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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특집 인터뷰 

  1. 체중 미달 꼬마, 복싱 레전드 되다: 이옥성 인터뷰
  2. “나이는 숫자일 뿐”: 수영 레전드 남유선 인터뷰
  3. 국가대표는 선수와 지도자만 있는 게 아니다: 탁구 국제심판 안국희 인터뷰
  4. 미소천사, 세계를 들다: 역도 레전드 이배영 인터뷰
  5. 히어로는 막판이다: 유도 레전드 송대남 인터뷰
  6. 스포츠의 사회 공헌을 위한 ‘두드림’: 김세진 위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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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은 각각의 국가에서 대표 선수와 지도자가 참가한다. 그리고 대중은 망각하지만, 심판 역시 국가를 대표하여 참가한다. ‘올림픽’이란 세계인의 축제에 선다는 것은, 개인의 성취를 떠나,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탁구계 팬들에겐 ‘스타’ 심판으로 잘 알려진 안국희 선생. 그는 교육 공무원, 작가, 스포츠 지도자, 스포츠 행정가, 스포츠 심판,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 안국희 선생의 하루는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학교 업무, 스포츠 행정 업무, 육아, 매일 빠지지 않는 공부와 꼼꼼한 일지 정리로 자정이 다되어야 끝이 난다. 이렇게 여러 직업을 동시에 겸직하고 있음에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보람으로 가득한 그녀의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2017년 코리아오픈 심판 참가 당시
2017년 코리아오픈 심판 참가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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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대를 물려 이어받은 탁구 사랑

 

안국희 선생의 첫 탁구 입문은 34년 전인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탁구선수 출신이자 체육교사였던 아버지탁구장을 운영하셨던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탁구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86 탁구축제’를 통해 처음 대회 출전을 하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후 유남규, 현정화 등 탁구 레전드들이 참가하며 동호인이 함께하는 대회였던 ‘86 탁구축제’는 말 그대로 국내 탁구인들이 화합하는 ‘축제’였다. 안국희 선생은 처음 출전한 이 대회에서 대표로 선서하였다. 안국희 선생은 당시 만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대표로 선서한 것을 아직도 큰 영광으로 마음에 기억하고 있다.

‘86 탁구축제’ 당시. 1등을 한 아버지는 탈수기를, 3등을 한 안국희 선생은 자전거를 상품으로 받았다.
‘86 탁구축제’ 당시. 1등을 한 아버지는 탈수기를, 3등을 한 안국희 선생은 자전거를 상품으로 받았다.

안국희 선생의 어머니가 운영하셨던 탁구장의 회원 중 MBC문화방송 직원이었던 한 회원은 탁구를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던 안국희 선생이 키도 안 닿는 탁구대에서 까치발을 들고 볼을 네트로 넘기는 것이 신기하였던지 그것을 CF에 담고 싶다며 CF 촬영 의뢰를 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CF 촬영을 하게 된 안국희 선생은 볼을 100번 이상 렐리하며 NG 한 번 없이 CF 촬영을 마쳤다. 안국희 선생이 겨우 다섯 살이던 때였다.

안국희 선생의 어린 시절. 그녀는 5살 때 MBC ‘뽀뽀뽀’ 공익 광고에 출연했다.
안국희 선생의 어린 시절. 그녀는 5살 때 MBC ‘뽀뽀뽀’ 공익 광고에 출연했다.

그 광경을 본 아버지는 안국희 선생에게서 당신이 선수 시절 이루지 못했던 꿈을 딸이 이뤄줄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탁구대를 직접 사서 그녀가 진학한 경기도 다문초등학교의 탁구팀을 창단하고 탁구 지도자가 되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탁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국적으로 생활체육화가 됐고, 학교마다 탁구팀이 만들어지면서 경쟁력 높은 선수들이 배출되던 시기였다.

안국희 선생의 아버지는 안국희 선생의 초등학교 탁구팀의 지도자로 그녀를 직접 지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탁월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지도하였고, 무엇보다 즐겁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던 중 학교의 예산 부족으로 팀이 해체되면서 그녀는 서울 종암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녀의 아버지도 원래 자리였던 대기업 직원으로 복직하였다.

