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극우 공론존 비판.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할 건 사람이지 극우라는 사상이 아니다. (⏰15분)
서(序): 희생해야 할 때, 싸워야 할 때
늘 삶을 결정하는 갈림길의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대개 잘 느껴지지 않고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내 삶의 갈림길, 그 어느 한쪽으로 나는 걸어간다. 그리고 그건 항상 내가 선택하고 싶었을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다. 한 수필가는 그런 순간이라는 건 정작 그 순간이 지난 뒤에,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렇게 다시 삶을 돌아볼 때, 아 그때였구나,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장 그르니에, ‘섬’).
늘 싸워야 할 때와 안아야 할 때, 전투를 벌여야 할 때와 관용을 베풀어야 할 때, 희생해야 할 때와 투쟁해야 할 때를 구별하는 기준이 있을지 궁금해했다. 아직 나에게 그런 지혜는 없다. 앞으로도 그런 지혜는 깃들지 않을 테지. 늘 그때그때 그저 서툰 구경꾼으로 세상 소식을 접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방관하는 구경꾼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마음에 와닿는, 안타깝고 미안해지는, 그런 세상 소식이 있다.
그건 대체로 아직 소망을 품은 사람들의 죽음 혹은 희망마저 사라진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것이고, 그 반대 방향에서 더는 희망하지 않고 세상을 조소하고 조롱하며 잔인하게 구는 젊은 친구들, 그러니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내 청춘의 유적 같은 것을 바라볼 때다. 한 평론가가 말했다.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희생할 수 없고, 스스로 옳다고 믿지 않으면 싸울 수 없다고(김현).

나는 2030 남성 청년의 ‘일부’가 극우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여러 칼럼과 에세이 그리고 분석 기사를 통해 접한다. 스스로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기성세대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마르케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니까. 그 거울이 어둠을 비추고 있다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그 거울 속 어둠을 지우지 않으면 안 된다. 각자가 선택한 미래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도록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싸움, 그 방법적 사랑에 관해 캡콜드(김낙호 교수)에게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22
두 번째 트럼프의 교훈:
극우와의 공존…같은 소리하고 있네
질문∙정리: 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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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6월 19일(목) 밤에서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인트로 부분을 제외한) 본문은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미국, 긍정적 낙관의 대가… 두 번째 트럼프
극우와의 공존? 지금 한국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주제다. 미국에서도 2016년 트럼프 첫 대선 승리 후 자성의 목소리로 나왔던 이야기다. 지금은? 그 사이에 정치 환경과 미디어 환경이 꽤 바뀌었는데도 왜 아직도 주류 미디어와 정치권이 똑같은 방식의 허망한 기대를 품고 있는지… 그걸 자성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2024년에 두 번째로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에서는, ‘극우와의 공존'(에 희망적인 담론과 그런 이야기들)이 오히려 그들을 정당화하는 퇴보의 의미가 되었다. 2016년 트럼프를 뽑았을 당시에는 미국도 우리가 우익과 대화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래서 심지어 일가 친지가 모이는 추수감사절에 싸우지 말고 정치 성향 반대인 분들과 좋게 좋게 말하는 방법을 연습해보자는 취지의 ‘성난 삼촌과 대화하기‘ 게임 같은 것도 나오고 그랬다. 시골 동네 한 번씩 찾아가서 트럼프 지지 우익 지지자 목소리를 고스란히 옮겨오고.
그런데 ‘극우 삼촌’ 목소리를 들어주고 좋게좋게 대해주면 알아서들 감복하겠지 하는 희망적인 접근은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런 해맑은 낙관의 대가가 ‘두 번째 트럼프’다.


비단 언론에서 다루는 기사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데, 2021년 트럼프 내란(국회의사당 공격)에 대해 미국 사법당국은 계속 판결을 미뤘다. ‘정치 보복’으로 보여선 안 된다는 점에서 법무부는 트럼프 변호인 측의 노골적인 지연 전술을 모두 받아줬다. 그런 고상한 판단으로 결국 내란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다음 대선이 치러지고, 트럼프는 당선되고 모든 것이 유야무야되었다. 지연 없는 단호함의 중요성은 한국에서 윤석열 내란 종식에 확실하게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

극우란 무엇인가?
