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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천사, 세계를 들다: 역도 레전드 이배영 인터뷰

역도가 올림픽에 등장한 역사는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체조경기였으며 지금의 인상, 용상으로 나뉜 경기 방식으로 변환되었다. 역도는 매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종목의 유치 존폐에 있어 단 한 번도 위태로움이 없었다. 이는 단순한 역도의 인기를 떠나 스포츠 면면에서도 인간의 신체적 그리고 생물학적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역도 선수로 세 번의 올림픽 출전을 한 선수가 있다. 첫 번째 올림픽은 도약을 위한 기회를 얻었고, 두 번째 올림픽에서는 시상대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으며, 세 번째 올림픽에서는 미끄러지면서도 끝내 놓지 못한 바벨이 있었다. 바로 체육훈장 맹호장 수상자로 우리나라 역도 레전드인 이배영의 이야기이다. 만 13살의 나이에 역도에 입문해 지난 20년 간 선수로서 그리고 선수 은퇴 후, 현재 종로구청 여자선수단 감독을 비롯해 다양한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스포츠 행정가로 변모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보았다.

이배영 선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용상 경기 당시

이배영 감독의 영광스러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용상 경기 당시

 

“야! 너 이리 와봐!”

하교하던 그를 누군가 불렀다

수동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진학한 순창북중학교 1학년 시절, 이배영 감독은 당시 130cm에 32kg밖에 되지 않는 정말 작은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달리 학교 일과가 끝나고 하교를 하려 교문을 나서려는데 “야! 너 이리 와봐!”라고 부르는 역도부 지도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도와 인연이 시작되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선생님을 따라간 창고에는 생전 처음 보는 쇳덩이에 동그란 원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사이 운동을 하는 또래 학생들도 보였다. 다짜고짜 바벨을 땅에서 끌어올려 보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그는 쉬이 끌어올려 보았다. 체구가 작았기에 그에게 작은 바벨부터 조금씩 무게를 올려본 선생님은 이배영 감독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보았다. 선생님은 그에게 정식적으로 역도 입문을 권유했다.

이배영 감독의 부모님은 역도에 대한 선입견이 깊었다. 공부도 잘했던 이배영 감독이 체육특기생의 길을 걷는 것도 반대했다. 그러나 이미 역도의 매력에 반한 이배영 감독은 부모님을 지속해서 설득하여 결국 성적에 지장에 없도록 하겠다는 조건으로 역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배영 감독은 그해 5월 역도에 정식 입문해 11월, 소년체전 선발전 겸 도 대회에 출전하였다. 실력으로나 경력으로나 그가 선발전 출전자 명단에서 제외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당시 전라북도 역도연맹 전무이사는 대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배영 감독을 보며 격려차 동메달을 ‘선물’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이배영 감독의 첫 ‘수상’은 그 당시까지도 이배영 감독의 역도 선수 생활을 말릴 수 없어 강제 설득 당하고 있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배영 감독이 다음 대회를 기약하며 훈련을 하던 중, 중량급 선발 선수 한 명이 집안 사정으로 소년체전 출전 포기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출전 선수의 빈 공백은 당시 이배영 감독을 유독 아꼈던 전라북도 역도연맹 전무이사의 선수 선발 추천으로 그가 채우게 되었다. 그렇게 이배영 감독은 우여곡절 끝에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했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 모든 게 역도 입문 7개월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배영 감독과 역도부 지도자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는 아찔한 우연이 숨겨져 있다. 역도부가 처음 창단되어 역도부 지도자 선생님은 체육 시간을 활용해 반의 모든 학생의 신체적 조건과 체력을 테스트하였다. 그런데 이배영 감독은 하필 그날 주번이라 체육 시간에 교실을 지키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역도부 지도자 선생님께 “저 녀석 똘망똘망 하던데 역도 테스트 안 해봤느냐”라며 이배영 감독을 테스트해보길 추천했고 역도부 지도자 선생님은 하교 시간까지 기다려 이배영 감독을 불렀다. 만약 역도부 지도자 선생님이 수많은 학생 사이 담임 선생님의 추천을 받지 않고 지나쳤다면, 지금의 이배영 감독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인생에서의 우연과 인연은 그렇게 운명적으로 삶을 바꾼다.

