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은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본 영화지만, 스포일러의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독자께 미리 알려드립니다. (편집자)[/box]
영화 [국제시장]에 관한 설왕설래 와중에 [포레스트 검프]가 언급됐던 모양이다.
이 모든 논란과 상관없이 나는 그저 [포레스트 검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미국식 판타지 = 영웅 + 가족 + 애국 + 자본
어떤 이는 [포레스트 검프]를 미국 정치의 보수주의를 반영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렇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역사관을 가진 영화다. 이걸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면, [포레스트 검프]의 보수성은 아주 명확해진다. 그 개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참고로 영화의 원작은 윈스톤 그룸이 1986년 발표한 동명 소설이다.)
약간 지능이 부족하고, “등뼈가 물음표처럼 휜” 한 남자 아이, 포레스트 검프(톰 행크스)가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과 격려로 미식 풋볼 선수로 대학에 진학하고, 월남전의 영웅이 되며, 전쟁에서 돌아와 탁구 선수로 미국-중국의 핑퐁 외교에 기여하고, 새우잡이로 큰돈을 벌어 잡지 [포춘] 커버스토리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IT 기업(애플)에 투자해 자본가(!)가 된다.





[포레스트 검프]는 미국식 가족주의와 영웅주의, 애국주의, 거기에 자본주의가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결합한 판타지다. 이야기는 너무 황당해서 동화스럽기까지 하다.
청년 엘리스 프레슬리에게 현란한 다리 춤 동작을 알려준 것도 어린 시절 다리 보조장치를 했던 검프다. 검프는 심지어 워터게이트 사건의 제보자로까지 등장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검프에게 평생 잊지 못할 그리움이자 영원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여자(제니)는 이 판타지의 보수성을 더욱 짙게 한다.
최악의 여자 제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검프에게는 ‘운명의 여자’인 제니(로빈 라이트)는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검프의 삶을 갉아먹는 여자로 묘사된다.

제니는 어린 시절 유일하게 검프의 편에 선다(검프의 표현을 빌리면 “콩과 콩깍지”). 그리고 대학 시절 잠깐 검프와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플레이보이 모델로 활동하며, 잡지 모델 사건으로 퇴학당하자 밤무대 스트립 가수로 전전한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검프는 제니가 노래하는 멤파스 술집을 찾고, 제니는 검프를 통해 자신의 비참함을 확인하는 듯, 검프를 외면하고 우연히 지나는 남자의 차에 올라타 떠나버린다. 그리고 검프 역시 베트남으로 떠난다.

검프는 월남전 반대 집회에서 검프는 극적으로 만나지만, 결국 제니는 월남전을 조롱하는 겉멋 든 히피 놈을 따라 포레스트의 곁을 떠난다.


제니는 영화 전체의 흐름상 이해할 수 없는 ‘나쁜 년’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제니의 ‘알리바이’로 폭력적인 아버지를 설정하지만, 그마저도 영화 속에선 그렇게 비중 있게 처리되진 않는다. 그 아버지의 존재는 결국 검프의 힘에 의해 무너져 사라진다. (제니가 죽은 뒤 검프는 그 집을 부순다.)

그렇게 영화가 제니를 묘사하는 시각은 잔인할 정도다.
제니는 히피족을 따라다니는 멍청한 여자에서 그치지 않고, ‘블랙 팬더당’에도 기웃거린다. 그리고 블랙 팬더당은 폭력적인 똘아이 그룹 정도로만 묘사된다. (이 에피소드가 영화 속에서 가장 왜곡이 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블랙 팬더 모임에서 제니를 폭행하는 건 흑인이 아닌 백인이다. 블랙 팬더 모임의 유일한 백인이 제니를 폭행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가. 검프는 이를 즉각적으로 응징한다. 백인 남자의 폭행과 이에 대한 검프의 응징은 블랙 펜더당을 너무 거칠게 묘사한 것에 대한 절충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니는 자신을 폭행한 블랙 팬더당의 백인 똘마니와 함께 버스에 올라타고, 다시 검프를 떠난다.


