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캡:콜드케이스]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사고방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명쾌하게 분석합니다. 오늘의 캡:콜드케이스는 ‘웹툰’ 특히 ‘회빙환’.


웹툰의 시대정신, 회빙환을 중심으로 (목차)

알림 및 안내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해 토픽을 좀 더 작은 단위로 나눠 인터뷰이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위 ‘목차’에서 궁금한 항목을 클릭하면 해당 항목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2024년 2월 3일의 인터뷰를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캡:콜드케이스 06.

웹툰의 시대정신:
‘회빙환’을 중심으로


“회빙환의 핵심은 그거거든요. 어떤 새로운 특수 능력이나 초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답을 알고 있는 거죠. 마치 그 시험 문제 답안을 알고 있고, 똑같은 문제를 다시 푸는 격이거든요. 그 다시 시험을 푸는 과정에서 쾌감이 생긴다는 거죠.”

“그리고 표현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는데요. 회빙환의 주인공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오답을 미리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오답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는 힘들다는 거죠.” (캡콜드)

[이야기의 종말]

이야기의 종말? 대량생산 시대의 착시죠


민노: 세기말의 포스트모던 논쟁에서 창작의 종말과 함께 언급된 ‘혼성모방’ 경향이 특히 장르 드라마에서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장르적 관습(클리셰)이 기어코 반복되고, 이야기는 언젠가 이미 본 것 같고.

캡콜드: 세상 모든 서사는 36가지가 전부라는 오래된 주장도 있고, 조지프 캠벨 같은 학자는 영웅의 원형 서사는 단 하나라서 모든 영웅담은 그 변주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죠. 사실 그런 이야기들은 항상 많이 있었죠.

카를로 고찌(Carlo Gozzi: 1720-1806). 비극(희곡)을 36가지로 유형화해서 제안했다.

고찌는 비극적인 상황은 36가지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쉴러는 더 많은 상황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고찌만큼 많은 상황을 찾을 수 없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그보다는 현대의 서사 ‘산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한국의 웹툰과 웹소설이 범람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는 변주마저도 너무 대량으로 생산되고 겹치는 거죠. 거기에 경쟁을 해야 하다보니까 이미 잘 나가는 경우의 수를 놓고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조율된 작품들이 한 번에 많이 쏟아지니까요. 그러다보니 예전보다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있죠.

규모의 경제랄까요


캡콜드: 어쨌든 너무 많이 만들고 있으니까 그만큼 더 비슷한 작품들도 많이 보이는 거죠. 규모의 경제예요. 게다가 심지어 다른 나라 작품들까지 인터넷을 통해서 진화한 번역 수단들을 통해서 유통되고요. 사람들은 아무리 서로 다른 곳에서 살아도 특정한 시대에는 생각하는 게 비슷해질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산업적으로 성공할 만한 ‘먹힐만한 이야기’는 더 한정적이죠. 그래서 더욱 그쪽으로 몰고 가는 거죠.

하지만 5년 전과 비교해 보세요


캡콜드: 하지만 지금 유행하는 이야기들을 한 5년 전에 유행했던 이야기들과 비교해 보세요. 완전히 그 성향이 다르거든요. 이야기도 일종의 ‘유행’을 따르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산업적 필요에 영향을 받는 겁니다.

장르물과 작가주의…그건 카테고리가 아니라 스펙트럼이죠


민노: 영화로 치면, 고다르나 큐브릭, 타르코프스키나 키에슬로프스키, 왕가위나 허우샤오셴, 우디 앨런이나 마틴 스콜세지, 박찬욱이나 봉준호, 토머스 앤더슨나 대런 애러노프스키, 켄 로치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의 작가주의적 전통이 한편에 존재하고(물론 이들 작가들도 자본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요), 거대 할리우드 시스템의 일부로서 완성도 높은 엔터테인먼트 ‘상품’을 제조하는 장인 그룹이 한편에 있습니다. 웹툰과 웹소설의 경우에도 작가주의적 경향과 시스템적 경향을 구별해서 평가할 만한 경향이 있나요. 궁금합니다.