1997년 동아시아경기대회 국가대표선수단 결단식

1997년 동아시아경기대회 국가대표선수단 결단식

체전 3관왕의 신성… 하지만 뼛조각이 된 팔꿈치

이배영 감독이 소년체전에서 수상하자, 역도계에서는 작은 체구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메달을 획득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이듬해 여름 처음 국가대표 꿈나무 격인 국가대표 후보 선수 전지훈련에 참가하였고, 후에도 종종 훈련에 참가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잘하는 또래 선수들이 모두 모이니 동기부여는 물론 훈련 방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중학교 3학년이 된 1994년, 그는 소년체전 3관왕에 오르며 역도계 ‘신성’으로 모든 이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고,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되었다.

순조롭게 훈련이 진행되던 사이, 순창고등학교에 진학한 이배영 감독은 중교 체급이었던 -40kg급에서 고교 최하 체급인 -54kg으로 체급을 단기간에 올려야 하는 상황에 부닥쳤다. 높은 체급의 선수일수록 기량은 현저히 차이가 난다. 체급이 달랐던 그는 상비군에서 제외되었고, 그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막연히 ‘체중을 불리면 체급이 늘 것’이라는 무지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과는 달리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배영 감독은 라면을 선택했다. 한 번에 라면을 세, 네 봉지씩 끓여서 먹어가며 체중을 불렸다. 하지만 기록은 제자리였다.

남들이 앞서나가는데 뒤로 처지는 느낌을 이길 수 없었던 이배영 감독은 체중을 불리는 와중에 훈련을 더 많이 했다. ‘운동만 더 많이 하면 기록이 더 늘 것’이라는 1차원 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몸은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오른쪽 팔꿈치 탈골과 뼛조각이 깨지는 상처를 입으면서 수술대에 올랐다. 시간이 지나 갑갑한 깁스를 풀었는데 팔이 펴지지 않았다. 바벨을 들어야 하는데 팔이 펴지지 않으니 막막했다. 무한한 재활과 함께 팔을 쓰지 않고도 가능한 이외의 훈련을 시작했다. 독한 시간을 견뎠다. 회복은 다행히 성공적이었고, 예상보다 이른 시일 안에 복귀하며 전국 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을 꼬박 체급 전환과 부상 재활에 전념하며 보냈다. 2학년에 올라서야 전국체전 2관왕에 오르며 성적을 내었다. 그 당시 국가대표 상비군 전지훈련 참가 중이던 이배영 감독은 정식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고등학생은 불과 두 세 명에 뿐이었던 역도 국가대표였기에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국가대표 상비군 전지훈련을 마치고 바로 태릉선수촌 입촌하라는 공지를 받고 이배영 감독은 전지훈련을 마칠 때까지 부푼 가슴에 잠을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1999년 미국 사바나 세계주니어 역도 선수권대회 우승

1999년 미국 사바나 세계주니어 역도 선수권대회 우승

첫 올림픽, 2000년 시드니에서 축제를 만끽하다 

선수촌에 입촌한 국가대표 생활은 상상했던 선수촌 생활과 많이 달랐다. 고등학생인 이배영 감독에겐 이미 월등한 실력과 훌륭한 기량을 지니고 국제 대회 출전 및 입상 성적을 내고 있던 선배 국가대표 선수들과 함께하는 훈련이 정말 힘들었다. 이배영 감독은 정식 국가대표였지만 실상 국제 대회 출전이 아니라 유망주 육성 개념으로 발탁된 경우였기 때문에 격의 차이를 크게 느꼈다. 그러나 득이었을까? 고된 훈련은 그의 상대적 박탈감을 오히려 없앴다.

“많은 훈련량에 일과를 마치면, 지친 몸을 가눌 수 없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목표는 먼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오늘 훈련만 잘 넘겨보자’였어요.” 

