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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다. 그 이미지도 여전히 세렝게티 초원이나 기근, 내전 같은 피상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십개의 국가 위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대륙’이며, 독립 이후에도 구체적인 수많은 지명과 인명, 사건이 얽히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아프리카 현대사를 형성해나간 ‘영걸’들을 위주로 이 지역을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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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영걸전 

  1. 서아프리카 삼국지: 프랑스령 삼국의 엇갈린 운명
  2. 동아프리카 쌍벽: 케냐타와 니에레레
  3. 콩고의 순교자 루뭄바: 독립에서 암살까지
  4.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5. 셀라시에, 타락한 계몽군주의 처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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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세계적으로 두 명의 에티오피아인이 그다지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첫째는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Tedros Adhanom Ghebreyesus, 1965년생) WHO 사무총장으로, 판데믹 초기에 그가 보여준 안일한 태도와 중국에 대한 지나친 비호가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바가 있다. 비판자들은 그의 친중 행보를 둘러싸고 중국의 국제기구 매수 행위가 세계적 해악을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Tedros Adhanom Ghebreyesus, 1965년생) WHO 사무총장 (2018년 당시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WHO 사무총장 (2018년 당시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0)

둘째 인물은 아비 아머드(Abiy Ahmed Ali, 1976년생) 에티오피아 총리다. 그는 에리트레아와의 평화협상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지만, 11월 4일 북부 티그레이 지방에 군대를 밀어 넣으면서 2020년 티그레이 전쟁을 일으켜 평화상의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아비 아머드(1976년생) 에티오피아 제15대 총리. 2018년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종전 협상을 이끌어내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4.0)
아비 아머드(1976년생) 에티오피아 제15대 총리. 2018년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종전 협상을 이끌어내 201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4.0)

그런데 이 두 인물,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논란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얼핏 보면 이 두 사안, 중국에서 발원한 판데믹에티오피아 한 지역의 내전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의 줄기 속에서 뻗어 나간 가지로, 명확하지는 않아도 확실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현대사의 줄기에는 에티오피아의 민족 분규와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해묵은 원한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중국의 부상까지 아우르는 지역적, 국제적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에티오피아의 오늘을 이해하는 것은 곧 세계사의 중요한 퍼즐 하나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 퍼즐을 알아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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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뿔’의 중심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동북부에 홍해와 인도양을 향해 뿔처럼 뻗어 있는 지역인 ‘아프리카의 뿔’의 중심에 자리한 국가이다. 서쪽으로는 수단과 남수단, 남쪽으로는 케냐, 북쪽으로는 에리트레아와 지부티, 동쪽으로는 소말리아와 마주하고 있으나, 바다로 나가는 모든 출구가 막혀 있는 내륙국이기도 하다. 에티오피아가 내륙국이라는 사실은 이 나라가 물류와 교통 면에서 지리적으로 겪는 어려움을 상징하기도 하고, 내륙국이 되는 과정 자체가 이 나라의 복잡한 현대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지리적 역학 (출처: 구글지도)
에티오피아의 지리적 역학 (출처: 구글지도)

에티오피아의 다른 중요한 지리적 특징은 이 나라가 평균 해발고도 2,000m가 넘는 고원 지대에 위치한 나라라는 사실이다. 바로 에티오피아 고원(아비시니아 고원)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은 몹시 덥고 건조한 인근 다른 지역과 달리 에티오피아의 기후를 훨씬 서늘하게 만들었으며, 화산 활동의 산물로 비옥해진 토양은 더 안정적이고 풍족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서쪽의 수단으로 흘러가 나일강에 합류하는데, 이 과정에서 고원의 토양이 강을 따라 실려 나가 하천 인근 지역을 비옥하게 만들어준다. 상대적으로 서늘한 기후와 고원의 수계망 덕택에 에티오피아는 일찍부터 정착생활과 농경이 성행한 지역이 되었다.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주로 재배되는 곡물은 벼과 식물테프(Teff)인데, 이 테프 가루로 반죽을 해 발효시켜 먹는 시큼한 빵인 인제라(은저라, injera)는 에티오피아의 주식이다. 이런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이후 에티오피아는 이집트를 제외하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먼저 독자적 문명을 발전시킨다.