안국희 선생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탁구팀을 창단했다.
안국희 선생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탁구팀을 창단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6학년 언니들을 이길 만큼 유망주였던 그녀는 강원도 삼척에서 개최되었던 전국종별닥구대회에서 개인전 3위를 하였다.

“서울에서는 다른 것은 다 좋았으나 코치 선생님의 구타가 너무 무서워 탁구 선수로 사는 삶이 싫었고, 그때부터 운동이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선수로 보장받지 못하는 인권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고, 현실 도피를 위해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절대 당연하지 않지만, 당연했던. 다 알지만, 모두가 묵인했던. 침묵해야만 성공의 길로 이어진다고 믿었기에 누군가에겐 뼈 아픈 상처와 마음의 생채기로 남아 있는.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 용인되지 않아야 할. 그것은 바로 강압적인 분위기 속 자행되는 구타와 가학적인 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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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은퇴 그리고 세 번 탈락 끝에 합격한 임용고시

 

안국희 선생은 명지 여자 중학교 명지 여자 고등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좋은 선수들이 많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일곱 번가량 지도자가 교체되었다. 지도자가 교체될 때마다 그 피해는 선수들에게 돌아왔다. 지도자마다 다른 훈련 스타일을 접목하지만, 인원이 많은 선수를 일일이 파악하기까지 상대적으로 시간도 오래 걸리는 데다가 운동에 몰입하는 것에도 방해되었다. 안국희 선생도 선수로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운동 실력을 꽃피워 줄 수 있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혼란스런 탁구부 환경 가운데 운동에 집중할 수 없을 때면 그녀는 과감히 라켓을 내려놓고 취미인 독서를 했고, 공부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두 갈래의 진로를 두고 고민했다. 프로 탁구선수로서 실업팀으로 입단할 것인지, 아니면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팀에 갈 것인지. 실업팀으로 진로를 마음먹고 외환은행과 안산시청 중 한 곳을 두고 마음을 저울질하던 시기에 그녀는 고등학교의 마지막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극적으로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의 전윤수 교수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이며 진로를 180도로 바꾸었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에서 그 힘듦을 누구에게 한 번도 말하지 못하고, 밖으로 내색도 못한 채 중, 고등학교 6년의 선수 생활을 보낸 그녀는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하며 체육지도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진학잡지 인터뷰 당시
진학잡지 인터뷰 당시

“오만일지 몰라도 ’나라면 커서 저렇게 지도하지 말아야지’, ‘나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도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향해 달리는 체육특기생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마음속 한쪽에는 ‘체육지도자’나 ‘체육행정가’의 꿈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안국희 선생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선수생활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탁구 클럽을 운영했다. 탁구 클럽은 성황을 이루었지만, 잘되는 만큼 몸이 고달파졌다. 클럽을 운영한 지 약 3년이 지났을 시점에 사회에서 탁구가 아닌 더 많은 도전과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대학 입학 당시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 출신으로 이미 교편을 잡으신 이력이 있으신 아버지의 강력한 추천이 기억났다. ‘교사’의 꿈을 이뤄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미더웠다.

“교사 자격증 가지고 있으면 뭐해. 그건 그냥 장롱면허야.”라며 이미 전문 지도자라면 불필요한 시험이라고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 이들이 있는 반면, “특기생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도 임용고시 붙기가 별 따기 같이 힘들어”라거나, “선수 출신 중 사립학교에 취직해 들어간 사람들은 있어도 임용고시 합격한 사람은 없어”라며 도전도 하기 전에 기를 죽였다.

안국희 선생은 그런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사범대학을 졸업하며 자연스럽게 취득한 교사자격증을 가지고 사립학교로 눈을 돌렸으나, 그마저도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교사의 꿈을 포기하려던 차에 신진고등학교 탁구선수이며 전북대학교 체육교육과 출신이자 그녀의 오랜 동네친구가 임용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안국희 선생에게 처음으로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동기부여를 가지게 된 계기였다.

