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의 색다른 진보 1.] 슬로우뉴스 민완기자 김도연이 젊은 독립 연구자 이완과 ‘지금’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새벽 배송’. (⏰17분)
진영 논리가 판치는 시대, ‘논쟁’이 어렵다. 말, 글로 논하여 다투기보다 SNS에 서로 조롱하고 비아냥대기 바쁘다. 이미 각 부족 입맛에 맞게 답을 정해 놓은 좌우파 지식인은 한 치 이견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토론은 물러나면 죽는 전장일 뿐이다.
사회적 합의를 위해 차분한 논쟁이 필요하다. 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에 의해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어떤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토론 테이블에 꺼내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성역화도, 언더도그마도 타파 대상이다.
색다른 관점을 가진 철학자를 소개한다. 독립 연구자 이완(31)이다. 그의 철학과 생각이 정치·사회 논쟁에 작은 불쏘시개가 되길 바란다. 그와 나눈 첫 인터뷰 주제는 우리 사회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쿠팡 새벽 배송 금지’ 이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지난달 택배노조가 ‘택배 분야 사회적 대화 기구’ 회의에서 밤 12시에서 새벽 5시까지 배송(새벽 배송)을 제한하자고 한 뒤 찬반 토론이 뜨거웠다.
- 보수파 한동훈(전 국민의힘 대표)은 “새벽 배송을 하는 분들은 강요받아서 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주간과 야간 중 야간을 선택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노측인 민주노총은 “야간 노동 때문에 발생하는 택배 기사들의 과로사를 방지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논객 진중권은 “자유주의(liberalist)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의 철학적 대립”이 깔린 이슈라고 봤다.
- 언론 역시 한 쪽에선 일자리가 사라지고 소비자 편익이 침해될 수 있음을, 또 다른 한 쪽은 과로로 사망하는 노동자의 죽음을 힘주어 보도하고 있다.
새벽배송 논쟁서 ‘선택의 자유’가 설 자리는 없다.
— ‘쿠팡 새벽 배송 금지’ 논쟁에서 반대자나 보수 진영은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반박한다. 야간 노동이 몸을 해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돈을 더 벌겠다는 개인의 선택을 왜 국가가 규제하느냐는 물음이다.
“보수가 선택의 자유를 앞세우면 문제가 커진다. 대체로 보수주의자는 ‘결혼 배우자로 동성(同性)을 선택할 자유’, ‘나이와 상관 없이 포르노를 선택할 자유’, ‘군대를 다녀올지 말지 선택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자유는 부도덕한 방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벽 배송 논쟁에서 선택의 자유가 앞서는 이유를 따로 설명해야 한다. 추가 설명 없이 선택의 자유를 앞세우는 것은 모순이다.
사실 이번 논쟁에서 선택의 자유는 설 자리가 없다. 전통적인 자유주의 관점에서, 국가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피울 자유’나 ‘최저임금보다 적은 돈으로 일할 자유’, 심지어 ‘양심에 따라 군대에 가지 않을 자유’까지 금지할 수 있다. 도덕이나 공공 이익 같은 마땅한 이유가 있다면, 자유주의자는 아무런 모순 없이 선택의 자유를 후순위로 둘 수 있다. 역사 속 자유주의는 자유‘도’ 소중하다는 생각이었지, 자유‘만’ 소중하다는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론’ 저자로 잘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각자는 사회를 방어하는 데 또는 사회 구성원이 공격이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필요한 노동과 희생 중에서 자기 몫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의무를 거부하는 개인이 있으면 사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강제할 수 있다.’⑴
다른 책도 아닌, 바로 자유론에 나오는 말이다. 밀은 최대 다수가 행복하려면 반드시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모든 상황에서 자유를 우선시하지는 않았다. 최대 다수의 행복, 공공 이익을 위해서 사회가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행동을 강제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개념으로 잘 알려진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도 ‘자유의 두 개념’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고전 정치철학자들은 (…) 철학자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평등과 같은 자유 이외의 목표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를 다른 가치와 상충되는 만큼 제한할 태세가 돼 있었고, 또는 심지어 자유 자체를 억제할 태세마저 갖추고 있었다.’⑵”

— 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자유지상주의’로 통용되고 있다. 규제와 규율이 없는 상태를 자유주의라고 해석하곤 하는데, 본래적 의미로써 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원래 자유주의는 소수 권력자의 폭정을 막고, 보다 도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상이었다. 유럽에서 처음 ‘자유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들이 요구한 것은 그저 간섭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라 법 앞의 평등과 대의민주주의 정부였다.⑶ 자유주의자는 누군가가 날 때부터 미천하다는 생각을 거부했고, 모두가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하기 때문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만약 강자의 자유가 약자의 자유를 위협한다면, 자유주의 국가는 강자의 자유를 규제해서, 즉 자유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해서 동등한 권리를 실현해야 했다. 평등한 대우와 평등한 권리, 이를 위해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가 여러 자유주의자들의 공통 신념이었다.”
