 대선에서 이재명 47.13%, 김문수 41.55%, 이준석 9.94%였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정원오 48.07%, 오세훈 49.22%였다. 후보는 바뀌었지만 정치적 구도는 거의 그대로 유지된 셈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적 균열선이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굳어지고 있다는 신호다.

2022 대선·2025 대선·2026 서울시장 선거 2030 남성과 여성의 지지율. 출처: 방송 3사(KBS·MBC·SBS) 출구조사. 2026 서울시장 30대 여성: 당초 오세훈 53.6% / 정원오 42.8%로 발표됐으나, KEP가 사전투표 데이터 누락 오류를 인정해 오세훈 45.3% / 정원오 51.3%로 공식 수정(2026.6.11.)

세대별 투표 경향도 주목해야 한다. 2022년 대선과, 2025년 대선, 202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의 20대 남성과 여성, 30대 남성과 여성의 지지율을 보면, 이런 경계의 고착화 또는 악화의 현상을 인지할 수 있다. 20대 남성은 세 선거 모두에서 보수 쪽 지지가 압도적이고 그 강도가 선거마다 심화되고 있다. 반면에 20대 여성은 비슷한 수준의 진보 지지가 유지되고 있다. 30대 여성은 2022 대선 때 민주당 우세가 약했다가 2025 대선에서 57.3%로 상승했고, 2026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30대 여성의 경우 진보 쪽 지지가 수정치 기준 51.3%로 과반을 유지했다.

과거 민주화 세대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청년층이 자연스럽게 진보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청년세대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경험이 있는 세대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이미 제도화된 사회에서 태어나 성장한 세대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정치의 기준 역시 민주화 세대와는 다르다. 이 점을 직시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현실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민주화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화 성공의 그늘’

나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선거 국면의 변화로 보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새로운 역사적 국면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로 본다. 핵심은 민주화의 실패가 아니라 민주화의 성공이다. 40여 년에 걸친 민주화의 성공 속에서 또 다른 그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민주화 성공의 그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성공의 그늘’이란 반독재 야당이 집권하고 그 집권 정부에 반독재 민주화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고, 그 결과 민주 진영이 단지 약자 또는 악에 대항하는 선의 세력으로만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과거 민주화 시대의 기본 구도는 선과 악의 구도였다. 독재 권력이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고, 민주화운동 세력은 도덕적 우위의 위치에 있었다.

과거 민주화 시대의 기본 구도는 선과 악의 구도였다. 독재 권력이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고, 민주화운동 세력은 선의 세력처럼 간주되었고 그 결과 도덕적 우위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세대에게 이러한 구도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민주화 세대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행동과 언어가 지금의 청년 세대에게는 전혀 다르게 읽힐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내로남불’이다. 민주진보 세력이 야당 시절에 사용했던 도덕적 기준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많은 시민은 그것을 위선으로 본다. 실제로는 정치의 복잡성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도덕적 이중기준으로 해석한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논란이 된 ‘탱크데이’ 사안도 그렇다. 민주화운동 세대에게 5·18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이기에 그것을 희화화하는 움직임에 경각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세대의 눈에는 국가권력이 특정 영역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과거에는 정의의 실천으로 읽히던 행동이 오늘날에는 권력의 과잉 행사로 해석될 수도 있다. 탱크데이 사안의 추이에서 보면, 스타벅스 불매운동에 행안부 등 공공기관이 적극 개입하는 모습은 일부 시민들에게 권력의 과잉 행사처럼 보일 수 있었다. 민주화 시대의 미덕이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과유불급’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민주화 시대에는 독재와 싸우는 강력한 투쟁이 미덕이지만,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동일한 방식의 대응이 다른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오늘날 보수나 극우세력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단순히 권위주의 향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형성된 새로운 불만과 분노에서 기인한다.

