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34.] 정년 연장이냐 고용 연장이냐, 한 단어 차이지만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포퓰리즘의 나무가 자란다. 거기서 자란 불신과 증오의 열매는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이야기하는 노동과 인간. (⏰16분)
- 정년 후에도 일하고 싶은 사람은 10명 중 약 9명.
- 마지막까지 일하고 싶은 나이는 72.5세.
- 현행 정년(60세) 연장 희망 의사는 10명 중 8명이 넘고,
- 연장해야 할 정년은 약 68세.
구인구직 사이트 ‘사람인’이 지난달 발표한 정년에 관한 조사 결과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지만, 새삼스럽게 충격적이다. ‘일하고 싶다’는 질문과 답변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그 질문과 대답이 ‘일할 수밖에 없다’로 읽힌다. ‘일하고 싶다’와 ‘일해야 한다’는 다르다. 설문에 답한 많은 이들이 ‘일하고 싶다’와 ‘일해야 한다’를 서로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간절한 필요와 사회적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것으로 나는 강하게 추정한다.
‘일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은 ‘일해야 하는’ 사회.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특히 쟁점인 정년 연장과 고용 연장의 차이 그리고 특히 65세 이후가 중요한 이유를 이상헌 박사(ILO 고용정책국장)가 청년과 이주노동자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했다.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34]
정년 연장이냐 고용 연장이냐:
노인과 청년 그리고 포퓰리즘의 나무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이 글은 2024년 11월 15일(금)과 11월 22일(금)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정년 연장이냐 고용 연장이냐
이상헌: 단어 하나 차이지만, 아주 큰 차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과 방법론을 취한다. 우선 정년 연장은 연금과 연결된다. 정년이 없는 나라도 있지만, 정년이 있는 나라에서는 정년이 끝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연결돼 있다. 정년 연장은 연금과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정년을 몇 년 늘려서 연금과 직접 연결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고용 연장은 아주 다른 이야기다. 60세 정년이고, 65세가 연금 수령 시기라고 하면, 그 공백을 ‘정년 연장’으로 잇겠다는 게 아니라 그 공백을 ‘좀 더 싼 가격으로 쓰고 싶다'(임금피크제로 이런 아이디어는 이미 실행 중)는 거다. 60세 정년은 끝났지만, 그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서 쓰겠다는 건데, 거기에는 비용 절감 유인과 함께 기업의 시혜적 태도가 공존한다. 고용 연장은 대부분 재고용 형태를 취하는데 일본에서 시작됐다.
그런 접근 방식의 차이 때문에 기업 입장과 노동자 입장의 차이가 매우 크다. 기업은 아무래도 고용 연장, 즉 일본식 모델을 선호한다. 그리고 노동자 입장에선 그 반대다.
비용의 문제를 제외하고서도 고용 연장인 경우에는 대개 하던 일을 이어서 하는 게 아니다. 하던 일이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사무직으로 일하던 직원이 완전히 비사무 업무에 배치되는 경우도 많다. 고용 연장의 경우에는 새로운 고용이 새로운 조건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영어로 ‘잡'(job, 업무)이 있고, ‘임플로이먼트'(employment, 고용)가 있다. 잡은 특정한 업무, 임플로이먼트는 고용된 그 상태를 의미한다. 고용 연장은 ‘업무(잡)’의 연속성이 유지된다기보다는 고용(임플로이먼트)만 유지하는 것이다. 대부분 그렇다. 그게 업무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정년 연장과 가장 큰 차이다. 일본에서는 본사에 근무하다가 자회사에 배치되는 경우도 흔하다.
ILO 입장? 국제 기준? 아직은 없다
정년 연장이 좋다거나 고용 연장이 바람직하다는 그런 ILO 기준이나 권고는 없다. 국가별로 차이가 심해서 국제 기준을 정하지 않았고 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퇴직했을 때 특정 연령대에서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국제적 기준 정도만 존재한다. 너무 복잡하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한국적 상황은 좀 독특하다. 유럽에서는 정년 관련 논의가 이렇게까지 활발하지는 않다. 유럽 논의도 나름으로 복잡하지만 동시에 단순한 게 뭐냐면, 정년 연장 논의는 항상 ‘연금’을 전제로 한다(참고: 정년 연장, 프랑스에선 반대 시위, vs. 한국에선 촉구 시위).
유럽과 달리 한국 논의 복잡한 이유: ‘고용 연장’
그런데 한국은 연금으로 바로 이어지는 ‘정년 연장’이 아니라 정년과 연금 사이의 공백에 징검다리를 놓는 차원에서 ‘고용 연장’을 또 다른 선택지로 가지고 온 측면이 크다. 한국에서 논의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이렇다.
