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도 미얀마도 아닌 곳에서 — 매솟 르포 ③] 한국 유학 중 미얀마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소수 민족 출신 목사 S. 한국에서의 인연으로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지대 ‘매솟’에 방문한 작가의 현장 기록. (⌚9분)
🌱 태국도 미얀마도 아닌 곳에서, 매솟 르포 (연재, 총8회)
1. 매솟 검문소, 보호받지 못한 낯섦을 느끼다
2. 매솟 난민촌 사람들: 여기에 있어도 되지만,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
3. 중국 미얀마 공화국
매솟의 현실이 된 ‘스캠’과 ‘인신매매’
매솟에 방문하며 가장 많이 들은 단어를 선정하자면 ‘스캠(Scam)’이다. 어딜 가나 사기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실제로 사기 범죄가 심각하냐는 질문에 한 명도 빠짐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인신매매’라는 단어도 때때로 대화 속에 오갔다. 대부분 고액 일자리 알선을 통해 인신매매를 당하게 되기에 우리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지만, 국경지대에 닿았을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를 맞아준 S는 한국에서부터 이어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S는 첫날, 우리를 위해 택시 기사를 섭외했다. 혹시 모를 사고, 혹은 범죄 연루와 이동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섭외된 택시를 거절했다. 매솟 지역에서 그랩(Grab;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동남아시아의 승차 공유 서비스)은 꽤 잘 운영되고 있었고, 차를 잡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번호판을 확인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판단도 신뢰를 더했다. 무엇보다, S의 형편에 계속 택시비를 부담시킬 수 없었다.
미얀마 국경지대로 이동하던 날, S와 만날 지점까지 갈 택시를 불렀다. 5분 거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가 잡혔고 숙소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당연히 번호판을 확인하는데, 번호판이 달려 있지 않았다. 앞에도 뒤에도. 번호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판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새 차라서 번호판이 없는 거야.”
택시 기사가 그랩 앱을 보여주며 말했다. 도로를 둘러보자 실제로 번호판이 없는 차를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번호판 없는 차를 탈 정도로 무모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출을 취소하고 새로 차를 불러 번호판을 확인했다. 정확한 숫자까지 확인하고 차에 올라타자, 이곳이 정부의 묵인 아래 불법이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곳이라는 게 실감났다.

그렇다고 모든 ‘번호판 미게시 차량’이 스캠이나 인신매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정말 새 차여서 번호판이 없을 수 있고, 미얀마에서 몰래 들여온 차량의 경우도 번호판이 없다. 매솟은 미얀마와 무역을 주로 하기 때문에 밀수입 차량이 유독 많다. 또한 번호판이 없는 차는 난민이 검문소를 피해 병원에 갈 때에도 이용된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자, 추적을 피하기 위한 수단, 혹은 범죄의 수단인 것이다.
중국의 미얀마(China’s Myanmar)
우리가 탈 뻔했던 차량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다른 차를 불러 납치당하지 않고 S를 만났다. S는 여전히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국경지대 근처를 둘러보기로 한 것이 그날의 계획이었다. 제대로 된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S의 추천에 이끌려 한 곳에 내렸다. 앞마당이 있는 카페였다. 그리고 간판에는 ‘China View Cafe’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분명, 저 국경 너머는 미얀마였다. 그러나 카페 이름은 China View Cafe. 울타리에 몸을 반쯤 걸쳐 강 너머를 보자 높은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이전에 미얀마를 방문한 적 있는 일행은, 미얀마에는 저렇게 높은 건물을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국경지대에 신축 건물이 줄지어 있다. 강 건너 건물 간판에는 중국어가 적혀 있었다. 나는 S에게 왜 카페 이름이 이렇냐고 물었다. S는 농담처럼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야 저 너머는 중국이니까요. 우리도 가끔 농담처럼 저곳을 중국 미얀마 공화국이라고 불러요.”
중국과 미얀마는 아주 복잡하게, 그리고 욕망으로 얽혀 있었다. 1988년 미얀마 군부가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하자¹ 서방이 제재로 등을 돌렸고, 중국은 “내정 불간섭”을 내세우며 무기와 자본을 지원하며 미얀마를 자국 영향권에 묶었다.² 독재를 이어가기 위해 미얀마도 중국의 도움을 이용했다.
파이프라인과 댐, 일대일로 인프라로 미얀마를 전략적 통로로 만든 중국은³ 2021년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를 두둔하며 유엔 제재를 막았고,⁴ 그 과정에서 생겨난 법적 공백 지대에 중국 범죄 자본이 흘러들어 카지노 특구가 사기 단지로 변모했다.⁵ 그리고 그 실체는 바로 강 건너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 그때 그 택시는 어디를 향해 갔을까. 납치, 도박, 폭행, 살인. 어떤 잔인한 단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실제로 캄보디아 범죄 단지처럼 일자리 알선 사기, 로맨스 스캠, 불법 카지노가 운영되고 있는 곳.⁶ 눈에 보이지만 닿지 않는 건, 난민뿐만이 아니었다.
