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안내 등
이 글은 ‘기생수: 더 그레이’에 관한 줄거리를 포함합니다. 스포일러를 염려하시는 분은 이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서 사용된 이미지는 별도 설명이 없는 경우에는 모두 ‘기생수: 더 그레이’ (2024, 연상호. 넷플릭스 제공)에서 빌려온 것입니다. (편집자)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중략)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중략)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기생수: 더 그레이] (이하 ‘더 그레이’)는 원작의 세계관을 한국으로 확장한다. 한국은 온갖 모순이 압축된 공간이다. 그리고 매번 그 모순을 깨뜨리는 역동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 곳이기도 하다. 한국은 강렬한 블랙이자 더 없이 원초적인 화이트이면서 동시에 깊고 모호한 ‘더 그레이’다.
기생수 여러분,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살인보다 더 큰 죄
“지구에 사는 누군가는 문득 생각했다.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지구에 사는 누군가는 문득 생각했다.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
[기생수: 더 그레이] (연상호, 2024) 넷플릭스. 중에서
마치 광기 어린 급진적 환경주의자의 탄식과 저주가 담긴 거친 선언문처럼 보이는 지문이 드라마가 시작하면 화면과 함께 흐른다. 검은 기름을 뒤집어쓴 새들과 물고기들이 힘겹게 파닥거린다. 대형 체육관에 설치된 화려한 조명 속에서 선택받은 청춘들은 야광봉을 흔들며 춤춘다. 거대 저인망어선이 바다의 생명을 싹쓸이하며 유유히 바다를 가르고, 숲은 불탄다. 지구는 마치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 같다.
기생수는 무엇인가. 어디서 온 존재인가. 기생수는 발명품인가. 아니면 진화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걸려 튕긴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인가. [더 그레이]가 도착하기 10년 전 만들어진 [기생수 파트 2]는 ‘지구를 좀먹는 짐승’, 그러니까 인간이 바로 기생수라고 말한다.
“너희(인간)의 승리라 해도 좋겠지. 살육에 관해선 인간을 능가할 수 없으니 당연하지. 하지만 너희도 언젠가 깨닫겠지. 살인보다 쓰레기 투기가 더 큰 죄라는 것을. (…중략…) 생물 전체의 균형을 지키는 우리에 비하면 인간이야말로 지구를 좀먹는 기생충이잖아! 아니, 벌레가 아닌 짐승, ‘기생수’다!”
히로카와 다케시(키타무라 카즈키), [기생수 파트 2] (2014, 야마자키 타카시) 중에서
[더 그레이]는, 만화 원작의 도입부를 그대로 빌려오긴 했지만, 기생수의 기원에 관해선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어느날, 기생수의 유충을 품은 원형 돌기들이 마치 함박눈처럼 지구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시작된다.
신체 강탈자, 시대와 인간을 비추는 거울
기생수의 문화적 기원 중 하나가 [프랑켄슈타인] (1818, 메리 셸리)의 ‘크리처'(creature; 피조물, 생명체)라면, 또 다른 기원은 소설 [신체 강탈자들] (잭 피니, 1955)이다. 이 소설은 그동안 [신체 강탈자의 침입] (1956, 돈 시겔), [우주의 침입자] (1978, 필립 코프먼), [보디 에일리언] (1993, 아벨 페라라), [인베이전] (2007, 조엘 실버 제작)으로 영화화됐다. 영화는 신체 강탈자를 통해 그 시대의 욕망과 공포, 그러니 인간에 관해 꾸준하게 질문해 왔다.
[더 그레이]가 오마주(존경과 감사의 의미로 다른 작품의 요소를 인용하는 것)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1886,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보물섬’의 바로 그 작가)은 단편 [바디 스내처] (1884, The Body Snatcher)을 썼다. 그러면 스티븐슨이 ‘신체 강탈자’의 원조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단편은 ‘신체 강탈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체 도굴범’에 관한 이야기다.
