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이완의 색다른 진보 4-1.] ‘윤어게인’의 늪에 빠진 한국의 보수주의. 대중적 감각의 상실과 보수주의의 급진화라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윤어게인’이라는 악몽…그런데 잠깐, 지금 한국에게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13분)

진영 논리가 판치는 시대, ‘논쟁’이 어렵다. 말, 글로 논하여 다투기보다 SNS에 서로 조롱하고 비아냥대기 바쁘다. 이미 각 부족 입맛에 맞게 답을 정해 놓은 좌우파 지식인은 한 치 이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토론은 물러나면 죽는 전장일 뿐이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 차분한 논쟁이 필요하다. 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에 의해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어떤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토론 테이블에 꺼내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성역화도, 언더도그마도 타파 대상이다.

색다른 관점을 가진 철학자를 소개한다. 독립 연구자 이완(31)이다. 그의 철학과 생각이 정치·사회 논쟁에 작은 불쏘시개가 되길 바란다. 이번에 그와 나눈 인터뷰 주제는 ‘한국의 보수주의’다. 1·2편으로 나눠 싣는다.

이게 왜 중요한가.

  • 국민의힘이 내란 세력을 절연하지 못하고 침몰 중이다. 비상계엄을 저지하고 윤석열 탄핵을 찬성했던 한동훈(전 국민의힘 대표)은 ‘배신자’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됐다.
  • 보수는 ‘보존하다’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윤어게인 세력이 주도하는 ‘보수’는 대체 무엇을 지키겠다는 걸까. 한파든 폭염이든 상관 없이 아스팔트에서 몇 시간 동안 고함을 지르는 이들의 동력은 무엇일까.
  • 유튜브 속 가짜 뉴스나 특정 세력의 자금이 이들을 움직인다고도 이야기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게 이완의 분석이다.
  •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누군가는 보수에 더 끌릴 수 밖에 없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급진화하지 않으려면 보수 정당이 더 망가져서는 안 된다.
윤석열이 2021년 6월 29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윤석열 페이스북.

‘윤어게인’의 도덕적 동기에 대하여.

— ‘윤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먼저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대전제부터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다. 12·3 계엄은 권력 남용이자 친위쿠데타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소 무기징역이어야 하고, 훗날 어떤 이유로도 석방돼서는 안 된다. 서부지법 폭도들도 더 중형을 받았어야 한다. 부정선거론은 근거가 부족하고, 이 나라가 좌경화되고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세금과 복지 제도에 대한 거부감 등을 보면, 오히려 우리나라는 상당히 우경화한 곳이다.

하지만 윤어게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덕적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윤어게인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급진 우파’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뭉쳐 있다. 단순히 무언가를 파괴하며 울분을 토하려는 사람도 섞여 있겠지만, 진지하게 나라가 위험에 처했고 자신들이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흔히 유튜브 속 가짜 뉴스나 특정 세력의 용돈이 극우를 움직인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대체 얼마를 받았기에 수년 동안 한파든 폭염이든 상관 없이 밖으로 나와서 몇 시간 동안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걸까. 가짜 뉴스 때문에 나라가 위험에 처했다고 믿고 그래서 광장에 태극기를 들고 나왔다면, 결국 나라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뜻이지 않은가.

— 가짜 뉴스, 허위 정보에 속아 급진 우파가 됐다고 믿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을 그저 가짜 뉴스에 속아서 이끌려 나온 사람들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짜 뉴스가 주된 원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유튜브를 규제하고 사실을 전파한다고 해도 급진 우파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이 위험하거나 불합리하게 행동할 때, 그 사람들의 인성이나 판단력을 탓하기 전에 사람들을 떠미는 힘이 있지는 않은지 먼저 따져야 한다. 그것이 진보주의자들도 자주 잊어버리는 진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 어디서 원인을 찾을 수 있나?