무역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오가고 있는가
두 번째 이동지는 국경과 가까운 무역 센터였는데, 미얀마에서 들여온 상품을 팔고 있었다. 다기부터 오토바이, 생필품 등. 대부분 물건이 일본 제품이라고 했다. 어째서 일본일까? 이 또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일본은 1954년 일본-미얀마 평화조약 및 배상협정 체결 후 1955년부터 1965년까지 미얀마에 배상금 2억 달러를 지원하며 인프라 구축 등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다.⁷
그 영향으로 미얀마는 일본 제품을 대거 수입하게 됐고, 미얀마 현지인도 일본 물품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전쟁 배상금이 ‘투자금’으로 변모했지만, 미얀마는 눈에 띄게 발전했다. 군부 재집권 이후 일본은 반군·민주화 세력 지원으로 돌아섰다.⁸ 실제로 이전에 방문한 매타오(MAETAO) 클리닉 도서관에도 일본어로 된 책이 있었는데, 이 센터 또한 일본이 대폭 지원하며 인도적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저기 모에이강 너머가 미얀마 미야와디 지역이에요. 200밧 정도면 보트를 타고 넘어올 수 있죠. 태국 경찰도 뒷돈을 받고 그냥 보내줘요. 미얀마보다 태국에서 돈을 더 잘 벌 수 있으니 넘어오는 거죠. 거의 단속을 하지 않아요.”
트레이드 센터에서 뒷길을 통해 철조망 개구멍을 넘어가니, 정말 작은 강이 흘렀다. 폭은 고작 100m 정도 되어 보였고, 우기라 그런지 강물은 탁한 빛을 띠었다. 저곳이 미얀마. 다른 나라. 다른 정부. 다른 현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좁은 강은 얼마든지 건널 수 있을 듯했다. 실제로 작은 보트 몇 척이 있었고 운영됐다. 국경이었지만, 경찰도 군인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마음만 먹으면’ 밀입국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 번째 이동지 역시 국경지대였는데 검문소 근처였다. 택시로 이동하는 길, S가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우정의 다리(Friendship Bridge)’였다.⁹ 미얀마와 태국이 우호적으로 연대한다는 상징이었다. “언제나 이름은 저렇게 짓죠.” S가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 태국 정부와 미얀마 정부는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에 가까웠다. 또한 살기 위해 넘어오는 미얀마 국적인은 여기서 난민, 혹은 불법 체류자, 혹은 값싼 노동력이 됐다.


검문소는 커다란 다리로 이어져 무역 차량과 사람이 동시에 오갔다. S는 저 다리로 스쿨버스도 지나간다고 했다. 미얀마에서 태국 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미얀마 사람이 받는 한 달 비자 비용은 1,900밧. 그러나 일주일 비자는 40밧 정도. 대부분 일주일 비자를 받고 일하며 다리를 오가 돈을 벌어온다고 했다.
“그런데 이전에는 일주일 비자가 무료였어요. 지금은 돈을 받고 있는 거죠.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게 지금 상황이에요. 저 아래 보트 보이죠? 이전에는 20밧이면 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700밧에서 800밧이죠. 검문소를 지나갈 수 없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비싼 돈을 내고 빠져나가야 해요.”
S 또한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한 글을 써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블랙리스트는 S뿐만이 아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 유학파 등 많은 지식인이 블랙리스트에 오른다.¹⁰ 한때 우리나라 또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통제 아래 두기 위한 방법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것은, 미얀마는 통금도, 군사정권도, 블랙리스트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
욕망이 오가는 국경지대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아 해방”을 명분으로 미얀마에 진주해 영국을 몰아냈지만, 실제로는 미얀마를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와 인도 침공의 발판으로 이용했다. 현지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¹¹ 결국 일본의 대미얀마 전략은 시대마다 명분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미얀마를 중국 견제와 자국 경제 이익을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했다.
중국은 1988년 서방이 제재로 미얀마를 고립시킨 틈을 타 무기와 자본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심었고, 그 대가로 미얀마를 인도양으로 나가는 전략적 출구, 즉 말라카 해협을 우회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 통로로 이용했다.¹² 중국 입장에서 미얀마는 인도를 견제하고 에너지를 수송하며 동남아시아로 뻗어나가기 위한 지정학적 도구였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법적 공백이 스캠 단지라는 괴물을 낳았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 미얀마를 갈라놓은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9세기 세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미얀마를 완전히 식민지로 만들었고,¹³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시켜 인도 진출의 배후기지이자 쌀, 루비, 석유 등 천연자원을 수탈하는 창고로 이용했다. 분열 통치를 위해 버마족과 소수민족을 의도적으로 갈라놓았고, 인도인과 중국인을 대거 이주시켜 상업과 행정을 맡기면서 민족 간 갈등의 씨앗을 심었다.¹⁴ 영국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독립국가가 아니라 서로 총을 겨누는 수십 개의 민족과 무장세력이었고, 오늘날 미얀마 내전의 뿌리 상당 부분은 바로 그 식민지 시대의 분열 통치에서 비롯됐다.
