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17.] ‘유예된’ 포퓰리즘이 윤석열이라는 광기를 만나 ‘내란’으로 폭주했다.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포퓰리즘. (11분)

포퓰리즘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12.3 내란이 터졌다(캡콜드는 미국에 있고, 우리는 한국 시각 기준 밤 11시쯤 인터뷰를 진행하곤 한다).

청년과 노인이 안전장치가 사라진 액화노동의 제로섬 게임을 강요당하고, 권력과 술 그리고 극우 유튜브에 스스로 기꺼이 중독된 미친 대통령이 광란의 계엄을 발동하며, 민주주의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같은 꿈을 위해 시민들은 피 흘릴 각오로 국회에 출동한 계엄군을 막아 세운다.

이 미친…

나라에서 태어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이 상의 의미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여기서 함께, 폭력에 맞서면서요“라고 수상 연설한다.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징글징글한 나라, 그 안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자신에 관해, 포퓰리즘이라는 위태로운 키워드를 중심으로, 캡콜드에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17]

포퓰리즘으로 본 청년, 노인 그리고 12.3 내란

질문 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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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12월 3일(화) 밤 11시에서 4일(수)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1. 포퓰리즘은 정의하기 어렵다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계속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만 해도 한창때는 복지 정책 약간만 강화하려 해도 포퓰리즘이라고 언론에서 아우성치지 않았던가. 어쨌든 기본적인 내용은 ‘민중’이든 ‘시민’이든 그 사람들의 의지가 직접 통치의 방향이 된다는 말이긴 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포퓰리즘은 민주제가 발전해 온 방향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와 다양성을 지닌 사회에서 민주제를 굴리려면 민의를 정제하고 솎아내서 정치 과정으로 녹아내기 위한 과정과 시스템이 필요하고, 흔히 다들 알고 계신 대의민주제라는 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제도가 발전하면 할수록 개별 사안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사회적 개선에서 배제되고, 그들 또한 그런 배제를 느끼게 된다. 즉 이 시스템이 ‘나’를 소외시킨다는 감각이 누적된다는 것이다.

주민 발안 등으로 대표되는 직접민주제 요소들은, 그래도 민의를 사회적 장치를 만드는 시스템을 거치도록 설계되었다. 반면 포퓰리즘은,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을 건너뛰고 아예 직접적으로 민의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다. 체제는 이미 엘리트 위주로 재편됐으니 민중이 시스템을 건너뛰자는 것. 그런데 그러다보면 시스템을 초월한 ‘초인’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런 초인의 상징이 극도로 왜곡되면 역설적으로 엘리트 그 자체인 트럼프가 재선되는 것이다.

우익적 방향성으로 터지는 포퓰리즘은 커다란 집단적인 상징 체계를 통해, 그리고 그렇게 공고한 우리 편 집단이 불순물을 제거하고 성공을 누린다는 신화를 만들며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는 방식이다. 이런 파격과 초월이 표출된 정치 체제인, 파시즘이 대표적이다.

한편 좌파 포퓰리즘의 방식은 아르헨티나의 소위 페론주의가 대표적이다. 이쪽은 국유화나 직접적 분배 등 시민들이 직접적이고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한다. 우파 포퓰리즘이 계속 가다 보면 파시즘으로 흘러가기 쉽듯, 것과 좌파 포퓰리즘은 이해 조율의 포기와 경제적 파산이라는 논리적인 귀결을 초래한다. 양쪽 포퓰리즘 모두 최종 국면에서는 파국인 셈이다.

2. 현대의 포퓰리즘

다수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지도자를 선출하고 당선시킬 만한 코어 세력만 있다면 ‘포퓰리즘’의 조건은 충족된다고 보인다. 포퓰리즘이 발흥할 때의 공통점은 국민 다수가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져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강력한 ‘팬클럽’이 잘 단합하면 포퓰리즘의 출현은 가능하다.