- 연금 수령 연령이 65세로 못 박힌 채 연금의 수준이 논의되고 있는데,
- 여기에 정년 연장뿐만 아니라 ‘고용 연장’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까지 논의에 포함됐다.
- 정년 연장이든 고용 연장이든 일하고 싶은 혹은 일이 필요한 달리 표현하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주지하는 것처럼 65세 이상 고용률도 매우 높은 수준이고, 노인빈곤율도 OECD 국가 중에서 압도적으로 1등이라서 이 두 조건이 서로 비례해서 평행하게 함께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
첫 번째 관문, 정년에서 65세
어떻게 하면 65세, 즉 연금 받을 나이까지 일할 수 있는가. 혹은 일하게 할 수 있느냐는 문제다. 또 다른 하나는 65세 이후 계속 일할 때 어떤 방식으로 채용해야 하느냐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거듭 말하지만, 유럽은 연금 받을 정도 나이가 되면, 아예 일을 하지 않는다. 그냥 ‘은퇴’다. 새로운 제2의 삶을 산다. 그게 상식이다. 우리와는 논의 양상이 매우 다르다.
정년 이후 연금을 받는 65세까지 어떻게 ‘브릿지’ 할 거냐는 문제다. 이 경우에 국제적 연구에서는 정년 이후 일하는 장년 혹은 노년이 청년 일자리를 뺏는 경우는 꽤 드물다. 우선 일자리가 다르다. 노년층이 정년을 연장해 이어가는 일자리와 청년에게 부여되는 일자리는 서로 겹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노년층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청년층 일자리가 는다는 연구도 있다. 노년의 소비가 늘면서 청년층 일자리가 늘어나는 거다. 물론 이런 현상이 보편적이진 않지만, 드물게는 노년 일자리는 청년 일자리와 서로 상승∙보완하는 효과가 있다는 실증 연구가 있다.
진짜 문제, 65세를 넘어서
노인 vs. 청년 충돌 가능성
그런데 65세를 넘어서까지 일하면, 일자리가 바뀐다. 대기업 출신이 택배 일을 하고, 심지어 경비 일을 하는 경우조차 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직종은 새로운 기술이나 숙련 과정을 요구하지 않는 ‘엔트리 레벨 잡’이 될 가능성이 높다. ‘명퇴 뒤 치킨집’ 공식도 사업 접근성이 높아서였는데, 숙련도를 요구하지 않는 노동 시장에서 오히려 청년과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청년이 정식 일자리를 찾기 전에 알바나 임시직을 찾을 때 그 시기의 청년층과 경쟁할 가능성이 높다.
65세 넘는 노인의 ‘낮은’ 유보임금 문제
두 번째 문제는 뭐냐면, 노년층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유보임금’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정도 월급 주면 일할게’라고 하는 그 수준의 임금을 유보임금이라고 한다. 노년층은 연금을 보완하는 차원에서의 일이라서 ‘유보임금’이 낮다. 가령 300만 원 정도 시장의 가치가 있는 일인데도 ‘나는 200만 원만 줘도 일할게’라고 자신의 시장 가격을 낮추는 게 가능하다. 이런 경우에 청년층과 일자리가 겹치면, 그 시장 임금을 끌어내리는 효과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느냐면, 그렇게 청년과 노인의 일자리가 겹치는 ‘그 순간’에는 청년이 유리한데, 임금 조건까지 고려하면 노년층이 유리하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더 채용하고 싶다. 그래서 이 두 조건이 경합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할지 지켜봐야 하는데, 노년의 규모가 커지면, 청년층이 좀 더 불리해진다.
이런 시장이 형성되면, 나중에는 노동시장 전반의 임금 상승을 제한하는 효과를 자연스럽게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노년층의 유보임금이 시장 임금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인력 부족과 청년 실업의 공존 가능성
‘굳이 이 돈 받고 일해야 하나?’라는 청년이 생길 수 있다. 청년 입장에선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못 찾는 현상이 생기고 그게 장기화할 수 있다.
결국 일손은 부족한데 청년은 자신의 ‘눈높이'(시장이 제공하는 임금이 너무 낮아서) 때문에 취업에 참여하지 않는, 인력 부족과 청년 실업이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불균형이 왜 생기나. 청년 인력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 청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질 좋은 일자리가 없어서 생긴다. 미스 매칭인 거다.