2019년 6월 개최된 대한민국 체육 꿈나무 축제에서 강연하고 있다.
2019년 6월 개최된 대한민국 체육 꿈나무 축제에서 강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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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교사가 되는 과정

여기서 체육교사의 진로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그 과정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학부과정의 졸업 기준에 충족하여 졸업하게 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게 된다. 째, 학부 전공이 체육교육과가 아니었더라도 체육 관련과라면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교육대학원은 학사가 아닌 엄연한 석사 과정으로 석사 논문을 작성하고 졸업 심사도 합격해야 한다. 셋째, 체육교육과가 아닌 체육 관련과 중에서 교직 이수를 하는 방법이다. 모든 대학이 교직 이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학 진학 시 모집요강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을 권장한다.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소지한다는 것은 공립교사 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을 의미한다. 원하는 지역구의 임용고시에 지원해 합격하면 교육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공립학교에 발령받는다. 다만 1~5년마다 한 번씩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아 학교를 옮긴다. 공립교사 임용에 합격하지 못한다고 해도, 사립 중, 고등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사립학교 임용은 상시 채용을 통해 이루어지며 채용 조건은 공립교사 임용에 준하여 실시된다.

※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용고시의 정식 명칭은 “공립교사 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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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희 선생은 그날로 노량진 고시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대학 재학 당시 운동 때문에 병행하지 못했던 이론 공부, 교육학, 그리고 실기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예상보다 상당한 학업량과 실기였다. 망신을 받을 순 없었다. 실기와 이론 모두가 탄탄한 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당시 대구에서 코치 선생님이었던 성은경 코치 선생님과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서 실기연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노량진에서 가까운 중앙대학교에서 대학원에 재학 중인 현직 선생님이 후배들을 위해 무상으로 실기 지도를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참관하러 찾아갔다. 중앙대학교 임용고시생들은 타 대학 출신이라고 배척하지 않고 성은경 코치 선생님과 안국희 선생을 모두 실기 지도에 합류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경기운영 당시 김경아 (2004 아테네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대한항공 코치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경기운영 당시 김경아 (2004 아테네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대한항공 코치와

그녀는 그렇게 임용고시 실기를 준비하며 최고의 기회를 얻었고, 또 최고의 인연을 만났다. 바로 중앙대학교에서 실기를 지도해주었던 선배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안국희 선생은 결혼하고 임용고시 준비에 계속 전념했다.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이론은 학원과 자습실에서 공부했고, 실기는 중앙대학교에서 연습했다.

생리학, 역학, 교과 교육론, 교수학습론,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 등 전공체육과목과 교육학 등 그녀는 ‘대학교를 한 번 더 다닌다’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농구, 핸드볼, 배구, 허들, 맨손체조, 기계체조, 높이뛰기, 현대무용, 한국무용, 수영까지. 생전 해보지 않은 종목의 실기시험을 위해 하나하나 다져갔다. 그리고 3번의 미끄럼 끝에 결국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지금도 가끔 꿈을 꾸면 임용고시에서 떨어지던 날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열심히 노력해서 합격했던 저 자신에게 스스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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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선수 출신 새내기 선생님이 지도한 역도팀의 금메달

 

안국희 선생은 2004년 부천여자중학교(이하 부천여중)로 첫 발령을 받았다. 학교 체육 교사는 본인의 주 종목이 아니어도 운동부 감독직을 임명받으면 수행해야 한다. 부천여중에 발령을 받자마자 담당 교사가 사정상 감독을 맡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안국희 선생이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체육특기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일반학생들의 생활을 잘 알지 못했다. 탁구 외의 다른 종목을 지도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문서작업 등 다양한 책임감이 주어지자 막막함이 앞섰다.

“가뜩이나 학교도 처음인데 운동부를 어떻게 하나 걱정 때문에 매일 매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합격만 시켜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맹세했던 고시공부 시절을 떠올리며 초심을 잃지 말자고 생각했고, 주변 선배 교사분들의 조언과 이끌어주심으로 굉장히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안국희 선생은 처음으로 역도부 감독을 하며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생각과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 그리고 깊은 고민을 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역도 감독을 수행하기에는 ‘개인적 자본’과 ‘지식’이 얕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이 모여 합작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지식’과 ‘동기부여’가 최우선이기에 그녀는 머리를 감싸 매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안국희 선생은 점차 그녀의 지식이 아닌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절대 감독의 권위나 위상을 내세우지 않았다. 무조건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생전 처음 접하는 종목이었기에 종목의 특성을 이해하고자 역도 관련 자료를 매일 공부했다. 모를 땐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기술적인 것을 지도하고 있는 코치 선생님에게 배우는 마음으로 협심하여 좋은 팀을 만들어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녀는 선수들이 중학생으로 사춘기를 보내는 만큼 멘탈 관리, 상담 및 팀 전반의 운영 등을 책임졌다.

