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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세병관을 바라보며 즉강끝을 생각한다.’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세상 소식을 전합니다. (3분)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

경남 통영에 가면 통제영이 있다. 조선시대 경상·전라·충청 삼도의 수군을 총괄했던 으뜸 병영으로 요즘의 해군본부에 해당된다. 이순신 장군 사후인 1604년에 조영되기 시작했지만 충무공의 호국정신은 여기서도 살아 꿈틀거린다.

통제영 한가운데에는 세병관(洗兵館)이 자리 잡고 있다. 세병관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에 걸맞게 세병관은 역대 통제사들이 중요한 의전과 행사를 주관하면서 삼도 수군을 호령했던 중심 건물이다.

통제영에 적은 세병·괘궁·지과

세병관에서 ‘세병(洗兵)’은 은 병장기를 씻는다는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 피로 물든 창칼을 깨끗이 닦아 넣어두고 다시 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통제영에는 만하루(挽河樓)도 있었는데 병장기 씻을 물을 은하수에서 끌어오겠다는 얘기다.

세병관 마루에 올라가면 들보와 벽면에 크고 작은 현판들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괘궁정(掛弓亭)이다. ‘괘궁’은 활을 건다는 말이다. 옛날 전쟁에서는 활로 화살을 쏘아 신호를 전했는데 그리 할 일이 없어 평화스러우니 활줄을 풀어 벽에 걸어놓는다는 말이다.

통제영 들머리에서 세병관까지 이르는 사이에는 내삼문이 놓여 있는데 ‘지과문(止戈門)’ 현판이 걸려 있다. ‘지과’는 창질(戈)을 그친다(止)는 뜻이다. 이 두 글자를 합하면 무(武)가 된다. 우리가 무장(武裝)을 하는 근본 목적이 평화에 있다는 얘기다.

무장의 근본 목적을 새겼다

무(武)의 근본 취지가 창질을 그만두고 전란을 멈추게 하는 데 있다는 인식은 당시 일부만 공유하던 특별한 생각이 아니었다. 보기를 들자면 고려 태조 왕건은 928년 후백제 견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창질을 그치게 하는 무를 숭상한다”고 했다.

또 조선시대 박제가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왕명에 따라 편찬해 바치면서 “우리 임금의 교화를 입어 창질을 멈추고 오래오래 평안하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적군과 싸워 제압하는 무술을 종합하면서도 이처럼 평화를 앞자리에 두었던 것이다.

‘창질을 그치게 하는 것이 무(武)’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은 세병·괘궁·지과가 들어가는 건물이 조선 남북 국경 지대에 두루 있었다는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건물에서 거처하거나 군사 훈련을 했던 장수와 병사들에게 그 뜻을 새기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괘궁은 무엇보다 서울 중앙의 훈련도감에 있던 활터가 괘궁정(亭)이었다. 함경도 혜산진·경원과 평안도 박천에도 괘궁정이 있었다. 평안도 의주·선천에는 괘궁‘루(樓)’가 있었고 제주도나 중국으로 뱃길로 이어지는 전라도 영암 이진(梨津)에는 괘궁‘헌(軒)’이 있었다.

다음으로 세병은 남방 국경 동래읍성의 남문이 세병‘문(門)’이었다. 북방 국경인 평안도 의주·벽동에는 세병‘루(樓)’가 있었다. 의주는 군사훈련장인 백일원(百一院)에도 ‘만하세병’이 크게 적힌 현판이 있었다. 지과는 경남 함안 한 곳에서 지과‘정(亭)’이 확인된다.

이불 속 만세 부르기인 윤석열 정부의 즉강끝

옛날에는 이처럼 임금에서부터 사대부와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무장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윤석열 정부가 쏟아내는 언행을 보면 이런 생각은 털끝만큼도 찾아보기 어렵다.

먼저 지금 정부에서 평화는 군비 확장을 위해서만 동원되고 있다. 걸핏하면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우지만 이는 엄청난 세금을 들여 막대한 무기를 사겠다는 얘기일 뿐이다. 두 마리 새우로 하여금 등 터지게 싸우도록 만들어 고래한테 이익을 챙겨주겠다는 말이다.

이에 더해 윤석열 대통령은 상대방이 도발하지 않도록 조건을 만들 생각은 않고 사실상 흡수통일론을 제기함으로써 북한을 자극하여 도발을 부추기고 있다. 북한이 오물 풍선을 띄우는 빌미가 되는 대북전단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데 방조·조장하고 있다.

전직 현직 국방부 장관의 발언은 이보다 더 나갔다. 신원식 전 장관은 “북한이 도발하면 즉시 강력히 끝까지 응징하겠다”면서 ‘즉강끝’을 내세웠다. 더 나아가 김용현 현 장관은 사건 현장에 국한되었던 이 즉강끝의 개념을 북한 정권과 지도부까지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전·현직 장관들의 ‘끝까지’는 전시작전권이 없는 상태에서는 한국에 권한이 없다. 이불 속에서 독립 만세 부르는 꼴이다. 그러면서 정작 전작권 회수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장관 모두 이러다 전쟁이 터질 것 같다는 불안만 키우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즉강끝’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은 지금의 ‘즉강끝’과 비슷한 언행을 일삼았다.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도성의 궁궐에서 책상물림 대신들과 죽이 맞아 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수들에게 제대로 나가 싸우지 않는다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1597년 2월 이순신 통제사 파직이 선조의 무리한 부산 앞바다 출전 명령을 거부한 결과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 말고도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무리한 출전을 강제한 적이 있었는데 1594년 장문포해전이 그것이다.

당시 왜적은 빈 배 두 척만 격침됐을 뿐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고 아군만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은 바다에서 육지로 힘들여 올라가며 싸워야 했던 반면 왜적은 산꼭대기 보루 뒤에 숨어 있다가 틈틈이 아래로 총만 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랏일이 위태롭건만 안으로 구제할 계책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겠는가.” 지금 우리 국민 대다수도 430년 전 이순신 장군의 이런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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