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 칼럼] 1% 진보 정치와 30% 혐오의 정치학, 차별과 혐오 넘을 민주주의 공적 언어의 복원이 필요할 때. (⏰12분)
1. 서(序): 정권 교체를 넘어, 민주주의의 경계를 다시 그리다
2025년 제21대 대통령 선거는 단순히 한 명의 대통령을 새로 선출하는 정치 이벤트가 아니었다. 이 선거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소추안 가결·인용이라는 전대미문의 헌정 위기를 배경으로 치러졌다. 비상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의 극단, 이어진 탄핵과 검찰 쿠데타 시도의 잔재, 혐오 정치의 총력전이 엎치락뒤치락 전개되는 와중에서, 유권자들은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어떤 헌정 질서와 사회적 가치, 정치 감수성을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투표장으로 향했다.

그 결과 이재명 후보는 전국 득표율 49.4%를 기록하며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2%,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8.3%,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0.98%를 기록했다.
79.4%라는 기록적인 투표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적 정동의 표현이었다. 이번 선거는 한국 민주주의의 경계와 가능성을 다시 써 내려간 집단적 감정의 정치적 실험장이었으며, 각 후보의 득표율 그 자체보다 그 이면에 잠재한 사회의 균열과 저항, 희망과 분노의 지형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 ‘정동’이란?
① 개요
정동이라는 건 감정이 되기 이전의 상태다. 이름 붙이기 전, 내가 뭘 느끼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뭔가 분위기가 전염되듯 퍼지는 느낌. 그게 바로 정동이다.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이미 몸이 반응하고, 분위기에 휘말리는 그런 에너지 흐름이다.
그런데 정동은 단순히 감정 이전의 비표상적 상태만이 아니라, 이미 표상된 감정이 다시 집단화되고 탈주체화되며 전환되는 상태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정동은 감정의 전 단계이자 감정 이후의 에너지 순환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 양방향적 개념이다.
그래서 정동이란 단지 ‘감정’의 전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정동은 “화가 난다”는 말처럼 명확하게 표현되기 이전의 흐름이며, 종종 사용자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퍼져나가는 에너지의 집단적 조직화다. 예컨대, 한 공간에 들어서면 이유 없이 불편하거나 긴장되는 감각처럼, 펨코에서의 ‘억울함’, ‘배신감’, ‘분노’는 이름 붙여지기 전부터 이미 커뮤니티에 공기처럼 퍼진 정동적 분위기로 존재한다.
더욱이 이러한 정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구체적인 감정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다시 새로운 정서적 흐름으로 바뀌어 퍼져나가기도 한다. 즉, 정동은 감정이 생기기 전의 흐름이자, 이미 생긴 감정이 다시 집단적으로 재조직되어 다른 방식으로 확산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② 감정과 비교
감정은 “화가 났다”, “억울하다”처럼 내가 뚜렷하게 느끼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라면, 정동은 그런 감정이 되기 전, 이미 뭔가 이상하다거나 불편하다는 식의 막연한 감각이다. 예를 들어, 한 공간에 있으면 이유 없이 긴장되거나 불안해지는 그런 상황이다.
③ ‘정동 정치’ (극우 정치의 맥락에서)
극우가 정동을 다룬다는 건, 사람들이 스스로 왜 분노하는지도 모른 채 함께 분노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조직한다는 뜻이다. ‘나는 뭔가 억울하다’는 감정이 되기 전부터 이미 ‘분위기상’ 누구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 그걸 만들고 퍼뜨리는 게 정동의 정치다.