원인 후보 중 하나가 ‘도덕 감정’이다. 많은 사람이 도덕을 쉽게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누구나 비슷한 결론에 닿을 수 있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트롤리 딜레마는 왜 난제이고 윤리학자들의 토론회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보편적 도덕의 목록이 그리 길지 않을까. 왜 사람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자주 의견이 갈릴까.

도덕에서 수많은 사람이 합의하는 중론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는 도덕이 추론만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인이 나쁜 이유가 무엇일까. 순전히 추론의 힘으로 살인의 비도덕성을 증명할 수는 없다. 추론은 근거에서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인데,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타당한지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론을 얻으려면 근거의 근거도 따져야 한다.

예를 들어 ‘감자는 맛있다. 사람은 감자다. 사람은 맛있다.’ 이 3단 논법은 순수하게 논리적인 관계만 보면 타당하다. 하지만 쓸모 있는 논증은 아니다. 감자가 맛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 문제고, 무엇보다 사람이 왜 감자인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논리 관계만 따질 것이 아니라 좋은 결론, 유용한 결론을 얻으려면 근거의 근거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근거의 근거의 근거를 계속 따져묻다 보면, 누구나 더 이상 근거를 댈 수 없는 지점에 닿게 된다. 일명 무한퇴행 문제다.

“논리는 어딘가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은 우리가 정당화 없이 가정한 어떤 진리가 돼야 한다. 이를 공리(Axiom)라고 하며, 이것이 논리의 한계 중 하나다.”

유지니아 쳉, 영국 수학자⑴

무한퇴행을 멈추려면 어느 지점에서 근거를 그만 따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덕 문제에서는 어느 지점에서 멈출 수 있을까. 나는 도덕 감정을 그 멈춤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어떤 일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 좋고 나쁨을 따질 수 없다. 만약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일 때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폭력이 나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을 것이다.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는 판단 잣대를 잃는다.

우리는 감정을 최종 근거 삼아서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부터 21세기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까지 이어지는, ‘도덕감정론’이 우리가 의심을 멈춰야 할 지점인 듯하다.

국민의힘은 ‘윤어게인’ 세력에 포획돼 있다. 사진=챗GPT.

“‘터널 시야’ 급진 우파, 비상계엄에 익숙함 느껴.”

— 모두가 같은 상황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덕적 판단도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 ICE가 트럼프 사병 노릇을 하며 미국 시민을 사살해도, 누군가는 ICE의 과격함에 어떤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 시민에게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들 모두가 극우 파시스트라서 그런 것이 아닐 수 있다. 단지 남들보다 타인 고통에 덜 반응하거나 튼튼한 권위 아래에서 질서가 안정돼 보일 때 편안함을 느껴서 그럴 수도 있다.

이런 차이는 타고난 기질과 오랫동안 몸으로 익힌 문화의 합작품이라서, 논리적 대화나 교육만으로 잘 바뀌지 않는다. 미국 네브라스카 링컨 대학의 정치학자 존 히빙의 말을 빌리면, “정치적 차이는 단순히 잘못된 정보나 엘리트의 음모, 상황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보다 훨씬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⑵

사람마다 입맛이나 알레르기 유발 음식이 다르고, 이걸 이성의 힘으로 바꾸기 매우 어렵다. 입맛이 요리를 고르지, 요리가 입맛을 고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향이 뉴스를 고르지, 뉴스가 성향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은 뉴스를 근거 삼아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어렴풋이 갖고 있던 결론의 근거로 뉴스를 찾는다. 그래서 가짜 뉴스만으로는 급진 우파를 설명하기 힘들다. 가짜 뉴스는 행동을 더 과격하게 만드는 요인이지, 시작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니다.