— ‘새벽 배송을 선택할 자유는 없다’는 관점도 가능하다고 보나?
“가능하다. 만약 새벽 배송이 비도덕적인 일이라면, 영국 철학자 존 로크는 정부가 새벽 배송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로크에게 자유란 기독교 도덕의 굴레 안에서 간섭받지 않고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도덕 밖에는 자유가 없다.⑷ 새벽 배송이 그렇게까지 비도덕적인지는 조금 더 따져봐야 하지만, 만약 비도덕적이라면 새벽 배송 금지는 어떤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 없는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으니까.
노동자는 항상 다수다. 특정 업계나 기업이 인력난을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 기업에 적합한 노동자가 부족한 것이지, 노동시장에 들어와 있는 전체 노동자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나 노동 공급은 수요보다 많다. 그런 상황에서 자발적 노예 계약을 허락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스스로 저임금 또는 무임금으로 일하기 시작하면, 노동자 사이에서 임금 인하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노동자 전반의 생활 수준을 하락시킬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선진국이 최저임금 또는 산업별 단체협상 제도 등으로 노동자 간 경쟁을 제한하고 임금을 보호한다.
이는 반자유주의적인 일이 아니다. 전통적 자유주의자는 국가 개입을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국가는 옳은 일을 하며 정의를 증진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자들에게도 오랜 상식이었다. 단지, 자유주의자는 마땅한 이유와 적법한 절차를 요구했을 뿐이다. 국가를 자유의 근간이 아니라 자유의 적으로 여기는 관점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건강과 생명이 달린 일에 선택의 자유만 들고 오는 것은 설명이 부족한 의견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유를 앞세우는 것이 반자유주의적일 수도 있다. 애덤 스위프트의 말을 빌리면, ‘자유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 조리 있게 복지국가와 그 이상의 국가도 완벽하게 정당화할 수 있다.’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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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권기돈 옮김, 펭귄클래식, 2009.
⑵. 이사야 벌린,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박동천 역, 아카넷, 2019.
⑶.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김승진 옮김, 니케북스, 2023.
⑷. 폴 켈리, 로크의 통치론 입문,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18.
⑸. 애덤 스위프트, 정치의 생각, 김비환 옮김, 개마고원, 2011..

위험하니까 물러서자? 진보는 위험을 통제하며 나아가는 것.
— 반대로 쿠팡 새벽 배송을 막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새벽 배송 규제가 진보적인가? 우리 삶을 장기적으로 더 낫게 해줄 거라 보는가?
