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50.]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인간과 노동. (⌚10분)



인간의 조건: 여는 말
인간의 존재 조건은 시간과 공간이다. 경제는 인간의 활동이고, 그 활동은 ‘공간’에 뿌리박고 있다. 하지만 월 스트리트 금융 엘리트가 보는 건 컴퓨터 속의 차트와 그래프다. 그 차트와 그래프 속에는 다양한 숫자들이 있다. 그 숫자들의 틈 속에서 인간의 뿌리, 그 노동이 자리했던 공간, 고유한 인격을 자라게 한 공동체의 전통과 마을의 향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차트와 그래프 속에 인간의 노동은 그저 숫자로만 남는다.
하지만 경제의 조건, 노동의 조건, 인간의 조건에서 공간을 지워버리면, 거기에는 갈등과 균열과 파열음이 남는다. 아무리 온라인과 디지털과 모바일이 진화해도 인간의 노동이 시공간의 조건을 초월할 수는 없다. 숫자에 인간을 종속시키고, 인간의 노동에서 ‘공간’을 제거하면, 인간은 뒤틀리고, 마을은 신음하며, 공동체는 균열한다. 그렇게 세계화의 필연적인 부산물로 극우 포퓰리즘이 자란다. 상실은 증오가 되고, 증오는 집단적 혐오로 진화한다.

이상은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그 기억으로 옮긴 세계화에 관한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의 설명이다. 세계화 혹은 신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경제학 용어를 적당히 섞어서 주요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그리고 전 세계 각 지역의 차이도 곁들여 세계화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헌이 세계화를 설명하는 방식은 본질적이면서도 철학적이다. 어려운 표현 없이도 깊이가 있다. 그렇게 담담한 구어체로 세계화를 설명한다.
쿠팡을 이야기할 때도, 플랫폼 노동을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수성 안에 존재하는 보편성, 보편성 안에 존재하는 차이와 개별성을 이상헌은 지적하고 되새긴다. 그 이야기에는 첨단 기술과 시스템에 관한 매혹과 과시가 아니라 항상 인간과 삶을 향한 공감과 연민이 있다. 인간의 구체적인 삶이 있고, 그 삶의 뿌리에 관한 근심이 있다. 그런 시선은 귀하다. 그런 이야기라면 우리는 가끔은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제네바 오전 8시‘(별칭 ‘제네바 인터뷰’)가 어느덧 50회다.
이상헌에게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는 경제학자 이상헌의 철학과 방법론, 그 거푸집(틀)이 형성한 사연을 물었다.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50]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제네바 인터뷰’ 50회 특집
질문∙정리: 민노
답변: 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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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11월 07일(금)에 진행한 대화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 등으로 맥락화하고,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일인칭 관점에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 여는 말: 민노(질문자)
🔖 본문: 이상헌(답변자)
기술과 기계가 ‘사람의 일’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이고, 보수적이다. 그 이유는… 세상이 쉽게, 많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풍요, 기술, 기계와 같은 걸 보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리고 세계가 본질에서 변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 있는 사람의 일, 관계, 협력, 긴장, 갈등의 요소는 잘 변화하지 않는다. 기술이나 기계가 사람의 일을 개선하거나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사람의 일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그동안 많이 이야기했던 ‘플랫폼(경제)의 문제’를 예로 들자. 플랫폼 경제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런 시선 자체가 환상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에 여전히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받는 ‘전근대적인 노동을 하는 인간’이 있고, 그 갈등과 모순에 얽힌 사람의 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적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통제하고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방식은 신기술이나 기계, 새로운 제도가 들어온다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기술을 낙관하고, 인간을 회의하는 사람들… 난 그 반대다
스스로 기술 낙관론자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에 관해서는 비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반대다. 기술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사람들은 살아 있고, 항상 해법은 완벽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해법을 찾아갈 것으로 기대하는 점에서는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다.
‘이면’이라는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그 심층에 깔린 인간의 삶을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좀 더 현상적으로 냉정하고, 까다롭고, 시큰둥하고, 어떤 면에서는 섬세하기도 하고, 그런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열광하고 비관할 때 나는 상대적으로 덜 열광하고 덜 낙담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후나 환경의 문제에서도 다른 분들보다 좀 더 낙관적이다.
새벽 배송에 관해서도 많은 분이 자신들의 욕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한다. 그 논쟁 테이블에 다양한 인간의 욕구가 드러난다. 결국은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 이해, ‘당사자성’을 표출한다. 기술, 그러니까 플랫폼이나 알고리즘에 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해, 자기 욕구로 이야기한다.

