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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다. 그 이미지도 여전히 세렝게티 초원이나 기근, 내전 같은 피상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십개의 국가 위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대륙’이며, 독립 이후에도 구체적인 수많은 지명과 인명, 사건이 얽히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아프리카 현대사를 형성해나간 ‘영걸’들을 위주로 이 지역을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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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영걸전 

  1. 서아프리카 삼국지: 프랑스령 삼국의 엇갈린 운명
  2. 동아프리카 쌍벽: 케냐타와 니에레레
  3. 콩고의 순교자 루뭄바: 독립에서 암살까지
  4.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5. 셀라시에, 타락한 계몽군주의 처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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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원한 판데믹과 에티오피아 한 지역의 내전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뻗어 나간 가지로, 명확하지는 않아도 확실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현대사의 줄기에는 에티오피아의 민족 분규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해묵은 원한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중국의 부상까지 아우르는 지역적, 국제적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에티오피아의 오늘을 이해하는 것은 곧 세계사의 중요한 퍼즐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퍼즐을 알아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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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을 읽을 분은 먼저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목차)

    • ‘아프리카의 뿔’의 중심
    • 악숨 왕국
    • 에티오피아 제국 (1270~1975)
    • 에티오피아-아달 전쟁(1529~1543)
    • 오로모인와 포르투갈 그리고 혼란기
    • 테워드로스 2세와 영국
    •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 제1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의 승리
    • 세 가지 유산 (1. 황제권 2. 국경 3.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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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넬리크 2세의 딸로 에티오피아의 첫 여성 통치자가 된 제우디투(Zewdito, 1876-1930, 재위: 1916-1930)
메넬리크 2세의 딸로 에티오피아의 첫 여성 통치자가 된 제우디투(Zewdito, 1876-1930, 재위: 1916-1930)

제우디투의 섭정으로 통치를 시작한 라스 타파리(Ras Tafari, ‘라스’는 ‘대공’에 해당하는 칭호)는 위대한 메넬리크 2세처럼 에티오피아의 근대화에 더욱 매진했다. 이는 보수적인 제우디투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라스 타파리를 비롯한 궁정 엘리트들의 합의는 확고했다. 이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신성한 황제국으로서 국체를 유지한 일본을 그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 생각했다.

‘마지막 황제’ 셀라시에 

이런 ‘일본주의자’ 그룹의 주도하에 여러 근대화 프로젝트와 개혁들이 추진되었다. 아디스 아바바에는 전기, 철도, 차량, 학교, 병원 등이 더 세워졌고, 수도와 지방을 잇는 인프라들도 확충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23년에는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여 온전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1924년에는 세계 각지로 사절단을 보내서 외국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도록 했다.

1930년, 제우디투가 사망하면서 라스 타파리는 마침내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제위에 오른 그의 이름은 이제 하일레 셀라시에였다. 이름의 뜻은삼위일체의 힘이었다. 공식적인 국가 원수이자 최고 권력자가 된 셀라시에는 이제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제우디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 재위: 1930-1974, 출처: 퍼블릭 도메인)
라스 타파리는 드디어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가 되었다.(1892-1975, 재위: 1930-1974, 출처: 퍼블릭 도메인)

1931년에 에티오피아는 일본의 메이지 헌법을 기반으로 에티오피아의 성문 헌법을 도입했다. 또한 그는 테워드로스 2세 이래로 선대 황제들이 추진했으나 지방 권력자들의 반발에 가로막혀 실패한 노예제 폐지를 밀어붙였다. 셀라시에 시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에티오피아의 노예제 폐지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냈다.

복수전, 제2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1935-36) 

그러나 이런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1922년 무솔리니가 집권하면서 파시스트 국가가 되었다. 우월한 이탈리아 민족이 지중해와 아프리카에 넓은 제국적 영토를 구축해야 한다는 파시즘의 주장은 스스로가 2류 열강임을 항상 의식하던 이탈리아인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입장에서 에티오피아는 자국이 팽창할 최적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먼저 이탈리아에서는 치욕적인 아도와 전투의 패배를 되갚아주고 에티오피아에 복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한편 이탈리아의 전략가들은 얼마 안 되는 식민지인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를 에티오피아를 중심으로 재편하고 육로로 연결하고자 했다. 경제 기획가들은 광대한 에티오피아를 개발하여 이탈리아 경제를 위한 자원 공급 기지로 활용하고, 개척민을 서늘한 고원지대로 보내서 인구압을 해소하기를 원했다.