좀 더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극우라는 게 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이야기하시듯, 현대 정치를 좌우라는 일차원적 척도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어휘 자체로 좁혀서 말하면 “극단적인 우익”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합의한 틀을 벗어나면서까지 우익적 세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즉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민주제 헌법과 상식의 경계를 넘어서 파괴로 나가가는 것까지 허용하겠다고 하면 극우로 볼 수 있다.
흔히 극우의 개념 필요적 요소로 이야기하는 ‘폭력’과 ‘혐오’는 극우의 전유물이 아니다. 극좌도 거울 쌍처럼 극우와 유사한 방식으로 폭력과 혐오를 행사할 수 있고 역사적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단순화시키자면, 현대의 우파는 좀 더 안정적으로 동질적인 사회를 꾸려가자는 방향을 지니며, 그래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권력 분배에 대한 신뢰, 능력에 따른 차등 대우 등을 긍정적으로 여긴다. 단점은 질서라는 명분으로 불평등을 옹호한다는 것.
반면에 현대의 좌파는 사회에서 더 다양한 주체의 참여 및 결과적인 평등을 지향하며, 이를 위한 제도의 적극적 개입과 관리를 지지한다. 단점은 그런 제도를 완벽하게 설계하지 못하면 상황이 꽉 막히게 된다는 점인데, 현대 사회는 워낙 이해관계나 예상하기 어려운 변인들이 많아서 그런 설계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런 두 방향에서 공동체 다수가 합의한 민주주의의 틀을 파괴하면서까지 이상향을 추구하고자 하면, 극우는 여성이든 민중이든 소수의 목소리를 누르는 것 이상으로 폭력과 파괴 그리고 혐오로 질주할 수 있다. 극좌에서도 구(舊)체제 기득권에 대한 증오로 유사한 폭력과 혐오를 만들 수 있다. 다만 확실히 할 지점은, 오늘날 많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현상은 일방적인 극우의 득세라는 것이다. 대칭적으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미국, 극우의 퍼즐들…
미국에서 지난 십여 년 극우가 득세한 환경, 그 사회적인 실패의 퍼즐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예시고 이것들이 모든 조건이라는 건 아니다.
- 경제적 불평등: 도농 격차와 업종별 불평등이 심화했고, 사회안전망은 난해했다. 정치(인)와 기업(인)은 담합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을 뿐, 이 불평등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개선하지도 않았다.
- 공교육 실패: 정치의 실패와 기업의 독주는 공교육에 대한 재원 문제로 귀결됐다. 돈도 인력도 부실한데 심지어 커리큘럼에 대한 정치적 ‘문화전쟁’까지 툭하면 불거지니 공교육의 품질은 갈수록 후퇴했다.
- PC과 워크에 대한 반감: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으면서, 문화적 불평등 해소만 자꾸 부각되면 곱게 봐줄 사람은 없다. 정치적 기득권과 경제적 기득권은 물론이고 문화적 엘리트에 대한 반감은 이런 정서에 바탕한다. 내 절실한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으면서 성소수자와 외국에서 온 노동자 편만 들고!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들이 같은 조건에서는 경제적으로도 더 큰 불이익을 받는다는 점이나 아예 실존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은 굳이 관심사가 아니다. PC와 워크 반대에는 이런 막연한 상실과 분노가 있다. PC나 워크하는 애들은 도시에서 좋은 대학 나온 애들이네, 하는 반감까지 겹치면 결국 혐오의 재료가 된다. 학력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차이는 당연히 꽤 있지만, 소수자들 챙겨주면 내 권리를 빼앗긴다는 제로섬 사고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씨앗’이 보인다.

- 참고: PC와 워크. PC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의미로 ‘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 워크(woke)는 인종·성·성정체성 등에서 소수자가 차별받는 현실을 깨우쳤다고 칭하는 말로, 깨어 있다(wake)의 과거분사(woken)를 흑인이 흔히 ‘워크(woke)’로 불렀던 것에서 유래.