오늘날 의미의 선진국형 포퓰리즘, 그러니까 세계화 경제 이후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단순하고 직접적인 세상에 대한 열망은 2008년 리먼 사태가 하나의 기준점이다. 90년대 말의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축적되었다가 폭발했던 사태니까. 그간 전체적으로는 부가 증가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버티고 있다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한 번에 터졌다.

일종의 폭탄 돌려막기였고,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을 지연시키던 와중에 리먼 사태를 시작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가 폭발했고,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표출했다. 그 시스템이 결국 엘리트의 기득권에 충실한 기만이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기득권 시스템에 대한 분노. 10일 차 월스트리트 점령(OWS). 2011년 9월 30일. 위키미디어 공용.
14일 차 월스트리트 점령(OWS). 2011년 9월 30일. 위키미디어 공용.

우리는 비슷한 충격으로 그 전에 ’97년 IMF가 이미 있었지만, 정치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고, 계속 정치지도자에게 희망을 걸고 국운을 함께 걱정하는 방식으로 풀려나갔다. 정권 교체가 비교적 평화적으로 핑퐁 게임처럼 진행되었고, 포퓰리즘의 폭발은 유보됐다. 2020년대 전까지는.

3. 우리가 IMF 직후 포퓰리즘으로까지 나아가지 않은 이유

포퓰리즘의 폭발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국가라는 시스템을 통해서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합의가 깔려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 시기 초고속 인터넷은 제2의 개항으로까지 그 의미가 부여됐다. 국가 중심으로 위기를 극복하자는 시나리오에 국민들이 대체로 동의했고, ‘나라’가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 함께 망한다는 의식을 공유했다.

김대중 정부가 거시적인 위기 극복 시나리오를 잘 짰고, 국민도 그 시나리오를 수용할 준비가 잘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IMF 사태라는 명명 자체가 이런 국가적 위기 극복 시나리오를 방증한다. 마치 IMF를 마치 왜적(마치 임진왜란 프레임)취급하는 것은 우리가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성공 국면도 그렇다. 엘리트 vs. 민중인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엘리트는 국가대표 취급해 주고, 국민 대중은 적당히 국뽕에 자아도취 하는 구도에 가깝지 않았나. 삼성은 국가대표 기업이고, 노무현 당선은 그래도 민중 권력의 승리를 의미하는 거대한 상징으로 작동했다.

2002년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선거 유세 중 승리의 ‘브이'(V)를 들어보이는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 노무현사료관.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의 모습. 2016. 11. 19. 광화문. 옥토 제공.

거기에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진 광장에서의 외침이 아주 만족스러운 ‘정치적 효능감’ 비슷한 것을 제공했다. 삶을 바꿀 본질적인 제도 개선은 없었지만 어쨌든 지도자를 내쳤으니까. 여튼 이런 이벤트가 4년~5년 정도의 주기로 반복되면서 포퓰리즘의 폭발이 유보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명박 당시의 광우병 사태라든지 박근혜 당선이라든지 무력함의 순간이 넘쳤으나, 어쨌든 촛불과 문재인 정부의 탄생이라는 ‘효능감 충족’ 이벤트가 상쇄시켰다.

하지만 그런 우연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지난 대선에서 포퓰리즘적 성향을 이미지로 삼은 이재명과 그냥 뭐 86 정치세대 하나 때려잡겠다는 포퓰리즘 후보 윤석열이 붙어서 후자가 당선되었다. 그런 선택의 결과를 지금 겪고 있다.

미래를 빼앗긴 2030


이렇게나 ‘노오력’했는데, 기성세대보다 확정적으로 잘살수 없다. 이들에게는 시스템에 대한 실망감이 깊다. 가령 이대남이라는 멸칭이 붙은 인구 그룹을 예로 들면, 여성들이 나보다 노력도 덜 하는 것 같은데 더 잘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그런 관극틀이 자리잡히면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폭 넓은 시선? 철학적인 성찰? 한국 학교 시스템은 무슨 학교 관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나오는 인성 교육, 전인 교육에 완벽하게 실패했다. 학교 이후의 사회화 교육을 일임하는 미디어 환경 역시 비슷한 약점을 지닌다. 배려? 조화? 언감생심이다. 한마디로 사회를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종합적 시선을 제공하지 못한 교육 시스템이고 미디어 시스템이다.