몸은 욕망의 기원이자 욕망 자체이면서 그 욕망을 채워야 할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욕망의 성소(聖所)를 차지한 신체 강탈자는 당대의 공포를 상징했다. 왜냐하면 욕망은 공포라는 텅빈 두려움을 채우기 위한 악마의 발명품에 불과하니까. 그 공포는 냉전 시대에는 소련이었고, 90년대에는 동성애(HIV)였다. 2000년대에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그 공포는 희미해지고, 거기에 현실을 기만하는 안온한 가짜 해피엔드가 남았다(유일하게 ‘인베이전’의 결론만 해피엔드).
신체 강탈자는 동시에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강탈자를 가리키면, 마치 거울처럼, 강탈자 역시 인간을 가리킨다. 소련에 관한 공포를 전체주의적 욕망의 연료로 삼은 정치적 광기로서의 매카시즘(McCarthyism;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은 그 강탈자/인간의 거울쌍을 잘 보여준다. 동성애(HIV)에 대한 공포 역시 독선에 빠진 종교적 맹신이라는 성찰 없는 욕망의 거울쌍에 불과하다. [인베이전]의 해피엔드는 역설적으로 그 해피엔드가 숨기려는 현실을 드러낸다.
교회, 가장 한국적인 ‘조직’
연상호의 [더 그레이]에서 그 공포와 거울쌍은 무엇인가.
[더 그레이]는 ‘조직’에 관해 끊임 없이, 집요하게 질문한다. 기생생물의 리더 권혁주(이현균)는 우연히 한 교회 목사의 뇌를 차지해 기생한다. 그리고 그 신도를 차례차례 기생생물의 숙주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권혁주는 ‘조직’이라는 인간의 발명품을 흥미롭게 학습한다. 조직은 인간 개체가 개별적 존재로서의 미약함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연상호가 인간 조직,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조직으로 교회를 설정한 건 의미심장하다. 왜 기업이나 NGO나 정부가 아닌 교회인가. 기생생물의 ‘조직’으로서 교회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비의스럽고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묘사되지만, 결국 그 뿌리는 세속적 욕망의 결정체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 교회 ‘조직’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한국적이다.
극 중 강원석(김인권 연기)이 경찰 조직, 더 나아가 인간을 배신하는 계기를 단 두 개의 짧은 장면에서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딸의 영어 시험에 관해 전화 통화하는 장면을 보자.
강주은 (강원석의 딸): (통화음) 아빠 나 영어테스트 만점 받았어.
강원석: (운전하면서 전화한다) 아이구! 어이구, 어이구, 어이구. (아직 흡족하지 않은 표정과 목소리로) 마, 만점이 몇 명인데? 혼자만 만점이야?
강주은(강원석의 딸): (큰 소리로) 응, 나 혼자!
강원석: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흡족한 목소리로) 아이고, 잘했네! 아이고, 우리 딸, 아이고 잘했네. 이따가, 어, 이따가 아빠가 맛있는 거 사가지고 들어갈게.
[기생수: 더 그레이] 중에서
강원석이 경찰 조직을 배신한 이유를 이보다 더 명징하고 함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가족은 여전히 숭고한 존재지만, 강원석의 이 평범한 가족, 모든 조직의 원형인 가족은 타락의 근원이며, 배신의 숙주다.
그리고 한 장면 더. 강원석 부부와 교회 집사 부부의 실내 골프 장면. 이 장면은 교회가 실은 사랑과 믿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경쟁과 비교와 질투에 손쉽게 촉발되는 욕망의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일종의 확인 사살.
집사 아내: “아, 이번 방학 때 주은이도 어학연수 보낼 거죠?”
강원석의 아내: 글쎄요. 우리 애는 아직 어려서.
집사 아내: 무슨 소리야, 언어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보내야 늘어요.
강원석의 아내: 그쵸? 사실 걱정이에요. 벌써부터 뒤처지는 건 아닌지. 이대로 두자니… 애들도 우리처럼 살 거 같고…
강원석: 아이, 뭘, 그런 얘기를 해. 집사님들 앞에서 (쓰읍)
[기생수: 더 그레이] 중에서
연상호는 자신도 교회를 다닌다면서 자신의 또 다른 연출작 [지옥]에 관해 이렇게 답한 적 있다.