윤석열 계엄 이후… ‘민주주의 챔피언’ 한국도 별 거 없네?
박근혜 탄핵 국면 보면서 한국이 미국보다는 나은 것처럼 생각했지만, 윤석열 계엄을 거치면서 한국도 비슷한 정도로 퇴화했네? 이런 게 내 주변에 한국 상황에서 희망을 봤던 분들이 언급한 평가다. 미 국회의사당 쳐들어간 극우 폭도나, 한국 법원 쳐들어간 극우 폭도나 방향은 비슷한 것 아니겠는가. 사실 미국이 실패한 ‘퍼즐들’은 한국에도 대체로 대입할 수 있다.
- 경제적 불평등: 우선, 지금 청년층이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 아닌가. 또한 지역 “소멸” 이슈에서 보듯 대도시는 흥하고, 비도시권은 점점 더 쇠락. 특히 옛 공업 지역도시의 쇠락. 참고: 양승훈 교수의 인터뷰.
- 공교육 실패: 초중고는 한국이 미국보다는 그래도 이 분야는 선진국이다. 다만 한국은 여전히 너무 입시에 ‘몰빵’한다. 제대로 된 사회화 교육, 그러니까 민주제의 규칙과 근거 기반 합리성으로 세상의 갈등을 풀어나가는 훈련이 너무 부족하다. 사회적 배려의 방법과 기술, 함께 살기의 의미,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고 경험을 축적하는 방법 말이다. 게다가 대학 입시가 끝나면 그나마도 끊긴다. 지금 당장을 위한 스펙에 몰빵하는 사회니까.
- 반감: PC와 워크에 대한 미 우익의 반감은 한국에서 흔히 접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2030 남성의 반감과 견줘볼 수 있다. 다만 양국 모두 문화적 ‘잘난 척’에 대한 반감은 일종의 선동 효과에 가까운데, 왜냐하면 정말 정치 경제적으로 “잘난” 부자와 엘리트를 위한 정책은 오히려 우익당(미국 공화당과 한국 국민의힘)의 특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철 밟는 한국
한국과 미국은 정치 환경으로는 사실상 양당제 체제라는 점, 그리고 미디어 측면에서는 전통(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신뢰도가 아주 낮아진 환경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미국은 이미 2016년 무렵, 한국은 2024년 상식적인 보수의 범위를 넘어서는 극우가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런 생각이 자라난 뿌리와 환경으로서의 미디어 토대가 한국은 온라인 커뮤니티 위주, 미국은 소셜 미디어 위주이지만, 그 양상은 비슷하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극우적 성향을 띠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거나 ‘트리거'(촉진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일상적으로 불만이 축적하고, 그런 축적된 불안과 불만이 허무주의의 길을 열어 사람들을 극우로 이끈다.
다만, 앞서 말했듯, 그 개개의 사람들이 품은 세계관에 따라 극우나 극좌로 나뉠 뿐인데, 좌파적 세계관은 이런 갈등 상황에서 권력 게임이랄까 대중 선동에서 극우보다는 좀 매우 불리하다. 현존하는 세계를 파괴하더라도 그 대안으로서 좀 더 정교한 세계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좌파의 숙명이다.
그런데 우파적 세계관에서는 그런 거 필요 없다. 그저 이 지긋지긋하고 위선적인 세계를 파괴하는 것 그 자체에 좀 더 ‘몰빵’하는 경향이 강하다. 파괴된 세계 이후의 세계는 뭐 대충 아름다운 옛날처럼 돌아가면 되겠지 뭐… 그래서 미국 극우의 구호가 바로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점에서 더 ‘사이다’스럽고, 대중적 선동을 위한 게임에서 유리한 측면이 있다.
이런 차이는 단순히 사람들의 교육 수준 차이라고 볼 수는 없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사회적 상상력의 결핍, 사회 체제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 부족이 누적되어 온 환경으로 본다. 그런 사회에서 우파적인 파괴, 그런 ‘사이다’로 상징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호소력이 더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본다.