극우의 감정 동원 전략은 유례없는 혐오 발화를 동반했고, 법률전과 정보전, 가짜뉴스와 반지성주의가 공론장을 침식했다. 그러나 동시에 진보정당의 복귀, 사회운동의 재결집, 다층적인 유권자의 선택은 이 선거가 단지 무너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 감각의 형성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민들의 집단적 감응의 장이었음을 보여주었다. 2025년 대선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선거가 단지 선거로 끝나지 않는” 역사적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2. 지역별 정치 지형의 입체화: 감정의 지도 위에서 민주주의를 선택하다
2025년 대선은 단순한 지역주의의 반복이 아니었다. 각 지역은 자신에게 축적된 역사적 경험, 계급적 현실, 정치적 상처와 회복의 열망을 고유하게 표현했고, 이는 단지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감정의 지도’로서의 정치 공간을 형성했다. 비상계엄 선포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파괴 사태, 혐오의 정치와 이에 대한 저항, 그리고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갈망은 지역별로 다르게 각인되었고, 유권자들은 그 감정의 언어로 투표했다.
서울은 이질적 정동이 충돌하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전체 득표율 기준으로 이재명 후보는 47.1%, 김문수 후보는 41.5%, 이준석 후보는 9.9%, 권영국 후보는 1.3%를 얻었다. 수치만 놓고 보면 이재명 후보가 앞섰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공존했다. 강남 3구와 용산구에서 김문수 후보가 이재명 후보를 앞질렀고, 강남구에서는 무려 56.6%를 얻었다. 관악구에서 이준석이 12.5%를 기록한 것도 눈길을 끈다. 서울대 등 서남권 대학의 위치성과 신림동 등 청년 밀집 지역의 특성과 맞물려, ‘기성 진보’에 대한 불신과 반감이 ‘이준석식 도전’에 일부 투사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이제 하나의 정치 공간이 아니라, ‘강남성과 관악성’이라는 감정의 파열음이 공간화된 내전의 현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경기도와 인천은 보다 명확한 정치적 재편이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경기도에서 이재명 후보는 52.2%의 득표율로 과반을 넘겼고, 김문수는 37.9%, 이준석은 8.8%에 머물렀다. 인천의 세부 수치는 이보다 약간 낮았지만, 계양·부평·미추홀 등 중심 지역에서는 이재명이 과반을 확보했다. 윤석열 정권 아래에서의 헌정 위기와 무능에 대한 불신, 그리고 이재명이 보여준 ‘실용적 복지와 행정 경험’이 수도권 유권자들의 실질적 삶과 결합된 결과였다. 수도권 외곽의 유권자들은 서울로 출퇴근하면서도, 정치·행정·문화적으로는 주변화된 ‘비서울성’을 일상에서 체감하고 있다. 그들은 ‘기회의 격차’를 정치적 감정으로 치환했고, 그 표심은 이재명에게 집중되었다.
대전은 유일하게 전국 평균 득표율과 거의 일치하는 결과를 보여주며, 다시 한 번 ‘정치적 바로미터’로서의 위상을 확인했다. 이재명 48.5%, 김문수 40.6%, 이준석 9.8%라는 수치는 각각 전국 평균(이재명 49.4%, 김문수 41.2%, 이준석 8.3%)과 유사하며, 충청권이 갖는 중도적 유동성과 정책적 판단 중심의 실용적 표심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대전이 특정 진영에 고착되지 않고 매 선거마다 다른 선택을 통해 민심의 방향을 제시해왔다는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울산은 여전히 보수 정당의 강세가 두드러졌지만, 균열의 조짐도 함께 감지되었다. 김문수는 47.6%로 1위를 기록했지만, 이재명이 42.5%로 바짝 추격했고, 이준석도 8.5%를 얻었다. 이는 영남 보수권 내부에서의 세대 간 균열, 노동자 계층의 진보적 투표 가능성, 젠더 이슈에 대한 복합적 반응이 동시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울산은 오래된 보수와 새로운 갈등의 교차점이며, 정동의 접경지대다.