무엇보다, 이미 세계의 다른 모든 영역이 이탈리아보다 강력한 열강의 손에 들어간 상태에서 에티오피아는 여전히 남아 있는 ‘만만한 상대’였다. 마지막으로 1931년에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는데도 손을 못 쓰고 있는 국제연맹의 무능함은 에티오피아 전쟁을 ‘해볼만한 게임’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는 1934년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국경에 요새를 설치하면서 에티오피아를 도발했고, 에티오피아가 여전히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는 반문명적인 국가라는 이유로 마땅히 이탈리아의 손에 정복되고 계도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국경에서 갖은 시비를 걸면서 침공의 빌미를 계속해서 만들어나갔다. 국제사회에서 이탈리아의 논리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이들은 없었으나, 이탈리아의 힘마저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1935년 이탈리아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을 개시했다. 에티오피아로서는 40년 전 아도와 전투 때와는 달리 이를 막아낼 재간이 도저히 없었다. 메넬리크와 하일레 셀라시에 치세를 거치며 에티오피아도 발전을 하긴 했지만, 중공업을 발전시키고 총력전을 준비한 이탈리아가 전차와 항공기까지 끌고 철저한 준비 끝에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에는 상대가 안 되었다. 심지어 이탈리아군은 제네바 협정에서 금지된 독가스까지 사용했다. 거기에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양쪽에서 쳐들어와 전력이 분산된 것도 문제였다. 1936년, 이탈리아군은 아디스 아바바에 입성했으며 하일레 셀라시에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국제연맹은 이번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에티오피아 템비엔(Tembien)에 주둔한 이탈리아 육군 포병 (1936, 퍼블릭 도메인)
에티오피아 템비엔(Tembien)에 주둔한 이탈리아 육군 포병의 모습 (1936, 퍼블릭 도메인)

짧은 점령이 남긴 민족 갈등의 ‘씨앗’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사실 거대한 에티오피아 전체에 대한 통제를 수립하는 것도 버거워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영국이 이탈리아와 전쟁에 돌입하면서 영국군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로 쳐들어 왔다.[footnote]에티오피아 전역뿐 아니라 영국은 각지의 전쟁 수행을 위해 수십만의 아프리카 식민지인들을 동원했는데, 이들은 참전 경험을 통해 근대적 기술과 조직을 배우고 정치적으로 각성하여 독립의 주역으로 떠오른다.[/footnote]

1941년 영국군이 아디스 아바바를 수복하고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다시 돌아오면서 이탈리아 점령기는 5년 만에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점령은 에티오피아에 짧으면서도 굵은 흔적을 남겼다.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 제국의 든든한 배후지로 만들고자 했던 이탈리아 경제 전문가들은 도로, 철도, 댐, 교량 등을 비롯한 각종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농업과 광업 생산에 투자하기도 했다.

더하여 이탈리아는 종래 에티오피아 제국의 암하라 지배층을 견제하기 위하여 관료제에 그동안 소외되던 민족 집단인 소말리인이나 오로모인을 기용하였다. 이런 정책들이 점령이 끝난 뒤 민족 간 갈등의 소지를 제공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티오피아 민족 구성

범아프리아카 공동체에 끼친 영향 

이탈리아의 침략과 점령은 국제사회에서 에티오피아의 위상을 극적으로 올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는 매력적인 인물인 하일레 셀라시에의 호소가 큰 역할을 했다. 황제는 국제연맹에 참석하여 “오늘은 에티오피아 차례지만 다음 차례는 유럽의 다른 나라가 될 것이다”라면서 더 큰 전쟁의 도래를 경고했다. 고래로부터 아프리카의 독자적 기독교 국가로서 유럽인들에게 수많은 전설과 흠모의 소재가 되곤 했던 에티오피아가 갑자기 20세기 국제적 갈등의 최전선에 불려 나온 것이었다.