무엇을 할 것인가: 1기 아니다, 3기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강성현 교수는 설명가능한 감정으로 고착되기 전에 이미 실존하는 정서적 신호라는 의미의 ‘정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청년 극우를 분석한다. 나는 훨씬 단순해서, 한국 극우가 그냥 감정으로 정립된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실제로 이들은 그런 감정의 결사체를 커뮤니티로 구성해 잘 놀고 있다. 거기에 더해 그런 감정을 무기화해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 감정을 잘 모른다고 하면… 강 교수의 취지는 이들에게도 설득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잘 이끌어 보자는 의미로 읽히는데, 나는 좀 더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 참고 기사: ‘압도적 심판’이 남긴 복잡한 질문, 이대남 이준석 1위를 어떻게 볼까.(강성현, 슬로우뉴스, 2025.06.04)
현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인 진단과 처방이 가능하지 않다. 인체의 심각한 병에 비유하자면, 3기 정도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네요, 몸조리 잘 해봅시다’ 하는 느낌이랄까. 나는 3기쯤, 그러니까 아주 급박한 순간이며 수술과 같은 대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앞서 정의했듯 극우는 민주제를 깨는 것을 감수하기에, 민주제 틀 안에서는 공존할 수 없다.
관건은 극우라는 ‘사상’과 극우 사상에 빠진 ‘사람’을 분리해서, 사상은 몰아내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 두는 일이다. 물론 아주 어려운 과제다. 두 가지가 얼마나 분리하기 힘들 정도로 공고하게 엮여 있는지,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졌는지에 따라서 병세를 진단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과제는 교육, 특히 토론과 대화의 토대 위에서 다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개별적인 토론과 대화를 주력으로 삼을 수 있는 시기를 지났다. 토론의 시도가 위선적 교조와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근거에 기반한 대화 이어가기보다는 단편적 조롱의 방백이 적극적으로 선택되는 매체 환경 아닌가. 그렇기에 더 단호한 접근으로 금지(‘수술’) 또한 이야기해야 할 때다.
극우적이라고 해도 사상을 형법적으로 제재하면 안 되지만, 그 사상이 표출되었거나 표출될 만한 긴급성이 인정될 때는 즉각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 사상을 품는 것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상을 표방해 온 사람이 공직에 올라간다고 하면 자동으로 퇴출하는 방식의 제도나 사회적 금기를 마련해야 한다. 극우적인 사상을 재료로 상거래를 한다면 그것도 금지해야 한다. 가령 극우 유튜브 컨텐츠로 수익 올리는 것 말이다. 슈퍼챗 수입 몰수라든지.
물론 단호한 대처라는 것이 금지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까 말한 공교육 개혁 같은 것도 동시에 추구해야 할 여러 처치법 가운데 하나다.
“입시교육과 인성 교육은 양립이 불가능합니다. 경쟁을 시켜야 하니까요. 경쟁 교육은 그 자체로 반인성교육이예요. 친구를 이겨야 된다고 계속 가르치면서 뭔 인성 교육을 하겠어요.”
최선정 전교조 정책기획국장, 슬로우뉴스 인터뷰 중에서
물론 민노씨가 지적한 전교조 선생님 말씀처럼, 입시교육 하에서 전인교육, 인성교육은 불가능하다. 결국 한국에서 교육은 노동의 계급∙계층화, 지역 소멸, 전반적인 사회적인 전반적인 성과를 결정짓는 첫걸음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극우에 빠진 내 아들 구하기 식’ 일대일로는 교육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국가적인 차원의 접근,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하고, 배경 학습이 필요하며, 교실 안에서 현대 사회 시사 이슈를 논쟁적이라는 이유로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더 적극적으로 토론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김문수와 김대중 그리고 전투적 민주주의
가령, 지난 대선에서 김문수 후보는 어떨까? 허용해야 했을까?