캡콜드: 상업적인 성공을 노리고 좀 더 장르적으로, 그러니까 검증된 공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그런 성향으로 가면 우리가 흔히 ‘장르물’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그게 산업적 규모로 성장하면 ‘장르 산업’이라고 하죠. 그것과 비교해서 작가 고유의 개성을 존중하고 상업적인 성과에서는 도박을 거는, 그런 성향이 더 강하면 우리가 작가주의라고 흔히 칭하죠. 그 두 가지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사실은 스펙트럼입니다. 명확하게 구별된다기보다는 작가주의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 있고, 장르적인 성향이 강한 게 있고요.

민노: 아주 예리하고 적절한 지적입니다.

80년대 어린이 명랑만화에도 그런 지적은 있었어요


캡콜드: 왜 이렇게 식상한가. 왜 이렇게 비슷비슷한가. 그런 지적은 80년대 만화에서도 있었습니다. 어린이 잡지 명랑만화들이 왜 이렇게 비슷비슷하냐, 왜 식상한 개그 코드를 남발하느냐, 그런 이야기가 있었죠. 그런데 한편에서는 그런 경향에 반대해서 ‘언더그라운드 만화’라는 운동이 있었어요. 90년대의 문화적인 구매력 신장에 힘입은 움직임이었죠.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가장 장르적이라는 만화에서조차도 그런 작가주의적 추구는 계속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의 웹툰 주류 산업 구조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웹툰 작품들은, 아무래도 네이버나 카카오와 같은 대형 플랫폼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노리고 만들어진 그런 작품들일 뿐입니다.

[보물섬] 창간호(1982. 10.)와 [아이큐 점프] (1993년 26호, 1988년 12월 창간)

그럼에도 여전히 작가주의는 남아 있어요


캡콜드: 하지만 여전히 종이로 된 동인잡지를 만드는 분이 있고, 개인 사이트 블로그에서 연재를 시도하는 분도 있고요. 네이버 같은 거대 플랫폼 루트를 뚫고도 굉장히 강한 작가주의적 비전과 철학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어서, 최규석-연상호 콤비의 [지옥] 같은 작품도 가능한 거죠.

여튼 다시 강조하자면, 작가주의와 장르 혹은 상업주의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스펙트럼인데 가장 많은 이들의 눈에 띄는 건 아무래도 성공한 작품, 사업적 성공 가능성에 최적화된 장르물이다 보니까 그쪽으로 눈이 많이 쏠려 있고, 노출도도 큰 거죠. 그건 규모의 경제에서 나오는 엄청난 규모가 초래한 착시라는 거죠.

[사회파 오컬트]

사회파 오컬트: 연상호와 최규석 혹은 주호민


민노: 자연스럽게 다음 토픽을 말씀해 주셨네요. 오늘 이야기할 토픽을 사전 조율하면서 연상호나 최규석이나 주호민을 ‘사회파 오컬트’로 묶으셨는데요. 일단 사회파 오컬트를 좀 더 풀어주시죠.

캡콜드: 오컬트(occult: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한 초자연적 현상)라는 소재로 장르물을 만들면서 그 안에 사회적인 시선을 녹여 낸다는 취지입니다. 가령 [지옥] 같은 작품은 오컬트의 요소를 빌려왔지만, 결국 당대 사회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춘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사회파라고 명명한 거고요.

웹툰 [지옥]의 경우


민노: [지옥]은 예견할 수 없고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의 거대한 위협에 맞닥뜨린 공동체의 분열과 절망 속에서도 나름의 길을 찾아가는 소수(리유, 타루, 랑베르)의 저항과 투쟁이라는 점에서는 [패스트] (1947, 알베르 카뮈)를 연상시키고, 초자연적 현상을 맞은 집단의 혼란과 광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미스트] (1980, 스티븐 킹)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캡콜드: 그렇게 볼 수 있죠. [지옥]은 우선 만화로서의 완성도가 아주 높다고 보고요. 우선 최규석 작가의 경우에는 [송곳]에서 이미 혹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도 그 현실에 부딪힌 사람들 중 누군가는 마치 ‘송곳’처럼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희망을 보여줬거든요. 그게 연상호 작가의 오컬트에 관한 천착과 합쳐지면서 좋은 균형점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네이버 웹툰 [지옥] (Hellbound, 2019, 스토리: 연상호, 작화: 최규석)

알 수 없는 무엇, 그게 우연인지 숙명인지 알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마주한 사람들이 그 우연에 계속 의미를 부여해서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인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가거든요. 결국 그 안에서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은 증폭하고요. 그런 현실을 반추하는 모습을 아주 성공적으로 형상화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통쾌한 이야기를 바라는지라 자꾸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층은 아무래도 좀 한정돼 있기는 하죠.

