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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가 틀렸다: 김희철 비판을 비판함

김희철은 JTBC ‘77억의 사랑’에서 설리, 구하라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성별을 갈라 싸우며 두 사람에게 악플을 달던 사람들이, 두 사람이 죽고 나니 서로를 탓하며 자기들은 추모를 한다 나서더라고.

“사실 저는.. 그 두 친구랑 좀 친했었는데, 그래서 이제 제가 그 일들을 겪고 가장 화가 났던거는, 요즘 뭐, 솔직히 성별을 갈라서 싸우잖아요. 그런 아까 두 분이 받았던 악플처럼(대도서관과 윰댕) 남자들은, 소위 말하는 성희롱으로 두 친구들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고, 여자들은 여자 망신이다, 부터 또 모욕적인 말들을 하다가… 그러다가 이제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러니까 서로 이제 탓 거리 할 걸 찾는 거에요. 니네 탓이다. 아니다 니네 탓이다. 아니다 프로그램 탓이다. 뭐 누구 탓이다. 그러니까 서로 또 먹이를 물어뜯으러 다니고, 뭐 너무 슬퍼서 우리는 추모를 할 거다. 그렇게 욕하던 친구들이.. 그러면서 저도 이제 전 평생 연예인을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인데, 저도 형(신동엽)한테 고민상담 할 정도로… 제가 그래서 그때 SNS를 다 끊고 닫았거든요. 나도 너무 화가 나서 이 모든 걸 볼 때마다 더 화가 나서…” (김희철, 출처: JTBC, 강조는 편집자)

이 말을 본 위근우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김희철을 비판했다. 이를 성별간 갈등으로 치환해 남녀 둘 다 잘못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건 논리적 비약이라고 말이다.

위근우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1. 남성들의 악플이 ‘여성혐오’적인 데 비해 여성들의 악플을 ‘남성혐오’적이라 말할 수 없고,
  2. 설리를 주로 공격한 것은 남성중심적 담론이었으며,
  3. 설리 본인이 여성혐오에 맞서 싸운 파이터였고,
  4. 설리의 삶을 응원했던 건 대부분 여성 페미니스트였다는 것이다.

위근우의 게시물 전문

사적으로 친했던 두 동료를 잃은 김희철 씨의 분노를 내가 감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젠더갈등'(따옴표를 쓰는 이유는 내가 젠더갈등, 성별 간 갈등이란 개념에 동의하지 않아서다)의 혼파망(‘혼돈파괴망가’ 혹은 ‘혼돈파괴망각’의 줄임말, 편집자) 속에서 나온 혐오발언들로 두 동료가 힘들어 했다고 느껴진다면 페미니즘의 당위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질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고 설리 씨에게 남성 악플러뿐 아니라 여성 악플러도 있었고, 그 중 태세 전환이 있던 이들이 있던 게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해도 이걸 ‘성별간 갈등’ 문제로 치환해 둘 다 잘못이라 말하는 건 엇나간 판단이라는 생각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남성 악플러 여성 악플러 둘 다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 근거로부터 ‘성별 간 갈등’에서도 남녀 둘 다 잘못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러한 논리가 정당화되려면 고인에 대한 여성 악플이 이런 ‘젠더갈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내적 연관이 제시되어야 한다. 가령 설리의 노브라에 대해 비난하고 그에게 성희롱을 하던 남성들의 악플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는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혐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고인에 대한 여성 악플 역시 ‘남성혐오'(역시 따옴표를 쓰는 건 편의적으로 쓰지만 동의하지 않는 개념이라서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걸까. 이 부분의 논리적 고리가 약하다.