청년 경쟁력의 변수, 노인과 이주노동자
끝으로 청년이 노동시장에서 잠재적으로 경쟁하고, 본인의 경쟁력에 변수가 되는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 여기에 노인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와도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이 생기고, 지금은 서로 업종이 달라서 충돌이 심하지 않지만, 이주노동자의 서비스 업종 진출이 활발해지면, 충돌 가능성이 커진다. 즉, 시장 진입의 변수가 청년 입장에서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희생양 프로필
파시즘과 포퓰리즘의 ‘손쉬운’ 먹잇감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포퓰리즘의 전략을 취했다. 포퓰리즘은 희생양이 필요하다. 나치즘이 제1차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상처받은 민족 자존심과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투사할 희생양으로 유대인을 내세운 경우가 대표적이다. 항상 포퓰리즘과 파시즘에는 공격 대상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이 공격 대상이 되는가. 취약 계층이다. 힘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공격 대상은 구체적이고 눈에 보여야 한다. 고통받는 대다수 서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수립하기보다는 그저 손쉽게 공격할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삼아 그 울분과 고통을 일시적으로나마 잊게 해줄 환상(희생양에 대한 공격과 혐오)를 제안하고 거기에 그 분노와 고통을 쏟아내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런 희생양 프로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이주노동자와 노인이다.
희생양 프로필에 가장 가까운… 노인과 이주노동자
노인이 스스로 자신을 지켰다고 할만한 정치적 사회적 성공 사례는 없다. 유럽은 퇴직하면 그냥 연금 생활을 하고, 그때부터는 그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고, 노년층 자체가 하나의 이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년층이 스스로 노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정치 세력화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주노동자는 어떤가. 일단 그룹화가 어렵다. 노동시장에서 노동자의 힘은 대부분은 물리적 형태, 좀 더 넓게 보면 조직력, 그리고 그것과 관련한 협상력인데, 이주노동자는 그 시작부터 그런 가능성이 아주 낮다. 그리고 나라에 따라서는 이주노동자의 세력화를 정책적으로 견제하려는 경향도 강하다. 이런 노인과 이주노동자의 프로필은 포퓰리즘의 먹잇감 대상에 가장 들어맞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기성 노조의 보수화 가능성
이들 그룹에서 가장 공격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큰 그룹은 기성 노조다. 잠깐 미국 이야기를 하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노조’도 있다. 멕시코 수출을 막고, 중국으로부터 지켜준다고 하면 노동자는 당연히 보호받는 느낌이 든다. 물론 실제로 보호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런 느낌이 들고, 그런 정치적 선택 상황에서 가령, 미시간 공장 지역 노동자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를 선택하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노조라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선택을 하는 건 전혀 아니다.
물론 미국만의 사례로 우리나라 기성 노조가 어떤 액션을 할지, 어떤 방향성을 가질지 가늠하는 건 어렵다. 다만 지금처럼 정부도 정치권도 시민사회도 아무런 실질적인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청년과 노인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숙주로 양분으로 하는 포퓰리즘의 나무를 그저 내버려둔다면, 기성 노조는 매우 방어적으로(보수적으로) 자기 보호를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국가적 차원에서 인력 부족으로 이주노동자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아주 수동적이고 방어적으로 이주노동자의 유입에 반대 세력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갈등 요소, 사회적 문제들, 관련 범죄 가능성 등을 강조하는 담론 작업에 가담할 수도 있다.
청년 그룹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고, 노년층 임금이나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텐데, 이런 논의에 대해서도 기성 노조는 좀 더 방어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다층적 갈등 상황, 정치 세력의 두 가지 전략적 방향성
기성 노조뿐만 아니다. 모든 그룹은 상대적으로 반응한다. 적대적 긴장이 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모든 그룹이 모든 그룹에게 방어적으로 나오면, 정치권에서는 본인의 정치 세력화에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통합이나 조정의 전략이 아니라 분열이나 갈등을 통한 전략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런 분열과 갈등의 전략을 취할 때 가장 취약한 그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주노동자 그룹이다.
그렇다면 기존 정치 세력이 가장 많은 유권자 그룹인 노인 노동력 그룹을 선택할까?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는 별로 없다. 노년층은 상이한 이해관계가 ‘거울’처럼 반영되곤 한다. 노인당 같은 게 없는 이유다. ‘거울’처럼 반영된다는 것의 의미는 기존 연령층 분화 과정에서 고착된 사고방식(예: 586이 반독재 민주화 과정에서 얻은 진보적 성향)이 노년까지 이어지고 투영된다는 의미다. 물론 약간의 보수화 경향은 있지만 말이다.