민노: 많은 사람들이 해피엔딩을 원하죠.

캡콜드: 현실을 반추하는 사회적 요소가 그래도 오컬트적인 판타지와 결합하니까 독자들이 ‘삼키기’가 좀 쉬워졌죠.

웹툰 [지옥]와 드라마 [지옥]의 차이


민노: 웹툰 [지옥]과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각각 평가한다면요?

캡콜드: 저는 기본적으로 만화 버전을 더 선호합니다. 만화 버전 경우에 사회를 비추는 장면들에서 내 속도로 잠시 쉬어갈 수 있어요. 나와 사회를 반추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죠.

하지만 영상화한 경우에는 아무리 원작에 충실하다고 하더라도, 물론 영상을 중간에 멈출 수는 있겠지만, 제 감상의 속도에 맞춰서 전개되지는 않죠. 아무래도 영상의 흐름을 쫓게 됩니다. 그게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 (2021, 연상호)

[회빙환 전성시대]

‘이공깽’에서 ‘회빙환’으로


민노: 오컬트랄까 회귀물을 포함한 이세계를 다룬 작품들의 인기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현상으로 보세요?

캡콜드: 대중문화 특히 장르물에서 내가 다른 세상으로 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코드는 굉장히 오래됐어요. 당장 판타지 소설의 고전인 [나니아 연대기]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이세계로 가는 이야기들은 많았어요. 영화 [존 카터: 바숨 전쟁의 서막] (2012)도 애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화성의 공주] (A Princess of Mars, 1917) 원작이고요.

그리고 한 10년 전만 하더라도 소위 ‘이고깽’이라는 게 유행했어요. 세계로 간 등학생이 판치면서 완전히 영웅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최근 5~6년 정도는 웹툰과 웹소설을 필두로 이세계 판타지로 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업계 용어로 ‘회빙환’이라고, 회귀, 빙의, 환생 계열의 장르물이 우후죽순으로 많아졌죠.

회빙환, 인생 2회차


캡콜드: 회귀는 주인공이 특정한 과거 시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빙의는 또 태어나거나 다른 사람으로 빙의돼서 현재를 사는 이야기, 환생은 다른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인생 2회차랄까, 그런 식인 거죠.

이 세 가지는 비교적 가깝게 연결돼 있어서, 결국 자기 능력을 가지고 다른 세계(이세계)로 가는데, 그 다른 세계가 원래 익숙한 그 현실 세계 그대로인 거죠. 이 세개를 묶어서 ‘회빙환’ 계열이라고 하는데, 그쪽으로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죠. [백 투 더 퓨처] (1985)라고.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는 그야말로 완벽한 회귀물에 가깝죠.

회귀물의 고전,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1985, 1989, 1990, 책임 프로듀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회빙환의 유행, 웹툰 웹소설은 리트머스 시험


캡콜드: 최근 5~6년 동안 회빙환 계열의 웹툰과 웹소설이 꾸준히 인기가 있었고요. 그게 산업적으로 검증되니까 좀 더 투자해서 판을 키우자는 게 드라마고, 그런 드라마들이 최근 한 2년 정도 굉장히 히트를 쳤고요. 웹툰과 웹소설은 일종의 리트머스 역할을 먼저 한 거죠.

왜 하필 회빙환이 유행했는가. 이미 많은 분들께서 해석을 주셨죠. 젊은 세대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고, 그 상태에서 내가 만일 ‘치트키’를 가지고 다시 할 수 인생 2회차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회빙환의 핵심은 초능력이 아니라 ‘답’을 알고 있는 것


캡콜드: 회빙환의 핵심은 그거거든요. 어떤 새로운 특수 능력이나 초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답을 알고 있는 거죠. 마치 그 시험 문제 답안을 알고 있고, 똑같은 문제를 다시 푸는 격이거든요. 다시 시험을 푸는 과정에서 쾌감이 생긴다는 거죠. 저는 그 해석이 꽤 그럴듯하다고 보고요.