또한 이런 내적 정합성의 문제와 별개로, 고 설리 씨가 겪어야 했던 경험적 맥락을 따져도(심지어 그것을 김희철 씨가 나보다 더 잘 알지라도) 저 판단은 잘못된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남녀 악플이 동일하게 가해졌다 가정해도 실제로 기사나 연예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고인에 대한 오피셜한 공격으로 가시화된 건 결국 남성중심적 담론이었다. 즉 고인을 직접적 혹은 우회적으로 비난한 연예기사들은 다분히 남성(혹은 남초) 중심적 관점으로 고인의 노브라에 대해, 고인의 ‘시선강간’이라는 워딩에 대해 시비했다. 가령 ‘누가 설리에게 시선강간이란 말을 알려줬는가’ 따위의 쓰레기 같은 기사들이 그러하다.

둘째, 고인이 본인의 삶 안에서 지키려 한 태도 자체가 다분히 여성의 자기결정권(노브라)과 자매애(생리대 지원)였다. 김희철 씨는 고인을 ‘젠더갈등’의 피해자로 보지만 정작 고인이야말로 ‘젠더갈등’에서 여성 진영의 중요한 플레이어이자 파이터였다. 그렇게 여성 연예인에 가해지는 여성혐오에 대해 목소리를 내서 저항한 고인이 과연 ‘성별 간 갈등’이라는 프레임에 동의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물론 개인적 친분과 함께한 시간이야 김희철 씨가 훨씬 많겠지만.

셋째, 악플러는 모든 성별에 존재했지만 반대로 설리의 삶을 존중하고 응원해준 이들 대부분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었다. 앞서 인용한 쓰레기 같은 기사들에 대해 반박하고 고인을 옹호한 기사나 칼럼들은 내가 재직했던 ‘아이즈’의 기사를 비롯해 다분히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작성됐다. 이런 반박 기사조차 김희철 씨가 ‘젠더갈등’적인 기사들로 싸잡아 비난하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위의 이유들로 고인에게 가해진 무차별한 악플을 근거로 김희철 씨가 평소 믿던(노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가사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젠더갈등’ 담론을 정당화하는 건 그리 세밀한 분석이라 보지 않는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친했던 동료를 잃었던 그의 울분을 감히 가늠할 수 없고 그 울분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말이 이젠 없는 고인의 진심을 대변하는 게 되어선 안 되며, 그럴수록 이런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덧. 고인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김동완 씨가 지적했던 [악플의 밤]의 문제에 동의하며 그렇게 고인을 악플에 ‘직접 맞서도록’ 방송에서 밀어붙이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김희철 씨 말대로 고인이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행복하다고 했다면 다행한 일이지만, 이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고인을 대신해 [악플의 밤]에 대한 알리바이를 다름아닌 JTBC 예능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리 윤리적이지 못한 편집이라고 생각한다.

덧의 덧. 얼마 전 허지웅 씨가 ‘젠더갈등’이란 워딩에 대해 ‘젠더갈등’이라는 중립적이고 건조한 현실이 있고 그 이면에 여성차별이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 원론적으론 이해하지만 위에서 보듯 거의 대부분의 경험적 맥락에서 ‘젠더갈등’이란 개념은 그 개념의 사용을 통해 여성차별이라는 이면의 진실을 가리는데 사용된다. (출처: 위근우의 인스타그램 게시물)

시작부터 ‘오독’ 

위근우의 글은 매우 당황스럽다. 무엇보다도 우선, 위근우는 김희철의 말을 오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희철은 설리를 향한 악플 자체를 두고 젠더갈등이라 칭한 게 아니다.

김희철이 젠더갈등이라 칭한 건 이 부분이다:

고인의 죽음을 두고, 남성 커뮤니티에선 ‘여성 커뮤니티의 악플 때문’이라며, 여성 커뮤니티에선 ‘남성 커뮤니티의 악플 때문’이라며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 자신들은 진심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말하면서도, 그러면서 한편으론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모습.

최초의 전제가 틀렸기에, 그 이후의 논리 전개는 사실 모두 무의미한 거나 마찬가지다.

맞다, 설리를 향한 악플은 남성 커뮤니티나 여성 커뮤니티나 공히 모두 여성혐오적인 시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이 설리의 죽음을 온전히 ‘다른 젠더’의 탓으로 돌리며 발을 빼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건 위근우도 맞고 김희철도 맞다는 식으로, 황희 정승처럼 굴 일이 아니다. 위근우의 비판은 ‘틀렸다’.