세계화도 마찬가지다
세계화도 그렇다. 자본은 숫자인데, 그 숫자의 이동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경제적인 문화적인 방향을 ‘세계인’으로 통일하거나 효율화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문화적이고, 공간적인 토대 위에서 독특한 세계관을 품고 살아간다.
예전에는 중도와 리버럴이 많았는데, 점점 더 극우가 득세하는 이유는 인간의 구체적인 삶, 특히 공간에 밀착한 토착적인 문화를 무시하면서 생겨난 필연적인 귀결이다. 반작용이랄까. 그 자본의 흐름과 생채기를 내면서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수십 년 동안 그런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런 부작용, 반작용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일이고, 지금 생겨난 정치적 균열은 필연적이다.
결국,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일’은 남아 있는 것인데, 자본의 문제, 기술의 문제로 숫자로 환원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졌다. 그런데 이런 비관적인 상황에서 나는 오히려 좀 더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의 일이니 사람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떻게 보면 성향이고, 기호라면 기호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통용되는 만능 솔루션은 없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엘리트에 대한 경계
내가 왜 이런 사고방식을 품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은, 그러니까 책으로 세상에 관해 배우고 안다는 건…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세상이 너무 명징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서 더 그랬다. 그분들의 삶을 윤리적으로 정치적인 틀로 손쉽게 재단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나도 엘리트라면 엘리트인데, 엘리트에 대한 경계심이랄까, 그런 게 있다. 지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엘리트는 대체로 이기적이다. 80년대를 보면, 지식인이 주도해서 계몽하고, 사회 개혁을 주도했다. 80년대 지식인의 역할에 관한 논의는 많았다. 사회를 어떻게 끌어가고 노동자와 어떻게 결합하고… 그땐 그게 좋았다.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를 통해 세계를 보는 게 아니라 공적인 관점으로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세상을 봤다. 그런 건 참 좋았다. 발언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발언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조금 지나 놓고 보니까, 그 이후로는 희생이나 헌신보다는 엘리트 특유의 본능적인 ‘이익 추구’라고 해야 할까. 엘리트가 왜 엘리트인가 하면, 쓸 수 있는 자원이 많다. 본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상황을 만들려고 하면, 그 가능성과 선택의 폭이 크고, 다양하게 뭔가를 활용할 수 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방향으로 끌리는 것 같다. 그게 자연 상태니까.
엘리트가 특히 이기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리고 의도적이거나 전략이라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이해에 충실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해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런데 그걸 자신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리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우연히 혹은 자연스럽게 또는 본인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런 본능적인 이기주의는 의도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인 이기주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모습이 특히 한국 정치에서 많이 보인다.
일종의 ‘지대(地代)’라고 할 수 있다. 그 지대 추구(쉽게 말해 ‘불로소득’)를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는 않는다. 그건 아무래도 내가 외국에 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긴 하다. 그래서 좀 까칠해지고, 민감해지는 점이 있는 것 같다.

논의는 실용적이어야 한다
‘진보’라는 표현, ‘보수’라는 표현 모두를 싫어하고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논의를 하는데 굳이 좌파나 우파, 진보나 보수라는 표현을 쓸 필요는 없다. 구체적인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면 그만이다. 그런 현안에 대해선 좌파나 우파나 진보나 보수나 그런 정치적인 틀로 재단하지 않고 그냥 문제 해결 자체에 집중하면 좋겠다.
좌파적 시각, 우파적 시각… 이런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틀짓기, 프레이밍이 사라지면 좋겠다. 그런 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문제 해결이 우파적 시각이 도움이 될 때도 있고, 좌파적 시선이 해법일 때도 있다. 하지만 무조건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좀 더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면이 있는데, 처음에 관점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기술과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일이고, 기본적으로 정책이라는 건 사람들이 현실적인 삶을 개선시키는 일이다. 논의는 실용적이어야 한다.

