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꺾정 52화] 정치개혁의 남겨진 퍼즐, 지방민주주의를 기획하라. (홍재우/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 (⏳5분)
22대 국회가 개원했습니다.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읍소하며 당선된 300명의 국회의원이 과연 유권자를 위해 제대로 일하는지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때입니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안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지니까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칼럼을 통해 유권자의 시각에서 22대 국회와 정치를 비평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이니까요.
중꺾정에서조차 소외된 ‘지방’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의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중꺾정) 칼럼이 시즌 3에 걸쳐 51편 연재되었다.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귀한 공론장이었다. 그러나 이 치열한 지면에서조차 거의 다뤄지지 않은 주제가 있다. 바로 ‘지방’이다.
지금까지 지방분권과 지역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다룬 글은 단 한 편, 그나마도 선거제도 개혁의 일부로 지방선거를 잠시 언급한 것에 그친다. 필진에 지방대 소속 교수가 몇몇 포함되어 있지만, 참여연대라는 조직 자체가 그렇듯, 우리의 시선은 줄곧 중앙정치, 서울의 국회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 외면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한국 시민사회마저 얼마나 깊숙이 중앙집권적 사고에 포섭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이자, 우리가 넘어서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우리는 지금 폭발의 임계점에 다다른 듯한 수많은 사회적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인구문제, 주택문제, 교육문제, 이 모든 사회적 스트레스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 권력과 자원의 과도한 수도권 집중이다. 모든 기회와 가능성이 서울이라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한, 청년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지방은 소멸하며, 국가는 활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자원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동등한 주권자임을 전제하지만, 현실은 수도권과 지방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분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은 시민의 정치적, 사회적 기회의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결국 ‘지방 소멸’이라는 절규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비명과 다르지 않게 된다.
구조 문제 해결에 실패한 이유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이래 민주당이 지방자치국가에 대한 강한 지향성을 보여주긴 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저변에는 보수정당과 다름없이 지방을 바라보는 중앙의 뿌리 깊은 불신과 폄훼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덕도 신공항은 그 시선을 명확히 보여준다. 지방민의 고단한 이동 현실은 외면한 채 ‘허브 공항 중복’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거나, 신공항의 탄소배출만 문제 삼는 이중적 태도는 중앙의 뿌리 깊은 불신을 드러낸다.
이런 시선 아래 지방의 모든 시도는 ‘토목사업으로 토호의 배만 불리는 예산 낭비’라는 딱지가 붙는다. 이러한 지적이 완전히 그릇되었다고 강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중앙집권적 구조가 바로 그 ‘지방 수준’을 영원히 제자리에 머물게 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결정할 권한도, 책임질 예산도 없는 상황에서 유능한 인재가 모이고 정책 역량이 성장하길 바라는 것은 싹이 틀 수 없는 척박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격이다.
중앙의 왜곡된 시선은 ‘메가시티’ 구상과 같은 대안마저 길을 잃게 만든다. 수도권 일극체제에 맞설 대항마를 키운다는 발상 자체는 진일보했지만, 지금의 담론은 오직 ‘발전’과 ‘성장’이라는 경제적 효율성에만 초점을 맞출 뿐, 지역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치’의 문제에는 침묵한다. 발전과 성장은 지역이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는 자치 역량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자치 능력이 없는 성장 전략은 결국 중앙정치가 던져주는 전리품 챙기기 경쟁으로 변질되거나,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채 천편일률적인 개발 논리에 종속되는 비극을 낳을 뿐이다. 진정한 지방의 부활은 지방선거와 지방의회, 지역 시민사회와 지방정당, 그리고 깨어있는 유권자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들이 함께 성장하여,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방자치 민주주의’ 생태계가 뿌리내릴 때만 가능하다.
이 민주주의 생태계의 부재가 낳은 가장 기형적인 모습은 바로 ‘교육자치’의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교육감 선거는 어느새 진보와 보수 진영의 대리전으로 변질되었지만, 정작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정당은 어디에도 없다. 과거 교육위원회가 사라지고 그 견제 기능이 지방의회로 넘어가면서 책임과 견제의 관계는 더욱 이상하게 꼬여버렸다. 고등교육의 자치가 없이 교육청이 유·초·중등 교육까지만 책임지다 보니 교육자치의 목표가 ‘얼마나 많은 학생을 수도권 명문대에 보내는가’에 매몰된다는 점이다.
지역의 미래를 설계할 인재를 키워내는 고등교육, 즉 지역대학에 대한 자치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교육자치는 지역 발전의 동력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인재 유출을 가속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지역대학의 소멸은 지역의 지적 엔진이 멈추고 청년들이 미래를 꿈꿀 공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은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뿌리는 정치 구조
결국 이 모든 문제의 뿌리는 정치 구조로 귀결된다. 이러한 개혁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축은 ‘지방정당’ 허용 문제다. 헌법상 정당의 주체가 ‘국민’이므로 ‘주민’ 중심의 지방정당은 위헌이라는 일부 헌법학자들의 해석은 지나치게 법 기술적이다. 정당 공천권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중앙이 독점하는 한, 지방정치인은 주민이 아닌 서울의 국회의원 눈치만 살피는 ‘정치적 분열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에 빨갱이가 많다”고 외치거나, 정부 부처의 자기 지역 이전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지방 선출직들의 반상식적 정치 행태는 바로 이 기형적인 공천 구조가 낳은 ‘지극히 합리적인’ 생존 전략의 산물이다. 지역의 이슈로 경쟁하고 주민의 평가를 받는 지방정당이 허용될 때, 비로소 지방정치는 중앙정치의 예속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성공적인 지방분권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방분권이 잘 되어 있는 나라치고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인민이 주권을 가지고 스스로를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은, 결국 내가 사는 공동체의 일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 주권자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서울 여의도가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지역 하나하나에 뿌리내릴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제는 시혜적으로 권한을 나눠주는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대등한 파트너인 ‘지방정부’로 인정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은 구체적인 제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 들어 문재인 정부보다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지만, 이 역시 구체적인 제도의 뒷받침 없이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 있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대통령 직속 지방시대위원회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국가균형발전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해야 한다. 나아가 대통령, 최소한 국무총리가 지방정부 수장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공식화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이제 ‘중꺾정’의 시선도, 참여연대를 비롯한 중앙 시민사회의 활동도 달라져야 한다. 국회 의정감시의 노하우와 날카로운 정책 평가의 잣대를 이제 지방의회와 지방정부로 향해야 한다. 지역 시민사회와의 연대를 더욱 굳건히 하고, 그들이 지역에서 꿋꿋하게 민주주의를 감시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정치개혁의 남겨진 퍼즐은 바로 ‘지방 민주주의’다. 결국 가장 견고한 민주주의는, 위기가 닥쳤을 때 서울이 아니라 각자의 동네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주권자들이 살아 숨 쉴 때 완성된다. 이제 그 퍼즐을 맞추기 위한 기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