즉, 노년층이 그 자체로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혹은 일자리에서의 시장에서의 위상을 가지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다만 노인은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보수화라는 게 일자리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인데, 그런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엔 지금은 그 규모가 너무 커졌다.
그래서 얼마나 통합의 전략, 그 방향성을 가지도록 할 것인가가 문제다. 예측하기 어렵지만, 아직 본격적인 초고령사회에 돌입하지는 않았기 때문에…(통계적 기준은 65세 이상 20%, 2025년 전반기 예상)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로의존적인 예측을 통해서 이야기하면 쉽지 않다. 변수가 너무 많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가능성이 커진다
불길한 징후들이 보인다. 기성 노조, 노인과 청년 그리고 이주노동자가 서로에게 사용하는 ‘언어’를 보라. 서로 매우 적대적이다. 언론 보도를 보면, 노조를 바라보는 언어, 청년을 바라보는 언어, 노인이나 이주노동자를 보는 언어들에 날이 서 있다. 좋게 보면 ‘비판적이고’, 나쁘게 보면 매우 적대적이다. 비아냥과 조롱의 표현, 배타적 정서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많아 보인다.
그런 단어들은 저널리즘이라는 창에 비춘 피상적 편린들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경향성을 가진다. 그런 표현이야말로 대상을 향한 입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담론 기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쉽게 말해 바닥 정서를 일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차이, 배타적 정서를 축적하고 그런 정서가 어떤 특정한 계기나 사건을 통해 서로에게 공격적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크다.
정책의 게토화, 생활의 게토화
단절된 대화… 고립된 노인
특히 노인은 함께 대화할 기회가 없다. 한국 사회는 남녀 균형 맞추기를 참 못하고, 세대 간 조화 맞추기도 참 못한다. 노년층을 불러 이야기 듣는 자리가 아주 부족해 보인다. 청년층을 불러서 그런 기회를 가지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많다. 하지만 노년층은 주로 정치인, 교수들 아니면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노년층을 대표하는가? ‘보통의 노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노년의 실질적인 이해와 바람과 불만, 어려움 같은 진짜 이야기를 펼쳐 놓을 기회가 없다. 노인의 진짜 문제들을 공론화할 기회가 너무 부족하다. 그런 자리가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물론 ‘누군가’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만 바랄 수는 없다. 노인 스스로 노력해야 하고, 정치권에서도 시민사회에서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을 바라보는 태도는 아주 전형적이다. 전반적으로 허드렛일하고 그냥저냥 밥 먹고 소일거리 하며 시간 때우는 그 정도, 다른 사회 구성원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 이들이 하지 않는 일을 노인이 한다는 그 정도로 본다. 그런 일이 끝나면 드라마 보고, 잠자는 존재로 여긴다. 노년층이 뭘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에 관해 아무도 관심이 없다. 여기에 노인 본인도 별로 노력하지 않는 것 같다.
유럽에서 노인과 청년 문제는 좀 다르다
유럽은 좀 다르다.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노년층에게는 연금 언제 받느냐는 곧 정년의 문제와 직결한다(프랑스에서 정년 연장 반대 시위를 벌이는 이유). 그게 우선은 첫 번째 문제다. 그리고 유럽에서 청년 문제는 자신의 경제적 유익을 위한 정치적 포지셔닝의 문제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 청년이 보수화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극우화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나는 ‘보수화’나 ‘극우화’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보수화나 극우화라는 정치적 스펙트럼에 끌리는 청년의 문제는 결국은 일자리 문제다. 자기 일자리를 뺏겼다는 자기 이해와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서 기존의 보수와 진보라는 구별법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서로서로 비판한다. 특히 기존 정치 세력을 몽상가라고 비판하고, 자기희생을 하지 않는 사람을 진보주의자라고 비난한다. 기존의 좌우 논의, 진보와 보수 논의가 개념적으로 아직은 의미가 있긴 하지만, 현재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개념이다.
기성 노조 청년 노인 이주노동자… 그밖에 또 다른 그룹 ‘비정규직’
기성 노조, 청년, 노인, 이주노동자 외에 비정규직이 있다. 이 그룹은 또 다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시기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사람들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는 경우가 많고… 이 문제는 계속된 문제고, 지난 20년 동안 계속 경제와 노동계의 화두였다. 여기에 남녀 문제, 정규직과의 관계 문제가 개입했는데, 여기에 청년, 노인, 이주노동자가 개입해서 더 복잡해졌다.
손쉬운 해법… 정책의 게토화, 생활의 게토화
통합의 길로 갈지, 아니면 피라미드의 하층을 하나 더 분리 생성해서 그 영역을 게토화해서 거기에 ‘희생양’을 밀어 넣을지… 그게 두렵다. 그 ‘게토화’는 가장 손쉬운 해법이다. 게토화한 영역을 정치 영역이 가장 손쉬운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으니까.