빌 게이츠의 “기후재앙론은 틀렸다’에 대하여
빌 게이츠, “기후재앙론은 틀렸다”
빌 게이츠는 최근(2025.11) 기후 전략은 인간의 삶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삶의 질 개선이 ‘배출량 감축’이라는 수치에 집착하는 정책에 밀려 뒷전이라고 비판했다. 게이츠는 ⑴ 기후변화는 인류 멸망을 가져오지 않는다.
⑵ 기온은 기후 문제 해결에서 최선의 지표가 아니다. ⑶ 기후변화에 맞서는 최선책은 인류의 건강과 번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기후에 관한 세 가지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에 관해 저명한 기후 활동가인 마이클 오펜하이머는 “기후변화 대응 노력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게이츠의 발언을 악용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예견한 게이츠는 “일부 기후 운동가는 내 의견을 반대하거 날 위선자로 비난할 것”이라면서 “지금은 기후행동과 아이들 생명 구하는 일이 상충 관계가 심해지고 있다. 질문해야 한다. 백신 지원금 중단해 0.1℃라도 온도 낮추는 게 현명한 선택일까? 나는 기후 운동가지만 동시에 아동 생존 운동가다.”라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참고: 빌 게이츠의 고백, “기후변화 심각하지만 인류 멸망까진 아냐.” 왜? (김도연, 2025.11.06)
민노씨가 언급한 게이츠 발언에 관해선 물론 기후 위기 회의론자들이 악용할 여지가 크다. 기후 회의론자들은 예전에는 기후 위기론에 근거가 없다는 식으로 기후 위기론을 공격했다면, 지금 기후 위기 논의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기후 위기 대응 활동을 공격한다.
기후 위기 대응의 취약점을 부각하고, 그 자체로 별 의미가 없다는 식의 공격적인 전략을 가져간다. 그렇게 기후 위기 운동의 동력을 떨어뜨리려는 방향을 취하는 회의론자에게는 게이츠의 최근 발언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자 공격 수단을 제공해 준 측면이 있다.
하지만 게이츠 이야기는 중요한 측면을 지적한 것이긴 하다. 기후 위기는 선진국에서는 어떤 의미로든 아주 ‘핫’하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에 가면 아주 ‘썰렁’하다. 개발도상국 입장은 자신들이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기후 위기 담론으로 ‘막았다’는 생각이 크다.
즉, 현실에서 개발도상국들은 기후 위기 담론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큰데, 정작 선진국은 이 점에 관해선 별다른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개발도상국 입장에선 ‘우리는 발전도 하지 말라는 거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아동 교육, 보육, 의료… 이런 쪽으로는 관심이 부족하니까. 게이츠 이전에도 이런 취지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았다.

목적와 수단의 전도, 우리는 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가. 결국은 인간에게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표를 수치로 구체화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의 특징이 뭐냐면, 원래 목표를 위해 수단으로 택한 ‘수치’가 어느 시점에서는 그 목표를 대신한다.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 표시한 ‘깃발’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리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반복적이고, 패턴적이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 생명을 지키고, 그 죽음을 막는 게 가장 큰 목적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목적과 목표는 지워지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수치, 10년 후 20년 후의 ‘수치’만 목표가 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특히 현장에서 아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더불어 요즘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환경 문제를 가장 잘하는 나라, 예전에는 중국이 그렇게 욕을 먹었는데, 요즘은 환경오염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유럽 선진국에서는 환경 오염 주범으로 중국을 여전히 공격하지만, 개도국이나 제3세계에서 보면, 오히려 트럼프의 미국이 ‘못된 놈’이고, 중국은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도 꽤 성장했고, 기후 위기와 관련해선 태양광과 전지도 잘 만들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중국이 참 잘하고 있다고 개도국은 볼 수밖에 없다. 선진국은 오히려 기후 위기를 통해 개도국은 발전할 수 없도록 ‘사다리 걷어차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거다. 기후 위기에는 이런 복잡한 상황도 반영돼 있다.

인간의 삶은 한번에 ‘휘발’될 수 없는 거니까
사람의 구체적인 삶으로 돌려놓고 보면, 우리가 열광적으로 이야기한 플랫폼, AI 노동, 디지털 경제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은 그저 열광 그 자체로 ‘펌프질’하면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벤트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언론이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기술과 기계의 환상과 판타지에 현혹되고 그걸 조장하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은 그걸 통해 돈을 벌고 지명도를 높이는 사람들일 뿐이다. AI와 플랫폼에 직접 영향받는 인간의 노동, 그 노동자의 삶과 직접 관계 맺지는 않는다. 하지만 좀 재미 없어 보여도 ‘인간의 삶’이라는 건 그런 휘발성이 없다. 인간의 삶은 한번에 휘발될 수는 없는 거니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식인이나 엘리트의 논의, 정치와 언론의 논의를 굉장히 피상적이라고 느끼고 어이없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모든 논의를 거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도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 그런 정책 논의조차도 의심스럽게 보는 시선… ‘우리의 삶을 당신들이 아는가’ 그런 시선이 많다. 정치인과 학자들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다.
좋은 비유는 아니지만, 식민지 초창기에 이광수 ‘무정’ ‘상록수’ 지식인의 농민 계몽 운동 같은 걸 보면, 시큰둥했던 사람들이 감동해서 농민과 지식이 연결돼서 으샤으쌰 하고, 80년대까지도 그런 게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없다. 삶의 차원에서 지식인이 확연하게 다른 계층과는 ‘분리’되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지식인의 언어에 설득력이나 공감력이 많이 떨어졌다. 또 다른 나쁜 현상 중 하나는, 공감이 커졌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그저 적대적 공생의 양당 정치 구조를 통해서 메시지가 증폭되기는 한다. 유튜브와 같은 여론 증폭 장치를 통해 확증편향의 무한 자기 증폭 현상이 반복하고 그런 메시지가 폭주한다.
그 상호 인증의 과정에서 더 과격해지고, 1로 시작했던 메시지가 10이 되고, 100이 된다. 지금은 그런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담론과 인간의 삶이 예전보다 더 멀어진 상태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을 연결하는 ‘계기’가 올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어쨌든 그 방법을 찾을 것으로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