그리고 결국 제니는, 검프가 새우잡이를 하며 개고생하는 동안에(영화는 검프의 개고생과 제니의 타락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마약에 빠진 콜걸(?)로 전락한다. (제니의 발코니 자살 시도 장면)

결국, 몸도 마음도 다 무너진 제니는, 뻔뻔하게도, 다시 검프를 찾아온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제니는 검프를 저능아라고 생각하고, 사랑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영화는 제니를 그런 여자로 묘사한다. 제니를 향한 구혼은 답을 얻지 못한다. 제니의 침묵에 검프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도 사랑이 뭔지는 알아.”

검프의 프러포즈가 있던 날 밤 둘은 함께 동침하고, 제니는 검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왜 아니겠는가, 그 다음 날 다시 검프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죽을 병에 걸려 다시 검프를 찾고,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초콜릿 상자가 든 벤치에서 앉아 있는 검프가 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제니는 검프에게 숨겨진 아들, 포레스트 검프 주니어를 소개하고, 검프와 제니는 결국 결혼한다. 병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제니에게 검프는 자신의 월남전 이야기, 새우잡이 이야기, 끝없이 달렸던 때의 이야기를 해준다. 제니가 말한다.
“네 곁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제니)
“너는 나와 함께 있었어.” (검프)
그렇게 잠시 검프의 곁에 머물렀던 제니는 결국은 병으로 죽고, 검프의 곁을 영영 떠난다. 검프의 곁에 유일한 사랑의 결실인 포레스트 주니어만을 남긴 채. 페미니즘의 시각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화가 제니를 묘사하는 방식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악의적이고, 잔인하다.
검프에 투영되는 신의 존재
[영화]에서 검프와 제니, 그리고 미세스 검프를 제외하고 가장 비중이 높은 배역은 검프가 월남전에서 구해낸 댄 테일러 중위(게리 시니즈)다.
검프는 월남전에서 테일러 중위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정상적이라면 검프는 테일러 중위에게 생명의 은인이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테일러 중위는 검프를 원망한다. 원래는 가문의 전통대로(?)(테일러 중위는 군인 가문인데, 대대로 전쟁에서 모두 전사했다) 베트남전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바보 녀석이 구해내는 바람에 비참한 삶을 계속 이어간다고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테일러 중위는 월남전에서 두 다리를 잃는다. 그리고 월남에서 돌아와 알코올 중독자로 자포자기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검프는 월남전에 이어 또 한 번 테일러 중위를 구원한다.
검프와 테일러 중위는 새로운 삶을 위해 바다로 향한다(검프가 버바의 유지를 기리기 위한 새우잡이 동업). 그 공간이 바다라는 점은 아주 상징적인데, 왜냐하면 성서적인 세계관에서 바다(물)는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서 속 인물 요나를 떠올려보시라. 바슐라르는 소설의 기원을 나 아닌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이라고 설명하면서 그것을 ‘요나 컴플렉스’라고 명명할 정도다.)

새로운 탄생의 자궁인 바다에서 검프와 테일러는 거센 허리케인과 싸운다. 그리고 결국 승리한다. 그리고 테일러 중위도 자신의 운명과 화해한다. “자네에게 한 번도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군.” 드디어 생을 긍정하며 검프에서 감사를 표하고, 테일러는 바다에 몸을 던진다. 구름 속에서 찬란한 햇빛이 비춘다.