“내가 믿는 ‘진보’는 이렇다. 더 많은 질병과 재난을 정복하고,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기술, 경제 발전에 참여해서 형평성 있게 발전 성과를 누리도록 하는 것.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용한 서비스를 마냥 없애려고 하는 것은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다. 서비스가 사라지면 편리함도 사라진다. 일자리도 사라진다.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다. 야간에도 덜 위험하게 일할 법을 찾는 것이 더 진보적 방식이다.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서비스를 없애야 한다면, 같은 논리로 비행기 승무원과 소방관의 야간 노동도 없애야 한다. 발암 물질을 접해야 하는 반도체 공장 직원도 사라져야 한다. 특히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일하는 모든 직업은 사라져야 한다. 자외선은 야간 노동보다 확실한 발암 물질이니까. 최근 여러 진보주의자가 돌봄 노동 가치를 강조하지만, 그 돌봄 노동은 정신을 소모시켜서 번아웃 등 여러 정신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야간 노동과 돌봄 노동은 소모시키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많은 노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건강에 나쁘다. 그래서 위험성만을 근거로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너무 많은 일이 사라진다. 진보주의자는 노동자가 마땅한 대가를 받게 하는 데, 그리고 몸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로를 강요받지 않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위험이 있다면 극복해야 한다. 진보란 위험하니까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사회적 협력의 힘으로 위험을 통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새벽 배송이 정말 건강에 해로운가? 노동장관은 “2급 발암 물질”이라고 주장했다. 믿을 만한 자료에 기반한 주장인가? 과학적인 논쟁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는가?
“정확히는 ‘2급’이 아니라 ‘2A군’이다. 얼마나 위험한지 순서대로 나타내는 등급이 아니라 분류표다. 2급이라고 하면 왠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위험해 보이지만, 국제암연구소 자료를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국제암연구소는 자외선과 담배처럼 암과 관련 있다는 근거가 탄탄한 요인들을 ‘1군’으로 분류한다. ‘2A군’은 통계나 동물 실험 등 충분하지는 않지만 많은 근거가 있는 요인들의 모음이다. 여기에는 생체 시계를 거스르는 노동과 65도 이상의 뜨거운 물, 가공되지 않은 붉은 고기가 포함돼 있다. ‘2B군’은 암과 관련은 있는데 근거가 비교적 약한 요인들이다. 전자파가 2B군에 속한다. 마지막 ‘3군’은 근거가 너무 부족해서 암과 관련 있는지 없는지 아직 모르는 요인들이다.⑴
2A군 목록에 새벽 배송이 명확하게 표현돼 있지는 않다. 다만 새벽 배송은 생체 시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라서 2A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생체 시계’다. 꼭 새벽이 아니더라도, 해가 다 뜨지 않은 이른 아침에 일하는 것 역시 생체 시계를 어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에 2A군에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국제암연구소 분류만 봐서는 새벽 배송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말하기 애매하다. 정육점 돼지고기와 같은 수준이고, 자외선만큼 확실하지도 않으니까.
국제암연구소 분류법은 근거가 얼마나 탄탄한지 보여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암에 걸릴 확률이 높은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부분은 구체적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안다.”
“0-5시 배송 금지, 이 과로를 저 과로로 대체할 것.”
— 심야 노동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는 적지 않다.
“물론 국제암연구소 자료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새벽 배송이 건강에 나쁘다는 근거는 많다. 미국의 한 연구진은 간호사 십만 명을 24년 동안 추적하며 교대 근무 위험성을 연구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5년에서 9년 동안 밤낮 교대로 근무한 사람은 낮에만 일한 사람에 비해 심장 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19% 더 높았다. 10년 이상 교대로 일한 사람은 27% 정도 높았다. 한국 연구에서도, 교대 근무 간호사는 소화기관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비교적 크다는 점이 밝혀졌다.⑶ 사람은 부엉이 같은 야행성 동물이 아니라서, 햇빛 없는 세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새벽 배송이 건강에 나쁘다는 주장은 과학적 사실로 보인다.