제주는 가장 진보적인 지역 중 하나로, 이재명이 54.8%를 얻으며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김문수는 34.8%에 그쳤고, 이준석은 8.8%, 권영국은 1.5%로 전국 평균을 상회하는 지지를 확보했다. 이는 제주가 생태, 분권, 이주, 젠더 등의 이슈에 있어 일관되게 진보적 정치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중앙정치의 극단적 양극화와는 다른 방식의 정치적 선택을 이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2025년 대선에서 드러난 지역별 투표 양상은 단순한 지리적 구획이 아니라, 각 지역의 역사적 기억, 계급 조건, 혐오와 민주주의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 교차하며 형성된 감정의 지형이었다. 서울의 내부 분화, 수도권의 실용주의, 충청권의 판단 중심성, 영남의 균열, 제주의 감수성은 모두 ‘지역’을 하나의 정치적 정동 단위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의 지도는 단순한 선거 결과 분석을 넘어서, 앞으로의 한국 정치가 어떤 지형 위에서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기초 자료가 된다. 지역은 더 이상 고정된 투표 블록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각기 다른 상처와 기대, 분노와 회복의 정동이 투영된 복합적 공간이다. 앞으로의 정치는 이 감정 구조를 세밀하게 읽고, 각 지역의 감정적 언어를 이해하며, 그 언어에 응답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특히 수도권 외곽, 충청, 울산, 제주처럼 감정과 구조가 중첩되는 지역에서는 더욱 정교하고 공명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2025년 대선은 단지 후보를 뽑는 정치 이벤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의 지형이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정치 공간을 다시 구성한 사건이었다. 정치는 이제 단지 이념과 정책의 설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정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는, 그 어떤 전략도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이번 대선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3. 세대별 투표 행태와 젠더 분화: 2025 대선의 정동 정치와 그 균열들
2025년 대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세대별, 젠더별 투표 행태의 극명한 분화였다. 이는 단순한 정당 지지의 차이를 넘어, 이 사회가 경험해온 교육, 감정, 사회화 방식, 그리고 각 세대가 체화한 정치적 트라우마와 희망의 구조가 어떻게 균열을 형성하며 드러났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2030 세대, 그중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투표 선택은 이번 선거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심층 구조를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방송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의 경우 이준석 후보에 대한 지지가 37.2%에 달해, 이재명 후보(24%)나 김문수 후보(36.9%)보다도 높게 나타났다. 이는 같은 연령대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20대 여성은 이재명 후보에게 58.1%라는 과반의 지지를 보냈으며, 이준석 후보에 대해서는 단 10.3%만이 선택했다. 이 성별 간 투표 행태의 간극은 어느 세대보다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었고, 이는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가 아닌, 정동적 감각과 사회화 경험의 총체적 결과로 해석되어야 한다.
30대 역시 유사한 구조를 보였으나, 20대보다는 분화가 다소 완화되었다. 30대 여성의 이재명 지지율은 57.3%로 20대 여성 58.1%와 거의 유사했지만, 30대 남성은 이재명(37.9%)과 이준석(25.8%), 김문수(34.5%) 사이에서 보다 분산된 지지를 보였다. 특히 30대 남성은 20대 남성보다 이재명을 선택한 비율이 더 높았으며, 이는 IMF 시기를 어린 시절에 겪고 자산의 중요성과 불안정을 체화한 세대의 보수적·실용적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공정’에 대한 감수성과 ‘불평등’에 대한 회의가 교차하는 경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분화의 배경에는 단순히 정치적 선호 이상의 삶의 궤적이 존재한다. 이하나의 에쓰노그라피적 통찰은 이 지점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조명해준다. 2000년대 이후 출생한 청년 세대, 특히 경기도 등 진보 교육감 지역에서 성장한 이들은 어린 시절 무상급식, 민주시민교육, 창의적 체험활동 등을 경험한 세대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평등한 교육 환경을 접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성별에 따라 다른 정동 구조를 체화했다. 여학생은 교사 중심의 수업 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 학업 수행에서도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한 반면, 남학생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지적받는 존재’로 경험되었다. 이는 남성 청년들 내부에 피해감정과 배제감을 심화시키는 구조로 작동했고, 나아가 학교 밖 정치 사회화의 장에서 ‘억눌린 남성성’이라는 형태로 정치적 전이 양상을 보이게 된다.