거기에 약간 덧붙이면, 왜 초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냥 답만 알고 새로 풀면 되느냐? 저는 그게 이 시대의 불확실성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당장 10년 전, 20년 전만 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확실함이 보였단 말이죠. 사회가 어떤 확실한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입했단 말이에요. 어떤 식으로 공부하고, 어떤 식으로 일하며, 어떤 식으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네가 만약 성공하지 못했지만 네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런 식으로 압박을 줬단 말이에요.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애니메이션 23화 패러디.

불확실성의 시대, 더는 ‘노오력’을 믿지 않는 시대


캡콜드: 하지만 이제 더는 그런 조언과 충고, 압박을 믿지 않죠. 특히 지난 5~6년 동안 사람들은 그런 걸 믿지 않게 됐어요. 그 사이에 코로나 팬데믹이 닥치기도 했고, 그런 경로로는 이제 더는 옛날 같은 성공이 불가능한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젊은 세대는 부동산 ‘영끌’하는 거고, 그런 여유가 없으면 코인 투자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런 게 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거란 말이죠.

어떤 식으로 해야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제 거의 도박하듯이 ‘꼬라박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제 진실을 마주했죠. 그렇게 해봤자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걸. 그렇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정말 희박하죠. 왜냐? 답을 모르니까. 어느 타이밍에 뭐가 얼마나 오르고, 언제 빠질지 사실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존버'(끝까지 버티기)하는 거란 말이죠.

불확실성의 시대, 하지만 답을 알고 있다면 어떨까?


캡콜드: 그런데 답을 안다면 어떨까요? 답을 알고 그 불확실성에 다시 도전할 때 얼마나 통쾌하게 승리할 수 있을까? 거기에 관한 일종의 소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시대상이 된 거죠.

나아가, 그런 웹툰과 웹소설을 종이가 아니라 모바일에서 소비한단 말이죠. 스낵 컬처(짤막한 단위의 대중문화) 위주로 좀 더 즉각적인 소비를 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그 흐름이 지난 십수 년 동안 어느 정도 꾸준히 진행된 거고요. 그런 형태로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뭐냐? 즉각적인 쾌감이죠. 갈수록 모바일 중심의 매체가 취하는 지배적인 양식은 (즉각적인 쾌락을 주는) ‘사이다 코드’라는 거고, 점점 더 (성찰, 비판을 요구하는) ‘사회적 코드’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요.

회빙환은 현실 극복의 저항적 잠재력을 품고 있을까


민노: 꼰대스러운 질문일 수는 있지만… 회빙환은 현실 극복의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특권적 치트키에 관한 모방 욕구를 좀 더 오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지만요. 환빙환의 유행은 정치적인 환멸이나 무관심을 더 강화할까요, 아니면 정치적으로 잠재적인 저항이나 개혁의 에너지를 담고 있을까요.

캡콜드: 회빙환 계열 작품이 사회파(사회적 개혁)로 가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봅니다. 회빙환은 주로 개인 중심의 문제 해결로 가죠. 미리 답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다시 되돌리거나 개척하는 것은 가능해도,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기는 어렵거든요. 그래서 자기에게 유리한 선택을 해서 꼬였던 내 개인적인 상황을 풀거나 거기에 좀 더 추가하면 착한 기업 만드는 그 정도죠.

사실 알고 있는 건 정답이 아니라 오답


캡콜드: 사회파에 요구되는 복잡하고 어려운 상상력과 사회관을 형상화하려면 작가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우선 독자들도 그런 작품을 갑갑해하죠.

그리고 표현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는데요. 회빙환의 주인공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오답을 미리 알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오답을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는 힘들다는 거죠.

많은 경우에 오답이 아닌 선택을 함으로써 그게 잘 술술 풀려서 사이다스럽게 빵빵 터지고 잘 해결되는 그런 모습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내는 경우는 많지만, 그런 선택을 실마리로 새로운 사회를 꿈꾸거나 새로운 정치를 제안하거나 하는 그런 작품은 흔할 리가 없잖아요. 대체로 아주 좁은 폭에서 개인적인 해결로 작품들이 흘러갈 수밖에 없죠.