이는 다른 누구보다도 대서양 연안의 범아프리카계 공동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노예무역이나 이주 등으로 대서양 건너편 아메리카에 살게 된 흑인들은 그 무렵 자신들의 뿌리인 아프리카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운동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아프리카 토착 기독교 문명인 에티오피아는 가장 좋은 영감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이는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성장한 다른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가장 인상적인 운동은 자메이카에서 시작된 ‘라스타파리 운동’인데, 이름에서 보이다시피 하일레 셀라시에를 숭배하는 종교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라스타파리 운동은 자메이카를 비롯한 카리브 흑인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중에는 훗날 레게 음악의 아버지가 되는 밥 말리도 있었다. 훗날 자메이카에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는 라스타파리언들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자메이카의 세계적 뮤지션 밥 말리(1945-1981)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인도주의와 평화, 사랑의 가치를 레게로 표현해 세계적 뮤지션이 됐다.
자메이카 태생의 뮤지션 밥 말리(1945-1981)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인도주의와 평화, 사랑의 가치를 레게로 표현해 세계적 뮤지션이 됐다.

에리트레아 ‘합병’

해방 이후 에티오피아는 영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47년에는 이탈리아와 조약을 맺으며 당당한 승전국 대열에 들 수 있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패전하고 쫓겨난 이탈리아가 남겨둔 영토를 자신이 확보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점령한 영국과 미국에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에 넘겨 달라고 요구했다.

메넬리크 2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에게 북부 연안 지역을 할양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이탈리아에 할양한 북부 연안 지역은 오늘날
셀라시에 황제는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에 할양한 북부 연안 지역(‘에리트레아’)을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동안 되찾아왔다.

당시 에리트레아는 1941년 영국이 해방시킨 이래로 영국군의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미국은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에 넘겨주어도 좋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하일레 셀라시에가 냉전에서 친서방 노선을 걸을 것이 워낙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하일레 셀라시에는 이탈리아에 침략당한 과거를 생각해보라며 대한민국을 위해 지원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강원도 춘천에는 에티오피아군 용사들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1952년, 에리트레아의 영국 통치가 종료되고, 에리트레아는 연방을 이루는 주(state)로서 에티오피아에 통합되었다. 미국은 이를 허락하는 대가로 에리트레아의 수도인 아스마라에 칵뉴 군사기지를 둘 수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의 모습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의 모습

개혁의 한계, “극도로 느린 개혁”(CIA) 

1945년부터 하일레 셀라시에는 자신의 역점 사업인 근대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자 계속 노력했다. 시대는 이제 제국주의 시대와 양차 대전을 거쳐 냉전으로 향하고 있었고, 황제는 기꺼이 자신을 지원해줄 후견국을 찾을 수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를 막고 제3세계를 시장과 자본주의의 청사진에 따라 발전시키고자 했던 미국이었다.

이탈리아와 맞서면서 셀라시에는 이미 서방 세계에서 존경받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던 터였고, 한국전쟁 파병과 에리트레아 합병 등을 통해서도 두 국가는 크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도 에티오피아는 그 지리적 위치와 역내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라도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주어야 했다.

그밖에 셀라시에는 아프리카주의와 탈식민화의 물결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1963년에 창립된 아프리카통일기구의 본부를 아디스 아바바에 유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후 셀라시에의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메넬리크나 셀라시에 같은 ‘계몽 군주’는 다른 비서구 국가에 비하면 선도적으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혁했고, 제국주의 시대에도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그런 계몽 군주 스타일의 제한된 개혁만으로는 목표로 하는 발전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셀라시에의 개혁은 에티오피아의 오래된 봉건적 사회구조와 질서를 거의 건드리지 않는 수준으로만 진행되었다.

신성한 제국에서 테와히도 정교회와 귀족층이 황제를 지지하는 체제를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무엇보다 황제 본인이 절대권력을 내려놓기를 원하지 않았다. 근대 문물은 수도 아디스 아바바를 위주로만 도입되었고, 그 혜택을 보는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은 75%가량이 소작농이었고, 교회, 수도원, 귀족들이 부과하는 가혹한 세금에 시달렸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당. "테와히도"는 '통합'을 의미한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당. “테와히도”는 ‘통합’을 의미한다.