더욱이 이들이 접속한 디지털 공간은 페미니즘에 대한 저항과 혐오가 구조화된 영역이었다. 초등 고학년부터 유튜브, 네이버 웹툰, 게임 커뮤니티를 통해 관계를 형성한 남학생들은, 이 공간 안에서 ‘관계’보다는 ‘경쟁’과 ‘겨루기’로 자신을 증명했다. 반면, 여학생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감정과 애정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런 디지털 정동의 차이는 이후 이들이 접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감정적 기반이 되었다. 특히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2018년 설리·구하라의 죽음, 2019년 페미니즘 백래시의 제도화 과정은 이러한 젠더 갈등을 사회화 초기부터 체험한 세대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처럼 10대 후반부터 20대로 진입한 청년 세대는 디지털 정동의 방식에서부터 극단적으로 분화된 경로를 밟아왔다. 남학생들이 주로 진입한 유튜브, 웹툰, 게임 커뮤니티는 이후 에펨코리아, 디시인사이드 등 게시판형 서열 커뮤니티로 이어지며, 냉소와 타자화의 정동을 구조화한 공간으로 전이되었다. 반면 여학생들이 형성해온 감정 중심적 소셜미디어 사용은 트위터(X), 인스타그램, 여성 커뮤니티 등을 통해 공감과 회복의 언어로 강화되었다. 이 감정 회로의 분리는 곧 정치적 메시지를 수용하는 방식에서도 이질적으로 나타났고, 각 진영의 지지 후보 선택 역시 이 정동의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플랫폼의 정치화는 단순한 여론의 장이 아니라, 감정의 지도 위에서 민주주의를 재편하거나 붕괴시키는 거대한 작용소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신진욱 교수는 이러한 2030 남성층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극우화냐 보수화냐”라는 단순 프레임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에 따르면, 이들의 정치적 정동은 비극적 현실의 구조와 감정적 사회화의 결과이며, 보수화라기보다 감정적 탈주선과 분열의 표현이다. 즉, 이들은 전통적 의미의 ‘기득권 수호’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느끼는 배제와 불신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보수적 선택을 하고 있다. 그는 민주당과 진보정치가 이들을 낙인찍기보다는, 감정의 지형과 분열을 이해하고 포섭하는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30 남성층에서 이준석과 김문수에 대한 지지가 고르게 분산되거나 높았던 것은, 단지 그들의 공약이나 이념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민주당이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 ‘위선’, ‘위계의 질서’를 체현한다고 인식되기 시작한 점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공정 담론의 혼란, 부동산 폭등, 성비위 문제, 성평등 교육에 대한 혼란과 후퇴, 그리고 무엇보다 진보 정치가 이들을 포섭하지 못하고 이탈시켰다는 점에서, 청년 남성들은 민주당을 거부했다. 중요한 것은 이 거부가 단지 보수적 회귀나 유튜브에 휘둘린 결과가 아니라, ‘정당한 주류로부터의 배제’에 대한 정동적 반응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민주당을 불신하고, 오히려 아웃사이더로서의 이준석에게 감정적 동일시를 보냈다. ‘노인들에게 구박받는 이준석’, ‘정치 엘리트에게 탄핵당하는 윤석열’에 대한 지지는, 실제 권력 여부와 상관없이 감정적으로는 약자의 위치에서 출발한다.