벼의 일종인 '터프'를 수확하는 에티오피아 농민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벼의 일종인 ‘터프'(Teff)를 수확하는 에티오피아 농민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대부분의 지역이 그렇듯, 에티오피아 문명의 성립에는 먼저 문명을 발전시킨 외부와의 교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초에 에티오피아는 문명의 요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홍해 건너편 아라비아 반도에서 셈어(아랍어가 속한 어파)를 쓰는 이주민들이 금속 기술이나 발전된 농경 기술 등과 함께 도래하여 이 지역의 문명 발전을 촉진시켰다. 기원전 1천년 즈음하여 다맛(D’mt)이라는 초기 국가가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토착민들과 이주민들이 공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셈계 이주민들은 에티오피아를 계속해서 셈화시키면서 오늘날의 에티오피아를 점차 형성해갔다.

악숨 왕국

기원전 2세기 무렵이 되었을 때는, 북부 지역에서 에티오피아 역사의 중요한 틀을 놓은 국가가 출현했다. 바로 악숨(Aksum) 왕국이다. 북부 티그레이 지역에 위치한 악숨은 홍해와 인도양, 아프리카 내륙과 이집트 등을 연결하는 교역 중심지로 성장한 상태였고, 중앙집권적 권력이 발생하기 아주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여타 고대 국가처럼 교역과 정복을 통해서 국가를 발전시킨 악숨 왕국은 오늘날까지도 에티오피아의 문어를 형성하는 그으즈(Ge’ez) 문자와 그 체계를 발전시켰다.

왕국은 4세기에는 홍해 건너편 아라비아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으면서 여타 지역에도 밀리지 않는 독자적 문명의 중심으로 발돋움해냈다. 에티오피아는 아르메니아와 함께 기독교를 가장 먼저 국교로 삼은 나라가 되었고,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는 이후 에티오피아와 인근 지역의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6세기에 악숨 왕국은 해협 건너편 예멘까지도 정복할 정도의 국력을 갖춘 강국이었다.

악숨의 오벨리스크(이집트에서 유래한 태양신 숭배를 상징하는 기념비)
악숨 왕국의 ‘오벨리스크'(이집트에서 유래한 태양신 숭배를 상징하는 기념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2.5)

그러나 악숨 왕국은 전성기 이후 7세기를 거치며 빠르게 쇠퇴하게 되었는데, 이는 홍해 건너편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이슬람 제국 때문이었다. 본래 악숨이 의존하던 홍해 무역은 중동 지역이 로마(이후 비잔티움)와 페르시아로 반분되었기 때문에 번창했었다. 하지만 아랍인들의 제국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중동에서 비잔티움을 몰아내면서 중동에는 거대한 통일 권력이 등장했고, 홍해 대신 시리아와 이라크를 가로지르는 교역이 크게 발전했다. 아랍 제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악숨으로부터 홍해 무역의 주도권을 빼앗아왔다. 이제 악숨의 쇠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후 악숨은 유명무실한 나라가 되어 명맥만 존속하다가 11세기 경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

에티오피아 제국 (1270~1975)  

악숨의 뒤를 이은 나라는 1137년부터 1270년까지 존속한 자그웨 왕조였다. 짧은 시기였지만, 자그웨 왕조의 통치자들은 기독교를 통해서 권력을 정당화했고, 기독교가 에티오피아 정치와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더욱 커졌다. 자그웨 왕조는 고원 중남부 지역에서 발흥한 지도자인 예쿠노 암라크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 예쿠노 암라크가 세운 국가가 바로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직접적 전신에티오피아 제국이다.