대학교 이상의 고등교육 경우도 직장에서 쓸 실용 기술 위주로 재편된 지 오래다. 그러니까 대학 역시 사회적 성찰(역량)을 제공하지 않는다. 내 처지가 이런데, 남의 처지는 어떨까. 그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런 걸 알려주지도 않고, 어떻게 연결되는지 훈련받지 못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고 그 윗세대라고 그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란 새로운 세대들이 성년에 가까워지거나 성년이 되면, 비교적 순수한 단일 집단을 만들면 사회적 무력함이 해결된다는 우익 포퓰리즘의 기본 틀과 합이 맞게 된다. 이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고 전 세계적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강화한 게 소셜미디어 시스템, 한국에서는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지배하는 정서는 ‘우쭈쭈’다. 좀 격식을 갖춰 말하면 동지애다. 민노씨가 말한 ‘환자로서의 동료의식'(황지우) 같은 걸 수도 있다. 멀리서 보면 기이하거나 한심할지라도, 당사자들끼리는 서로 애처롭고 애틋하다. 서로 ‘정신 차려!’라고 말하기보다는 ‘우쭈쭈’해주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는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젊은 남성층 일각에 있는 그런 ‘우쭈쭈’ 세계관을 바깥 정치의 양분으로 삼아낸 대표적인 사회적 마스코트가 이준석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준석(전 국민의힘 대표). 수능 수험생 응원 영상 중 캡처. 2023년 11월 14일. 이준석 인스타그램.

사족을 달면, 내가 ‘이대남’이라는 표현을 피하려는 건 그 표현이 그냥 멸칭이기도 하지만, 범주가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당장 이들이 이제 30대가 되어가고 있다. 더불어 피해의식의 우익화는 완전히 남자에게만 한정되는 성향인 것도 아니다. 즉, ‘이대남’은 성별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계급적이고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여러 복합 원인이 작용하는 문제다.

희망 없기는 노인도 만만찮다


물론 노인도 희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평온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기대를 품은 노인보다 불안을 먹고 사는 노인이 훨씬 더 많다. 사망률, 자살률로 표현되는 절망의 현실은 그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다. 시스템이 내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품기 쉽다. 그 절망의 시스템을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절망, 회의감으로 빠질 때가 위험하다. 그때 포퓰리즘으로 이끌리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 노인은 2030보다 더 포퓰리즘에 끌릴 유인이 많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통계나 경향은 노인에 친화적인 전향적인 뉴스들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관적인 인식과 집단 내에서 그 의식이 공유되는 방식이다. 한국의 노인들은 2030보다 더 포퓰리즘에 친화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

다만, 노인 정체성으로서의 정치세력화는, 이상헌 박사 지적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노인이 됐다는 것만으로 기존의 경로의존적 정체성, 가령 민주당 혹은 국민의힘을 지지했던 청년장년기의 기억과 경향을 지우고 새롭게 ‘노인 정체성’ 장착하고 그걸 내세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노인으로서의 어려움은 ‘집단’으로서의 어려움이 아니라 노인 개개인의 처지로 여기기 쉽다. 그래서 더 정체성 정치나 세력화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상계엄, 음모론적 망상에 빠진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도 포퓰리즘의 맥락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동안 다른 인터뷰 토픽에서 강조했던 카리스마의 사이다 정치, 그 극단적 형태로 보인다. ‘사이다’는 관념이나 이야기, 설득이나 대화가 아니다. 번쩍하면서 출현해 어떤 바보라도 현저히 눈에 보이는 뭔가를 제공해야 한다.