반면, 2030 여성층은 민주주의, 복지, 안전, 평등에 대한 일관된 지지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세월호와 박근혜 탄핵을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와 회복의 정동을 체화한 세대였다. 이재명 후보가 가진 복지정책 경험, 성평등 언어, 그리고 위기 대응에 대한 메시지는 이들에게 신뢰를 주었다. 이처럼 여성 유권자들의 정동은 보호와 회복의 감각에 기반했으며, 이준석식 혐오 정치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여성 유권자들 내부에서도 ‘반이준석’ 연대는 이념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며 경험적인 형태로 구축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이러한 세대별·성별 분화는 단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정당 정치가 회피해온 교육, 감정, 젠더, 계급의 복합적 교차점이며, 향후 진보 정치가 반드시 포섭해야 할 균열선이다. 특히 진보 진영은 30대 남성이라는 정동적 회색지대에 대해 더 세밀한 이해와 설득이 필요하다. 이들은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직관을 갖고 있으며, 민주당의 위선적 태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동시에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자산 축적의 절망 속에서 현실주의적 정치로 쏠릴 위험이 크다. 이들에게 ‘정의’와 ‘공정’은 단순한 가치가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며, 진보 정치는 이제 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삶의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2025년 대선은 세대와 젠더에 따라 갈라진 정동의 정치적 지형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선거였다. 정치는 이제 이 감정의 분화를 단순히 ‘갈등’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그 안에서 형성된 감각적 현실의 반영으로 이해해야 한다. 진보 정치의 과제는 이제, 이 감정의 지도를 따라 다시 사회적 신뢰와 민주적 상상력을 재구성하는 데 있다.
4. 혐오 정치의 제도화와 민주주의 언어의 재구성
2025년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의 언어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으며. 그 언어를 다시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중대한 시험대였다. 혐오 정치는 더 이상 변방의 정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정치의 감정적 기반이자, 선거 전략의 한 형태이며, 무엇보다 정당 정치 내부로 제도화된 정치 기법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더 이상 극우 유튜버나 청년 남초 커뮤니티에서만 발생하는 국지적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선 국면에서 혐오 정치가 공개적으로 유세장에 출현하고, 후보 토론에서 의도된 상처와 조롱으로 재현되며, 실제 투표율로 전환되는 정당 지지율로까지 제도화되었을 때, 우리는 혐오 발화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의 언어가 어떤 균열을 겪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된다.
가장 직접적인 예는 이준석 후보의 전략이었다. 그는 ‘직접적인 혐오’가 아닌 ‘간접 인용’이라는 화법을 통해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는 식의 회피 전략을 반복적으로 구사했다. 대표적인 예가 ‘젓가락’ 사건이다. 민주주의의 규범적 언어는 정중함이나 토론의 형식으로만 보장되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타자를 배제하거나 조롱하지 않고도 정치적 차이를 주장할 수 있는 공존의 문법, 즉 공적 언어(public language)의 존속 여부이다. 이준석의 방식은 이 공적 언어를 비웃는 데 성공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진정성과 솔직함으로 포장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도그 휘슬(dog whistle)’, 사회심리적으로는 ‘디지털 가스라이팅’이 결합된 이 수사학은 기존 정치 언어가 가식적이고 답답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대안처럼 제시되었고, 조롱과 분노를 표현의 자유로 오인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이때 민주주의 언어는 그냥 무기력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혐오 정치의 조력자로 기능했다.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의 법률전쟁(lawfare)이 ‘법적 꼼수’의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언어를 뒤틀었다면, 대선 국면에서는 이준석식 디지털 수사학이 공론장 자체를 냉소와 분노로 채워버렸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언어가 윤리적 책임 없이 반복될 수 있었던 구조다. 언론, 법원, 정당 모두 이 파괴된 언어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후보 토론 중 젠더 혐오적 발언, 지역 감정 조장,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롱, 심지어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희화화조차도 단지 ‘유감’ 수준에서 넘겨졌다. 공적 언어를 복구하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할 책무를 가진 정치 세력들은, 오히려 방관하거나 침묵함으로써 이 언어의 붕괴에 일조했다.