투표 용지 부족 사태가 드러낸 균열…권력의 ‘현재성’에 주목하는 세대

송파에서 벌어진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둘러싼 항의행동을 통해 우리는 세대 간 인식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투표용지 부족의 사건 초기에 민주진보 진영 내부에서는 이를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반면 극우 진영에서는 부정선거 프레임으로 해석하며 재선거 요구나 참정권 침해에 대한 항의를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로 흡수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우리는 극우적 전유 시도를 단지 부정선거론의 연장선이나 내란세력 척결이라는 프레임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젊은 세대가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의식과 불만을 진지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민주진보 진영은 권력의 ‘역사성’을 중심으로 현실을 바라본다. 독재세력으로부터 내란세력에 이르는 역사적 계보를 기준으로 정치적 사안을 판단한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세대는 권력의 ‘현재성’에 더 민감하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보다 어떻게 권력을 행사하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절차적 정당성, 공정성, 투명성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한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너무 단단하게 굳어졌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젊은 세대의 시선에서는 보수든 진보든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한다면 유사한 정치 양식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민주진보는 부정선거 프레임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참정권 보장과 선거절차의 완전성에 대한 시민적 요구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음모론적 부정선거 주장과 실제 참정권 침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지만, 후자는 민주주의를 더욱 충실하게 만들기 위한 요구일 수 있다. 극우가 전유하려는 의제를 다시 민주주의의 의제로 전환하는 길이기도 하다.

경계를 녹이는 정치, ‘햇볕정치’의 과제

나는 최근 출간한 『극우시대가 온다―햇볕정치와 공화적 민주시민교육』에서 보수와 진보의 고착된 경계를 해동하는 정치를 ‘햇볕정치’라고 불렀다. 햇볕정치는 적에게 굴복하는 정치가 아니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통합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정치이다.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유지하면서도 상대가 품고 있는 불안과 분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햇볕정치의 출발점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존재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경계가 너무 단단하게 굳어졌다는 데 있다. 경계가 고착될수록 작은 실수 하나가 거대한 정치적 반작용을 낳는다. 이번 선거는 바로 그러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변화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역지사지형 성찰성’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극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오류뿐 아니라 그들이 동원하는 감정의 구조도 함께 이해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정치적 자기성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원칙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더욱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의 문제이다. 정의를 향한 방향성은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변화된 현실에 맞게 새롭게 성찰되어야 한다.

강고하게 얼어붙은 사회심리적 경계를 녹이고, 적대의 정치에서 설득의 정치로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민주진보세력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며,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시대적 과제다. 나는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햇볕정치적 시각과 방향이 구체적인 정치와 사회적 갈등의 맥락에서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지는 단정적으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할 수 없다. 단지 이런 새로운 시선과 상상력을 결합해서 정의를 향한 투쟁의 행진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2000년 6월 15일 북한 평양시에서 남북정상이 만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나는 햇볕정책을 계승하는 햇볕정치를 제안한다.

기본적으로 민주진보 진영은 ‘정의(justice)’라는 가치 목표를 최대한 실현하기 위해 상대를 제압하는 일종의 ‘돌진적 전투주의’를 주요한 방법론으로 삼아 투쟁해 왔다. 이러한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필요조건으로서 유효하다.

그러나 변화된 현실의 맥락, 2030세대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감수성, 그리고 민주화의 ‘그늘’로 인해 형성된 사회적·정치적 ‘강퍅함’을 함께 고려한다면, 기존 투쟁의 정치와 내가 말하는 햇볕정치적 실천을 사안에 따라 적절히 배합하는 유연한 복합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초당적 지지가 필요한 사안에서는 과감한 협치 전략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송파 사태와 같은 경우에는 젊은 세대의 참정권 요구를 그 자체로 진지하고 강력하게 수용하는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 또한 ‘내로남불’ 논란이 반복되는 사안에서는 스스로 기득권 일부를 내려놓으면서 모두에게 적용될 공통의 규칙을 만드는 노력이 요구될 수 있다.

때로는 민주화세대가 기득권자의 위선처럼 보여지는 사안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이 지녔던 자기희생의 정신을 되살리는 노무현식 접근법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탱크데이’와 같은 사안에서는 국가 행정 권력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과유불급’을 경계하고 절제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이른바 ‘87년 체제’의 사회경제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예컨대 고용, 주거 등을 둘러싼 더 근본적인 대안적 사회경제적 정책을 내는 문제는 당연히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정치‘양식’에 대해 집중한다.

결국 햇볕정치란 기존의 원칙과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시대적 조건 속에서 그것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정치적 상상력이며 실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착된 경계를 해동(解凍)하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기존의 투쟁 전략과 배합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서울 잠실 개표소를 봉쇄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 KBS 뉴스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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