가령 아주 예전 아르헨티나의 좌파 포퓰리즘은 국민에게 돈을 뿌렸다. 이명박식의 보수 포퓰리즘은 청계천으로 현현했다. 그렇다면 윤석열에게 그건 뭔가? 86세대의 청산이다. 86 기득권을 타파한 새 세상을 제안했고, 그걸로 대통령이 됐으니 말이다. 명태균이든 풍수지리든 어쨌든 용산으로 집무실도 이전하고, 기자들에게 김치찌개도 끓여주고 그런 이미지를 뻥뻥 터뜨리며 시작했고 말이다. 문제는 속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내실이 부족한 정도를 넘어 경제는 망해가고, 대표적인 개혁 정책으로 추진한 의료 개혁은 의료 대란이라는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해결이라는 ‘정상적인’ 해결 방식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을 이미 보여줄 대로 보여줬다. 사회적인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정치적 해결 능력도 없는 정부라면, 거대 여당의 공세에 맞서는 방식이라는 것도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되기 쉽다. 거기에 더해 윤석열은 위헌 위법한 방식까지도 불사했다. 이건 정말 예상을 훨씬 뛰어 넘긴 했다.

비상계엄을 발표하는 윤석열. 2024.12.03.

그런데 우파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이들의 논리라는 것은 하나의 선명한 ‘적’을 설정하고, 우리 편 정체성으로 뭉쳐서 그들을 물리쳐야만 자연적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선동한다. 미국 트럼프가 ‘이민자’가 그런 적이라면, 윤석열에게는 민주당의 86 정치인들이 그런 적이다.

지난 수년간 벌어진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대립의 현실은 그저 있을 수 있는 교착 상태의 흔한 정치판 모습일 뿐이다. 86이 무슨 극우 유튜브 음모론 속의 거악도 아니고 간첩 집단도 아니다. 하지만 윤석열식 음모론의 세계에서는 어쨌든 민주당은 거악이고, 이들은 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위기를 우리(윤석열과 그 극소수 지지자)가 극복해야 한다는 망상에 빠진다.

원래 한국에서 우파 포퓰리즘이 기대어 온 근간은 ‘친북, 친일’ 척결이다. 그런데 윤석열은 일단 친미를 위해 친일 제스쳐를 워낙 강하게 실행한지라 친일 쪽으로 적을 창조해 내기는 어렵고, 북한은 현명하게도(?) 김용현(전 국방부장관)의 도발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민주당을 기득권 86 중심의 ‘다수당 독재’라고 규정한 거다.

민주당을 거악으로 설정하면서 예산 삭감과 감사원장 등 탄핵의 ‘합법적 테두리’ 안에 있는 야당의 실력 행사를 위헌한 불법으로 과장한다. “광란의 칼춤”, “국헌 문란”,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이라는 표현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표현인데도 그 표현을 민주당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한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비상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극우 유튜브 주장을 빼다 박은 윤석열의 ‘국민께 드리는 말씀’. 2024.12.12.

결국 우파 포퓰리즘이 지배력을 잃고 극단화되다 보면 도달하는 마지막 종착점은 대통령 최후 수단인 계엄이다. 행정부만으로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이자 최악의 수단이며,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이성과 합리의 옷을 벗어버린 음모 사고에 빠진 ‘나’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가장 ‘사이다’스러운 수단이 바로 계엄인 거다.

양날의 칼


포퓰리즘은 태생적으로 모순적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목표를 내세우고 상징과 선동을 동원해도, 내세운 명분을 실현하는 것은 확정적으로 불가능하다. 과잉 자의식이 낳은 너무 단순한 현실의 모순(선과 악의 대결)을 해소하기에 진짜 현실은 너무 복잡하다. 원래부터 그런데, 윤석열 정권의 경우는 포퓰리즘의 근거인 여론 동원력마저 미비하여 겨우 10%대 지지다. 즉 친위쿠데타를 해도 정책을 밀어붙일 물적 토대가 전혀 없는 상태다. 결국 그 “광란의 칼춤”으로 자기 자신이 베일 수밖에 없는 게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 속 음모론의 세계는 진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세계화한 국면에서는 보는 눈과 이해관계가 국제적으로 촘촘해져서 더더욱 윤석열의 상상 속에 있는 친위 쿠데타는 불가능하다. 대통령으로서 내세운 공약 중 하나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는 판에 새로운 세상을 제안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망상이자 광기다. 가짜 카리스마라는 허상은 결국 파도 거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다. 파국으로 자기 파괴로 종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계엄이라는 포퓰리즘 끝판왕의 출현을 저지하지 못한 것은, 한국의 현행 민주주의, 속칭 87년 시스템으로 구성된 권력구조의 시한이 이제는 끝났다는 것을 방증한다. 윤석열로 현현한 극단적 포퓰리즘이 그나마 지금까지는 유보되어 왔다는 것이 오히려 대단할 정도로, 오랫동안 누적돼 오지 않았나.