어떻게 소화했는지도 잊을 만큼 힘든 훈련을 견디는 걸 하루에 하루를 보태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렀다. 그의 수술 경과는 어찌나 회복이 빨랐는지, 당시 국가대표 감독은 이배영 감독의 선수 은퇴 후, 당시를 회상하며 ‘회복력이 좋아 신기했다’고 했을 정도이다. 그의 훈련은 제25회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우승 등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선보이는 값진 결실로 돌아왔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역도 국가대표팀(위), 결단식(아래)

추억의 사집첩,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역도 국가대표팀(위), 결단식(아래)

 

조선대학교 재학 시절, 만 21세 나이로 출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배영 감독은 ‘200년 시드니 올림픽’을 국가대표 선수로서 출전했던 세 번의 올림픽 중 유일하게 ‘축제’라고 느꼈던 올림픽으로 기억한다. 첫 번째 올림픽이었던 만큼 성적에 대한 부담감도 적었고, 출전에 대한 의미가 컸으며, 성적보다는 자신과의 기록 시합에서, 그것도 올림픽이라는 무대에서 늘려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그리고 이배영 감독은 -69kg급에 출전하여 330kg의 성적으로 7위를 하였다. 또한, 참가 선수단과 관객, 시설 등 두루두루 높은 평판을 받았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축제’를 마음껏 만끽하며 즐겼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역도 경기장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역도 경기장에서

부상, 부상, 또 부상…. ‘동작 연구’로 돌파구를 열다

이배영 감독은 고등학교 1학년 당한 부상 이후, 고등학교 3학년 전국체전 출전했을 때, 대학교 시절 세계선수권대회 시합 때, 그리고 같은 시절 훈련을 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총 네 번의 팔꿈치 부상을 당했다.

“처음 다쳤을 때는 혼란이 왔는데 ‘설마 또 다치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계속 훈련을 했어요. 두 번째 부상을 당했을 때는 ‘그만두고 싶다’기 보다는 ‘어디까지 다치나 보자’라는 오기가 생겨서 이를 악물고 훈련을 했어요. 그러나 세 번째 부상으로 이어졌고, 그제야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에 ‘동작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동작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룻밤 사이 고쳐지지 않는 오래된 습관으로 인해 얼결에 옛 동작으로 훈련하다가 네 번째 부상을 당했다. 이배영 감독은 네 번째 부상으로 인해 ‘알고 다치는 순간 역시 동작이 다치게 하는 것’을 깨달았다. 부상이 왜 생기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확신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이배영 감독은 훈련 중 부상 방지에서도 ‘목표 설정’과 ‘동기부여’를 강조한다.

“‘부상 때문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냐’는 질문은 선수들이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 입니다. 그러나 저는 역으로 선수들에게 ‘다쳤을 때 그만둘 생각할 여유가 있느냐’라고 묻고 싶어요. 부상을 당했을 때 선수들이 가장 먼저 지녀야 할 정신은 ‘빨리 나아야지’라는 의지라고 생각해요. 부상을 이겨내면 확실히 운동을 대하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부상을 당했다고 해서 ‘그만둬야겠다’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미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치는 것 같습니다.”

이.배.영. 영광스런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다 

이배영 감독은 2004년 이전 수많은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고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 연속 대한역도연맹의 신인선수, 우수선수, 최우수선수로 선발되어 수상하는 등 역도계에서 최고의 선수였으나 비인기 종목의 특성상 이배영 감독을 아는 인구는 몇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메달 획득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다.

‘미소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획득 경기 당시

‘미소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 획득 경기 당시

“사실 올림픽 출전 직전까지도 저 자신에게 확신이 없었어요. 기록이 늘어가고 있는데, 부족한 느낌이랄까요?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전하는 느낌이 드니 많이 불안하고 자신감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강력한 올림픽 금메달 예상 후보였던 불가리아 선수가 올림픽 직전 도핑이 적발되며 올림픽 출전이 불발되자 제가 운이 좋으면 동메달까지 획득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기면서 그때부터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어요.”