에티오피아의 직접적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티오피아 제국이 19세기 말부터 사용한 국기
에티오피아의 직접적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티오피아 제국이 19세기 말부터 사용한 국기

이후 14세기 암다 치욘(Amda Tsiyon)과 15세기 자라 야코브(Zara Yaqob) 황제 등의 통치 하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은 인근 지역으로 팽창해갔다. 제국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에티오피아에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1. 첫째는 통치의 근간으로서 기독교가 갖는 위상이 더욱 커진 것이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가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솔로몬 왕과 남쪽에서 찾아왔다는 시바 여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져 유통되었다. 왕조의 이름도 그래서 솔로몬 왕조였다. 신성한 존재인 황제는 나라 각지에 설립된 수도원과 교회를 통해 통치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2. 둘째 변화는 에티오피아의 주류 민족으로서 암하라인들이 부상한 것이었다. 고대 악숨의 중심지는 에티오피아 고원의 북부인 티그레이 지역이었다. 이곳에 사는 티그레이인들은 그으즈어를 쓰던 악숨인들을 계승하여 에티오피아 권력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쿠노 암라크는 고원 중남부에 살고 있던 암하라인이었고, 자연스레 제국의 주도권은 암하라어를 쓰는 암하라 엘리트들이 잡게 되었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1970년대까지 무려 700년을 이어갔기에, 암하라어와 암하라인이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주류 언어와 주류 민족을 형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팽창일로를 걸어가던 제국은 그러나 곧이어 중대한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15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이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가 진출한 곳은 고원지대 바깥, 즉 홍해와 인도양과 마주 보는 해안 저지대였다. 이 지역은 아라비아나 페르시아의 상인과 선교사들이 해안을 통해 진출하기 쉬운 곳이었다. 게다가 이 저지대는 에티오피아 고원과 달리 몹시 뜨겁고 건조한 곳이라, 고원의 농경 제국과는 달리 널리 퍼져 살며 유목 생활을 하는 목축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사막 목축민이 만든 종교인 이슬람교는 이들의 기존 생활상에 아주 적합했다.

그렇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아프리카의 뿔 해안 저지대에 자리한 대표적 국가가 바로 소말리족의 나라인 소말리아다. 이 지역 무슬림들은 이팟 술탄국을 이루어 에티오피아 고원의 기독교인들과 싸워오다가, 일찍이 암다 체욘 시기에 복속되었던 상태였다. 하지만 소말리인들은 15세기에는 더 강력한 아달 술탄국이 세워지면서 이제는 반대로 서쪽의 고원지대를 계속 침범했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분명 강대국이었지만, 아달 술탄국 역시 인도양 전역에서 활약하는 이슬람 상인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달 술탄국의 국기. 아달 술탄국은 15세기(1415년~1559)에 세워진 무슬림 다민족 국가였다. 국기에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아달 술탄국의 국기. 아달 술탄국은 15세기(1415년~1559)에 세워진 무슬림 다민족 국가였다. 국기에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이 그려져 있다.
소말리아는 15세기 이후 서쪽 인 에티오피아의 고원 지역을 침범했다.
소말리아인(무슬림)는 15세기에는  서쪽 고원지대에 사는 에티오피아인(기독교)을 공격했다.

에티오피아-아달 전쟁(1529~1543)

점증하는 아달 술탄국의 위협은 16세기에 마침내 에티오피아-아달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두 국가의 전쟁에는 인도양에서 출현한 두 강력한 외세가 개입하게 된다. 아달 술탄국을 지원한 이들은 발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를 모두 정복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제국이었다. 모든 무슬림을 이끄는 칼리프의 지위도 갖고 있었던 오스만 술탄은 인도양 각지에서 병력, 무기, 돈을 지원하면서 이슬람의 팽창을 선도했다.

그런 오스만 편에 맞서는 에티오피아의 동맹은 강력한 해군력으로 인도양 무역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뛰어든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양 각지에 요새를 설치해서 수익성 높은 사업인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싶어했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양의 무슬림 통치자와 상인들을 공격했는데, 역시 인도양 무역에 관여하고 있으면서 모든 무슬림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오스만 술탄으로서 포르투갈의 도전을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국가는 심지어 인도양 반대편 끝에 있는 인도네시아의 아체에서도 충돌했다.