대체 역사물, [근육 조선]의 경우


민노: 제 질문의 취지는 말씀하신 그런 내용도 있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사회 개혁의 서사를 보여줄 필요 없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가령 마르쿠제가 보들레르의 퇴폐적인 시 속에서 혁명적인 잠재력을 발견한 것처럼요. 그런 취지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을 개척하고 극복하는 그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좀 더 세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거나 그런 저항의 잠재력을 품게 하는, 내가 세상에 부딪혀서 바꿔내야지 하는 그런 잠재적 에너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 있었나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캡콜드: 예로 들면, 대체 역사물이라는 장르가 있어요. 회빙환 계열 중에서도 좀 과거 깊숙이로 되돌아가서 빙의 방식이라든지 해서 세상을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그런 좀 더 선 굵은 접근이 있는데요.

그런 계열의 작품 중에서 최근에 제가 좀 주목한 작품이 [근육 조선]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헬스 트레이너가 조선시대(세종대왕 치세)로 회귀해서 사람들을 건강한 몸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만성 비만에 시달리던 세종도 계속 운동을 시켜서 아주 몸이 건강해지고, 근육질로 만들죠. 그래서 역사의 판도가 바뀌는 거예요.

‘사이다’라는 시대정신이 회빙환을 만날 때


캡콜드: 하지만 [근육 조선]의 주인공이 조선의 역사를 바꾼다고 해도 거기에서 포인트는 그걸 어떻게 사이다스럽게 팡팡 터뜨릴까 하는 거죠. 조선의 신분제 사회가 변한다든지 조선시대 사람의 엇갈린 이해관계가 어떤 식으로 조율되고, 그 집단적 욕망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 그런 사회적인 부분은 사실 건드리지 않거든요. 역시나 개인적인 수준에서 혹은 그걸 약간 확장한 정도의 범위에서 변화와 해결을 다룹니다.

제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사이다’라는 게 아까 모바일 소비의 즉물성을 언급한 것처럼 미디어 소비 방식과 굉장히 맞물려 있고요. 거기에 이제 산업적 요구와 수요가 개입해서 창작자들도 그런 방향으로 뛰어들고요. 그런데 ‘사이다’를 회빙환에서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방식이 뭐겠어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주인공이 그 답을 모르는 사람을 농락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단 말이죠. 이미 정답/오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실패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략을 짜서 그 인생을 처음 살아보는 강력한 악당을 확실하게 농락하고 압도하죠. 세상에 그런 사이다가 어딨어요.

그렇게 눈길을 끌고 그런 파급력을 확산시키다보니 그런 산업적인 잠재력이 드라마나 영화로 이어지고, 그러나보디까 한 5~6년 전에 웹툰이나 웹소설의 유행이 이제 2~3년 전부터는 확실하게 모든 영상물의 유행이 되어버린 거죠.

아, 사이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의 이야기. 그 본질적 욕구의 시원.

[죽어도 좋아], 회빙환에서도 드문 ‘루프’


민노: 회빙환 계열에서 캡콜드 님께서 주목한 작품들은 어떤 작품들인지 궁금합니다.

캡콜드: 골드키위새의 [죽어도 좋아] (2015, 카카오웹툰)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드라마판은 완성도가 굉장히 높게 평가받거나 주목도가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웹툰 원작은 제가 아주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하고요. 이 작품은 회빙환 계열에서도 좀 특수한 장르인 ‘루프'(무한 반복)물이죠. 오래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그라운드호그 데이] (1993, 해럴드 레이미스)와 비슷한 설정이죠.

민노: 아, 그 영화는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영홥니다. 정말 걸작이죠.

‘루프’ 계열의 걸작. [그라운드호그 데이] (1993) 우리나라 개봉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

캡콜드: [사랑의 블랙홀]이 스스로 개과천선해야 하는 미션이라면, [죽어도 좋아]는 답이 없는 타인을 갱생하게 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지는데요. 그런 미션이 재밌죠.

민노: 뭔가 좀 따뜻한 느낌이 있네요.