이배영 감독이 불안감 반, 자신감 반으로 아테네 공항에 도착한 후 화물 운반대에서 짐을 내리는데 올림픽 대회 날짜에 맞추어 역도 할 때 손이 풀리지 않도록 일부로 손에 잡기 편하게 길러온 엄지손톱이 ‘딱’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순간, 이것이 어떠한 징조를 뜻하는 것인지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테네 현지 적응을 위해 경기 전 며칠보다 훨씬 더 일찍 도착한 것은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나날이 지나면서 지루함과 무료함이 몰려들었고 초조한 잡생각은 사라졌다.

올림픽 경기가 시작되자 부러진 손톱이 징크스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이배영 감독은 이내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몰두했다. ‘무념무상’으로 경기에 임하니 그는 어느새 금메달을 바라보며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이배영 감독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전병관 선수의 금메달 이후 맥이 끊겼던 대한민국 남자 역도에서 12년 만에 은메달을 획득하는 역사를 썼다.

“메달 획득 이후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역도계 외 다른 분야에서 저를 찾아주시는 것과 길에서 걷다 보면 대중분께서 알아봐 주는 것이 신기했어요. 그중 가장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제껏 제가 소개될 때 ‘이배영입니다’였었다면, ‘올림픽 메달리스트 이배영입니다’로 바뀐 것이 제게 가장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드디어 이배영 감독은 누군가에게 소개될 때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큼 특출만 한 무언가를 이루어낸 사람이 된 것이다. 이배영 감독은 두 번째 올림픽 출전에서 올림픽 메달 획득과 함께 평생 자신 이름 석 자 소개에 붙을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그 타이틀엔 ‘무게’가 있었다. 그의 실력을 배제하고 그가 내뱉는 말과 사사로운 행동까지 많은 대중이 눈여겨보게 되었다. ‘공인’으로서의 또 다른 책임감을 지니게 된 것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MBC 역도 해설위원 당시 역도연맹 임원, 전병관 감독과 함께

2012년 런던 올림픽 MBC 역도 해설위원 당시 역도연맹 임원들, 전병관 감독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 두 번의 세계선수권

이배영 감독은 선수로서 출전했던 수많은 국제 대회 중 올림픽도 기억에 남지만, 특별히 두 번의 세계선수권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는 그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주니어대회도, 아시아 대회도 아닌 첫 국제 대회에서 시상대 위에 올라가 메달을 획득한 의미 있는 대회였다. 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태극마크, 그리고 그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출전하는 국제 대회. 이배영 감독은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메달을 획득한 순간을 가장 감격스럽게 생각한다.

“올림픽 출전은 한정된 국가, 한정된 숫자의 선수가 출전합니다. 그러나 세계선수권대회는 세계의 ‘모든’ 선수들이 총출동하는 대회니 선수들에겐 세계선수권대회의 결과가 곧 실력을 인정하는 대회이기에 더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배영 감독은 당시 동메달을 획득했으나 은메달을 획득한 타국 선수가 도핑에 걸린 것이 대회가 끝난 후에 발각되어 이배영 감독이 은메달로 승격되었다. 타국 선수가 대회 측에 자신이 받은 은메달을 스스로 반납하지 않으면 이배영 감독도 기록은 은메달 획득으로 수정되어 처리 되었더라도 받은 동메달에 만족하며 막연히 기다려야 했을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타국 선수가 잘못을 인정하고 메달을 반납하여 이배영 선수가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돌려받은 메달인 만큼 지금은 집에 예쁘게 ‘전시’해두고 있다.

또 한 번의 세계선수권대회는 바로 2007년의 대회이다. 이배영 감독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세계 최고’를 꿈꾸며 모든 걸 쏟아부었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하여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그는 용상과 인상 6번의 시기에서 모두 실패했다. 그는 2007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인생에서 가장 처절했던 대회’로 꼽는다.