지배 계층은 세금은 물론이고 평민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특권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아디스아바바는 현대적인 도시였을지 몰라도 그 밖은 중세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산업은 거의 없었다. 1970년대 에티오피아 인구 3천 500만 명 중 노동자는 5만 명에 불과했다. 에티오피아의 개혁을 후원한 CIA는 황제의 사업을 보고 “극도로 느리게 진행되는 경제 사회 개혁 사업”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황제는 전제군주정의 틀을 해치는 정치적, 사회적 자유와 권리는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민족 갈등 – ‘대소말리아주의’ 

갈수록 격화되는 민족 갈등도 문제였다. 이탈리아의 통치, 교육 확대, 탈식민화 등이 민족 의식의 각성을 자극했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암하라인의 패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다른 주요 민족들은 이를 계속해서 수용할 생각이 없었다. 남쪽의 오로모인, 동쪽의 소말리인, 북쪽의 티그레이-에리트레아인들이 모두 제각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동쪽과 북쪽이 특히 문제였다. 소말리아는 1960년 영국이 이탈리아령 소말리아와 영국령 소말리아를 통합하면서 독립했는데, 독립부터 소말리아에는 잃어버린 소말리인들의 땅을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는 대소말리아주의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대소말리아주의를 향한 목소리는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하고 강경 민족주의를 내세운 시아드 바레 시기에 더욱 커졌다. 이는 과거 메넬리크 2세가 정복했던 오가덴 지역의 소말리인들의 분리주의를 자극했고, 소말리아 정부는 이런 분리주의를 적극 지원했다. 1963년에는 오로모인들도 소말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시아드 바레(Siad Barre, 1919-1995, 재임: 1969-1991) 소말리아의 군부 독재자 시아드 바레는 '대소말리아주의'에 편승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
소말리아의 군부 독재자 시아드 바레(Siad Barre, 1919-1995, 재임: 1969-1991)는 ‘대소말리아주의’에 편승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했다.

문제는 ‘북쪽'(에리트레아와 티그레이)  

북쪽의 에리트레아와 티그레이는 더욱 큰 문제였다. 에리트레아는 10년에 걸친 영국 군정을 거치며 언론과 출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이미 경험한 상태였다. 황제 전제정 하에서 그런 권리를 누리지 못할 에티오피아에 굳이 통합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나마 연방제 하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해줬기에 망정이었다.

그러나 하일레 셀라시에는 연방제를 완전한 통합을 위해 거쳐가는 단계 정도로 생각했다. 1959년에는 군정기에 도입된 각종 권리와 자유가 박탈당하고, 티그레이어와 아랍어 사용이 억압되었으며, 마침내 1962년에는 연방제를 폐지하고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 본토와 통합시켰다.

황제의 동족인 암하라인들이 에리트레아로 파견되어 통치를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당연히 에리트레아인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고, 에리트레아에서는 아디스 아바바의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와 게릴라 전쟁이 시작되었다. 유사한 일이 에리트레아와 인접한 티그레이에서도 벌어졌다.

특히 문제는 '북쪽'이었다.
특히 문제는 ‘북쪽’이었다.

‘냉전의 최전선’

1970년이 되었을 때, 북쪽과 동쪽의 분리주의 운동은 국제적 안보 문제로 격상되었다. 은 동아프리카에서 미국의 최우방국인 에티오피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소련의 동맹국인 홍해 건너편의 남예멘을 거점으로 소련의 지원이 에리트레아와 티그레이 분리주의 조직으로 흘러 들어갔다.

소말리아는 더욱 직접적이었다. 1969년 시아드 바레가 사회주의를 천명한 이래로 소련의 동맹국이 되었으며, 소련은 소말리아에서 해군 기지까지 제공받았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여전히 바깥세상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었지만, 에티오피아는 조용하게 냉전의 최전선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핵심적 결정권을 행사하는 황제가 이제 80세가 가까이 되면서 극히 노쇠했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근대화의 기수에서 과거의 총기나 정력도 잃고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봉건 압제자의 전형이 되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제 치매 증세까지 찾아왔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황태자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노쇠한 황제를 이을 후계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아디스아바바의 궁중은 분명 표류하고 있었다.