게토화가 별것 아니다. 예컨대 동네에 범죄가 생기면 경찰은 전과자들부터 조사한다. 그런 ‘전과’ 없이도 이주노동자는 고용이나 사회∙정치적 문제가 생길 때마다 너나없이 먼저 지목당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만만한 ‘희생양’이 되면 실업자가 늘어도 이주노동자, 치안 문제도 이주노동자를 문제 삼는다. 이게 바로 정책의 게토화, 생활의 게토화다.
그 대상은 노년층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적인 문제의 (나쁜)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걱정되는 게 이주노동자와 노인이 결합하면, 그러니까 서로 갈등하면, 그 폭발성은 배가한다.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언제라도 불붙을 수 있는 휘발성, 폭발성이 잠재하고 있다. 정치적 발화 지점이 새롭게 생겨날 수 있다.
포퓰리즘의 나무가 자란다
만약에 이런 일이 심화한다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이런 조건은 당연히 포퓰리즘의 구조적 조건인데,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고, 좀 더 비약해 보자. 포퓰리즘의 나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20대 청년의 보수 우익화
미국 대선에서도 20대 청년의 보수 우익화 현상이 이슈였지만, 유럽에서도 이런 포퓰리즘의 구조적 조건이 모두 존재한다. 물론 트럼프의 상징성(?)이 워낙 커서 미국이 더 두드러져 보이긴 한다.
포퓰리즘의 나무가 자라는 가장 좋은 조건 중 하나는, 구조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문제다. 미국 선거만 해도 경제가 좋다는 사람들은 그걸 설명할 때 뭔가 좀 복잡하다. 그 대신에 트럼프의 단순한 설명, 아니 선동은 더 단순하고 명확하다.
그래서 경계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이야기도 자칫 훈계로 잘못 전달될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 모든 모순을 ‘이주노동자’에게 쏟아버리니까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한가. 단순하면서도 즉물적이면서 명징하다. 이미 그런 위험한 상황이 상당히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다.
노조-청년-노인-이주노동자, 연대는 가능한가
노년층과 기성 조직이 서로 연대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현재로선 연대할 이유도 많지 않고, 작은 단위에서 연대할 공간도 부족하다. 사회적 차원에서 연대 가능성을 지금 당장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 그런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65세가 넘는 노인이 늘어나면 그 규모로 협상력을 가질 수도 있을까? 업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선 기존 노조와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재 평균적으로 보면, 노조에 속한 노동자는 ‘중상’에 속한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노년층이 진출한 노동시장은 ‘중하’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현재로선 겹치는 부분은 적지만, 앞으로는 겹치는 영역이 점점 더 커질 게 분명하다. 그래서 좀 더 전향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청년, 기존 노조, 노인의 시장 영역에서 겹치는 접촉면이 크지 않지만, 앞으로는 점점 더 그 겹치는 영역은 커질 게 분명하다. 접촉면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갈등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서로의 입지를 향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전략 재료가 될 수도 있다.
갈등의 재료는 유보임금, 기존 노조의 협상력 축소, 경쟁력 높은 이주노동자 유입 등이다. 노조의 투쟁 대상이 기업이나 자본에서 내부 경쟁자들에게 향할 수도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정치권의 전략적 개입 여지도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문제… 입 대신 몸으로 말해야
포퓰리즘은 단순히 구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치적∙문화적 커뮤니케이션 문제다. 경제적 분석, 구조적이고 합리적인 분석도 중요하지만, 어떤 내러티브를 구성해서 어떻게 당사자에게 전하고 소통할지 고민해야 한다.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설명이 힘들면, ‘소통’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적을 수도 있다. 소통이 아니라 정책 입안자나 지식인이 ‘솔선수범’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수도 있다. 소통이라는 방식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때는 그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때, 정책의 진실성을 ‘몸으로’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정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지대를 추구하지 않고, 기득권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여줘야 한다. 좌우가 없는 문제(가령 가족, 부동산, 교육), 기득권의 공통적 이해관계가 취약계층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항상 이익은 기득권이 취하고 취약계층은 점점 더 삶이 팍팍해진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당이든 국민의힘이든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다. 자신들은 아주 윤리적이고 원칙적이며 철학적인 양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화하는 작업인 경우가 흔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자신의 이해관계를 솔직히 드러내는 게 더 나아 보일 수도 있다. 이건 소통의 문제이고, 정책의 신뢰성에 관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