다만, 논쟁 전반이 과학적으로 이뤄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확히는 규제가 이뤄진 다음 일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따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노총은 ‘0-5시 배송’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국제암연구소는 구체적 시간대를 문제 삼지 않았다. 생체 시계를 거스르는 노동 자체가 2A군이다. 그렇다면 오전 5시 이전에 물류센터에 가서 물건을 싣고 이후부터 배송을 시작하는 것도 2A군에 속하는 노동일 수 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호르몬 분비 주기를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국제암연구소 자료를 근거로 내세웠다면, 0-5시 배송 금지는 논리적으로 일관된 대책이 아니다. 암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렇다.
게다가 0-5시에 배송할 수 없게 한다면, 배송 기사들이 더 무리하게 움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출퇴근 시간, 등하교 시간 전에 일을 끝내려면 더 서둘러야 할 수 있고, 혹시라도 그 시간대에 진입하면 도로에 갇히거나 아파트 단지 등에서 엘리베이터를 쓰기 어려울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일 테니까. 다시 말해 0-5시 배송 금지는 이 과로를 저 과로로 대체하게 될지도 모른다.”
— 왜 쿠팡의 새벽 배송만 규제하느냐는 반론도 있다. 쿠팡 기사들만 새벽 시간에 노동하는 건 아니잖나?
“규제 형평성 문제다. 새벽에 일하는 것은 배송 기사뿐만 아니다. 코스트코의 냉동 식품 부서 직원들은 오전 1시부터 10시까지, 또는 오전 3시부터 오후 12시까지 근무한다. 매장이 오픈하기 전에 냉동고와 매대에 물건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대 근무도 아니다. 한 번 새벽 근무를 시작하면, 부서를 옮기지 않는 한 비슷한 시간대에 일해야 한다. 매번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지게차를 움직이기 때문에 새벽 배송보다 안전하다고 할 수도 없다. 야간 노동 위험성 때문에 0-5시 배송을 금지한다면, 오픈 시간이 중요한 소매업도 새벽을 이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노동자 건강권을 앞세운 순간, 이 논쟁은 새벽 배송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몇몇 진보주의자는 모든 야간 노동을 점진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필수적 영역은 예외로 둔다. 만약 필수적이어서 어쩔 수 없으니 대신 보상과 휴식 시간을 늘리자고 한다면, 야간 노동 폐해를 관리할 다른 방법이 있다고 자인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야간 노동 억제의 설득력은 더 약해진다.
이런 문제는 둘째치고 어떤 식으로든 야간 노동 최소화를 추진한다고 하자. 기업은 그 손해를 어떻게 벌충하려 할까. 다이소나 메가커피가 키오스크를 확대하고 은행이 오프라인 지점을 폐쇄한 것처럼, 유통 기업은 물류센터와 사무 자동화를 서둘러서 그쪽 인력을 감축할 수 있다. 아마존처럼 물류센터를 자동화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늘어난 비용은 자동화를 촉진하는 주 요인 중 하나였다. 종합소매업 브랜드는 오프라인 영업 시간을 늦추는 대신 매장을 줄이고 배송에 더 의존하게 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배송 기사를 위해 다른 노동자 일자리를 없앨 수도 있는 셈이다.

야간 노동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무서운 것은 사회적 지위 하락이다. 가혹한 지위 경쟁 속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감소하면, 사람은 심각한 스트레스 탓에 정신 질환에 걸리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⑷ 꼭 절대 빈곤에 빠지지 않더라도, 지금 지위가 위태롭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큰 불안을 느낀다.⑸ 적지 않은 배송 기사들이 새벽 배송 규제에 반대하는 데는 이런 원인이 있는 것 아닐까. 눈앞 문제를 치우려다가 더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될 수 있다.”
— 이번 논쟁에서 쿠팡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은 많지만, 노동 규제 이후 어떻게 기업이 반응할 것이냐를 고민하는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계 요구에 따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관철시켰고,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은 ‘키오스크’로 대응했다. 그런 점에서 자동화를 우려하는 관점은 의미가 있다.