“종교는 믿음보다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연상호)
그 연상호는 [더 그레이]를 통해 한국의 교회에 관해 그저 관성적인 ‘믿음’을 확인하는 대신에 현실을 직시하며 ‘질문’한다. 우리의 교회가 일깨우는 건 우리의 세속적인 욕망인가, 아니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한 그 거룩한 희생인가. 그 답은 교회를 가득 채운 시체들이 답한다. 한국 교회는 타락했다.
또 하나의 가족: 정수인 & 하이디 그리고 설강우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 관한 오마주처럼 보이는 정수인(전소니)과 하이디(정수인의 기생수), 그리고 이 둘과 환자 혹은 소수자 또는 피해자의 동료의식을 공유하는 설강우(구교환)는 일본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다. 이 세 주인공은 [더 그레이]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특히 설강우는 원작 만화나 일본판 영화에서는 대응할 만한 캐릭터도 없는 [더 그레이]만의 오리지널 캐릭터다.
일본 원작의 ‘오른쪽이’가 마치 게임의 감수성으로 주인공 이즈미 신이치의 전투력을 강화시켜주는 동시에 “주인공 인간과 일상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 양식에 관한 철학적 차이를 논한다”(캡콜드)면, 정수인과 하이디는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지만, 또 완전히 다른 개별적 존재로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여학우들이나 자매 사이의 우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수인과 하이디라는 이란성 쌍둥이에 소수자 삼위일체의 한 점을 더하는 ‘피해자 유족’ 설강우는 연상호가 [더 그레이]를 통해 그려내고 싶은 세계가 ‘가족의 재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일본 원작에도 가족에 관한 언급은 대사를 통해 등장하긴 하지만 이렇게 밀도 있게 구성되진 않는다. [더 그레이]가 만들어내는 가족의 이미지는 영화 [가족의 탄생]이 훌륭하게 그려냈던 것에 견줄만한 완성도다. 이들은 서로에게 겉으로는 무심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츤데레'(겉으론 무심하고 툴툴거리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우리들 대부분의 가족 속 남매의 모습이 그렇듯.
강우는 자주 양아치스러운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이지만, 결국은 가족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그저 평범한 우리네 ‘식구’처럼 묘사된다. 정수인은 폭력적인 가부장 가정의 생존자이고, 설강우는 기생생물에 의해 몰살당한 가족의 유일한 생존자다. 둘은 ‘고아’지만, 서로에게 가족과 식구가 된다.
강원석-아내-자녀는 가족의 해체라는 절망적이지만 별로 놀랍지는 않은 일상적인 한국 현실을 보여준다. 여기에 대비해 정수인-하이디-설강우가 ‘약자 연대’라고 할만한 가족의 재구성 과정을 보여준다.
설강우가 정수인에게 말한다:
설강우: 야, 근데 아까 아빠 이야기 했었잖아. 그 너희 엄마는? 뭐 하고?
정수인: 엄마는 다른 남자랑 잘 살아. 다른 애랑.
설강우: 아, 됐어. 안 봐도 비디오다, 야. 잘 살면 됐지, 뭐, 씨. 안 그래? 이제 너나 나나 고아다. 서로 돕고 살자.
정수인: (싫지 않은 표정으로) 무슨 고아야, 다 큰 어른들이.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
[기생수: 더 그레이] 중에서
수인은 “사람은 어차피 다 혼자야”라고 말하지만, 속으론 싫지 않은 눈치다. 정말 그냥 어디서나 볼 법한 평범한 남매 같다, 이 둘.
봉준호의 [기생충]에 대한 연상호의 대답
이런 연상호의 ‘따뜻한 동화적 비전’은 마치 봉준호 [기생충]에 대한 대답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마르크스의 심장으로 그려낸 것 같은 이솝 우화라면, 연상호의 [더 그레이]는 그 우울하기 짝이 없는 우화에 대한 대안처럼, ‘약자,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들의 연대’를 이야기함으로써 희망을 이야기해보는 것도 괜찮은 거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동화의 따뜻함에 스스로 너무 취한 걸까.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설강우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낯간지러운 해피엔드다. 하이디가 수인이에게 쓴 편지를 강우가 읽다가 말고 수인이에게 말한다. “요거, 요 문장은 요거는 네가 읽어야 돼. 아유 나는 도저히 못 읽겠다.” 그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좋든 싫든 너는 혼자가 아니다.”