2004년 부천여중 역도부에서 만난 문유라 선수는 당시 공부도 잘하는 선수였지만, 힘든 가정환경에서 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선수였다. 역기 들기에서 우연히 재능을 발견하여 역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53kg급 선수였던 문유라 선수는 인상 64kg, 용상 80kg을 기록하며 전국소년체전에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고,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는 58kg급에 출전하여 ‘중학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세계주니어대회에서 인상, 용상 합계 224kg을 들며 금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선수로 성장했다.

2009년 당시 세계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뒤 환영식에서 문유라 선수 모습(출처: 대한역도연맹) http://www.weightlifting.or.kr/2015/board/content.php?no=37&kind=8&search=&word=&sort=&page=24
2009년 당시 세계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뒤 환영식에서 인터뷰하는 문유라 선수 모습 (제공: 대한역도연맹)

안국희 선생은 문유라 선수의 시합마다 함께 다니며 문유라 선수를 지원했다. 문유라 선수가 메달을 딸 때면 마치 안국희 선생이 메달을 획득한 것 마냥 더 기뻤다. 이후, 국가대표로 선발된 문유라 선수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부천여중 설현의 역도 코치 선생님의 지도력을 보며 ‘정말 지도자는 저렇게 부지런하고, 헌신적이고, 열정이 있어야 하는구나.’라고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연습하는 것만 보아도 ‘좋은 성적이 나오겠구나…’하는 확신이 들 만큼 훌륭한 훈련방식을 구사하셨습니다. 코치 선생님과 훈련하는 선수들을 보며 탁구선수로 은퇴 후 처음으로 ‘다시 운동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도 조금 빨리 알았더라며 더욱 좋은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안국희 선생은 그렇게 부천여중에서 3년간의 초임 기간을 보내고 2008년, 부천북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부천북고등학교에서는 5년 간 체육교사로 담임하며 럭비부 감독을 맡았다. 그녀는 탁구가 아닌 다른 종목을 지도하며 종목은 다르지만 묘하게 동질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로 기본적으로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인성과 인내심,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둘째로 한 선수의 탁월함을 더욱 향상하게 하기 위해선 단점보단 강점에 집중하게 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모든 종목에 부합하는 효과였다.

첨부 사진 9: 기라성 같은 제자이자 현재 미레에셋대우 탁구단 소속 황민하 선수
기라성 같은 제자이자 현재 미레에셋대우 탁구단 소속 황민하 선수
일명 ‘탁구명가’라고 불리는 중원고등학교 남자 탁구부와 탁구부 감독을 맡았던 안국희 선생
일명 ‘탁구명가’라고 불리는 중원고등학교 남자 탁구부와 탁구부 감독을 맡았던 안국희 선생

그후, 이정삼 (양산시청 감독), 이상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단체전 은메달, 단식 동메달), 서현덕 (국가대표 상비 1군, 2019 태국오픈 단식 준우승), 정영식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의 계보를 이어 당시 고교 최강자였던 박정우(KGC인삼공사 선수)까지 배출한 탁구 신성의 성지인 중원고등학교의 탁구부 감독으로 부임한 안국희 선생은 2014년 중원고의 전국체전 은메달, 대통령배 우승, 문화관광부장관기 우승, 2015년 전국체전 은메달 등의 성적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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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안국희, 탁구 지도자로 세계대회 우승을 이끌다

 

2016년,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중원고등학교의 탁구부 선수들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그녀의 지도력에 이목이 쏠렸다. 이미 안국희 선생은 교육청에서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교육감상을 받으며 교사로서도 인정을 받은 후였다. 그녀는 그해 국내 우수 지도자로 선발되었다. 그 기회로 안국희 선생은 2016년 ITTF 월드카뎃챌린지 대회의 아시아팀 지도자가 되었다.