“물론 자동화가 반드시 일자리를 줄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속도다. 자동화를 촉진해 버리면, 한 곳에서만 오래 일한 사람들,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새 일자리가 나타날 때까지 실업 상태를 견뎌야 한다. 새 일자리가 나타나더라도, 노동자가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자동으로 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10년 차 대형마트 계산원을 하루 아침에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로 키울 수는 없다. 풍족한 실업 급여와 적극적 재교육이 없다면, 너무 빠른 자동화는 낙오자를 만들 것이다. 애초에 어느 분야에서 새 일자리가 생길지 예측하고 미리 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이미 대기업의 스마트팜 단지 확대를 가로막은 적 있다. 이번에도 규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면, 기업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 할 것이다. 기업도 피할 수 없는, 무질서하고 과열된 경쟁이 핵심 원인인데, 이 원인을 방치하고 그 염증에만 약을 바르는 것은 지속 가능한 해법이 아니다. 당장의 염증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원인이 남아 있다면 어디서든 비슷한 문제가 또 일어날 것이다. 결국 기회 균등과 완전 고용 같은 구조 변화가 필요하다.
구조 변화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고 반박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서 0-5시 배송 규제가 신속하게 도입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장기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시점에서 사회적 갈등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 없는데, 갈등을 초래하는 대책이 특별히 더 신속하고 저렴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논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진보 진영의 단골 멘트 아니던가. 지금 논쟁은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다. 굉장히 소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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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IARC, NIGHT SHIFT WORK, IARC MONOGRAPHS ON THE IDENTIFICATION OF CARCINOGENIC HAZARDS TO HUMANS VOLUME 124, 2020.
https://publications.iarc.who.int/Book-And-Report-Series/Iarc-Monographs-On-The-Identification-Of-Carcinogenic-Hazards-To-Humans/Night-Shift-Work-2020
⑵. Céline Vetter et al., “Association between rotating night shift work and risk of coronary heart disease among women,” JAMA 315, no. 16 (2016): 1726-1734.⑶. 이경재 등, 여성근로자에서 교대근무와 심혈관계와 소화기계 증상과의 관련성, 대한산업의학회지 제20권 제4호, 2008.
⑷. 키스 페인, 부러진 사다리, 이영아 옮김, 와이즈베리, 2017.
⑸. 대니얼 키팅, 남보다 더 불안한 사람들, 정지인 옮김, 심심, 2018.
“위험한 일자리 없애야? 관찰자 보기 좋은 세상 만들 뿐.”
— 홈플러스 일자리 등도 우리사회에서 ‘좋은 일자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쁜 일자리’를 없애는 게 답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흔히 좋은 일자리라고 하면, 안정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을 떠올린다. 넉넉한 월급과 번듯한 명함이 포인트다. 그런 점에서 본사 정규직 사원을 제외하면, 홈플러스 같은 대형마트 일자리는 좋은 일자리가 아닐 것이다. 홈플러스에서 계산원으로 일하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미 대형마트 일자리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홈플러스는 15개 매장을 닫고, 직원들에게 무급 휴직을 줄 예정이다. 이마트 등도 기존 매장을 줄이는 추세다. 아마 지금 우리나라에서 매장을 확장하는 종합소매업 브랜드는 코스트코뿐일 것이다. 이대로 대형마트 일자리가 줄어들게 방치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 홈플러스가 무너지면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볼까. 바로 전문직이 아닌 저숙련 노동자다. 특히 새 기술을 빠르게 배우기 어려운 중노년 노동자가 위험하다.