김문수라는 여당 대통령 후보가 반민주적 내란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어중간한 태도로 윤석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못한다면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현재 실정법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런 입법도 필요하다는 거다. 물론 이런 민주주의를 위한 입법은 민노씨 지적처럼, 역사적으로는 ‘전투적 민주주의’의 딜레마 상황을 낳기도 했다. 즉, 민주주의를 막기 위한 수단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정권의 수단으로 변질하곤 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는데, 김대중 정부는 장기 양심수를 가석방해 주는 절차로 ‘준법 서약서’라는 것을 사용했다.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겠지만, 법은 지키겠다고 서약하라는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현실 정치의 논리로는 말이 되지만, 체험적으로는 내가 품은 이 사상이 반헌법적이라고 인정하는 ‘사상의 자유’에 반하는 서약이 되기에 정작 양심수들에게는 많은 반발을 샀다. 이렇듯 사상과 연결된 규제라는 것은, 실제로 적용하려면 굉장히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좀 더 ‘현재’ 기준으로 현실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극우 유튜브를 규제한다면 어떻게 규제할 수 있을까? 이런 경우에는 기계적 기준을 가져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직접적 폭력을 선동하는 경우
- 폭력 행동 결집을 선동하는 경우
- 근거 없는 음모론과 낭설에 대한 정정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이와 같이 어느 정도는 기존의 국내외 미디어법의 테두리에서 접근할 수밖에는 없을 테고, 다만, 세부적인 기준은 조심스럽게 가져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극우와 공존, 미국식 낙관주의의 실패
처음에 이야기했듯, 2016년 대선 직후부터 미국 주류 언론은 ‘극우와의 공존’ 아이디어를 참 부던히도 추진했다. 트럼프 지지파 이야기도 좀 들어봐 주자, 뭐 그런 접근이었고,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같은 번듯한 레거시 미디어들이 농촌 지역 사람들도 인터뷰하고, 러스트 벨트 실업자들도 인터뷰하고 그런 식으로 갔다.
그런 안이한 접근에서 다시 한번 대히트했던 것이, 그 성공에 힘입어 결국 정치가도를 밟아 현재 부통령까지 된 JD 밴스의 ‘힐빌리의 노래’다. 앞선 비유로 돌아가자면 질병 1기 같은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상황 판단과 접근이었고,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그런 상상을 품고 있는 미디어가 있다는 게 문제다.

가령 올해도 뉴욕타임스는 일반 유권자 7명을 정기 인터뷰 방식으로 추적 조사했고, 이 사람들의 의견을 가감 없이 들려주는 특집 코너를 냈다. 그런데 그 유권자 집단은 수상쩍게도 트럼프 지지자 비중이 훨씬 높았고. 어쨌든 그렇게 목소리를 들어주고 또 들려주는 노력은 지난 8년 동안 좀 성과를 거두었을까? 미국 우익의 극우화가 제어되기는커녕, 더 공고하게 결집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모론은 더 강화했고, 퇴행했다. 지난 대선을 얼룩지게 만든, ‘아이티 난민들이 당신 애완 고양이를 잡아먹는다’는 괴담이 대표적이다. 아니, 부통령 후보가 직접 뿌리고 다녔으니 괴담도 아니고 그냥 인종차별적 명예훼손이지만.
이들 미디어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병은 3기인데, 처방은 ‘식사에 소금 좀 덜 넣으시고 하루 십 분만 걸어보세요’라고 처방한 격으로 본다. 지금은 목소리를 들어주는 방식보다는(이미 알아서 목소리 잘만 내고 있다) 당장 필요한 전방위적인 단호한 대처를 모색해야 한다.
단호한 대응과 대처, 그 ‘선(기준)’
다만 단호하게 대응하고 대처한다고 했을 때 그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섬세한 조율이 필요하다. 참조사례로 항상 떠올리는 것은 미국에서 ‘N 워드'(흑인 비하 표현)를 금기시하는 것이다. 법으로서 ‘N 워드’를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단어를 잘못 썼다가는 활동이 금지되고, 기업에서 쫓겨나는 사회를 만들었다. 문화적으로 좀처럼 통제되지 않는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력으로 그런 사회적인 ‘터부’를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극우를 금지하자는 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도 이보다 훨씬 더 큰 프로젝트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작은 것들, 구체적인 것들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다만 사상과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을 쉽게 내다버릴 수는 없기에, 특정 인물, 특정 미디어 채널을 막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컨텐츠 규제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령, 일베를 폐쇄할 것이 아니라 개별 게시물 단위에서 구체적이고 강력한 댓가를 치루게 하는 식이다. 이를 위해서는 형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민사적 접근이 필요하고, 그걸 수월하게 할 법적 정비가 필요하고, 사회적 손실을 손해액으로 계산할 수 있는 정교한 척도도 필요하다.