현대사회 대인관계에 관한 날카로운 풍자


캡콜드: 네, 나름 따뜻하고 해야 하나, 코믹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설정이 있는데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아주 어려운 문제잖아요. 현대사회의 대인관계에 관한 굉장히 날카롭고 풍자적인 시선이 있고요. 그걸 전체적으로 굉장히 재밌는 시나리오로 풀어나가고 있어서, 그런 식으로만 개성을 잘 발휘해도 저는 충분히 작가주의에 가까운 요소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작가주의라고 해서 무슨 그림도 굉장히 새로운 화풍이어야 하고, 이야기도 무슨 세상 처음 듣는 이야기어야 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민노: 당연하죠, 그런 거 오히려 너무 싫을 때가 많죠.) 하나의 장르, 그 장르의 공식 안에서 그 공식만을 따르지 않고, 작가 스스로 세상에 던지고 싶은 말, 사람에게 건네고 싶은 그 이야기를 자신만의 해석으로 작품 속에 잘 녹여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아주 좋은 작가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골드키위새, [죽어도 좋아]. 카카오웹툰.

웹툰의 드라마화가 가지는 취약점


민노: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나요?

캡콜드: 네, 그런데 드라마는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드라마의 유행 문법을 넣다보니까 이야기도 좀 더 표준적인 드라마화가 될 수밖에 없고요. 그러니까 웹툰을 드라마화하는 경우에 웹툰에서는 가벼운 개그와 무거운 순간이 좀 더 자유롭게 오가는데, 아무래도 드라마에서 그걸 형상화하는 건 좀 난이도가 높거든요.

그래서 웹툰의 가벼운 개그들을 거의 잘라버리고 진지한 줄거리로만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단 말이죠. 그러다보니까 드라마 버전은 드라마의 공식을 아무래도 더 따르기 때문에 그 변환 과정에서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회빙환의 유행은 앞으로도 지속할까


민노: 회빙환 유행은 앞으로도 지속할까요.

캡콜드: 사람들이 충분히 지겨워지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지속하겠죠. 아무래도 미디어 소비 양태가 이제 짧은 포맷과 모바일을 통해서 소비되고 있어서요. 쇼츠 같은 걸 생각할 때 회빙환마저도 너무 갑갑하다고 생각하고, 그것보다 더 사이다인 새로운 코드를 찾아 나설 수는 있겠지만요. 물론 정확하게 예측은 안 돼요. 그걸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새로운 걸 기획해서 큰 돈을 벌었겠죠(웃음).

[평론의 역할]

창작을 견인하는 평론


민노: 평론의 역할에 관한 생각을 들려주신다면요.

캡콜드: 평론은 크게 다음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 우선 독자에게 재밌는 작품을 골라주는 것.
  •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작품을 수단으로 동원하는 것.
  • 창작자에게도 의미를 돌려주는 것. 이 작품이 어떻게 새로운 미학을 창조했는가. 깊이 들어가서 다음 세대에게도 그 의미를 전하는 평론.

현대에 와서는 평론은 주로 첫 번째 범주, 독자에게 ‘이 작품 재밌다!’라는 그런 쪽으로 흘러갔단 말이죠. 어떤 작품 재밌으니까 읽어봐라, 이건 한 20자 내로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쪽으로 수요가 너무 쏠려 있단 말이죠.

물론 평론가들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너무 한쪽에서는 시사 평론을 하면서 작품을 수단으로 끼워 넣거나, 온갖 현학적이고 미학적인 용어로 점철된 자기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거나 해서 평론의 수요를 스스로 없애버린 죄가 자신에게 있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 정말 필요한 건 세 번째 범주, 왜 이 작품이 어떻게 더 깊은 의미로 세상과 맞닿아 있는지, 그리고 그 표현방식들이 더 깊은 미학적 방법론과 연결되지는 그런 부분을 찬찬히 분석하면서 해설하는 그런 약간 난이도 높은 작업들을 이제 다시 집중해야 창작을 견인하는 평론으로 갈 수 있는 거죠.

세 번째 범주의 평론, 소비층은 창작자


민노: 세 번째 범주에 대한 수요는 좀 존재한다고 보세요?

캡콜드: 수많은 창작자가 이렇게 넘치는 걸로 보아 그리고 그 창작자들이 지금 특히 웹툰, 웹소설로 쏟아지고 있는 걸로 봐서는 수요는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이왕 작품활동을 할 거라면 좋은 작품을 쓰고 싶으니까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성공도 바라겠지만, 좋은 작품을 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히 있을 거라고 봐요.