대기업은 예전만큼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2017년에는 종업원 300인 이상 기업체들이 일자리 17만 개를 만들었는데, 2023년에는 6만 명만 만들었다. 그중 30%도 2년 미만 일자리다.⑴ 최근에는 기존 직원을 내쫓는 곳도 많다. 그 탓에 우리나라 노동자의 평균 은퇴 연령은 50세 밑으로 떨어졌다.⑵ 대기업 직원의 평균 근속기간도 8년 정도다. 30대에 기껏 취업해도 40대가 되면 다음을 고민해야 할 수도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중소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공급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임금 체불 규모는 매년 늘고 있고, 그중 대부분은 중소기업에서 일어난 일이다. 비정규직, 불안정 일자리도 늘고 있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는 80년대부터 이어진, 뿌리 깊은 문제다. 다시 말해, 삶의 질을 개선할 기회는 많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홈플러스 같은 대형마트는 최저임금이라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공급해 왔다. 특히 저숙련 중노년 여성을 대규모로 채용해 왔다. 대학에 가지 못했거나 경력이 단절된 중노년 여성에게, 대형마트는 자녀 학원비라도 벌 수 있는 곳이다. 기업에 따라서는 호봉제로 꾸준히 월급을 올려주는 곳이기도 하다. 좋은 일자리는 아니지만, 필요한 일자리다. 그런 대형마트 일자리가 사라지면, 그곳 직원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사실상 홈플러스가 부족한 사회 안전망을 벌충해 온 셈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건강 식품인가 불량 식품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충분한 대안을 마련하지도 않고 나쁜 일자리 소멸을 방치하거나 앞당긴다면, 실업과 상대적 빈곤이 기다릴 뿐이다. 위험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니까 없애야 한다는 주장은 정말 다수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 관찰자가 보기 좋은 세상을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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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국가데이터처, 2017년, 2023년 일자리행정통계.
⑵. 미래에셋 투자와 연금 센터, 미래에셋투자와연금리포트 No. 54, 2022.

‘나쁜 일자리’ 대체할 공공 역할?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
— 이 부분에서 공공 역할은 무엇인가? ‘나쁜 일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정책이 있는가?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성장 잠재력이 있는 중소기업에 정기적으로 고용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올해 중앙정부는 민생지원금으로 12조 원 정도를 지출했다. 12조 원이면, 50만 명에게 매달 200만 원 씩 월급을 줄 수 있는 돈이다. 정부가 매년 12조 원 씩, 정기적으로 고용 보조금을 지급하면, 중소기업과 대기업 격차를 다소 줄일 수도 있고, 유동성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중견기업으로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때 성장 잠재력은 공무원이 판단하기보다 금융권이 판단하게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국채를 발행해서 기업은행에 돈을 쥐여 주고 투자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업이 부담하는 사회보험료를 폐지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등을 다 합쳐서, 우리나라는 노동자에게 임금의 9% 정도를, 사업자에게 고용한 노동자 임금의 10% 정도를 사회보험료로 부과한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아닐지 모르지만, 중소기업 입장은 다르다. 이미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창출한 소득의 80% 이상을 노동자에게 지급하고 있다.⑴ 지금처럼 최저임금이나 사회보험료에만 의존한다면, 중소기업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사회보험료를 폐지해서 새로 채용하거나 임금을 올려줄 여력을 키워야 한다.
실제로 덴마크는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기업에 따로 사회보험료를 부과하지 않는다. 대신 OECD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소득세를 걷는다. 우리나라 노동자는 OECD에서 가장 적은 소득세를 내는 편이다. 물론 소득세를 올리자고 하면 반발이 거셀 테니, 초과이윤세를 도입하고 토지세를 강화해서 복지 재정을 충당하는 것은 어떨까.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는 경제 효율성을 덜 해칠 뿐만 아니라 기회 균등 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미국 능력주의 철학자 토마스 멀리건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은 자신의 경제적 지대를 누릴 자격이 없으며, 그것을 몰수하는 데 정의의 장벽은 없다.’⑵
그리고 무질서한 경쟁을 손봐야 한다. 지금 우리는 균등한 기회 없이 소수 생존자를 가려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혁신을 촉진하고, 부패를 억제하고, 최대 다수의 능력을 발전시켜서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능력주의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하지만, 엄격한 능력주의자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단 한 번도 능력주의를 제대로 도입한 적 없다. 일단 경제적 지대를 그냥 방치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의 능력주의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세상이 충분히 공정해서 모든 것을 내 노력으로 얻었다는 착각, 즉 ‘공정한 세상 오류’만 가득할 뿐이다.”