중국이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 뒀고, 대만 인근과 남중국해에 군사 기지를 만든다는 ‘사실’만 접하더라도, 급진 우파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반중 시위를 벌일 수 있다. 급진 우파는 공산당에 맞서는 데 최적화한 사회질서와 굳건한 한미 동맹을 보며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⑷

실제 2023년 네이처 지에 올라온 한 연구는 페이스북 가짜 뉴스에 노출되는 양을 줄인다고 해서 사람의 성향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애초에 페이스북 게시글 중 과격한 콘텐츠는 극히 소수일 뿐만 아니라 정보가 신념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이야기다.⑸

큰 불안감이나 격한 분노는 다양한 대안을 떠올리지 못하게 막는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터널 시야다. 급진 우파는 어떤 이유에서든 큰 안보 불안과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찾기보다는 이미 겪어 본 일을 참고하려 한다. 그래서 비상계엄이라는, 그들의 기억 속에 익숙한 대책에 열광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도덕심리학 등을 기반 삼아서 추론한 것이다. 혐오감과 다소 거리를 둔 채로 한국 급진 우파를 직접 연구한 자료가 더 필요하다. 사람들이 급진 우파가 되는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과격화를 막든 평화로운 공론장에 끌어들이든 할 수 있다.

반대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중용의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헛된 주장은 비생산적이며, 끝없는 좌절의 원천이다.”

존 R. 히빙, 미국 정치학자
— 국민의힘은 윤어게인 세력과 절연하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과 대적했던 한동훈을 배신자로 몰아 당에서 제명시켰다.

박근혜 대통령 때 그랬던 것처럼 한국 보수는 대통령 탄핵을 계기 삼아서 셋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12·3 계엄을 반란으로 인정하고 윤석열 대통령과 선을 그으려 하지만, 다른 한쪽은 계엄이 정당했다고 믿으며 윤어게인을 외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이에서 국민의힘은 한동훈 전 대표와 그 지지자들을 배제하며 윤어게인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모양새다.

사실 윤어게인 진영의 주장은 허점 투성이다. 분명 계엄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헌정질서는 어떤 권한을 언제,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법으로 정해두고 있다.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법에 따른 판단, 즉 ‘법의 지배’가 우리나라 자유 헌정질서 핵심이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은 법이 허락하는 영역에서 한참 벗어났다. 국회에 특공대를 보내고, 포고령으로 정치, 언론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 나라에 그래도 된다는 법은 없다.

윤어게인 진영은 이렇게 주장한다.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다. 이미 권력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12·3 계엄은 쿠데타가 아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루이 나폴레옹은 무려 대통령 신분으로 내각과 의회를 뒤엎은 다음, 파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통해 황제로 즉위했다. 이를 ‘친위 쿠데타’라고 부른 지 수십년 째다. 윤어게인 진영은 들어보지 못한 표현인 것 같다.

국민의힘 대표 장동혁이 지난달 19일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하고 있는 모습. 사진=장동혁 페이스북.

‘시장만능, 독재자 미화’ 콘텐츠 빈곤한 보수정치.

— 비상계엄 지지는 보수의 가치와도 동떨어져 있다. 공화주의는 보수의 가치 아닌가. 공화국 체제를 흔들고 권력을 독점하려 한 것이 윤석열 아닌가?

일반적으로 민주공화국은 권력을 나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통령의 행정부뿐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각 기관은 고유한 권력을 갖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와 정부의 대표자이지만 정부의 모든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선출된 대통령과 선출된 입법부, 특히 총선으로 과반을 차지한 다수당은 민주적 정당성 면에서 거의 동등하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서 입법부를 무력화하려 했다면, 이는 대통령 자신에게 없는 권력을 넘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12·3 계엄은 권력 남용이고 친위 쿠데타다. 이를 옹호하는 것은 법의 지배 같은 자유주의 기본질서에 어긋난다.

이렇게 원칙만 놓고 본다면 보수는 윤어게인과 함께 해서는 안 된다. 보수가 정말로 우리나라의 자유 헌정질서를 핵심 가치로 여긴다면, 윤어게인과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 ‘한국 특색 자유민주주의’라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 윤어게인 세력을 왜 배척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나?

