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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러멀라이즈 양파, 한식의 구원자 (연재 속 특집)

  1. 설탕과 한식, 쾌락과 미개함 사이
  2. 서양의 양파는 한국의 양파보다 달다
  3. 캐러멀라이즈 양파 만들기(끝)
  4. 세 가지 양파를 사용한 제윢볶음(+)

오늘은 레시피가 아닌 하나의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바로 ‘단맛’이다. 단순히 설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나 무겁고 중요한 소재라서 스스로 오랜 시간을 두고 궁리한 주제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단맛에 관한 ‘썰’을 풀고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캐러멜라이즈 양파에 관해서 설명하겠다. 이후는 그 양파를 활용한 요리들을 시리즈 형식으로 몇 편 써 볼까 한다.

나는 요리를 공부한 사람치고 미식 경험이 많은 축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내게 잊히지 않는 외식 경험이 몇 번 있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7년 전쯤이었으니 곱게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상호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대 쪽에 부추삼겹살로 유명한 맛집이 있었다. 평범한 삼겹살집이었지만 부추가 특이했다. 엄청난 양의 부추를 삼겹살과 함께 불판에 올려서 구워 먹는데 금방 숨이 죽는지라 사람들은 끊임없이 부추를 셀프로 가져와 구웠댔다. 함께 자리한 친구들도 연신 맛있다며 자리를 즐겼다.

근데 구운 부추의 맛이 엄청나게 달았다. ‘왜 이렇게 달지?’ 그냥 부추만 집어 먹어봤다. 부추와 함께 설탕 알갱이가 아작아작 씹혔다. 마침 셀프 코너에 부추를 리필하러 온 알바생을 보았다. 부추 위로 백설탕 봉지를 통째로 들고 문자 그대로 설탕을 ‘들이부었다’. 두 가지 단어가 동시에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쾌락’ 그리고 ‘미개함’. 이때는 내 생각의 실체를 온전히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수요미식회로 유명해졌다가 어느 순간 입만 열면 악플이 달리는 음식평론가 황교익. 사람에 관한 호불호는 개개인별로 기준이 달라 굳이 사족을 달지 않겠다만,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분이기에 맥락이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두 마디 언행으로만 평가되는 게 굉장히 아쉽긴 하다.

그럼에도 인문학의 눈으로 음식을 바라보는 한국 최초의 음식평론가 중 한 명이자, 한국의 식문화를 관통하는 그의 통찰력은 음식을 공부하는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몇 년 전 설탕을 두고 백종원, 황교익 사이의 논란이 뜨거웠다. 내가 색깔이 옅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오히려 매우 반대다), 나는 실제로 두 분을 ‘각자의 영역’에서 굉장히 존경한다. 그러나 두 사람에 대한 내 평가는 무의미한 시간낭비일 뿐, 지금 나는 저 문장 “서양 요리를 내는 레스토랑의 주방에는 설탕이 아예 없습니다.”에 관해 내 의견을 말하고 싶다.

1. 서양 주방에는 진짜 설탕이 아예 없나?

황교익이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저 말을 하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며 수많은 악플이 달렸다. 사실 저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좀 웃기다. 설마 식당에 설탕이 없을 리야 있겠는가. 당연히 디저트도 팔고 커피도 있을 텐데.

‘서양에서는 짠 메인 요리를 할 때 설탕을 쓰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적절하다. 국가별, 식당 별로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은 나도 충분히 안다. 그럼에도 나 역시 ‘진짜 서양 주방에는 설탕이 없더라’고 말하고 싶다.

학교에서 소스 담당으로 있던 실습 시간이었다. 어떤 소스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쓴맛과 신맛이 너무 강해서 밸런스가 안 맞았다. 한국인으로서 설탕에 익숙하던 나는 바로 설탕을 찾았다. 근데 주방에 아무리 찾아도 설탕이 없는 거다.

“선생님, 설탕 어딨어요?”
“대체 뭘 하려는데 설탕이 필요해?”

“소스 균형이 좀 안 맞아서 조금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제빵실에 가서 찾아봐”.

나는 설탕을 찾으러 디저트 파트로 가야 했다. 이때 문득 황교익 선생님의 저 말이 떠올랐다. ‘서양 주방에는 진짜 설탕이 없구나’. 이후 여러 레스토랑 실습을 거치면서도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설탕이 필요하면 디저트 파트로 가야 했거나 주방에 설탕이 있더라도 아주 구석에 거의 쓰이지 않는 채로 박혀있다. 4년간 학교와 주방 전반에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메인 파트에서 설탕을 찾는 사람은 한국인인 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지 못했다.

2. 왜 서양에서는 요리에 설탕을 쓰지 않는가? 혹시 설탕 쓰는 것을 수준 낮게 생각하는가?

설탕 사용을 꺼린다거나 수준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메인 요리에서 설탕이 사용되는 맥락이 거의 없다는 게 정확하다. 단맛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인간이라면 가지는 원초적인 욕망이다. 서양 사람이라고 단맛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단맛을 기대하는 포인트가 무척 뚜렷하다.