포퓰리즘의 항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무력감이 포퓰리즘의 양분인 만큼, 항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효능감이라는 개념이다. 내가 필요한 바를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실현해내고 사회의 시스템으로 굳히는 변화의 성취감. 국가 차원에서 그런 것을 얻기 어렵다면, 지역사회, 기업, 가정… 더 작은 단위에서 더 피부에 와닿는 만족감을 시스템 차원에서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역할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원래는 풀뿌리 정치(지역정당, 우리나라에선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시민사회다.

자기 자신의 사회적 함의를 아주 작은 단위에서 출발해 점점 더 큰 단위와 의미론적 공간에서 확인하는 작업이 포풀리즘의 항체이며, 그런 항체를 통해 사회 전체의 면역 시스템이 강화한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 이후 해야 할 이야기는 민주당의 단순한 집권이 아니라 지역정당, 지역공동체, 지역활성화이어야 한다(참고 기사: 지역소멸과 지역정당).

학교도 가장 작은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의 합의, 민주주의를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교육적 방법론,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절차와 해법이라는 차원에서 포퓰리즘의 가장 강력한 항체로 역할할 수 있다. 슬로우뉴스가 솔루션 저널리즘으로 ‘학교폭력’의 문제를 채택한 것은 그런 방향성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탄핵 이후’의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고 본다. 미디어 차원에서도 함께 협의하고 해결하는 민주적 거버넌스의 방식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솔루션 저널리즘이기도 하다. 그런 포퓰리즘적 광기의 항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탄핵만큼 중요하다.

어라? 저 X이 내 옷을 입었네? (더 글로리, 넷플릭스 2022).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을 과장하긴 했지만, 학교폭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보여준다. 모방 욕구와 적대적 귀인 편향 그리고 학교로 이식된 수직적 권력구조와 그것을 본능적으로 학습하는 아이들.
학교와 교육부 그리고 교육청이 ‘학교폭력’을 다루는 방식은 반(反)교육 그 자체다.

물론 문제는 이런 항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때론 지루하고 때론 무거우며 힘겹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섬세하고 복합적인 이야기를 재밌게 만들까, 사이다보다 더 통쾌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 형식과 전달 방식, 대화의 방법론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가령, 게임, 영화, TV, 스트리밍은 민주적 역량, 포퓰리즘의 항체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그런 식의 항체조차도 ‘사이다’ 형식으로 가져오긴 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영화 ‘기생충’은 계급 모순의 해결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거기에 영겁회귀에 가까운 깊고 무거운 절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아주 섬세한 영화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기생충’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이다 같은 성공(칸, 오스카 수상)의 탐닉인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기생충’과 같은 현실의 모순과 절망을 함께 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기생충] (2019, 봉준호). 다양한 나라별 포스터.

인터뷰를 진행하는 오늘 밤, 공교롭게 비상계엄이 터졌다. 윤석열의 이 광기는 초현실이다. 영화 장르로 치면 블랙코미디이면서 호러다. 내일은 어떤 장르로 바뀔지 예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다큐멘터리로 끝났으면 좋겠다. 그 다큐를 통해 그 상황까지 간 우리가 함께 만든 사회의 모습을 두고두고 돌아보도록 말이다.

2024년 12월 윤석열 탄핵 집회. 위키미디어 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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