아무래도 다수의 흩어진 중도층보다는 소수의 완고한 급진우파 목소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정치는 서로 입맛이 다른 사람끼리 어느 식당을 갈지 고르는 과정이다. 매번 단순 다수결로 식당을 고를 수도 없고, 매번 소수의 입맛만 따를 수도 없다.

그래서 정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식당, 다시 말해 최대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 대안을 찾기 위해 각자가 자신의 입맛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대안을 결정하는 과정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자유주의적 정치 질서가 있을 때 입맛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태극기와 성조기가 광화문 광장을 수놓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면, 진보와 보수가 서로 도덕 감정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타협점을 찾거나, 온건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 동맹을 이뤄서 급진 우파를 철저한 소수파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어느 쪽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수 진영 안에서 누군가가 온건한 보수 깃발 아래로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선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나라 보수 정치인들에게 남은 콘텐츠가 별로 없다. 기회 균등 없는 능력주의, 시장만능주의, 과거 독재자 미화가 거의 전부다. 폭넓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만한 무언가가 없다. 그러니 선거를 앞둔 정당 입장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보수주의를 연구하는 학자 상당수가 공통점 하나를 공유한다. 보수주의란 무엇인지를 두고 하나의 정답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구자들 스스로 그렇게 고백했다.

예를 들어 러셀 커크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에서 보수주의 운동 성장에 크게 기여한 사람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도 커크가 쓴 ‘보수의 정신’이 번역돼 있다. 그 책 후반부에서, 커크는 ‘보수주의자란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⑸ 무엇이 보수주의이고 아닌지를 가르는 엄격한 기준 따위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책 전반에서 커크는 에드먼드 버크를 시작으로 보수적이라고 할 만한 인물 몇몇의 삶과 생각을 요약한 다음, 그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가치를 정돈하는 식으로 보수주의자의 정신을 소개한다. 여기서 커크는 초월적이고 불변하는 도덕 질서가 있다는 믿음, 관습처럼 오랜 시간 합의된 지혜와의 연속성 등을 보수주의의 기본 신조로 제시했다.

물론, 이 신조는 시대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도 강조했다. 커크 본인도 책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한다.

미국 역사학자 조지 내쉬의 책도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다. 해외에서 미국 보수주의를 연구할 때 자주 참고하는 저서인 것으로 보인다. 그 책 서론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내용이 엄청나게 달라지는 복잡한 현상’이다. 그래서 내쉬는 여러 보수주의를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정의를 찾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푸념한다.⑹ 그리고 커크처럼 흔히 보수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소개하며 책을 끝마친다.

영국의 ‘일국민 보수주의’는 급진적 평등주의에 반대했지만, 과도한 불평등이 사회 질서와 통합을 해친다고 여기고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가부장주의적 보수주의라고도 부른다. 비슷한 사례로 캐나다의 붉은 토리(Tory), 미국의 록펠러 공화주의 등이 있다.

단 하나의 정답 같은 보수주의는 없다.

—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했나?

‘보수주의 Conservatism’는 무언가를 간직하다, 보존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Conservare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에는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가 빠져 있다.

처음 정치적 의미로 ‘보존’을 앞세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 프랑스 혁명가들이었다. 혁명가들이 혁명의 성과를 보존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보수적 conservateur’이라는 말이 법률 용어나 신학 용어를 넘어서 정치적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구체제를 부수고 등장한 공화국을 지키는 것이 곧 보수적인 것이었다.⑺

이후 나폴레옹 시대를 지나 1814년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왕정 복고가 이뤄진다. 당시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를 정립하면서 구체제와 프랑스 혁명의 성과 일부를 모두 계승하는 헌법(1814년 헌장)을 만들었다. 이 시기 왕당파였던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자작이 루이 18세의 입헌군주제 헌법을 지지하는 잡지를 만드는데, 그 이름이 ‘보수파 conservateur’였다.