스페인 돌레도를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 (죽기 4년전인 1971년 당시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4.0)
스페인 돌레도를 방문한 하일레 셀라시에. 그는 계몽군주에서 노쇠한 봉건 압제자로 타락하고 만다. (죽기 4년전인 1971년 당시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4.0)

위기의 70년대 

1970년대가 되면서 에티오피아의 상황은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3년에는 월로 지역에서 기근이 닥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황제는 국가의 위신을 논하면서 원조 수용을 가로막았다. 이것이 에티오피아가 노력한 근대화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월로 기근은 에티오피아 경제가 마주한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해 석유 파동이 시작되면서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여러 제3세계 국가들이 큰 타격을 입었는데, 에티오피아도 그중 하나였다. 무역 적자가 치솟으면서 에티오피아는 수지 균형을 맞출 수가 없었고, 물가는 폭등했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공공부문 예산을 삭감했는데, 이는 그나마 제국 정부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라고 할 수 있었던 아디스아바바를 중심으로 한 도시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위기는 제국과 황제 지배에 진저리를 내던 반대파들의 활동을 자극했다. 먼저 정부 지원으로 서구로 유학을 다녀온 뒤 그곳에서 좌익 사상에 감화된 일군의 운동가들이 있었다. 이 새로운 에티오피아 인텔리겐치아들은 낙후하고 비참한 조국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급진적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지지를 모았다. 티그레이와 에리트레아, 소말리아의 반란세력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소련의 후원 아래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노선을 받아들이고 급진화 되었다.

1 차 오일 쇼크(1973-74) 기간 동안 버려진 주유소의 모습. 에티오피아도 당연히 이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
1 차 오일 쇼크(1973-74) 기간 동안 버려진 주유소의 모습(부흥회관으로 사용 중인 모습). 에티오피아도 오일 쇼크의 충격을 피할 수 없었다.

‘데르그'(위원회)와 타락한 계몽군주의 최후

그러나 제국은 이런 외부자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 지지가 이탈하면서 무너졌다. 발단은 에티오피아 남부 네겔레의 군부대였다. 1974년 1월, 이곳에서 음식과 물의 보급이 부족해지자 병사들의 항의가 일어났는데, 장교들이 이에 강압적으로 대처하려 하자 항의는 반란으로 금세 발전했다. 네겔레 반란 부대는 황제가 교섭을 위해 파견한 장군도 감금해버렸다. 이것은 전제정이라는 댐에 균열을 내는 첫 번째 신호탄이었고, 곧이어 불만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2월에는 아디스아바바 인근의 군부대에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다시 폭동이 일어났고, 에리트레아의 아스마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2월이 되었을 때 정부는 아디스아바바에 대한 통제를 사실상 상실하고 3월에는 중소 도시의 통제력도 잃었다. 도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하고자 군을 동원하기에는 불만의 진원지가 군이었기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군은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메꾸고자 했다. 6월에는 군 하사관들과 하급 장교들이 공모하여 108인으로 구성된 ‘조정위원회’를 결성하고 아디스아바바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 조정위원회는 단순히 ‘위원회’로 더 널리 불리었다. 에티오피아의 혁명 정권을 칭하는 말로 알려진 ‘데르그’(Derg)가 바로 암하라어로 ‘위원회’를 가리키는 낱말이다. 7월과 8월을 거치며 정부 장악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데르그는 9월 12일에 마침내 하일레 셀라시에를 폐위시키면서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정부로 부상하게 된다. 이후 시작될 내부적 혼란, 전쟁,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에티오피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혁명이 급진화되면서 솔로몬의 후예이자 국민의 존경을 받는 아버지에서 에티오피아의 착취와 억압, 낙후와 후진성의 근원으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9월 11일에 데르그 장교들은 황제에게 월로 기근의 참상을 기록한 영국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게 했다. 다음날 장교들은 황제를 폐위한다는 포고문을 낭독했는데, 황제는 이에 대해 자신 또한 폐위를 받아들인다고 답하였다. 궁에 감금되었던 황제는 이듬해 8월에 사망했는데, 데르그는 자연사라고 발표했지만, 많은 이들이 처형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시신은 1992년 이후에야 궁전 화장실 밑에서 발견되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살라시에의 1942년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살라시에의 1942년 당시 모습 (퍼블릭 도메인). 그는 타락했고,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에 의해 처형당한다.

물론 이제 폐위된 황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혁명 정권의 주도권을 누가 장악하냐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문제의 답이 드러나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부 출신인 37세의 젊은 장교이자 곧이어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로 악명을 떨치는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그 장본인이었다.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1937년생)
‘아디스아바바의 도살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193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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