그 결과, 유권자들은 감정적 동일시를 기준으로 정당을 선택하게 되었고, 그 감정의 기저에는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젊은 남성층 유권자들은 ‘기득권 진보’에 대한 불신과 민주당의 성평등 언어에 대한 반감을 ‘이준석식 직설’에 투사하면서, 혐오를 정치적 진정성의 한 표현으로 수용했다. 실제로 20대 남성의 이준석 지지율이 37.2%에 달한 반면, 여성의 지지는 단 10.3%에 그쳤다는 점은 이 언어 전략이 얼마나 깊은 성별 정동의 분화를 야기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과 진보정치는 초기 언어적 대응을 실패했다. 민주당은 선거 기간 동안 ‘균형 있는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젠더 이슈와 혐오 발화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규범 언어는 더는 신뢰받지 못하는 형식만 남긴 채, 혐오를 말할 자유와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이제 진보정치, 특히 민주당은 이러한 언어의 실패 앞에서 분명하게 정책으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제도적 권력을 다시 쥐었다 하더라도, 언어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꾸로 정치 혐오를 심화시키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민주당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하나는 제도 내부에서의 언어 복원, 즉 헌법적 가치와 시민권 담론을 탈가식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예컨대 젠더 이슈나 소수자 권리 문제에 있어 중도적 균형을 내세운 애매한 언설은, 오히려 이슈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를 낳았다. 다른 하나는 감정의 지도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재호명이다. 20대 남성의 감정 구조, 지역별 억울함, 기득권 프레임에 대한 불신을 단순히 극우로 돌려버리는 대신, 그 감정을 비가시화하지 않고 민주주의 언어 안에서 재서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 스스로가 그동안 어떤 식의 언어적 배제를 수행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혐오에 침묵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말만 정중했던 태도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진보정치 역시 다른 의미에서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번 대선에서 권영국 후보는 1%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11억 후원금’이라는 상징적 에너지는 분명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윤리적 정당성만으로는 확장되지 않는다. 진보정치가 혐오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의 새 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젠더, 기후, 노동, 지역의 언어를 수동적으로 복사하지 않고, 감정과 현실을 연결하는 ‘공적 언어의 감각화’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언어는 단지 의회에서가 아니라, 청년의 유튜브, 학부모의 커뮤니티, 거리의 포스터와 뉴스 댓글 속에서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맞는 말’이 아니라, 다시 말하고 싶어지는 말, 다시 연결하고 싶어지는 감정, 다시 기대해도 되는 정당성이다.
결론적으로, 혐오 정치의 제도화는 기존의 민주주의 언어가 감정의 흐름을 붙잡지 못했을 때 벌어진 균열의 결과다. ‘말은 정중했으나 삶은 무시했던’ 민주주의 언어는 신뢰를 잃었고, 그 자리를 조롱과 공격, 간접 인용의 교란 언어가 차지했다. 지금 민주주의가 마주한 과제는 언어의 품격 이전에 언어의 신뢰, 타자의 배제 없는 감정의 조직화, 그리고 다시 말하고 싶은 공적 언어의 발명이다. 민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이제는 혐오 이후의 언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실질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할 시간이다.