포르투갈-오스만 전쟁(1538-1559년)의 일부로서 에티오피아-아달 전쟁(1529년-543년). 위 이미지는 아달 술탄과 에티오피아 국왕의 싸움을 묘사한 그림. (출처: 퍼블릭 도메인)
포르투갈-오스만 전쟁(1538-1559년)의 일부로서 에티오피아-아달 전쟁(1529년-1543년). 위 이미지는 아달 술탄과 에티오피아 국왕의 싸움을 묘사한 그림. (출처: 퍼블릭 도메인)

포르투갈이 에티오피아를 지원하기로 한 이유에는 전설 상의 이유도 있었다. 십자군 전쟁 이래로 유럽에서는 머나먼 바깥 세계에 기독교를 믿는 강대한 제국과 군주가 있고, 그와 함께 힘을 합치면 이슬람 세력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그 군주의 이름을 ‘프레스터 존’이라고 불렀다. 많은 모험가들은 어딘가에 있는 프레스터 존과 그 왕국을 찾고자 항해에 나섰다. 그리고 솔로몬 왕의 후손이 다스린다는 이슬람 세계보다 더 남쪽에 자리한 에티오피아 제국의 존재는 프레스터 존 왕국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보였다.

전쟁은 아달 술탄국의 걸출한 군사 지도자 아흐마드 이브라힘 알 가지(Ahmad Ibrahim al Ghazi)의 지휘 아래 에티오피아 제국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알 가지는 파죽지세로 고원지대로 진격하여 에티오피아 제국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였다. 여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지원해준 화약무기들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멸망 위기에 놓인 에티오피아 황제는 포르투갈로 사절을 급파하여 지원을 요청했고, 포르투갈은 프레스터 존 왕국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참전해 역시 화약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군대를 파병했다. 포르투갈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아달 술탄국이 주도하던 전세는 다시 팽팽하게 바뀌었으며, 최종적으로 알 가지가 전사하면서 에티오피아는 기사회생하는 데 성공했다.

술탄 알 가지의 동상. 파죽지세로 에티오피아 고원지대를 장악했지만, 포르투갈의 개입으로 전사하고 만다.
아달 술탄국의 군사 지도자 알 가지는 파죽지세로 에티오피아 고원지대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포르투갈의 참전으로 전사하고 만다. 사진은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있는 알 가지의 동상.

오로모인와 포르투갈 그리고 혼란기 

그러나 에티오피아와 아달의 전쟁은 의도치 않은 파급효과를 낳았다. 전쟁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는 대신에 두 국가를 모두 약화시키면서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메운 세력은 에티오피아 고원 남쪽 끝에서 발원한 오로모인들이었다. 고원에서 목축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오로모인들은 효율적인 정치, 군사 조직을 발전시켜 에티오피아 제국과 아달 술탄국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는 전쟁에서 벗어난 두 국가를 더욱 약화시켰고, 중앙집권적 기반이 더욱 약했던 아달 술탄국은 붕괴하여 후계 국가들로 이어졌다. 그나마 에티오피아는 그럭저럭 국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나, 17세기를 지나며 오로모인들은 고원의 중부까지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약화된 에티오피아 국가가 포르투갈에 의존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여기에는 포르투갈 예수회의 선교 노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포르투갈인들에게서 전설 속의 프레스터 존의 왕국에 대한 설렘은 이미 사라졌고, 가톨릭과는 다른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이질적인 면은 점차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에티오피아의 교회를 더 ‘올바른’ 가톨릭으로 이끌고자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이루어 1622년 수세뇨스 황제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에티오피아 교회의 주도권이 로마에 있다고 선언했다.

예수회의 문장
예수회의 문장

이는 포르투갈과 더 밀착하여 남쪽의 오로모인들과 동쪽의 무슬림들을 물리치고 왕권도 강화하고자 했던 수였다. 당연히 이 조치는 기존의 에티오피아 교회 신자, 특히 성직자와 귀족들의 어마어마한 반발을 초래했다. 1632년에 수세뇨스 황제가 사망하고 왕위를 계승한 파실리데스는 1636년 수도를 티그레이 내륙의 곤다르로 옮기고 에티오피아 제국의 곤다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 안정기는 중앙 정부의 정치적 지도력이 와해된 1760년대가 되면서 끝났다.

