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지난 8월 23일,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주민등록번호를 ‘생년월일·성별 등 개인의 고유 정보를 포함하지 않은 임의 번호 부여 방식으로 변경’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 성별, 지역(출생지) 등의 개인정보를 ‘번호’ 자체에 표시한다.

동성애 조장? 성별 구별 어려워진다? 

그런데 뜬금없게도 이 발의안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국회 홈페이지에는 11,000여 개에 달하는 반대 의견이 등록되었다. 그중 몇 개를 보자.

  •  “성별은 오직 남여뿐입니다. 제3의 성별은 없습니다.”
  • “성별을 왜 맘대로 바꿉니까?”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반대 단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남녀의 구별이 어렵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하는 차별금지법으로 가기 위한 선제 입법.”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주민번호를 임의번호로 바꾸어야 하는 이유는 불필요한 개인정보 노출과 이에 따른 차별이나 피해를 막기 위해서이다. 주민번호의 성별 구분 체계가 ‘여성을 사회적으로 차별하고 특정한 성 정체성을 강요하는 등 인권 침해’를 하는 것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바는 있으나, 이것이 동성애 조장과 무슨 상관이 있나.

반대 단체들 회원들은 주민등록번호 뒤 일곱 자리의 ‘첫 번호'(1이나 2)를 통해 성별을 구별하나? 그 뒤 첫 번호를 모르면 정말 성별을 구별할 수 없나? 임의번호가 되면 남녀 구별이 어려워진다니 어떻게 하면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음표 퀘스천
임의번호로 바꾸면 성별 구별이 어렵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민번호 일일이 확인해서 성별을 구별해왔다는 건가? (출처: Marco Bellucci, CC BY)

주민번호, 그 지난한 역사

지난 2014년 초, 신용카드 3사의 1억 건이 넘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에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주민번호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90년대 중반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000년 초반 이미 헌법학자들은 주민번호의 위헌성을 지적하였고, 주민번호를 포함한 주민등록제도 자체에 대한 토론회도 수차례 개최되었다.

‘개인정보 유출’ 신기록 경신하듯 

한국 사회의 정보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정보 유출 문제도 심각해졌다. 마치 신기록을 계속 경신하듯이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이어졌다. 개인정보 유출 사고의 근저에 서로 다른 개인정보를 연결하는 만능키로서의 주민번호를 공공 및 민간 영역에서 무분별하게 수집하는 문제도 지적되었다.

이미 90년대 중반에 한국의 주민번호는 전 세계에 수출되어 명의도용에 이용되었다. 2006년 2월, 온라인 게임 ‘리니지’의 대량 명의도용 사태가 대표적이다. 리니지 사태 이후 개최되었던 토론회에서 필자는 주민번호 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나, 당시 정부의 대책은 주민번호 도용에 대한 처벌 강화에 머물렀다.

2008년 옥션과 하나로 텔레콤에서의 대량 개인정보 유출 사고, 2011년 네이트와 싸이월드에서의 3,500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고, 그리고 2014년 신용카드 3사에서 발생한 1억 건이 넘는 개인정보 유출 사고는 정부의 대책이 얼마나 효용성이 없었는지를 입증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유출 4억 건

’13년 2월부터 인터넷에서 ‘주민번호 수집 제한’  

그동안 시민사회에서는 꾸준히 현행 주민번호의 문제점을 지적해왔고, 대량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서 주민번호에 대한 규제도 조금씩 강화됐다. 2013년 2월 18일부터 인터넷에서 주민번호 수집이 제한되었고, 2014년 8월 7일부터 ‘주민번호 수집 법정주의’가 시행되어 법령에 근거가 없이는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없게 되었다.

조금씩 주민번호에 대한 수집 제한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여전히 1,000여 개의 법령에서 주민번호 수집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번호 수집 제한’이라는 명분이 무색한 상황이다.

특히, 정부는 2012년 8월 23일 ‘인터넷 실명제’가 위헌 결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본인확인기관 지정 제도를 통해 신용평가기관 및 통신사의 주민번호 수집을 허용하고 있다.

전 국민의 주민번호는 이미 ‘공공재’ 

이미 전 국민의 주민번호가 사실상 유출된 상황이다. 2014년 개최된 토론회 발표자료에 따르면, 기사로 드러난 주민번호 유출 건수만 3억 7천 4백만 건이었다. 한국 성인들은 평균적으로 8번 이상 유출되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정부는 유출된 주민번호를 변경해주는 것에도 소극적이었다.

2008년 옥션과 하나로텔레콤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은 행정안전부에 주민번호 변경 청구를 했지만 각하되었고, 2011년 네이트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이 다시 한 번 변경 청구를 했지만, 거부되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소송은 법원에서 패소하였고, 결국 2013년 헌법소원을 제기하게 되었다. 2014년 카드 3사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에도 개인정보 변경 청구 운동이 전개되었다.

진보넷과 민변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기 위해 "신청"을 받고 있다. (캡처: 진보넷)

여론 변화와 정치권의 대응 

개인정보 유출 문제가 누적되자 주민번호에 대한 사회적 여론도 변화하였다. 특히, 2014년 카드 3사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주민번호 개편에 대한 요구가 비등해졌으며, 여당인 새누리당 대표와 대통령마저 주민번호 대체수단 마련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도 주민번호 개선 방안을 마련하려는 시늉은 해야 했다.