“이 대회를 통해 만족하며 차근차근 정진하는 것. 그리고 무조건 욕심만 내서는 안 되고, 적게 가져도 가질 수 있는 것에 만족할 줄도 알아야 조금 더 가질 수 있다면 그 기쁨 또한 크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때 이후로 역도의 깊이를 알아간 것 같아요.”

20019년 제100회 서울 전국체전 종로구 성화

20019년 제100회 서울 전국체전 종로구 성화

투혼을 불사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배영 감독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지만,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경기 도중 다리 경련을 일으켜 넘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역도 바벨을 놓지 않는 모습으로 많은 대중에게 기억 되며, 지금도 회자하고 있다. 절실했던 그의 모습. 끝까지 투혼을 펼친 그의 모습.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돌아봤을 때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경기를 위해서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역도는 장미란 선수 등의 등장으로 인해 대중의 선풍적인 관심을 받았다. 많은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그렇듯, 이배영 감독에게도 일시적인 방황이 찾아왔다. 평생의 꿈이었던 ‘올림픽’과 ‘올림픽 메달 획득’을 각각 이루고 나니, 그에게 삶을 가치 있게 살아갈 동기부여를 줄 꿈과 목표가 사라진 셈이었다.

“꿈을 이뤄버리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운동을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매일 고민했어요.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은 획득하지 못해봤으니 다시 시작하자!’라고 마음을 먹었어요.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며 역도에 대해 더 깊이 매진하게 되면서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역도의 새로운 부분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어요.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했다면 그 결과도 제게 좋을 수 있었겠지만, 역도를 알아가면서 올림픽은 경기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연구를 한 결과를 보기 위한 대회이니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이배영 감독에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축제’였다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영광’이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은 ‘피날레’였다. 다리 근육 경련으로 인해 실력을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용상에서 세 차례 바벨을 떨어뜨려 실격 처리 된 이배영 감독이었다. 그는 끝까지 응원해준 관객들에게 손을 들어 화답하고 미소 지으며 경기장을 떠났다.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이배영 감독의 투혼은 스포츠맨십의 상징이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결과가 좋았다면 기분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부상 때문에 많이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메달 획득도 아닌 부상으로 실격당한 제게 언론도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고, 대중도 몇 배나 더 많이 알아봐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에요.”

이배영 감독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메달 획득 후보다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국내를 넘어 외신까지 이배영 감독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냈다. 이배영 감독은 2008년 삼성&Daum 네티즌 금메달, 2008년 순찬군민의장 문화체육장, 2008년 조선대학교 명예금메달, 2008년 제2회 한국페어플레이상 개인상 등을 수상했다.

2015년 국가대표 후보 선수 지도자 당시

2015년 국가대표 후보 선수 지도자 당시

지도자를 향하여 

전국체전 역도 금메달 11연패를 하며 -69kg급 국내 역도 최강자로 군림했던 이배영 감독은 2011년 전국체전 종합 은메달 수상을 마지막으로 18여 년 간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선수 은퇴 후, 그는 순천향대학원에서 헬스케어비지니스 석사과정에 입학하여 학업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충남체육고등학교 (이하 충남체고) 역도부 지도자를 맡았다. 대학원 졸업 이후, 국가대표 후보 선수 지도자를 거쳐 2016년 리우 올림픽 국가대표 지도자를 맡았다. 2016년 리우 올림픽이 끝나고 2017년부터 현재까지 종로구청 여자 역도 선수단의 감독을 맡고 있다.

“선수는 ‘나 혼자만 챙기면 된다’라면, 지도자는 ‘나를 희생하고 선수를 챙겨야 한다’라는 것이 선수와 지도자와의 가장 다른 관점인 것 같아요. 지도자를 하며 크게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합니다.”

이배영 감독에겐 지도자가 되어 힘든 점보다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 힘들었다. 그는 오랜 선수 생활을 했던 만큼 무엇이든 시작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마냥 쉬고 싶었다. 그런 그였기에 선수 은퇴 후 석사학위도 마칠 겸 수입 1원 없이 1년을 보냈다. 쉴 만큼 쉬고 나니 집안의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생각과는 달리 사회는 녹록지 않았다. 무엇이든 선수 시절 연봉과 비교를 하게 되니 딜레마에 빠지기 일쑤였다.