월드카뎃챌린지 대회는 ITTF (International Table Tennis Federation, 국제탁구연맹)에서 주관하는 대회로 2002년 헝가리 티사우자바로스에서 처음 열렸다. 초대 우승자는 장지커 (2012년 런던 올림픽 단체전, 단식 금메달, 2016년 리우 올림픽 단식 은메달, 단체전 금메달리스트) 선수이다. 경기는 매년 10월 중 열리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중남미, 북미, 오세아니아주, 홉스팀, 이집트 등 8개 대륙에서 32명의 남녀 선수가 참가해 실력을 겨루게 된다. 경기 종목은 남녀 단체전, 단식, 복식, 남녀 혼합혹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국희 선생은 아시아팀의 지도자로 선수들이 아시아의 다 다른 나라에서 발탁된 선수들이기에 영어로 지도를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안국희 선생은 2016년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영어교육 프로그램에서 EBS ‘에리카의 위풍당당 잉글리쉬’의 에리카 선생과 1:1 교육을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진 않아도, 무엇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친숙’해질 수 있었다. 영어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되니 선수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교류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2017년 피지 수바에서 열린 ITTF 월드카뎃찰랜지 대회 아시아팀 우승 시상식
2017년 피지 수바에서 열린 ITTF 월드카뎃찰랜지 대회 아시아팀 우승 시상식

안국희 선생이 지도했던 아시아팀은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2017년 우승, 2018년 준우승, 2019년 우승까지 그렇게 ITTF 월드카뎃챌린지 대회에서 4년 연속 지도자를 맡아 아시아팀의 우승 및 준우승을 이끌어냈다. 안국희 선생에게 월드카뎃챌린지대회 출전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문화권에서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하는 선수들과 만나 배우며 소통하고 지도할 소중한 기회였다.

“단시간 안에 팀 선수들의 특성과 몸 상태를 파악하고, 상대 선수에 대해 분석하며, 전략과 전술을 적절히 적용 시킬 수 있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ITTF 월드카뎃챌린지대회 아시아팀 우승 시상식.
2017년 ITTF 월드카뎃챌린지대회 아시아팀 우승 시상식

월드카뎃챌린지대회는 경기 개최 전 대륙별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연습을 하는데 이 연습시간은 선수뿐 아니라 선수를 분석하는 안국희 선생에게도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안국희 선생은 문화가 다르고, 언어 장벽 사이에서 이해도는 떨어지며, 소통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지도자로서 대한민국 고유의 기술이나, 전술, 전략을 고집하기보다는 다른 나라의 훈련 방법과 선수 특성을 고려하여 그녀의 조언과 지적이 적합한 적재적소에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아시아팀의 매니저인 압신(이란)도 그녀에겐 최고의 조력자였다. 많은 것을 알려주고자 했으며, 배우고자 했으며, 인도해주었다.

양궁, 태권도, 배드민턴, 쇼트트랙, 유도 등 해외에 진출한 많은 국가대표 출신 지도자들이 있다. 은퇴 국가대표 선수들은 지도자로서 해외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하고 해외 진출을 꿈꾸기도 한다. 안국희 선생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우리나라 스포츠 지도자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처럼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국내 스포츠인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다만, 성급하지 않고, 진출하고자 하는 나라에 대한 문화와 이해, 언어, 글로벌 매너교육은 꼭 받고 나가기를 추천합니다. 우리나라 긍지와 자부심을 품은 선수와 지도자분들 특성상 어디를 내놔도 꼭 좋은 성과를 거두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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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분석, 공부, 그렇게 합격한 국제 심판 시험

 

안국희 선생이 심판이 된 과정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탁구에 대한 영상을 보던 중 탁구 규칙이 많이 변했고, 탁구 라켓과 러버가 과거 본인이 선수 시절 때와 바뀐 것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탁구 선수였던 그녀가 다시 탁구에 대한 규칙을 세세하게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것은 심판 수업으로 이어졌다.

탁구 심판은 선수 경력과 무관하게 3급 자격 과정 이수를 하고 자격증 획득을 하게 되면 2급, 1급 순으로 승급된다. 승급하기 위해서는 자격 이수 외 1년에 3회 이상 대회에서 심판 활동을 해야 하며, 그 과정을 거치면 국제 심판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안국희 선생은 이 과정을 모두 거치고 국제 심판이 되었다.