민노: 세 번째 평론은 비유하면 B2C(기업-다수 소비자)라기보다는 B2B(기업-기업)이라는 건가요? 창작자들이 평론의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캡콜드: 그런 거죠. 그리고 일반 소비자가 창작욕을 품게 할 수도 있는 거고요.

민노: 요즘 창작자들이 평론을 좀 읽나요?

캡콜드: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자기 작품에 관한 재미 있다 없다 리뷰는 많이들 보시겠죠. 그런데 그런 것들로부터 뭔가 영감을 받아서 새로운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 같고요. 창작자에게 뭔가 방향타 역할을 하는 그런 평론이 지금 가장 부족해진 상황인 거죠. 원래도 그 지분이 많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갈수록 그런 평론이 부족해지는 느낌은 있습니다.

웹툰 웹소설 비평권력, 존재했던 적 있나


민노: 그럼 하나만 더요. 영화로 치면 프랑스의 ‘까이에 뒤 시네마’나 영국의 ‘사이트 앤 사운드’, 우리나라의 [키노]나 좀 더 대중적인 [시네21]의 비평 권력이랄까요. 그런 게 웹툰이나 웹소설에 존재했던 적이 있나요?

캡콜드: 권력이라니, 그냥 없었다고 봅니다. 우선 평론을 하시는 분들이 그만큼 그런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그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런 부분도 있고요. 물론 그런 권력이 존재한 적이 없어서 딱히 아쉬운 적은 없었고요. 다만, 저는 그런 것보다는 창작을 견인할 수 있는 평론이라는 게 점점 더 말라가고 있으니까 그런 영역을 좀 더 적극적으로 키워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민노: 그런 비평 풀은 충분하다고 보세요? 그리고 지속가능성의 차원(생계)은 어떤지도 궁금합니다.

캡콜드: 지금도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좋은 평론가들이 많고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계시죠. 그런 분들께서 좀 더 목적의식을 뚜렷하게 잘 가다듬어서 에너지를 집중하면 저는 앞서 이야기한 분위기도 충분히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평론만으로는 지속가능성, 생계 문제는 전에도 해결이 어렵고, 지금도 여전히 해결이 어려울 겁니다. 제가 당신들 고료 수입이 얼마냐고 물어보고 다니지는 않지만요.

민노: 문학 쪽에서는 문지나 창비 같은 경우를 봐도 그렇고, 그 비평 권력이 강당(대학)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구조화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웹툰 쪽에선 학계와 교류가 좀 있나요.

캡콜드: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화판은 학계와 평론계가 그렇게 오버랩되고 그러지는 않는 편이라서요. 저는 사실은 그게 굉장히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학계의 이상한 틀에 박혀서 세상과의 접점을 잃어버리고 하는 그런, 왕년의 영화계가 그렇게 빠진 것보다는 훨씬 덜할 것 같고요.

[부록]

연예인의 ‘패자부활전’… 패자 부활의 공식 루트가 중요하다


민노: 작품 외적인 이야기지만, 유아인 마약 건은 [지옥 2]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건가요?

캡콜드: 마약 건에 관해서는 제가 좀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저는 나름 악역을 맡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실제로 물의를 일으키고 하면 딱히 그 캐릭터의 이미지에 위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민노: 저는 잘못한 사람들에게 패자부활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떠난 이선균 배우에 관한 안타까움이 깊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래전부터 가진 생각입니다. 잘못했으면 당연히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죠. 다만 가끔은 너무 사회적인 처벌이 혹독한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중 예술인 경우에 마약으로 잘못해서 벌 받고 다시 재기하시는 분도 많고요. 외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고(故) 이선균.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캡콜드: 그럼요. 패자부활전 이야기를 하셨는데, 패자 부활의 ‘경로’에 관한 합의를 이제 좀 공식적으로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약이라고 하면, 마약으로 처벌받고, 또 마약 퇴치 운동에 일정하게 참여한다든지 해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재기할 수 있는 과정을 사회적으로 공식화한 루트를 만들어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복귀, 재기 기준이 그저 단순히 ‘시간’이 3년 지났다, 5년 지났다 이런 게 아니라 사죄와 사회 복귀를 위한 행동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민노: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끝)

관련 글

첫 댓글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