당연히 이런 입법은 현실적으로 아주 복잡하겠지만, 그런 방향성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받아주면 좋겠다.

두 번째 기회와 댓글 싸움의 정치
극우적 사상으로 벌인 행위를 단호하게 처벌하되, 사람은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세컨드 챈스’,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퇴로가 막히면, 더욱 강력한 극단화밖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대단한 발상은 아니고, 그냥 현대 문명사회의 교정 제도의 근간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온라인 댓글의 세계에는 그런 거 없다. 커뮤니티, 소셜에서의 분위기는 극단적인 조롱으로 가득하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고, 모두 사회에서 퇴출시켜야 할 것처럼 말한다. ‘저 사람만 이기면 돼, 여기에서만 이기면 돼’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거다. 나의 화려한 막말 덕분에 상대의 말문이 막히고, 내가 마지막 댓글을 달면 이긴 거니까. 마음껏 조롱하고 ‘이겼지롱~! 내가 말싸움에서 이겼지롱~!’ 하는 거다. 실제 사회는 그딴 식으로 돌아가면 곤란하다. 그런데 그런 댓글 조롱 잔치가 사회적 정당성을 얻는 교두보가 생긴다면? 심지어 그 조롱이 극우적 세계관을 포용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이준석 ‘현상’에 대한 우려다.

앞서, 극우로 빠지기 좋은 조건 가운데 하나로 내가 당하는 불평등이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고 해결되지 않는 불만을 이야기했다. 이것은 특히 실질적인 양당제 정치체제에서 작동하기 쉬운데, 정치가 내 삶의 고민을 해결해 주지 않으니 이 당도 싫고, 그 당에 반대한다는 저 당도 싫은 것이다.
그래서 대안 세력을 갈구하는데, 그건 새로운 사회체계에 대한 상상력과 학습을 요구하는 좌파보다는 그냥 대충 쉬운 우파 정당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도 대대로 제3당은 살짝 보수 쪽으로, 하지만 실용성을 강조했던 쪽이 득세한 배경이다. 정주영, 문국현, 안철수…이들 계보의 공통점이 바로 그 실용적 보수의 느낌이고, 특히 기업인으로서의 성과를 내세웠다. 진보정당인 구 민주노동당이 제3당으로 인정받은 2004년만 예외인데,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이라는 특수성이 워낙 강력했고.
올해 한국 대선에도 그 공식이 존재한다. 이준석이다. 이준석은 기업인은 아니지만, 중도 보수의 입지를 가지고, ‘하버드’라는 학벌을 성공한 기업인의 성취 대신 채워 넣고, ‘이재명 김문수 같은 아들을 원하십니까? 저 같은 아들을 원하십니까?’라는 식으로 어필했다. 정주영, 문국현, 안철수 정도의 정책적인 연구나 고민도 없이 사실상 문화적 극우의 아이디어를 선거전에 접목한 경우다. 물론 ‘대안 세력’을 내세우며 극우하는 게 딱히 특이한 것은 아니다. 독일의 네오나치 정당 AfD는 정당 제호가 말 그대로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일 정도다.

결(結): 미국 전철은 밟지 말자
미국이 먼저 망해봤다. 한국이 더 선진국이지만, 전철을 밟지는 말자. 1기라고 생각하고 여유 부리지 말자. 병의 진행으로 보면 3기라고 생각하고 당장 수술대에 올리자. 아이디어? 그동안 슬로우뉴스에서 이야기한 내용도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디어 쪽에서는 내가 전문성이 있으니 좀 더 제안할 수 있고, 노동과 경제 전반에 관해서는 이상헌 박사가 제네바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김도연 기자의 인터뷰도 청년 이슈의 쟁점을 담은 좋은 콘텐츠로 쌓이고 있다.
끝으로 한 번 더 강조한다.
함께 살아야 할 건 사람이지 극우라는 사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