2017년 코리아오픈 심판 참가 당시
2017년 코리아오픈 심판 참가 당시

안국희 선생은 국제 심판으로 활동하며 특별한 에피소드도 많이 겪었다. 2015년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세계주니어챔피언십의 심판으로 배정되었으나, 당시 프랑스에 테러가 있어서 국내의 다른 국제 심판들은 위험부담에 참가를 꺼렸다. 그녀는 비행기에 홀로 몸을 실어, 혼자서 파리에 내려 테제베(프랑스 고속 열차)를 타고 방데라는 지역까지 이동해야 했던지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당시 국내에서는 도입되지 않았던 전자 시스템을 활용한 ‘심판제로’를 활용하고 있어서 진땀을 빼며 심판을 봤다.

“저는 언어가 유창하지 않았고, 당시 새내기 심판이었지만, 일단 ‘부딪치면 헤쳐나갈 수 있다’는 제 강점을 믿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경기 기간 내내 아무 사고 없이,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심판으로서 기억에 남는 경기 중 2017년 코리아오픈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라켓 컨트롤 하던 중 장지커 선수의 라켓 검사를 하게 되었던 그녀는 그저 장지커 선수의 라켓을 건네받아 검은 면이 아래가 되도록 내려놓았는데 장지커 선수가 화를 내며 항의를 하였다. 알고 보니 장지커 선수는 경기 전 검은 러버가 테이블 면과 밀착되면 경기에서 패배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런데 ‘징크스’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경기를 잘했던 장지커 선수는 경기가 끝난 후 나중에 안국희 선생을 찾아와 ‘자신의 징크스가 오늘 깨진 것 같다’며 사과와 감사 인사를 했다.

 

올림픽에서 선수를 웃게 하는 것도, 울게 하는 것도, 분노하게 하는 것도 여러 요인이 있지만, 특히 그중 하나는 심판의 오심이다.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쇼트트랙 김동성 선수의 ‘오노 사건’은 외교 문제로 번질 만큼 전국적으로 반미감정을 부추겼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유도 -66kg급 8강에서 ‘판정번복’ 오심의 피해로 조준호 선수는 동메달에 그쳤다. 같은 대회에서 펜싱 에페 개인전 준결승에서 신아람 선수는 이른바 ‘1초 사건’의 희생자가 됐고, 이 ‘1초 사건’은 ‘역대 올림픽 5대 판정 논란 사건’에 올라가 있을 정도다. 그뿐인가. 2014년 소치 올림픽 김연아 선수의 은메달 수상이 확정된 이후, 대중, 국내 언론뿐 아니라 외신들까지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은 ‘도둑맞았다’라고 표현했다.

2006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도둑맞은 김연아 선수 (사진은 2010년 5월 모습 모습, 출처: David Shankbone, CC BY)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도둑맞은 김연아 선수 (사진은 2010년 5월 모습 모습, 출처: David Shankbone, CC BY)

안국희 선생은 심판 생활을 하면서 본인이 아무리 많은 선수나 지도자 경력이 있더라도 심판은 또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선수나 지도자가 ‘체력’ 소모가 많다면, 심판은 ‘정신력’ 소모가 굉장히 심하다.

‘심판의 오심도 경기 일부다’라는 것에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오심이 없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오심을 인식한 순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심판이 오심하고도 오심에 대해 인정을 하기보다 갑(甲)이라고 생각하고 오심을 경기 일부라고 치부하며 선수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심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판들은 공정하고, 또 냉정하게 걸러내어야 합니다.”

안국희 선생은 심판하며 마음에 되새긴 것들이 있다. 스포츠는 공정성, 평등성, 진실성, 자유성, 공리성을 그 배경으로 하고, 그것이야말로 스포츠를 정의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만약 심판이 오심이 있음을 인지했다면 경기를 속개할 것이 아니라 객관적 방법을 동원하여 경기를 운영하는 것이 심판의 역할이다. 심판의 오심은 ‘스포츠중재재판소’에서 제소할 수 있다고 알고 있지만, 국내 스포츠계는 오심에 대해 묵과하고 지나치는 일이 종종 있다.