“선수로 돌아가기에는 제가 내린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고, 제가 처음부터 역도를 잘하지 않았듯, ‘무엇이든 처음부터 좋을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충남체고 지도자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배영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과 선수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혼란스러움을 겪었다. 지도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선수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선수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달하는 것이 지도자의 역량임을 깨달았다. 또한, 팀 전체에게 한마디를 해도 선수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르니, 개인의 성향에 맞추어 전달해야겠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대표 지도자 시절 태릉선수촌 역도 훈련장에서 국가대표 지도자, 선수들과 함께

국가대표 지도자 시절 태릉선수촌 역도 훈련장에서 국가대표 지도자, 선수들과 함께

선수 은퇴 이후, 2016년 리우 올림픽 국가대표 코치진에 합류하면서 이배영 감독은 전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 동료였던 선수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어제의 친한 선배, 후배가 오늘은 선생님과 제자로 마주한 묘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대표팀 지도자로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수들과 다 같이 카페에 간 적이 있어요. 평소 훈련장에서 ‘코치님’이라고 잘 부르던 윤진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 2016년 리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선수가 “오빠! 저는 아메리카노요!” 이러더라고요. 순간, 윤진희 선수도 놀래서 “죄송해요. 오빠! 아니, 코치님!”하는데. 사실 선수 시절 매우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코치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훈련장 외부에 나와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툭’ 튀어나왔던 거죠. 윤진희 선수는 다른 지도자와 선수들, 그리고 저의 위치를 생각해서 훈련장이나 타 장소에서도 습관적으로 ‘오빠’라고 부를까 봐 굉장히 조심하고 있었는데 무심결에 튀어나왔다며 한참 웃었어요. 옆에 있던 ‘뭐, 당연히 그럴 수 있지’라는 표정의 후배 선수부터 놀라서 눈이 커진 어린 선수까지 선수들의 반응은 다양했어요.”

 2016 리우 올림픽 당시 동메달을 획득한 윤진희 선수와 함께 

2016 리우 올림픽 당시 동메달을 획득한 윤진희 선수와 함께

지도자의 미덕은 끊임 없는 연구

이배영 감독은 선수 때나 지도자 때나 운동하는 방법과 동작에 대한 부분에 관해 많은 연구를 한다. 그에게 운동하는 방법과 동작은 체력운동 및 근력운동을 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부분이다. 무턱대고 많이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며 바르고 효율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역도의 관점에서는 무게 변화의 구조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에 이배영 감독은 체력과 근력 운동에서 선수들의 올바른 동작이 어떤 것인지 지속해서 변화를 구분하여 그에 관해 연구한다.

“제가 선수 때 많이 다쳤던 팔꿈치 부상 또한 제가 동작을 변화시키고 나서부터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동작이 아니면 부상은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체력과 근력을 위해 훈련량만 늘리면 과부하가 오게 되고 과부하가 왔을 때 조차도 훈련량이 많아지면 곧 부상으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역도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기량을 늘리기 위해 훈련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선수가 훈련만 많이 하면 무조건 잘하게 될까요? 하나가 더 추가 돼야 해요. 바로 ‘올바른 방법’으로 많이 해야 합니다.”

역도는 무게 부하가 따르기 때문에 올바른 구조나 방법이 대입되지 않으면 곧 부상으로 연결된다.