서양식은 기본적으로 전채 – 메인 – 디저트 구성을 가진다. 단맛을 확실히 담당하는 마지막 코스가 남아있으므로, 전채(前菜: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를 향해 달려가는 식사의 모든 순간에 그 누구도 단맛의 개입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미식적으로 뛰어나서, 그러니까 ‘음식은 달게 먹다니 미개한 것들 쯧쯧’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먹는 것이 그들의 사고 체계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본질적 이유는 단연 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저트’의 뚜렷한 존재감 때문이라고 본다.

단 거에 단 거에 단 거 더하기. 거기에 또 단 거.

3. 장류의 헤게모니: 그럼 한국은 왜 이렇게 음식에 설탕을 많이 쓰는가?

첫 번째 원인은 식사법 구조 자체에서 찾는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밥과 국을 중심으로 반찬을 펼쳐 먹는 형태를 가진다. 애초에 후식 개념 자체가 뚜렷하지 않다. 전통 한과 등의 달콤한 음식들도 우리 식문화에서 하나의 엄연한 주체로서 존재하지만, 일상적 식사의 맥락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단것은 식사 ‘이외의’ 시간에서 별도로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메인 식사에서 자연스럽게 단맛이 고개를 들 여지가 생긴다. 동시에 후식은 식사의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독립적인 맛을 구현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그래서 디저트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꽤나 특이한데 ‘달지 않아 맛있다’라는 디저트 본국에서 들으면 이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하는 말이 나오는 지점이다.

두 번째는 바로 한식의 핵심 정체성이 장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높은 염도, 강렬한 감칠맛과 풍미가 특징인 장류(간장, 된장, 고추장)가 패권을 잡는 맥락, 그리고 맛의 구조적 관점에서 단맛의 두드러짐은 필연이다. 일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알듯이 간장과 된장을 쓰는 일본 대중요리의 대부분도 보통 달콤한 뉘앙스가 두드러진다.

한 술 더 떠서 한국은 고추장까지 있다. 고추장이 들어간 수많은 요리 중 아무거나 하나만 떠올려 보자. 떡볶이건 고추장찌개이건 닭볶음탕이건 그게 뭐가 됐건, 그 음식을 상상하면 약간 단맛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고추장은 높은 염도와 강한 감칠맛에 심지어 매운맛까지 붙어있다. 이 고추장을 본연의 특징 그대로만 살짝 소량으로 활용하기에 고추장은 너무 맛있는 재료이다. 여러 요리에 그것도 ‘다량’으로 개입된다. 당연히 그냥 먹기 힘들 정도로 짜고 매워진다. 단맛이 돕지 않으면 애초에 먹기가 힘들다.

다른 글에서 나는 한식에서 ‘장류는 너무 맛있어서 문제’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문장이다. 장은 우리 음식을 이야기하는 첫 번째 페르소나이자 한식을 규정짓는 키워드이다. 그런데 그 장점과 아름다움이 너무 치명적인 탓에 요리의 메인이 되어야 할 원재료의 얼굴을 순식간에 가려버린다.

소갈비찜이나 돼지갈비찜의 주인공이 고기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바로 간장이다. 똑같은 소스로 똑같은 맛을 내는데 단지 다른 재료가 거기 빠진 것뿐이다. ‘주재료를 어떻게 맛있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오늘은 어떤 장을 잡고 휘둘러야 하나’의 사고 체계가 한식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장이 언제나 요리의 주연으로 등판하다 보니 이 강력한 장의 장단을 맞추기 위해 반드시 단맛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단맛을 다이렉트로 해결하는 구원투수가 바로 설탕인 것이다. 식재료가 아니라 장이 한식의 주인공으로 군림하는 상태에서 한식과 설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4. 근데 설탕 넣어서 달게 먹는 게 뭐가 문제냐?

음식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 한식은 장맛이다. 그 좋은 장을 쓰려면 단맛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누군가가 어디 미슐랭이나 월드베스트레스토랑을 들먹이며 한식은 너무 달고, 설탕을 많이 쓰니 고쳐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 말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한식에서 설탕이 안 들어가는 경우가 찾기 힘든 반면, 서양식에서는 설탕을 쓰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요리나 미식문화의 수준을 결정짓는 요인은 아니다. 서양은 서양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한 잡지사나 특정 기관이 문화를 판단하고 우수성을 규정할 수 있는다고 믿는 발상 자체가 좀 우습다.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보면 애초에 맛의 구조와 문화적 차이, 한식의 본질을 어설프게 이해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문제를 삼는다면 설탕의 사용 자체가 아니라, 적절한 사용 방법을 이야기해야 한다. 다음 편에 이어서 설명하겠지만, 설탕을 조금이라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야채의 단맛을 활용하는 것이다.

근데 그거 아시나? 지금 양파값이 2년 새 3배가 올랐다. 설탕 안 쓰겠다고 야채로 단맛을 내고자 하는 것은 재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어버렸다. 설탕만큼 효율적이고 빠르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없다. 한식에서 설탕의 개입을 막기란 불가능하다. 이를 어떻게 적절히 통제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려야 한다.