그 대신 177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에티오피아는 제메네 메사핀트(Zemene Mesafint), 판관시대 혹은 왕자들의 시대라는 혼란기를 겪게 되었다. 제국 정부는 수도인 곤다르 주변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할거하는 지방 세력들이 제국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 벌이는 쟁패가 계속되었다. 패권을 노리는 중요 세력으로는 북부의 티그레이와 중부의 쇼아가 있었다. 티그레이는 미카엘 세훌의 지도 아래에서 황도 곤다르를 수중에 넣고 있었고, 암하라인 왕국인 쇼아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오로모인들과 맞서 싸우며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테워드로스 2세와 영국   

그러나 판관시대를 끝낸 이는 티그레이와 쇼아 사이에 위치한 콰라 지역의 지도자 카사(Kassa)였다. 그는 1855년에 수도를 정복하고 제국의 새로운 황제 테워드로스 2세로 즉위했다. 새 황제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과거 에티오피아 제국 영토 대부분을 다시 수중에 넣었으며, 지역의 실력자들을 제압하고 정교회를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테워도로스 2세(1818–1868, 재위: 1855-1868)
테워드로스 2세(1818–1868, 재위: 1855-1868)

하지만 정복과 강압적 통치는 곧이어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테워드로스 2세는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이집트가 서북쪽에서 에티오피아를 위협해오기 시작했는데, 이집트는 과거 메흐메드 알리의 근대화 노력으로 크게 강력해진 상태였다. 황제는 이전처럼 기독교 국가의 수장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여러 편지를 유럽으로 보냈다.

그러나 영국의 시큰둥한 반응에 분노한 황제는 제국의 영국인들을 구금하였다.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던 1867년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테워드로스 2세에 반대하는 여타 지역 유력자들의 협조를 받으며 그의 수도이자 최후의 도피처인 막달라(Magdala) 요새로 진격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가망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자결했다. 에티오피아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영국군은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거나 식민화할 계획이 전혀 없었고, 곧이어 철군했다.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테워드로스 사후 계승 투쟁 끝에 황제에 오른 이는 티그레이의 요한네스 4세였다. 요한네스는 영국군 대신에 계속해서 에티오피아를 노리고 있던 이집트군과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테워드로스 같은 카리스마가 없는 요한네스로서는 단독으로 이집트에 맞서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는 다른 지역 유력자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요한네스 4세 (1837–1889, 재위: 1871-1889)
요한네스 4세 (1837–1889, 재위: 1871-1889)

요한네스는 쇼아의 지도자 메넬리크와 제휴하기로 결정했다. 메넬리크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며 황제 버금가는 실력자가 되었다. 1889년 요한네스 4세가 수단의 마흐디군과 싸우다 죽자, 메넬리크는 그 자신이 황제가 되어 메넬리크 2세로 등극했다. 메넬리크 2세는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 인물이다. 메넬리크는 군사 정복을 통해 에티오피아의 영토를 확장했고,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메넬리크 2세(1844-1913). 쇼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에티오피아의 황제.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1844-1913, 재위: 1889-1913). 쇼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에티오피아의 황제.

그의 통치기에 메넬리크는 거의 군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정복 전쟁을 지휘했다. 메넬리크는 쇼아를 중심으로 오랜 경쟁자인 북부 티그레이를 빠르게 흡수하고, 그 이후에는 북부와 중부 고원지대 바깥으로 영토를 확장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영토를 만들어냈다. 남쪽으로는 16세기 이후 에티오피아 제국의 주된 위협이 되었던 오로모의 땅을 거의 정복했고, 이후에는 소말리인이 주로 거주하는 동쪽의 거대한 오가덴 지역도 차지했다.