영화 속 상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월남전 반대 집회에서 제니와 짧게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진 뒤 깊은 상실감에 빠진 검프는 무작정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무작정 뛰는 검프를 선지자로 믿고 사람들이 검프를 따라 뛴다. 언론도 검프를 취재한다. 검프는 3년 2개월 14일 16시간을 달린다.
수염이 덥수룩한 검프의 모습은 영락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쯤 되면 검프는 예수다! 물론 영화는 이 에피소드를 코믹한 허무주의로 끝내버리긴 한다. 검프가 달리기를 멈추자, 추종자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산상설교를 기다리듯, 검프의 말씀을 기다린다.
“조용. 조용해봐. 뭔가 말씀하시려나 봐.” (추종자들)
“나는 아주 지쳤어요. 집으로 가야겠어요.” (검프)

우리는 영화를 읽지 않고 본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시각 예술이다. 지금까지 줄거리를 이야기해놓고, 좀 허무해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영화의 서사(내러티브)를 분석하고, 종합해봤자, 그건 영화 관극 체험의 극히 일부를 언어를 통해 재구성하는 것에 불과하다.
대개, 한 시간 반 정도의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영화 속 몇 초의 장면들, 그 장면을 연기한 배우의 표정 그리고 파편화된 잔상일 뿐이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재현된 어떤 풍경이나 이야기를 조각난 형태로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는 영어 공부를 하는 식으로 혹은 수학 공부를 하는 식으로 영화를 보지 않는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모두 언어화시켜서 체계적으로 학습하며 기억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만약 그렇게 영화를 ‘공부’하고 읽는다 하더라도 어떤 영화 체험, 흔히 말하는 ‘영화의 감동’이 다시 그대로 재현되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서사나 플롯, 등장인물의 상징성이나 화면 구성을 통한 편집 테크닉(몽타주나 미장센 등)으로 분석해봤자, 결국 그 영화의 ‘시각적인’ 감동이 언어를 통해 다시 되살려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가령, 앙드레 바쟁은 가장 위대한 영화로 칭송받는 [시민 케인]에 대해 “영화에 있어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관객들은 거의 눈치채지도 못할) ‘딥 포커스’ 기법이다.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의 대칭점으로) 바쟁은 미장센 이론에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 [시민 케인]이 딥 포커스 기법을 통해 드디어 영화(의 세계관)에 관한 선택권을 관객에게 돌려줬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바쟁이 [시민 케인]의 의미를 분석하고, 그 이유를 아무리 섬세한 언어로 풀어봤자 [시민 케인]을 봤던 관객의 감흥이 그 분석과 비평으로 되살려지는 건 아니다.
물론 그 해석과 비평을 통해 영화는 또 다른 차원에서 풍성해지고, 다시 태어나지만.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
다시 [포레스트 검프]로 돌아오자.
[포레스트 검프]가 영화로 만들어진 1990년대 초중반은 관객에게 노골적으로 과시하는 특수효과가 유행했던 시기다. (이런 스펙터클에도 안 놀랄 거야?) 하지만 [포레스트 검프]는 철저하게 특수효과를 검프의 드라마 속에 숨긴다. (가령, 알라바마 대학에 처음으로 흑인 학생이 등교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칼러와 흑백의 교차 장면. 전미 풋볼 선수로 선출돼 케네디와 만나는 장면, 존 레넌과 함께 TV쇼에 출연하는 장면 등)


[포레스트 검프]는 테크놀러지가 영화 속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통해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드라마를 극대화했다는 점에서 정말 뛰어난 영화다. 그리고 표피적으로 드러난 그 이야기의 정치적 역사적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포레스트 검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영화를 자신의 삶 속에서 재구성한다. 특히 그 영화를 본 그때, 그 공간 속에서 영화를 맥락화한다. 나에게 [포레스트 검프]는 첫사랑의 추억과 겹쳐진다. 나에게 [포레스트 검프]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보 같기만 하던 어떤 고등학교 자퇴생의 텅 빈 공간과 겹친다.
그리고 나에게 [포레스트 검프]는 ‘바보도 사랑할 수 있구나’, 그리고 ‘세상은 어쩌면 초콜릿 상자처럼 알 수 없는 맛을 숨겨 놓았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희망과 구원의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런 구원의 이미지야말로, 그런 희망의 이미지야말로 [포레스트 검프]가 위대한 이유다. 그 이미지 체험에 반대하는 서사 분석도 충분히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을 보면서 느꼈던 그 찰나의 이미지, 그 원형으로서의 잔상을 그런 지적 분석이 모두 깨뜨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쿠제의 지적은 음미해볼 만하다.

