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곧 기회다!!!
전쟁 삐라 같은 제목의 문건이 세상에 드러났다. “對外祕”(대외비)라는 글자가 뚜렷이 찍힌 문건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문건은 공영방송 KBS 장악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정당한 의혹 제기와 비판 보도뿐만 아니라 대통령 발언과 심지어는 대통령 부인에 대한 호칭까지도 심의 기구를 동원해 제재하는 언론 탄압을 보며 윤석열 정권은 그야말로 비판 언론과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이 지키고자 해 왔던 공영방송과 그 제도를 형해화해 처참히 망가트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공영방송 점령군의 의기양양함마저 느꼈다.
이러한 ‘생각’과 ‘느낌’이 점차 실체를 가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비판 언론과 공영방송에 대한 전쟁은 과대망상도 문학적 은유도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며 대담하고 계획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일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위기는 기회다] 문건 내용 “우파 중심으로 조직 장악”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는 3월 31일 [‘독재화’하는 한국-공영방송과 ‘신보도지침’] 편에서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제목의 KBS 대외비 문건을 단독 보도했다. 보도에 의하면 이 문건은 우파 권력을 위해 방송 조직을 장악하여 법과 제도가 정한 KBS의 방송 공공성과 공영성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국민과 시청자를 위한 공영방송을 특정 이념 집단을 위한 방송으로 만들기 위해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다.
문건을 작성한 이는 이를 ‘파괴적 혁신’이라 지칭했다. 실제 내용도 정확히 공영방송의 공공성과 공영성의 ‘파괴’만을 담고 있다. 문건은 “사장 제청 즉시 챙겨야 할 긴급 현안”으로 다음 항목을 적시한다.
- 대국민 담화(사과) 발표
- 인사를 통한 조직 장악
- 불공정 편파왜곡 가짜뉴스 근절
특히 인사와 관련해선 “그동안 소외된 자 중 축적된 역량과 능력이 있는 자”를 기용하되 “우파 중심으로” 라며 편파적 이념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사장 임기를 ‘실·국장에 대한 임명동의제’를 “폐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정중히 명령하고 있다. 하지만 임명동의제는 방송 제작과 편성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이다.
문건에는 공영방송 체계 근간 자체를 뒤흔드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방송구조 개편(KBS 공중분해) 항목에서 “현행 KBS 체제를 1공영, 1민영 등 방송구조 개편” 등과 함께“1TV는 교육방송, 아리랑방송 등과 결합”하고 “2TV는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보도된 내용만 보더라도 KBS 대외비 문건은 현행 방송법과 노동법을 위반할 소지가 다분하며 공영 방송 체계 자체를 허무는 의도를 담고 있어 보인다.
박민 사장, 취임 전 대외비 문건 인지하고 실행했나?
보도에 의하면 이 문건은 KBS 내부 직원의 제보로 확보된 것으로 이미 “고위급 간부 일부가 업무 참고용으로 공유하고 있는 문건”이라고 알려졌다. 언론노조 KBS본부에 의하면 이 문건은 “국장급 직위자가 하급자에게 참고하라며 건네는 등 사측 간부 사이에서 유통됐고, 일부 평직원도 열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이러한 언론 보도가 사실이고 박민(KBS 사장)을 포함한 간부들이 이 문건을 토대로 공영방송의 인사와 운영 및 경영과 관련해 의사결정을 했다면 이는 부당노동행위뿐만 아니라 방송의 자유와 독립성을 명백히 침해하고 KBS 내부 규정까지 위반한 심각한 불법행위가 될 수 있다.