“선수들의 기능과 역량 발휘에 자신의 고집으로 발을 거는 우매한 심판이 아닌, 더욱 전문성을 갖춘 심판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국제 대회에서 시합할 때 심판의 오심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선수들의 역량과 영어 능력 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도쿄 올림픽은 2021년 7월 개최로 1년 연기가 확정되었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올림픽 심판 배정도 마찬가지이다. 올림픽 심판 배정은 보통 6개월~1년 이전에 이루어진다. 올림픽 심판은 종목마다 그 숫자가 다른 만큼 대륙별, 나라별로 기준을 둔다. 심판도 나라에서 1인 이상 출전이 불가능한 종목이 많다. 저변이 넓은 종목에 따라서는 평생 기회가 오지 않을 수 있기에, 심판에게도 올림픽은 ‘꿈의 무대’이다. 안국희 선생은 이번 2020년 도쿄 올림픽은 어렵지만, 2024년 파리 올림픽 심판 참가를 목표로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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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발전을 위해 걸어가는 길목에서

 

한국여성스포츠회 행사 당시 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과.
한국여성스포츠회 행사 당시 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과.

안국희 선생은 언제나 본인이 몸담은 스포츠계가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고민한다. 현재 체육 교육영역과 스포츠 행정영역의 합일점이 많기에 다섯 개의 관련 기관과 단체에서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활동도 아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우선 그녀는 은퇴 선수 및 현역 선수가 함께하는 사단법인 두드림 스포츠에서 1대 회장이었던 유승민 IOC 선수위원에 이어 2대 회장으로 부임하여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스포츠를 통한 스포츠 가치 실현을 함께 이룰 수 있도록 플랫폼 역할을 하는 단체를 이끌고 있다. 두드림 스포츠에서는 은퇴 선수들의 리스타트 교육을 비롯해 다문화, 저소득층 학생들의 스포츠 경험 교육 및 스포츠 활동, 스포츠 문화 행사, 장애인 스포츠 활동 지원, 스포츠 가치 전달 활동 등을 펼친다. 두드림 스포츠에서는 동방사회복지회 미혼모 여성들에게 생리대 지원행사를 하였으며, 선덕원 어린이 돕기 행사, 다문화저소득 학생들을 위한 1박 2일 스포츠 교육 행사 기획 및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왔다.

2019년 6월 두드림 스포츠에서 개최했던 축구 송종국 선수와 함께한 아프리카 티비 기부행사
2019년 6월 두드림 스포츠에서 개최했던 축구 송종국 선수와 함께한 아프리카 티비 기부행사

체육지도자들을 위한, 체육지도자들에 의한 협회인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에서는 스포츠 지도자들의 처우개선 및 활동, 교육 등에 초점을 두고 도모하는 단체이다. 안국희 선생은 이 단체의 이사로서 지도자들의 교육 및 행사, 포럼, 상벌 행사를 통해 지도자들의 사기 진작 및 교육, 올바른 지도를 통한 스포츠계의 선순환을 위한 노력에 앞장서고 있다.

각각 이사로 자리하고 있는 한국여성스포츠회와 국가대표선수회는 철저히 은퇴 선수가 은퇴 선수를 위한 복지, 은퇴 선수가 후배 선수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뭉친 단체다. 한국여성스포츠회는 은퇴 후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그동안 열약했던 환경에서 유리천장을 깨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그간 활동이 없어 위축 되었던 소극적인 행동을 뒤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멘토로서 어린 미래 꿈나무들에게 다양한 진로의 세계를 알려주는 행사를 하기도 하고, 한국여성스포츠회 주관 탁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국가대표선수회에서는 은퇴 선수들이 꿈나무 선수들에게 장학금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안국희 선생은 스포츠문화연구소에서 과거 스포츠 뿌리를 찾고 스포츠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이슈에 관해 고찰하는 연구 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정치적 이슈가 아닌 체육인들의 목소리를 올바르게 대변하기 위해 연구하며 성찰하는 스포츠문화연구소이다.

안국희 선생은 그동안 여러 직책을 수행하며 수많은 스포츠계 인사와 인연을 맺었다. 그 중에도 가장 손꼽는 인연은 바로 유승민 IOC 선수위원이다.

특별한 인연 유승민 IOC 선수위원과 함께.
특별한 인연 유승민 IOC 선수위원과 함께.

