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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새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세월호 시행령 폐기 촉구에 동참한 문화예술인 594명 중 하나라는 이유로 블랙리스트라는 딱지가 생겼던 거다.

실은 평소 정치 성향이 왼쪽으로 많이 가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상식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동참했던 일이다. 대단한 용기의 발현도 아니었고 인간 같지 않은 헛소리를 하는 상대에게 저 구석탱이 끝자락에서 “뭐 인마?” 하고 소심하게 한마디 거든 것 정도랄까.

세월호 리본

같이 이름을 올렸던 분들에 비하면 내세울 게 없다시피 한 사람이라 딱히 불이익을 체감할 만한 일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다. 지금은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폭로되고 관련자들이 형사처벌을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전처럼 그 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전에는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매일 자식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고 기사를 찾아 읽으시는 어머니는 오죽하셨을까. 그런 못된 일 하지 말라셨다. 이회창 씨의 열렬한 지지자셨던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아주 호된 소리를 들었을 거다.

“석희 씨는 정치적인 의견이 너무 세요. 그러다 큰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정치적인 의견이 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소셜 미디어에 한두 마디, 그것도 한 달에 두어 번이나 썼으려나. 이것조차 의견이 강해 보인다니 요새는 공개된 소셜 미디어에선 정치 얘기를 삼가는 편이다. 친구 공개로 쓰는 곳에나 간혹 한두 마디씩 쓰지.

뭐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내가 하는 말들이 만에 하나라도 클라이언트에게 해가 될까 싶어서다. 번역가의 정치색이 마음에 안 든다고 영화를 보이콧한다거나 하면 나도 돈 받고 일하는 프로이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에게 염치가 서질 않으니까. 정말 소리를 내야겠다 하는 곳에선 언제든 다시 내겠지만, 그 외 불필요한 잡음을 내진 않을 생각이다.

요새는 내 발언들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목소리 높여 강성으로 정부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던 투사도 아니고 체감도 안 되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것뿐이라 억울해할 이유는 없지. 이제 다들 겁먹지 않고 소리 높일 수 있는 때가 됐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 뿐이다.

스피커 마이크 의견 주장

대통령이 탄핵당하던 날 유명인들은 앞다투어 인스타그램에 삼계탕이며 치킨이며 사진을 올리며 풍자로 소신을 표현했고, 사람들은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선다며 댓글에 비겁하다 욕을 했다. 물론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게 비겁한 사정이든, 합리적인 사정이든, 가치관과 닿아 있는 사정이든.

‘할리우드 텐’과 트럼보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매카시즘[footnote]매카시즘(McCarthyism): “1950년부터 1954년 사이에 일어난, 공산주의 혐의자들에 반대하는 떠들썩한 반대 캠페인으로, 대부분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직업을 잃었다.”(옥스포드 사전, ‘매카시즘’, 위키백과, ‘매카시즘’에서 재인용)[/footnote] 광풍의 전조였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할리우드의 감독, 배우, 작가 등 영화계 인사들을 잡히는 대로 사상 검증해서 빨갱이라는 딱지를 씌웠고, 그 결과 ‘할리우드 텐’[footnote]할리우드 텐: 194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 양원에서 승리하자, 미국 내 보수 경향은 더욱 강화됐고, 의회는 1947년 일부 영화인들을 반미활동조사위원회(AUAC)에서 증언하도록 소환했다. 소환된 43명의 영화인 중 19명이 증거 제출을 거부했고, 위원회는 그중 11명을 소환됐다. 그 ‘비우호적인 증인’ 중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나중에 위원회에 증언했고, 결국 10명이 남았다. 사람들은 이들을 ‘할리우드 텐’이라고 불렀다.

  1. 앨바 베시(Alvah Bessie), 각본
  2. 허버트 비버먼(Herbert Biberman), 각본 겸 감독
  3. 레스터 콜(Lester Cole), 각본
  4.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
  5. 링 라드너 주니어(Ring Lardner Jr). , 각본
  6. 존 하워드 로슨(John Howard Lawson), 각본
  7. 앨버트 맬츠(Albert Maltz), 각본
  8. 새뮤얼 오니츠(Samuel Ornitz), 각본
  9. 에이드리언 스콧(Adrian Scott), 제작 겸 각본
  10. 돌턴 트럼보(Dalton Trumbo), 각본

[/footnote]으로 대표되는 블랙리스트가 생겼다. 아무도 이들을 써주지 않았고 노골적인 불이익을 당했다.

그나마 저기는 10명인데 우린 10,000명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참 통 큰 스케일이다. 물론 할리우드서도 ‘할리우드 텐’만 불이익을 당한 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피해를 보았다.

트럼보

할리우드 텐 중에서도 가장 큰 불이익을 당했던 유명 작가 트럼보(로마의 휴일, 브레이브 원, 스파르타쿠스 등 집필)는 정부와 보수단체들의 집요한 방해에 맞서 싸웠고 끝내 실력으로 블랙리스트를 부숴버렸다. 그리고 전미 작가조합 로렐 상을 수상하던 날 저녁, 정부의 만행에 동조 혹은 침묵했던 영화계 동료들이 모두 모인 시상식장에서 트럼보는 이런 수상 소감을 밝힌다. (이하 영화 [트럼보]의 대사를 옮김.)

블랙리스트는 악마의 시절이었습니다.

악마의 손길이 닿지 않고서
그 시기를 버텨낸 사람은 없죠.
미약한 개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우린 각자의 본성과
필요와 신념에 의해 반응했습니다.
각자 처한 상황들이 그리하도록 강요했죠.

공포의 시절이었고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고
가족들이 해체됐죠.

그리고 어떤 이들은…
어떤 이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허나 그 어둡던 시절을 돌아보면서…
영웅이나 악당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없었기 때문이죠.
희생자들만 있었을 뿐.

희생자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나 행동을
강요받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었지만,
우린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늘 하는 얘기는
누굴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입니다.

오랜 세월 서로에게 남긴
수많은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도, 우리도 죽창을 쥐는 일은 없도록 하자. 지금 필요한 것은 세월이 서로에게 낸 상처를 살펴주고 보듬어 주는 인간애다.

트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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