이 정복 전쟁에는 19세기 후반 이탈리아를 통해 들어온 우역(‘소의 전염병’)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프리카 소들은 유라시아 우역에 면역이 없었던 터라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90%가량의 소가 폐사하는 재앙이 벌어졌다. 소를 중요 경제적 기반으로 삼던 목축민들은 궤멸적 타격을 입어 수많은 사람이 기근으로 죽었다. 에티오피아도 이때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농경에 주로 의존하던 티그레이나 암하라보다 목축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오로모나 소말리의 타격이 더 심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유럽 열강이 우역이 쓸고 간 자리에 들어가 식민화를 한 것처럼, 메넬리크 2세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오로모와 소말리의 땅을 정복한 것이다.

제1차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의 승리  

그러나 북쪽에서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통일을 이룩하고 식민지에 뒤늦게 눈독 들이기 시작한 이탈리아였다. 처음에 황제는 이탈리아를 이용하고자 했다. 홍해와 면한 해안지대를 이탈리아에게 넘겨주고, 그 대가로 지원을 받아 티그레이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 넘어간 해안지대는 바로 오늘날의 에리트레아가 된다.

메넬리크 2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에게 북부 연안 지역을 할양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이탈리아에 할양한 북부 연안 지역은 오늘날
메넬리크 2세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에게 북부 연안 지역을 할양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이탈리아에 할양한 북부 연안 지역은 오늘날 에리트레아가 되고, 그 결정은 분쟁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이탈리아는 이 과정에서 에티오피아와 맺었던 우찰레 조약(1889)을 근거로 에티오피아 전역을 세력권으로 두고자 하는 야망을 드러냈다. 마침내 에티오피아가 우찰레 조약을 거부하자 이탈리아는 이를 제국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좋은 기회로 판단하여 1896년에 진군을 개시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를 얕본 이탈리아군은 메넬리크 2세가 지휘하는 에티오피아군에 의해 아도와에서 참패했다. 비록 이탈리아가 2류 열강이었다고는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가 유럽의 강대국을 패퇴시킨 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승전 덕분에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전역이 식민화가 되는 와중에도 홀로 독립을 유할 수 있었다(다른 독립국인 라이베리아는 그 독특한 성격상 온전한 독립국이라 보기 애매했다).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역점을 두었던 근대화 사업에 있었다. 영국이 무시무시한 테워드로스 2세를 가볍게 무찌르는 것을 보고 메넬리크 2세는 에티오피아를 도와줄 다른 유럽 열강을 찾고자 했는데, 여기에는 영국과 유라시아를 두고 쟁패를 벌이고 있던 러시아가 가장 적격이었다. 러시아 고문단은 메넬리크 2세의 궁정으로 파견되어 주로 군사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여타 근대화 사업을 위한 여러 협력을 제공했다.

메넬리크 2세는 쇼아 지역에 새로운 근대적 수도를 세우기로 했는데, 암하라어로 ‘새로운 꽃’이라는 뜻을 가진 이 도시가 오늘날까지도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이다. 아디스 아바바는 은행, 교통, 통신, 학교 등의 근대적 인프라가 작동하는 도시로 발전했으며, 유럽 각국의 대사관도 곧이어 자리를 잡았다. 메넬리크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아디스 아바바를 프랑스가 홍해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항구 도시인 지부티와 잇는 철도를 건설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의 사후 개통되었다. 1913년 메넬리크가 사망했을 때 에티오피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자주권을 지키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나라였다.

에티오피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아디스아바바' 메스켈 광장의 모습 (2021년 1월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4.0)
에티오피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아디스아바바’ 메스켈 광장의 모습 (2021년 1월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4.0)

세 가지 유산  

에티오피아에서 문명이 탄생할 때부터 제국주의의 파도를 이겨내기까지 기나긴 역사를 거치며, 현대 에티오피아는 그 틀을 갖추어 나갔다.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유산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에티오피아의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연하게도 직전의 테워드로스 2세와 메넬리크 2세 시기가 이후의 진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우선 차후의 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세 가지 유산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번 편을 마치고자 한다.