예술의 진리는 여기 – 세계란 참으로 예술작품 속에 나타나는 바 그대로라는 점에 있다.
이 명제는 문학이 노동계급이나 ‘혁명’을 위해 쓰였다고 해서 혁명적인 것은 아님을 함축한다. 내용이 형식이 됨으로써, 문학은 단지 그 자체에 관한 중대한 의미 속에서만 혁명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이란 오직 그 자체의 미학적 차원에 달려 있다. 실천과 예술의 관계는 냉혹하게도 간접적이고, 중재되고, 단절된 것이다. 좀 더 즉각적으로 예술작품이 정치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갈등에 대한, 변화의 급진적이고 초월적인 목표점에 대한 힘을 축소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에서보다는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 속에 좀더 거대한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고 하겠다.
– 허버트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 p. 12. 서울: 청하.
[box type=”note”]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 출처
- [포레스트 검프](1994, 로버트 저메키스) – © 1994 – Paramount Pictures
별도 표시가 없는 이미지는 퍼블릭 도메인이고,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미지 출처는 위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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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영화가 타자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런 구원의 이미지보다는 다른 것들이 떠올랐겠죠. 마르쿠제의 말은 예술이 필연적으로 지니는 정치성과 동시성을 희석시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그 이전에, 어떤 영역에서는 어떤 항구성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생각하지만 그것은 일단 뒤로 하고)… ‘의지의 승리’같은 영화는 미학적 성취도로는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얘기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좋은 점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비판해야 한다, 정도가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어느 게 더 무게있는 부분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정치성은 희석되고 예술 내부적인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 오래 남게 되겠지만서도 동시대의 사회에서 작용하는 즉각적인 효과 역시 부정하기 어려우니까요.
sdfsdf 님께
논평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취지처럼 (그리고 대다수 헐리웃 영화들처럼) 포레스트 검프 역시 철저하게 백인 중산층 (관객)의 시각으로 그려진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나 WASP의 관점으로 그려진 영화라고 보는데요.
그럼에도 영화의 다른 겹은 원형으로서의 휴머니즘(신화적인 원형으로서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한 남자의 순애보?)를 정말 천재적으로 정치적, 역사적 사건 속에서(오히려 정치적 사건들은 한 인간의 드라마 속에서 주변화하는데요) 형상화했다고 봅니다.
사실 포레스트 검프는 그 표피의 이야기는 지극히 보수적이지만, 정치를 탈정치화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라고 보고, 그런 점에서는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그럼에도 앞서 말한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감정으로서의 만남과 이별, 휴머니즘이 포레스트 검프라는 인물을 통해서 탁월하게 그려졌다고 봅니다. 탐 행크스의 연기는 거의 기적과도 같죠.
더불어 글에서 썼습니다만, 당시 영화를 봤던 제 자신의 처지(관객의 역사성)이 개입해 더 풍부한 울림을 전해줬던 영화였습니다.
제니가 그렇게 잔인할 정도로 나쁜 여성이라는 설정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선택한 것이지요. 검프를 선택하지 않고, 다른 길을 갔다가 다시 검프를 만나긴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검프의 인생을 갉아 먹는 것이다라고 해석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여성을 바라보는 본인의 시점이 너무 강한 기사라 읽기 불편합니다. 놀라운 건 필자가 “편집장”님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섹스엔더시티의 사만다라는 캐릭터를 또는 사만다가 아니더라도 섹스엔더시티의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놀랍게 해석하실지 궁금합니다.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본다면 더 놀랍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제니가 필자님이 보시기에는 그렇게 욕먹어야 하는 여자인지, 아니면 그렇게 욕먹어야 하는 여자로만 묘사되었다고 이해하시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