이것은 해피엔드일까?
차기 대선을 노린다는 시장을 구한 삼류 깡패 설강우는 ‘더 그레이팀’에 정규직으로 스카웃되고, 마트 점원으로 항상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수인이는 오빠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하고 애인 같기도 한 설강우라는 ‘가족’을 얻는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영혼의 짝궁 하이디까지 얻었다. 그리고 강우는 ‘더 그레이팀’ 최준경 팀장이 “자리 남는다고 너(수인)도 끼워 준”다고 수인이에게 말한다.
이게 로코물의 해피엔드,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의 공식화된 해드엔드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가짜 해피엔드 혹은 유예된 해피엔드
이 해피엔드는 너무 무책임하다. 이 희망은 너무 잔인하다. 현실 속 수인이들, 항상 외롭고, 가족으로부터 응원받지 못하며, 변변한 학벌도 없고, 일용직이나 알바와 같은 질낮은 일자리를 전전하는… 그렇게 DJ가 리드하는 폼나는 음악에 맞춰 거대한 체육관 속에서 몸을 흔들어볼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적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그 해피엔드는 어떤 의밀까. 그네들도 그리고 나도 그 해피엔드로 10분 정도는 흐뭇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늘, 가능성 있는, 스스로 상품이길 거부하는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런 작가를 만날 때마다 떠올리는 말, “만약 예술의 종국에는 선이 악에 대해 승리한다고 약속한다면, 그러한 약속은 역사적 진실에 의해 반박될 것이다. 현실에 있어 승리하는 것은 악이고, 그곳에는 단지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만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선의 외로운 섬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이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만든 약속을 거부한다. 그들은 헤피엔드를 거절한다.“(마르쿠제, 미학의 차원, 1978)
이 무책임한 해피엔드, 그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해피엔드를 연상호의 비전이라고 생각하기엔 연상호는 더 중요한 감독이다. 드라마 속 해피엔드처럼, 삼류 깡패가 정부의 특수 조직에 채용되고, 괴물과 한몸이 된 변종 여자가 정규직 특수요원이 되는 그런 삼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현실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아는 현실, 그 진실을 연상호가 모를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그 해피엔드를 글로벌 흥행을 염두에 둔 타협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시즌 2가 이 질문에 답할 것이다.
변하지 않은 세계, 회색에 잠시 담긴 희망
드라마는 ‘더 그레이’의 회색에 관해 직접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연상호은 이렇게 말했다:
“특수 요원에는 신분을 드러내는 화이트 요원과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블랙 요원이 있는데 두 가지를 혼용해 탄력적인 운영을 한다는 의미와 인간과 기생생물의 중간자로 두 상반된 세계를 바라보는 ‘수인’을 회색이라고 여겼다.” (연상호)
VOGUE(오기쁨 기자), 드디어 베일 벗은 ‘기생수: 더 그레이’, 2024.03.07. 중에서
회색은 경계의 색이다. 그 회색은 특수 요원이나 수인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괴물의 경계가 사라지고, 가족이라는 모든 공동체(조직)의 맹아가 악을 잉태하는 숙주로 작동하는 인간 세계에 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 세계는 회색이다. 그리고 연상호의 [더 그레이]는 그 회색의 세계 속에서 아주 잠시나마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한다. 나도 기꺼이 이 ‘해피엔드’를 아름답게 비추는 수인이의 노을에 물들고 싶다.
하지만 수인은 조금은 슬픈 듯 고개를 숙인다. 노을을 배경으로 한 수인이의 얼굴은 행복한 듯 불안한 듯 알 수 없는 표정이 된다. 그건 희망인가… 이 드라마는 정말 해피엔드인가…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