1. 황제권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무슬림 세계에 둘러싸인 기독교의 섬이라는 이유로 대내적, 대외적으로 강력한 종교적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황가는 그들이 솔로몬의 후예라는 전설을 통해 민중들에게 다가갔으며, 수도원, 교회, 성직자 네트워크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황제권은 판관시대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위협을 받게 되지만, 테워드로스 2세와 메넬리크 2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다시 회복되었다. 특히 에티오피아는 단순히 이웃 무슬림 국가들을 넘어 식민 열강인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자체적 근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황가가 갖는 카리스마는 더욱 빛날 수밖에 없었다.

2. 국경

메넬리크 2세는 활발한 정복 전쟁과 이탈리아에 맞선 방어전, 그 사이의 외교 협약을 통해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국경을 완성시켰다. 메넬리크의 치세 동안은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식민화에 달려들어 순식간에 국경을 획정한 시기이기도 했다. 서쪽과 남쪽에는 아프리카 종단 정책을 완수한 영국 식민지, 각각 수단과 케냐와 맞닿게 되었다.

메넬리크 2세가 1889년에서 1896년 사이에 확장한 영토
메넬리크 2세가 1889년에서 1896년 사이에 확장한 에티오피아의 영토

홍해, 인도양과 맞닿은 저지대는 상황이 조금 더 복잡했다. 티그레이와 연결된 에리트레아 지역은 이탈리아가, 중요 항구인 지부티는 프랑스가 차지했다. 소말리아는 영국과 이탈리아가 나누어 가졌다. 고대부터 에티오피아가 바다로 향하던 출구인 에리트레아와 지부티의 상실은 뼈아팠으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에는 에티오피아는 바다로 나가는 출구를 상실한 내륙국이 되고 말았고, 이 문제는 20세기에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계속되는 불안정 요인으로 남게 된다.

3. 민족

그으즈어를 쓰던 고대 악숨인들이 몰락한 이래로, 에티오피아와 그 인근 지역에는 수많은 종족 집단이 거주하며 공존과 갈등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프리카의 뿔 지역의 국가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민족들은 다음으로 추려졌다.