비록 잡지 자체는 금방 사라졌지만 그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잡지를 계기로, ‘보수파 conservateur’가 과격한 혁명에 반대하고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1830년에는 프랑스어 ‘보수파’가 영국으로도 수출된다. 당시 토리당원이자 평론가였던 존 클로커가 토리당을 ‘보수당 Conservative’이라고 부르면서, 처음으로 ‘보수’가 정당 이름으로 사용된다.⑻ 그리고 보수당의 강령, 보수당 사람들의 생각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가 아는 영어 단어 ‘Conservatism’이 탄생한다.

이처럼 최초의 보수파는 혁명 성과를 지키는 사람들이었고, 곧 이어 등장한 보수파는 급진적 자유화에 저항하며 왕정이나 종교, 관습처럼 오래 지속된 가치를 보존하는 사람들이었다.

— 보수주의 어원인 ‘보존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Conservare)엔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 빠져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혹시 속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모든 변화를 거부해야 할까, 아니면 변화의 속도를 조절해야 할까, 라고 했을 땐 전자가 보수로 느껴지는 것처럼.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 앞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다. 만약 급진적 혁명이 일어날 것 같다면, 혁명에 맞서기 위해 무력을 써야 할까, 아니면 개혁을 추진해서 사람들을 체제 일원으로 끌어들여야 할까. 개혁을 추진한다면, 어디까지 추진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각 시대와 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답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보수주의는 끝없이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간혹 영국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를 보수주의의 원조 또는 아버지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버크는 휘그당원이었고 미국 혁명을 옹호한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미국과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버크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도 아니었다. 보수주의는 에드먼드 버크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나무가 아니다.⑼

이렇다 보니 아예 ‘정치적 보수주의’ 또는 ‘보수주의 정치철학’ 같은 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보수주의를 어떤 정교한 정치 철학이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경계하고 친숙한 것을 선호하는 성향 또는 낯선 것을 시도하기보다 이미 자리 잡은 것을 좋아하는 기질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⑽

흔히 말하는 ‘심리적’ 보수주의가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러셀 커크 같은 보수주의 사상가도 보수주의를 일관된 이념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나 태도로 여겼다.

우리나라 보수 진영에서는 누가 원조 보수인지를 두고 다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단어의 역사를 보면 무의미한 싸움이다. 세상에 단 하나의 정답 같은 보수주의는 없는 것이다. 지금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 변화 속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보수주의자다. 단지 특정 시점에서 다수파에 속하는 사람과 소수파에 속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 참고문헌

1. 유지니아 쳉, 논리의 기술, 김성훈 번역, 열린책들, 2020.
2. 존 R. 히빙 외,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김광수 역, 오픈도어북스, 2025.
3. Adam Waytz, et al, Ideological differences in the expanse of the moral circle, Nature Communications 10, 2019.
4. Brendan Nyhan, et al, Like-minded sources on Facebook are prevalent but not polarizing, Nature, 2023.
5. 러셀 커크, 보수의 정신, 이재학 옮김, 지식노마드, 2018.
6. 조지 H. 내쉬, 1945년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지적 운동, 서세동 옮김, 2022.
7. Richard Bourke, What is Conservatism? History, Ideology and Party,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17(4), 2018.
8. 루돌프 피어하우스, 보수, 보수주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4, 이진일 옮김, 푸른역사, 2019.
9. Richard Bourke, What is Conservatism? History, Ideology and Party,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17(4), 2018.
10. Nicholas Smyth, There Is No Such Thing as a Political Conservative,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24(1), 2025.

이완은 누구.
  • 1994년 8월 출생.
  • 다이소 등 서비스업에서 5년 동안 일했다.
  • 자살 예방과 기회 균등, 정치철학을 연구한다.
  • 한국 진보, 보수를 분석한 책 ‘좌업좌득’, ‘함께 자유로운 나라’를 썼다.
  •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위기 앞에 혼자 되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관련 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