안전행정부는 ‘주민번호 개선 자문단’(이에 진보넷도 참여하였다)도 꾸리고, 주민번호 개선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발주하였으며, 2014년 9월 29일에는 6개의 개선 대안을 검토하는 공청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때 나온 6개의 방안 모두 한계는 있었지만, 안전행정부의 최종 결론은 현행 유지였다. 그나마 주민등록번호의 변경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법안을 발의하였다.

’15년 12월 역사적인 ‘헌법불합치’ 결정 

2015년 12월 23일, 역사적인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헌법재판소가 주민번호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2017년 12월 31일까지 국회가 개정안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헌법재판소 상징문양

그러나 이 지점에서도 행정자치부(구 안전행정부)의 꼼수와 여야의 야합이 작동하였다. 시민사회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계기로 국회가 주민번호 전면 개편을 논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국회는 행정자치부의 요구대로 ‘주민번호 변경 허용’만을 내용으로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19대 국회 말미에 통과시켰다.

정부의 허송세월 

이미 19대 국회에서만 임의번호로의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4개나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허송세월하고 있던 정부와 국회가 국회 만료 직전에 성급하게 ‘주민번호 변경 허용’만을 통과시킨 이유는 주민번호 전면 개편으로의 확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행정자치부는 주민번호의 변경을 허용해주되, 생년월일, 성별은 놔두고 주민번호 뒤 6자리만 변경해줄 계획이라고 한다. 주민번호와 함께 국민들의 생년월일과 성별도 이미 유출된 상황에서 변경된 주민번호가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 의문이다. 몇 가지 정보를 조합하면 주민번호를 추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 수행된 이윤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연구팀의 실험에 따르면, 페이스북에 공개된 생일, 출신 학교 등의 정보를 이용해 11만 5,615명 중 5만 2,000여 명의 주민번호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페이스북 이용자가 공개 설정한 정보만으로도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
이윤호 교수의 실험에 따르면, 페이스북 이용자가 공개 설정한 정보만으로도 절반에 가깝게 ‘주민번호’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임의번호로 바꿔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진선미 의원의 주민등록법 개정안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의된 것이다. 진선미 의원은 19대 국회에서도 동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주민등록법 일부개정법률안(진선미의원 등 12인) (출처: 의안정보시스템) http://likms.assembly.go.kr/bill/billDetail.do?billId=PRC_T1H6M0Z8C2P3B1O3H5W1G4N8E2X7E0
주민등록법 일부 개정 법률안(진선미 의원 등 12인) (출처: 의안정보시스템)

문제를 알면 답이 보인다. 현 주민번호의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이중에서 하나는 해결됐다. 그러니 남은 건 세 개다.

1. 무분별한 주민번호 수집 문제

첫 번째 문제는 결국, 서로 다른 개인정보를 연결하는 만능키로서의 문제와 직결된다. 주민번호 수집을 최소화하고 기존에 주민번호를 사용하던 영역에서는 목적별로 다른 번호를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조세를 위해서는 조세번호를, 건강보험을 위해서는 건강보험번호를 사용해야 하며, 목적별 번호와 주민번호의 연계는 최대한 제한 되어야 한다.

주민번호 수집 법정주의가 시행되고 있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아직 갈 길이 멀다.

2. 유출되어도 변경할 수 없는 문제 (해결) 

두 번째 문제는 지난 19대 국회에서 법 개정으로 일단 해결되었다.

3. 노출로 인한 차별 문제

현 주민번호에는 생년월일, 성별, 출생지 등 개인정보가 포함돼 있어 정보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개인정보 노출로 인한 피해나 차별을 받을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현재의 번호 체계를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는 무작위 일련번호(임의번호)로 바꾸는 것이다. 과거 수작업으로 번호를 부여했던 때와 달리, 행정 시스템이 전산화 된 현재 상황에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한 번에 전 국민의 주민번호를 변경할지, 원하는 사람과 신생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할지는 논의 여지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민번호를 임의번호로 변경해야 한다. 이게 바로 주민번호의 임의번호 법안이 나온 맥락이다!

이런 주장이 시민단체나 학계 주장만은 아니다. 2014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위와 같은 주민번호 전면 개편 방안을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에게 권고한 바 있다. 더구나 현재의 주민번호 조합 체계로는 2100년 이후에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체계 변경이 조만간 불가피하다.

4. 현재 주민번호 체계 + 빅데이터 육성 = 미친 짓 

지난 6월 30일 행정자치부는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를 위해 비식별화를 거친 개인정보는 별도의 동의 없이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비식별화한 개인정보를 기업이 마음껏 쓸 수 있게 하겠다고?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비식별화한 개인정보를 기업이 마음껏 쓸 수 있게 하겠다고?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비식별화를 하더라도 다른 개인정보를 조합하여 재식별화가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는 이미 많이 나와 있다. 마스터키(만능번호)인 주민번호를 매개로 수많은 개인정보가 통합될 수 있는 한국에서는 그 위험성이 더 크다. 주민번호 체제를 유지하면서 ‘빅데이터 산업’을 육성하겠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