또한, 위근우의 말이 ‘일반론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일반론을 개별 사례에 함부로 적용하면 안 된다. 만에 하나, 설령 김희철이 실제로 젠더 갈등이란 개념을 잘못 사용했다 해도, 위근우의 글은 흡사 장례식장에 가서 고인의 부인한테 가부장제의 폐단에 대해 이야기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이건 정말 단순한 얘기지 않나. 개별 사례를, 남의 사생활과 감정을 함부로 일반론으로 재단해서 법관 노릇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 앞에서 ‘너의 슬픔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고인의 친구로서 고인의 아픔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이,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두고, 그건 인문학적으로 틀렸다는 식의 ‘고나리질’(‘훈계’)1이라니. 실제로 체험한 이의 목소리가 ‘인문학적’ ‘사회학적’ 정합성을 따져 부정되는 것은 정말 논리적으로 합당한가. 검은 백조를 봤다는 사람의 목격담을 검은 백조가 있을 수 없다는 사회학적 ‘통찰'(?)을 들어 부정하는 것이 정말 합리적인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검은 백조를 봤다는 사람에게 검은 백조가 없다는 '사회학적 통계'를 내미는 일은

검은 백조를 봤다는 사람에게 검은 백조가 있을 수 없다는 사회학적 ‘통찰'(?)을 들어 그 목격담을 부정하고 훈계하는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 문제  

젠더 불평등상 여성혐오와 짝을 이루는 남성혐오란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남성을 혐오하는’ 현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여성혐오(미소지니)라 이름 붙여진 현상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 또한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는 건 남성 중심적 담론이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다.

근데 그 얘기를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 얘기에 끌어오면 어떡하나? 설리는 페미니스트였고, 페미니스트들이 설리에게 연대했다고? 그것과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은 무슨 관계인가? 페미니스트들이 설리에게 연대했기에,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은 심각성이 덜해지는가?

페미니스트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의 '악플'은

페미니스트의 ‘연대’가 있었기 때문에 여성 커뮤니티의 ‘악플’은 덜 아픈 것이 되었나? 남초 커뮤니티의 악플이든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이든 아프긴 마찬가지다.

젠더 불평등에 대한 일반론이, 일부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과 뒤늦게 남 탓하는 풍조를 ‘없는 걸로’ 만들진 않는다. 젠더 불평등이란 큰 맥락 속에서 그게 비교적 작은 문제일지는 모르겠으나, 틀림없이 있는 문제란 말이다. 그리고 한 개인을 충분히, 죽음에 이르도록 괴롭힐 수 있는 문제고.

위근우의 글은 젠더 갈등이란 화두에 지나치게 천착함으로서, 익명의 개인들과 연예인 사이의 권력관계, 연예인을 둘러싼 옐로 저널리즘의 문제 등 다층적인 문제를 젠더 담론 속에 전부 눙쳐버리고 만다.

예를 들어, 언론은 설리가 로타와 작업한 화보를 여성혐오적으로 소비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설리를 여성혐오적이라 비난하는 맥락에서도 소비했다.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이 남성혐오적이지 않다는 것은, 사실 악플의 권력관계를 논하는 데 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논리 전개가 뜬금없기까지 하다. 말했다시피, 김희철이 말한 ‘성별을 갈라 싸운다’는 건 악플 자체를 두고 한 얘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글은 ‘설리는 여성 진영의 파이터였다’는 이유로 여초 커뮤니티의 악플을 남성 커뮤니티의 악플에 비해 덜 해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쎄쎄, 2016년 7월 호 '설리 인터뷰' 중에서

쎄쎄, 2016년 7월 호 ‘설리 인터뷰’ 중에서

게다가 설리라는 개인을 괴롭힌 게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그나마 가까이 있었던 이해자이자 친구가 하는 말을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칼럼니스트가 거대담론을 갖다 붙여서는 ‘네가 하는 말은 틀렸다’ 비평하는 건 명백히 오지랖이다.