문건의 작성 시점도 우려를 더욱 짙게 한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이 문건이 적어도 지난해(2023) 10월 이전부터 작성됐을 거로 추정했다. 박민이 이 문건을 업무 참고용으로 인식하고 이에 따라 인사와 운영을 포함해 노사 관계 관련 의사결정을 했다면, 위법성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문건에는 8월 수신료 관련 데이터와 김의철 사장 가처분에 대한 내용이 언급돼 있으며, “(인사는) 우파 중심으로(사장 선임과정에서 이해를 달리했던 우파 포함)”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문건은 박민이 이사회로부터 임명 제청을 받고 윤석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전, 박민 공식 취임 전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박민이 취임 전 이 문건을 전달받아 인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KBS 장악 계획서, 작성자를 밝혀라
문건의 심각성은 문건 내용이 단순히 계획을 권고하고 제안하기 위한 기획서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 계획서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기관의 대표에게 직접 실천 원칙과 방법까지 제시할 수 있는 권위와 권한을 가진 이는 과연 누구일까? 더 큰 문제는 문건의 주요 내용들이 실제 박민 취임 이후 현실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문건은 단순히 업무 참고용이라고 보기 어렵다. 공영방송 장악을 위한 지침으로 보이는 ‘정황 증거’들이 많다.
- 박민은 취임 직후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 박민 임명 당일과 이튿날에만 본부장, 국·실장, 부장 등 72명에 대한 대규모 인사를 단행했다.
- 이는 KBS 노사 단체교섭에 따라 2018년부터 도입된 국장급 보직자에 대한 임명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주요 제작 책임자 인사를 강행했다.
- KBS 정상화 주요 내용으로 기재된 ‘불공정 편파 왜곡 가짜뉴스 근절’ 부분도 ‘땡윤 뉴스’로 현실화했다. 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가 대표적이다. ‘대외비’ 문건이 상당한 권위와 무게를 가지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에서도 이 문건과 유사한 내용을 담은 문건이 존재했다. 경향신문은 작년 7월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실과 국정원이 공모해 방송장악을 기획했다 판단한 검찰 수사보고서를 단독 보도했다. 서울중앙지검 국가정보원 수사팀이 작성한 ‘MBC 방송장악 관련 청와대 홍보수석실 관련성 검토’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검찰은 이명박 정부 당시 다음과 같은 언론 장악 관련 문건에 국가정보원과 대통령 홍보수석실이 관련되었다고 봤다.
-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
- [MBC 좌편향 출연자 추가 퇴출 확행]
- [좌편향 방송인에 대한 온정주의 확산조짐 엄단] 등
윤창현 언론노조위원장은 [위기는 곧 기회다!!!] 문건은 “2010년 문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며 공영방송을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도록 KBS를 공중분해시키겠다라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이 문건의 작성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전달자 등을 밝혀야 할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총선 이후의 국회가 밝혀야 할 최우선 과제
박민이 임명한 이제원 제작1본부장은 KBS 다큐인사이트 팀이 제작중이던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반란이라도 진압하는 태도로 (제작중단을) 지시”했다. 담당 PD는 즉각 제작 자율성이 침해되었다며 제작·보도 책임자와 실무자 간 협의체인 제작공정방송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무산되었다. 이는 노사가 합의한 단체협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반발을 낳았지만 소용없었다. 문건이 파괴하고자 하고 박민 체제가 실제 파괴한 것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방송의 공영성이 파괴되면 우리는 유가족과 함께 사회적 참사를 애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애도의 대상과 기회를 그들이 정해준 대로 따라야 한다. KBS는 이승만을 추도하고 경애하기 위하여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띄우는 보도를 했다. 결국 파괴적 혁신은 방송의 공공성과 공영성을 넘어 우리 사회와 역사까지 파괴할 것이다. 이 문건 작성자들이 뜻한 “기회”가 정확히 이것일 테다.
문건의 작성자와 경위 및 전달과 실행 과정의 실체는 국가 차원에서 밝혀져야 한다. 방송의 공공성과 공영성 회복 차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자유와 정의 그리고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 보호를 위해 그러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강제 민영화에 성공한 YTN의 신임 사장이 취임식 첫 발언으로 “대선보도 대국민 사과”를 예정했다. 순간 [위기는 기회다!!!] 문건이 KBS 만이 아니라 모든 공영방송의 파괴를 위한 어떤 거대한 음모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스쳐지나간다. 총선 이후 국회가 나서서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 이유이다.
민언련 총선 특별칼럼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맞아 선거 전후 언론보도와 사회 의제를 짚어보는 총선 특별칼럼을 마련했습니다. 시민이 정확하고 공정한 정보를 얻어 현명한 주권자로서 선거에 참여하길 바라며, 열두 번째로 채영길 민언련 공동대표·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해당 칼럼은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