2016년 리우 올림픽 결단식 당시

2016년 리우 올림픽 결단식 당시

“나뭇가지로 예를 들자면, 나뭇가지가 일정한 힘을 부여할 때까지는 휘기만 하다가 한계점 이상의 힘이 부여되면 부러지듯이 인체도 무게 부하를 이겨내는 구조에 따라 힘을 견뎌내는 정도가 달라서 한계점 이상의 힘이 전달되면 곧 부상으로 연결됩니다. 그 한계점은 나뭇가지 중앙 가깝게 잡을지, 아니면 양쪽 끝에 잡을지에 따라 부러지는 한계점이 다릅니다. 역도 역시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훈련량, 근력, 체력 그 모든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훈련을 해도 훈련 방법 하나에 의해 그 훈련의 효과는 매우 큰 차이가 난다. 그렇기에 이배영 감독은 항상 훈련 방법과 동작을 중요시한다. 역도는 효율성의 극대화이다. 힘이 ‘센’ 사람이 잘하는 것이 아닌, 힘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잘하는 운동이 바로 역도이다.

올림픽이란 ‘축제’… 하지만 훈련은 ‘전쟁’처럼  

역도는 특별한 종목이다. 특성상 아주 특수한 경우들이 불평등하게 여겨질 정도가 있지만, 종목 특성상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경기가 쉽게 풀리면 매우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종목이 있는가 하면, 역도는 그런 종목이 아니다. 겨루기 종목의 경우 대진표가 유리하게 구성되면 성적을 올릴 수 있으나, 역도는 절대적으로 선수 개인의 기량이 곧 기록이 되고 성적이 되니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다. 평소 훈련한 만큼 경기에서도 정직하게 성적이 나온다.

가끔은 이벤트처럼 잘하는 선수 한 명이 실격을 당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특정 선수 외에도 다른 선수들의 기량이 못지않기에 소위 ‘운도 실력이다’라고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인 ‘운’이라는 게 존재하기 힘든 종목이다. 그렇기에 역도 선수들은 불평등이라고 느끼기보다 종목 특성에 대해 빠른 인정을 하고 적응을 해야 한다.

경기장이 기울어져서 경기하는데 연습 때는 기울지 않은 곳에서 훈련했다고 하여 기울어서 경기를 포기한다면 성적은 당연히 없다. 기울어진 경기장은 모든 선수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나 빨리 인정하고 적응하느냐에 따라 선수의 성적이 갈린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당시 브라질 리우 현지 역도 훈련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2016년 리우 올림픽 당시 브라질 리우 현지 역도 훈련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저는 선수들에게 조건과 여건을 맞추어 경기에 임하지 말고 경기장에 선수 개인에게 맞추어 경기에 임하라고 요구합니다. 혹, 불평등이 있다고 해도 빠른 인정과 적응을 통해 더 낳은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배영 감독은 선수와 지도자로서 총 네 번의 올림픽을 출전했다. 그는 첫 번째 출전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외에는 출전했던 세 번의 올림픽이 모두 ‘전쟁’ 같았다고 표현한다. 총, 칼만 안 든 성적과 메달을 위한 치열한 전쟁. 특히, 승부욕에 대해서는 서양 선수들보다 동양 선수들이 훨씬 강하다고 느꼈다. 심지어 ‘축제’라는 의미가 퇴색되어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될 만큼 말이다.

“올림픽 출전 자체에 의미를 더 부여하는 것이 메달 획득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쟁은 훈련 중에 충분히 할 수 있고, 올림픽은 ‘종전’(전쟁을 끝마친다는 의미에서, 편집자)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좀 더 멋진 결과가 나올 것이라 생각해요.”

노력하는 자는 결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멋지게 즐기느냐’가 ‘어떤 결과를 오게 하느냐’가 될 수 있다. 올림픽은 출전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고 여기는 이배영 감독이다.

2017년 아시아클럽역도선수권대회 당시 종로구청 선수들과 경기장에서 (위) 2018년 전국실업역도선수권대회 당시 종로구청 임직원 및 선수들과 함께 (아래)

2017년 아시아클럽역도선수권대회 당시 종로구청 선수들과 경기장에서 (위)
2018년 전국실업역도선수권대회 당시 종로구청 임직원 및 선수들과 함께 (아래)