더 나은 행동하도록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
— 능력주의와 기회의 균등은 이완 연구자가 관심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균등한 기회를 위한 필요 조건은 무엇인가?
“엄격한 기회 균등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동과 청소년부터 보호해야 한다. 아동과 청소년이 빈곤감과 절망감을 느끼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기에 느끼는 심리적 고통은 성인기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사교육비를 조정하기 위해 강제력 있는 사회적 합의체를 구성해야 한다. 최저임금위원회처럼, 정부와 학원, 소비자 대표가 모여서 사교육비 인상률을 제한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대학 무상교육까지 도입해야 한다. 넉넉한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직업 훈련 프로그램도 필요할 수 있다.
이렇게 일자리를 늘리고 이직을 수월하게 만들면, 기업이 노동자를 붙잡기 위해 근무 조건을 개선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 협상력도 강화할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980년대 후반부터 IMF 외환위기 이전이었다. 그때는 구직자 한 사람 앞에 일자리 세 개가 기다리고 있던 시대다.⑶ 노동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던 셈이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1987년에 대투쟁을, 1996년에 전국적 총파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일본에서도 인구절벽 탓에 임금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⑷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일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가 중요하다. 일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규제만 강화한다면 결국 노동자도 피해를 볼 수 있다. 갑질, 과로사 등 노동 문제는 법 조항에 한 줄 더 추가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랬다면 체불 임금이 2조 원 넘게 쌓이지 않았어야 했다.
노동자도 절판된 책이나 한정판 굿즈를 갖고 있다면 원가보다 비싸게 팔 것이다. 정확히 같은 원리로, 기업인은 현금 유동성을 위해 임금을 낮추거나 과로를 강요한다. 돈을 벌고 싶은 사람들의 일반적 행태를 기업인만의 이기심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이득을 보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기회 균등과 완전 고용에 최대한 근접해서, 허튼 이기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이 더 나은 행동을 고를 수 있도록 사회 조건을 바꾸는 것이 진보주의의 오랜 목표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분명 이런 변화는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니 괜한 감정 싸움에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
⑴. 임용빈, 노동소득분배율의 결정요인과 대기업/중소기업 사이의 변화, 한국노동연구원, 월간 노동리뷰 2021년 5월호.
⑵. Thomas Mulligan, Do People Deserve their Economic Rents?, Erasmus Journal for Philosophy and Economics, Volume 11 Issue 2, 2018.
⑶. 요코타 노부코, 한국 노동시장의 해부, 그린비, 2020.
⑷. 한국은행 동경사무소, 2025년 일본의 임금인상 현황 및 시사점, 2025.
— 새벽 배송 규제 논의가 소모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죽었다.’ 몇몇 진보주의자가 이 사실을 앞세우면서 선과 악 대결로 논의를 비틀었다. 기업인뿐 아니라 낮에 장 볼 시간이 없는 소비자까지 생명보다 속도를 우선시하는 악인(惡人)이 됐다. 감정 싸움이 시작되면 논리적 대화는 더 어려워진다. ‘나는 옳고 정의롭다’는 태도는 언제나 진보를 가로막는 주적이었다. 이번 논쟁에서도 그런 태도를 숨기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감정 싸움을 걸었으니 유익한 대화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완은 누구.
- 1994년 8월 출생.
- 다이소 등 서비스업에서 5년 동안 일했다.
- 자살 예방과 기회 균등, 정치철학을 연구한다.
- 한국 진보, 보수를 분석한 책 ‘좌업좌득’, ‘함께 자유로운 나라’를 썼다.
-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위기 앞에 혼자 되지 않는 나라를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