  • 티그레이인(티그라얀, 티그리냐, 티그레): 고대 그으즈어와 가장 유사한 언어를 쓰는 민족 집단이다. 에티오피아 북부의 티그레이 지역과 에리트레아에 주로 살고 있다. 일찍이 이 지역에서 악숨 왕국이 발전했던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홍해와 마주 보고 있는 교역 요충지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에티오피아 역사와 문화를 주도한 민족이었다.그러나 메넬리크 2세 치세를 거치면서 주도권을 완전히 암하라에 넘겨주게 되었다. 티그레이인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 민족으로 분화했다. 먼저 티그레이 지역에서 오늘날 에티오피아에 속한 남쪽 지역에 사는 이들은 티그라얀인들이 되었고, 북쪽 에리트레아의 고지대에 사는 이들은 티그리냐인이 되었다. 한편 건조한 에리트레아의 저지대에서 목축에 종사하는 이들은 인근 소말리인들처럼 이슬람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티그레인이 되었다.
  • 암하라인: 티그레이인과 함께 에티오피아 역사를 주도해온 민족이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중북부에 자리하고 있고, 가장 유명한 중심 지역은 쇼아이다. 암하라인들은 북부 지역의 악숨이 멸망한 뒤 13세기 에티오피아 제국을 수립하며 에티오피아 역사의 주류를 형성했다. 암하라인의 완전한 주도권은 메넬리크 2세 시기에 완성되었다.티그레이는 황제에 의해 제압되었고, 티그레이인들이 사는 북쪽 에리트레아가 이탈리아에 넘어가면서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메넬리크가 에티오피아 제국의 수도를 쇼아 지역의 아디스 아바바로 선택하면서, 제국의 중심도 온전히 암하라 지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암하라어, 암하라인은 오늘날까지도 에티오피아의 ‘표준’으로 간주된다(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암하라인으로는 ‘위켄드’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캐나다 가수 아벨 테스파예가 있다).
메넬리크 2세와 그가 만든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오늘날(2021년) 모습
메넬리크 2세와 그가 만든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오늘날(2021년) 모습
  • 오로모인: 16세기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가 전쟁으로 약해졌을 때 남쪽에서 대거 이주해온 목축민이다. 티그레인과 암하라인은 셈어파 민족인 반면, 오로모인은 쿠시어파 민족이라 소말리인과 더 가깝다. 에티오피아의 혼란기인 17세기와 18세기 동안 오로모인들은 에티오피아의 중북부 지역까지 밀고 들어와 암하라인과 투쟁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탈리아를 통해 들어온 우역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메넬리크 2세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에티오피아 제국에 흡수된다.원래 토착 종교를 믿던 오로모인들은 북쪽의 문명국들과 접촉하면서 종교를 받아들였는데, 대략 절반은 이슬람을 믿고 절반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상대적으로 새롭게 들어왔기에 에티오피아의 역사를 주도했다고 보기는 힘든 민족이지만, 여러 오로모 국가들은 16세기 이래로 에티오피아의 주요 권력 집단으로 등장하여 제국 정치에 개입하기도 했을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다. 오늘날 에티오피아 인구의 35%를 차지하는 최대 민족이다.
  • 소말리인: 에티오피아 고원 동쪽의 무더운 저지대에서 목축을 주로 하는 민족이고, 오로모인과 가까운 쿠시어파 민족이다.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홍해와 인도양 무역을 통해 성장했으며, 무역을 통해 벌어들인 부, 부족의 정치적 응집력, 이슬람교라는 새로운 통합 수단을 활용해 여러 국가를 건설했다.아프리카의 뿔의 패권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에티오피아와 대립했다. 그러나 저지대 목축민들은 에티오피아와 달리 중앙집권적 정치 중심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소말리인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계속된 쟁패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우역이 지나갔고, 메넬리크 2세는 서부 소말리아의 오가덴 평원을 정복하여 제국의 영토에 편입시킨다. 이후 소말리아는 북쪽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남쪽의 영국령 케냐, 동쪽의 이탈리아로 나뉘어 식민화가 되었고, 이는 소말리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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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메넬리크 2세가 죽었을 때, 에티오피아는 단순히 오랜 역사와 독자적 문명을 지닌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후계자들은 영토를 확장하고 근대화를 시작한 위대한 황제의 나라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메넬리크 2세의 업적은 곧 에티오피아는 여러 불안정 요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에티오피아는 내륙국이 되었으며, 특히 북쪽의 이탈리아가 아도와 전투의 수치스러운 패배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결정적으로, 암하라인의 지배를 티그레이인, 오로모인, 소말리인들이 계속해서 받아들일 것인지가 문제였다. 메넬리크 2세 같은 걸출한 황제는 쉽사리 나오는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메넬리크 2세가 안정적으로 황위를 계승할 아들을 보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1913년부터 1916년까지는 그의 외손자 이야수 5세가 비공식적으로 황위를 승계했는데, 유약한 인물인 이야수 5세는 메넬리크 2세의 가신들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기행을 벌이다가 쫓겨난다. 이야수 5세 대신 황제에 오른 것은 그리하여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제우디투(Zewdito)였다.

메넬리크 2세의 딸로 에티오피아의 첫 여성 통치자가 된 자우디투(1876-1930, 재위: 1916-1930)
메넬리크 2세의 딸로 에티오피아의 첫 여성 통치자가 된 제우디투(Zewdito, 1876-1930, 재위: 1916-1930)

그러나 제우디투도 아버지 메넬리크 2세의 카리스마를 이어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대신 실질적 권력자로 떠오른 것은 하라르 지방의 수장인 타파리 마콘넨(Tafari Makonnen)이었다. 쇼아의 왕 살레 셀라시에의 후손이자, 메넬리크 2세의 종질(오촌 조카)인 그는 방계 혈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황태자이자 섭정의 직위에 올랐다. 1917년 그는 에티오피아의 대공이라 할 수 있는 ‘라스’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 때문에 세계에서는 ‘라스 타파리(Ras Tafari)’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 라스 타파리가 바로 1974년까지 에티오피아를 지배하는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 재위: 1930-1974년, 출처: 퍼블릭 도메인)
에티오피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 재위: 1930-1974년, 출처: 퍼블릭 도메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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