‘아이스크림’의 꿈 

이배영 감독은 2015년 충남체육회 인권전문 인력풀 활동을 하며 처음으로 체육계 인권 문제에 대한 현안을 다루게 되었다. 그가 접한 기억에 남는 사건 중에는 지도자의 폭력 건에 대한 사건이 있었다. 지도자의 잘못을 서류를 보고 판단해야 했으나, 서류를 통해서는 그 사건의 정황에 대해 깊이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절차상 서류와 당일 면담을 통해서만 지도자의 징계 여부를 확정 지어야 했다. 그때부터 그는 서서히 스포츠 행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탁상공론의 현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배영 감독은 바르게 잡아가고 싶은 마음은 앞섰지만, 그가 할 수 없는 스포츠 행정의 아쉬움에 머리를 감쌌다. 역도계 지도자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스포츠 행정을 공부하던 와중에 역도연맹의 이사로 선임되면서 행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실전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역도연맹의 직책을 맡으면서 크게 활약하거나 활동하기보다는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많습니다. 이후로 IOC 유승민 선수위원, 복싱 지도자 이옥성 코치 등과 사적인 자리에서 체육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의 발족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은 한국 체육을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는 체육이 아닌 체육인들의 자립으로 체육을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모여 시작되었다.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은 ‘체육지도자의’, ‘체육지도자에 의한’, ‘체육지도자를 위한’ 약 24만여 명의 체육지도자를 위해, 대한민국 체육 발전을 위해 도모하는 연맹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배영 감독은 현재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의 사무총장이다.

“체육인들에게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알기 위해 ‘2019 코칭서밋’을 개최하여 스포츠와 법률을 주제로 한 교육부터, 다양한 교육을 연맹의 이사님들과 함께 먼저 들어봤습니다. 저희가 먼저 들어보고 체육인들에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이지 판단하고 싶었으니까요. 또한, 체육인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혜택과 체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 사무총장으로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의 K메디컬, 비포브랜드 감사패 증정식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의 K메디컬, 비포브랜드 감사패 증정식

이배영 감독은 역도계뿐 아니라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받혀주지 않는 정책과 시스템을 지적했다.

“특히 어린 학생 선수들이 학업과 훈련을 병행해서 잘하며 양성되어야 성인이 되어서도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 신분의 선수들이 공부하랴, 운동하랴, 전문 선수를 하기에는 너무 혹독한 환경이에요. 학생 선수들은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서 생활을 해야 하는 환경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려면 쉬지 않고 두 시간을 걸어서 가야 먹을 수 있고, 집에 와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어도 오면서 먹지 않으면 다 녹아버리니 그마저 걸어오면서 먹고, 다시 두시간 동안 걸어 집에 오면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녹초가 되는 상황으로 표현하고 싶네요. 먹긴 먹어도 너무 힘들고, 그마저 아무 때나 먹을 수도 없고, 앞으로 선수들은 이렇게 어렵게 운동할 것 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배영 감독은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혼자 바꿀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현재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인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을 통해 학생 선수들이 마음 놓고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멋진 훈련 환경을 만들 방법을 찾고,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복지가 훌륭해서 모든 국민이 체육을 하고 싶어!’ 하는 한국체육! ‘체육을 하게 되어 정말 좋다!’ ‘체육을 편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좋다!’ 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한국체육환경과 복지를 우선으로 하기에 체육인을 자랑스러워하는 한국체육으로 변화 시키 싶습니다. 저는 (사)한국체육지도자연맹에서 그런 체육환경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 보려 합니다. 물론 전부 다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지속해서 겁니다. 하나부터 시작하여 최대한 변화 시키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시작은 우리나라 역도의 위대함을 알린 올림픽 메달리스트. 지금은 유망주를 육성하는 지도자이자 무엇보다 체육계를 사랑하기에 변화와 발전을 꿈꾸는 행정가인 이배영 감독. 앞으로 그가 꿈을 품으며 달려갈 길과 그의 꿈이 이루어지며 바뀔 희망찬 우리의 체육계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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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글렌다 박
초대필자, 기자, 작가

[AVEC G] (www.avecg.net) 발행인. 'CALAMUS GLADIO FORTIOR(펜은 칼보다 강하다)'; 글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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