설리의 고통은 결국 설리만이 알겠지만, 그나마 그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였겠나? 젠더가 같다는 이유로, 여성시대의 악플러들이 바로 곁에 있던 남자사람 친구보다 더 설리의 고통을 잘 이해하고 나눌 수 있었을까? 젠더는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잖나.

위근우의 글이 이 일반론을 지적하는 수준에서 끝났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반론은 한 연예인을 향해 쏟아진 악플과 그 죽음 이후 벌어진 책임 돌리기 등 특정한 ‘사건’을 해석하는 데는 적절하지 않다.

지겹다 이젠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 말이 얼마나 오용되고 있는지 참 한심스럽다. 뻔히 알면서도 계속 ‘남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복하는 것도 참 그렇다. 그게 지금 어떻게 이해되고 있냐면, 특히 악플러들한테는, ‘그러니까 여자는 무슨 막말을 해도 된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단 말이다. 여자는 젠더 불평등의 피해자니까. 피해자가 가하는 폭력은 폭력이 아니니까.

근데 가해자와 피해자, 강자와 약자라는 게 언제나 그렇게 무 자르듯 나뉘는 것이던가. 일반론이 개별 사례에 그렇게 깔끔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던가. 당장 연예인이란 존재는 대체 강자인가 약자인가. 이건 결국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다. 김희철은 많은 경우 강자처럼 보이지만, 악플러 앞에서는 약자일 수 있다.

이처럼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져야 할 이야기가, 개별 사례에 맥락도 안 따지고 그냥 마치 정언명령처럼 적용되고 있다. 자본, 지역, 문화 등 다른 권력관계는 모두 배제하고 오직 젠더 권력만이 피해자성을 규정하는 만능 도구로 이용된다.

박창진이 조현아에게 모욕을 당해도 젠더 권력상 남성혐오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이건 박창진 잘못인가? 맥락을 무시하고 기승전-젠더로 얘기가 빠지니까, 그 자체만 떼어놓고 보면 ‘일반론으로서’ 맞는 말일지 몰라도 실제로 맥락 속에서는 완전히 틀려먹은 얘기가 되는 거다.

대항항공 세 모녀의 폭력과 비행은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대한항공 세 모녀의 범죄와 폭행은 ‘젠더 권력상 남성혐오’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남성 잘못인가?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최근 한 재벌가에서는 남성이 가정 폭력을 호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논평하기를, ‘사회구조적으로 남성혐오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 가정 폭력도 남성에게 원인이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 남성의 행실을 비웃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개중에는 여성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며 TV 등에 얼굴을 비치곤 하는 사업가도 있었다.

그들의 주장이, 수많은 가정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힐난해온 바로 그 논리, ‘피해자가 맞을 짓을 했을 것이다’와 똑같다는 건, 그리 놀랍지만은 않다. 젠더 권력이라는 한 가지 일반론이 모든 사안을 판단하는 단 하나의 계명이 되면서, 권력 관계의 다층성 등 다른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성평등은 우리가 여전히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다. 젠더 담론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 근데 그게 누가 젠더 담론을 얘기한다고 무조건 그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젠더담론을 절대선처럼 내세운다. 젠더 얘기만 하면 정치적 올바름의 권좌에 감히 도전하지 말고 무릎을 꿇어야 할 기세다.

기승전-젠더 논리 전개, 인문학과 사회학을 빙자한, 근거 없는 자가발전식 논리 전개. 그냥 자기는 다른 한남과는 다르다 자랑하려는 자기합리화의 도구들, 지겹다 이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독자'를 향해야 하고, 향할 수밖에 없다. 누가 독자의 눈을 가린 손수건을 풀 것인가.


  1.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지나치게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뜻, ‘관리’의 오타인 ‘고나리’에서 비롯된 신조어(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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