쥐닭이 참 잘못하면 인생 종칠 수 있는 내란 빼고 할짓은 다한듯
걔들은 그냥 그게 메뉴얼인가 싶음 작은정부, 참사, 쿠데타, 몰래 눈먼돈으로 크게 해먹기 누가 일관적으로 시키는지 참
뻔히 그 대가리가 바다건너 어딜거 같단 생각이 들긴한데
ㅡ이 선거를 가볍게 여기는것중에 일제강점부터 조중동 이 매국매체가 그렇게 색깔로 피곤하게 갈라대니까
정치나 사회문제 자체에 알러지 내는 나라가 된다 싶음
툭하면 편따지고 빨갛니 파랗니 넘어가니 토론은 커녕 대화도 안되는걸
그렇게 가정이나 교육에서부터 싹을 잘라버리는데 어디 민주정의 국민이 생겨나겠냐 싶음ㅡ
게임도 그러함 반유료가 더 최악임 자산격차에 따른 비하자위를 거기서 하라고 일부러 반유료하는 회사도 있고
아무말도 안하는데 전체채팅이라는 유저전체에 반 강제적으로 노출되는 곳으로 더러운 배설이 지속되는 곳도 있슴 아니면 그런곳마다 도배질하는 인간들이나… 아얘 유료로 출시하게 유도하면 그 안에 확률형 도박성도 줄이고 그런 배설 노출도 줄어들지 않을까 싶음ㅡ 유저없다고 찡찡대면 AI도입해버리라고 하고, 일자리 줄이는게 아닌 부분에 한해 힘들대면 다 도입해보는것이 어떨까 싶음ㅡ 차피 근데 게임도 비슷한 게임이 양산되는 시기라서 무조건 왠만하면 도입해야할 때가 된듯 함 근데 이제 그 배설을 이제 AI가 받고 세뇌되려나ㅡ
게임업계 매출을 과거의 괴상한 사회에서나 가능한 격차자위질로 벌었던걸 모두가 인정하고 바뀌어야 한다 생각함 그에 관련한 커뮤니티도 싹 정리해버리고 관리자 처벌강화해서
어차피 앞선것처럼 경쟁 심화로 망하게 되있는데 이런다고 망하면 진작 망했어야 하는거고 살면 그 지독한 경쟁에서도 살만한 뭔가로 잘 살겠지싶음ㅡ 다만 그것이 민주정에 영향을 주는 통로가 되서는 안되는 것이여야하고
세심하게 쓰셨는데 내용에 반복되는 오류가 있어요. 20대 여성의 이준석 득표율의 10%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9%는 권영국 후보의 득표율이에요.
은 전혀 다른이야길 해버렸네요
치밀한 분석입니다. 잘 긁어주고 계세요
기저에 깔린것까지 박박
“실제로 20대 남성의 이준석 지지율이 37.2%에 달한 반면, 여성의 지지는 단 5.9%에 그쳤다는 점은 이 언어 전략이 얼마나 깊은 성별 정동의 분화를 야기했는지를 보여준다.” 에서 5.9%가 아니라 10.3% 인데 오타 난 것 같습니다.
<본문 오타 정정>
편집자입니다. ㅜ.ㅜ;
1. “20대 여성은 이재명 후보에게 58.1%라는 과반의 지지를 보냈으며, 이준석 후보에 대해서는 단 5.9%(⇨ 10.3%로 정정)만이 선택했다.” (본문 중에서)
2. “실제로 20대 남성의 이준석 지지율이 37.2%에 달한 반면, 여성의 지지는 단 5.9%(⇨ 10.3%로 정정)에 그쳤다는 점” (본문 중에서)
위 두 곳에서 ‘쯤이’ 님 지적처럼 오타(오류)가 있었습니다.
해당 본문 수치는 “5.9%” ⇨ “10.3%”로 정정했습니다.
발행 전에 오류를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모쪼록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더불어 늦었지만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초등 고학년부터 유튜브, 네이버 웹툰, 게임 커뮤니티를 통해 관계를 형성한 남학생들은, 이 공간 안에서 ‘관계’보다는 ‘경쟁’과 ‘겨루기’로 자신을 증명했다. 반면, 여학생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감정과 애정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라는 부분은 철저하게 갈라치기에 충실한 분석이네요. 동덕사태나 메갈 등 남혐사태 등 성별혐오에서 네트워킹을 구축한건 오히려 여자들인데 말이죠
똥같은 기사 잘봤습니다
똥86 사회학자의 젊은척하려고 이거저거 귀엽고착하고 정의로워 보이는 키워드팔이 사회학적 분석이랍시고 싸질렀으나 결국 언더도그마를 벗어나지못하는 위선의 주접냄새가 폴폴풍기네. 이런애들도 교수직함달고 꺼드럭대고다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