5. 설탕과 포르노

아니, 사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다.

먼저 설탕에 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설탕은 빠르고 강력하며 효율적이며 저렴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설탕을 포르노와와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이 자체로 좋냐 나쁘냐 다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세상에 실존하는 생명력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포르노를 두고 ‘이것이 과연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이 이 본질과 비슷하다. 이것은 정답 없는 화두로 누가 그것을 어디까지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궁극적으로 권력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다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설탕과 포르노, 그 둘은 너무 쉽고 자극적인 쾌락이라는 점, 그에 따라 야기될 수 있는 문제가 선명하다는 것이다.

다시 디저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디저트는 미친 듯이 단 것이 정상이다. 그 미친 듯이 단 디저트를 딱 두, 세 스푼 먹고 끝내는 것이 서양의 식사법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서구의 식사법을 따라야 한다’도, 또 ‘그것이 우수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짚고 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디저트가 ‘달지 않아 맛있게’ 되면 후식을 밥처럼 먹게 된다. 이는 영양학적으로도 미식적으로도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이를 ‘포르노의 일상화’라고 부르고 싶다.

이 ‘포르노(설탕)의 일상화’가 드러나는 핵심 원인을 나는 한식의 맥락에서 단맛이 개입되어야 하는 경계선이 너무나 흐리다는 점에서 찾는다.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해묵은 설탕 논쟁의 본질이다. 쉽게 말해 설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설탕이 낄 데 안 낄 데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다.

설탕은 단맛을 쉽고 빠르게 해결하는 너무 강력하는 아이템이라 남용의 여지가 다분하다. 이는 한식의 전반에서 설탕 사용의 익숙함을 가져오고 종국에는 설탕을 굳이 안 넣어도 괜찮은, 혹은 넣으면 안 될 곳에도 설탕을 넣는데 망설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지점이 바로 치명적인 문제다. ‘김치찌개에도 설탕 넣는데 된장찌개라고 못 들어갈 이유가 있나?’라는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낳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음식들에 설탕이 개입해 맛의 전체적인 표정을 흐리는 역할, 전부 고만고만하게 맛있고 비슷하게 맛 없는 비민주적 평준화를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 이는 곧 한 음식의 영양적, 미식적 미개함을 넘어 종국에는 문화적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맛있으면 됐지! 손님만 좋아하면 됐지!’라는 지극히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핑계는 힘든 자영업자가 거부하기 힘든 타당성을 부여한다. 단지 적당히 먹을만 하게 만들어진, 개념과 기준 그리고 의식이 결핍된 음식이 거리에 만연하고 나아가 문화와 사회를 지배하는 데는 찰나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부추에 설탕을 들이붓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서구권의 식문화가 여태껏 경제적, 문화적 우위점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음식 그 자체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식사 방식의 태생적 구조와 그 맥락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마약이나 포르노와 함께 도매금으로 취급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설탕이 공식적인 예술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강력한 바운더리, 바로 ‘디저트’라는 독립된 플랫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플랫폼 위에서 설탕이 가진 그 폭력적인 쾌락은 예술로 인정될 수 있다는 안정감 아래 미각적, 시각적 가치를 마음껏 발휘한다. 즉, 서양 식문화는 ‘짠 음식’과 ‘단 음식’ 그 각각의 장점이 단독으로 빛날 수 있는 판(맥락)이 잘 깔려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6. 그래서 도대체 뭔 이야기 하고 싶은 거냐? 제발 짧게 말하시오.

설탕이 ‘맛’을 망가뜨려서라기보다 ‘문화’를 망가뜨려서 문제다. 한식 전반에서 단맛의 개입 또는 설탕의 과다 섭취라는 그 자체의 폐해보다 식문화의 관점에서 ‘짠 요리’와 ‘달콤한 요리’ 각각의 영역이 빛날 수 있는 ‘맥락’을 파괴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이는 궁극적으로 섬세화를 통한 한식의 고급화, 세계화를 요원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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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페북에서 이 글을 보게 되어 들어왔습니다. 생각해볼만한 내용이 있는데 제목만 보고 쓴듯한 악플이 많아서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 글이 평가절하당한 이유 중 하나가 이 글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전달하는 방식사이의 모순에 있다고 봅니다.

    설탕이 포르노에 비견할만큼 뚜렷한 양면성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잘 사용하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 글의 내용이라고 이해했구요. 그렇지만 이 글은 황교익/백종원이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즉각적 반응을 일으키는 소위 “떡밥”을 언급합니다. 페북에 노출 될 때는 아예 황교익씨 사진이 제일 크게 노출되었구요. 저는 이러한 전달방법이야말로 미디어적인 측면에서 설탕과 같다고 봅니다. 내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전에, 독자들의 생각은 논란이 될만한 말과 인물들에 입혀져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회수나 주목도를 위해서 자극적인 제목이나 소재를 쓸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제 경우에는 처음 몇초간은 황교익 vs 백종원 이라는 강렬한 맛이 가장 진하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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