매솟의 중심은 무역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본 것은 각 나라의 욕망이었다. 눈에 띄는 일본제품과 중국의 스캠 단지, 그리고 분열돼 흩어진 민족. 더 가지고자 하는 욕망, 더 지배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욕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무역의 중심에서 오가는 것은 단순히 상호 이득을 위한 물품과 자원만이 아닌 셈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다리를 건너는 이들도, 웃돈을 주고 배를 타 넘어가는 사람도, 스캠 단지에도 사람이 있다. 마주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 하지만 잔인한 것은 그들 위에 있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 ‘사람’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사람의 욕망을 끊임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잊히지 않는다. 작은 강 건너를 보며 자신의 나라라고 말하던 S의 미소가. 식당에서 같은 미얀마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하던 모습이.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깊은 물음이 이곳에 있다.
🔖 각주
¹ 1988년 8월 8일 미얀마 민주화 시위(8888항쟁). 군부의 유혈 진압으로 공식 사망자 수백 명, 비공식 추산 수천 명이 희생됐다.
— Lintner, Bertil. Outrage: Burma’s Struggle for Democracy. White Lotus, 1990.
² 쿠데타 이후 중국의 미얀마 군부 지원.
— Steinberg, David I. & Fan Hongwei. Modern China-Myanmar Relations. NIAS Press, 2012.
³ 중국-미얀마 송유관·가스관(2009년 착공, 2013~2017년 완공) 및 중국-미얀마 경제회랑(CMEC).
— “China-Myanmar Oil and Gas Pipelines.” Global Energy Monitor, 2023. globalenergymonitor.org
⁴ 2021년 쿠데타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 미얀마 제재 결의가 논의됐으나, 중국·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채택되지 못했다. 관련 안보리 회의 내용은 유엔 공식 보도자료(SC/14440 등)에 기록돼 있다.
— UN Security Council. “Security Council Press Releases on Myanmar.”
⁵ 미얀마 국경지대 스캠 단지 형성 과정.
— “Scam Centres in Myanmar.” UN Office on Drugs and Crime (UNODC), 2023. unodc.org
— “Trapped: The Human Trafficking Crisis in Southeast Asia.” Reuters Investigates, 2023.
⁶ 먀와디(Myawaddy) 및 KK파크 스캠 단지 실태.
— “Myanmar’s Scam Compounds.” Al Jazeera Investigative Unit, 2023.*
— “Inside the Scam Factories.” BBC News, 2023.*
⁷ 1954년 11월 체결된 일본-미얀마 평화조약 및 배상협정에 따라 일본은 1955~1965년 총 2억 달러(당시 고정환율 기준 약 720억 엔)의 배상금을 인프라 투자 형태로 지원했으며, 별도로 무상 경제협력 500억 엔을 추가 제공했다.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Japan-Myanmar Relations.” mofa.go.jp
— Seekins, Donald M. Burma and Japan Since 1940. NIAS Press, 2007.
⁸ 2021년 쿠데타 이후 일본의 대미얀마 정책 전환.
— “Japan Shifts Myanmar Policy After Coup.” Nikkei Asia, 2021.
⁹ 태국-미얀마 우정의 다리(Thai-Myanmar Friendship Bridge). 매솟-미야와디를 잇는 1번 다리는 1997년, 2번 다리는 2019년 개통됐다.
— Asian Development Bank. “GMS Economic Corridors.” adb.org
¹⁰ 미얀마 군부의 블랙리스트 운영. 쿠데타 이후 군부는 언론인, 활동가, 지식인 등을 대상으로 체포영장 및 블랙리스트를 발부하고 있다.
— “Myanmar Junta’s Crackdown on Civil Society.” Human Rights Watch, 2022. hrw.org
— 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AAPP). aappb.org
¹¹ 일본-미얀마 점령(1942~1945). 아웅산 장군이 창설한 버마 독립군(BIA)은 초기 일본과 협력해 영국을 몰아냈으나, 일본군은 이후 강제 노동과 물자 수탈을 자행했다. 아웅산은 1945년 일본에 등을 돌리고 연합군 편으로 전향했다. 점령 초기 BIA는 카렌족 등 소수민족과 충돌하며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으며, 이는 이후 민족 갈등의 씨앗이 됐다.
— Bayly, Christopher & Tim Harper. Forgotten Armies: The Fall of British Asia. Penguin, 2004.
¹² 중국의 말라카 딜레마와 미얀마 전략.
— Storey, Ian. “China’s Malacca Dilemma.” China Brief, Jamestown Foundation, 2006.
¹³ 영국-미얀마 전쟁 3차례: 1차(1824~1826), 2차(1852), 3차(1885). 3차 전쟁 후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됐다.
— Thant Myint-U. The River of Lost Footsteps: A Personal History of Burma. Farrar, Straus and Giroux, 2006.
¹⁴ 영국의 분열 통치(Divide and Rule). 소수민족에게 군 복무 특혜를 주고 버마족과 분리 통치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 Taylor, Robert H. The State in Myanmar. NUS Press,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