안국희 선생과 유승민 선수는 안국희 선생이 중학교 시절, 그리고 유승민 위원이 초등학교 시절 처음 시합장에서 만났다. 종종 이야기도 나누고, 전지훈련 때 함께 운동했던 사이었다. 졸업 이후, 유승민 위원은 선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훈련했고, 안국희 선생 역시 본인의 자리에서 스포츠의 가치를 전달하는 교사로서 열심히 지냈다. 유승민 위원과 만나기만 하면 다른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끝은 스포츠 이야기, 스포츠 확산과 가치 지향적 환경, 선진국의 스포츠 시스템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그 결과는 ‘사단법인 두드림 스포츠’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과거 함께 꿈꿨던 비전을 하나씩 실현해 나갈 수 있음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 인연이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유승민 위원의 겸손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와 신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젊고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결정함에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소통할 줄 알고, 정보가 항상 위에 머물러 있음을 타파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안국희 선생은 그렇게 유승민 위원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다. 유승민 위원은 선수로서도 누구보다 우수한 성과를 이루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단식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단체전 동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단체전 은메달까지. 올림픽 탁구 종목으로 국내 유일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획득했고, 현재 IOC 선수위원이자 대한탁구협회 회장으로서 탁월한 스포츠 행정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안국희 선생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두드림 스포츠 ‘우리들의 경기’ 행사 당시 유승민 IOC 선수위원, 배드민턴 유연성 선수, 펜싱 남현희 선수와 함께
두드림 스포츠 ‘우리들의 경기’ 행사 당시 유승민 IOC 선수위원, 배드민턴 유연성 선수, 펜싱 남현희 선수와 함께

안국희 선생의 두 번째 특별한 인연은 다름 아닌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펜싱 레전드 남현희 선수이다. 남현희 선수는 여성들의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현 시스템의 개선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하며 함께 두드림 스포츠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남현희 선수와 여성 스포츠 스스로 자정적 노력을 해야 함에 대한 필요성과 미래 비전을 함께 나누며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안국희 선생은 인생 멘토로 ‘PLAN-DO-SEE’를 알려준 한국체육지도자연맹의 김재현 이사장을 꼽는다. 스포츠 마케터인 그는 스포츠인들이 갖춘 능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도록 내공을 발휘한다. 또한, 스포츠 환경의 발전과 스포츠 지도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성을 추구하시는 공익성이 좋았고, 말로 하는 약속이 아닌 행동하는 실천력을 보여주시는 분이기에 저는 이분을 정말 존경합니다. 김재현 이사장님이 보여주신 PLAN-DO-SEE 메시지를 항상 제 다이어리 메세지 앞에 적어놓고 계획에서 실행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두드림 스포츠 ‘우리들의 경기’ 행사
두드림 스포츠 ‘우리들의 경기’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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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오늘 뿌린 씨앗이 꽃길이 될 날을 꿈꾸며…

 

안국희 선생이 회장으로 올림픽 레전드 및 은퇴 선수들이 중축되어 운영 되는 ‘사) 두드림 스포츠’는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 중이다. 날짜, 시간, 장소는 코로나19 때문에 모두 하반기로 미뤄진 상태이지만, 주요 행사를 이곳에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경기도 ‘꿈의 학교’: 1년간 매 주말에 운영되는 학교로 주제는 주로 스포츠 창작과 관련된 프로그램
  • 8월 개최 예정인 ‘래트로 운동회’는 전국 가족 단위 신청을 받아 진행될 예정
  • 사랑의 열매 후원 대회: 다문화 저소득 학생들 대상의 스포츠 행사
  • 필리핀 코피노 아동들 스포츠 교육 행사: 동방사회복지회와 협업
  • KBS 강태원 후원대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탁구 대회
  • 다문화 저소득층과 소외계층 여성 대상 생리대 무상지원 행사
  • 한국여성스포츠회와 협업한 가족 탁구대회
  • 선덕원 스포츠 활동 교육봉사
  • 환우암 돕기 탁구 대회
  • 시니어 스포츠 활동인 호매실 병원 스포츠 교육봉사

안국희 선생은 2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꿈꿔본다. 스포츠 파이프라인 창시자로서 스포츠 파이프라인 시스템을 통해 융합적 스포츠 환경을 구축하고 스포츠 플랫폼 현실적 방향 제시와 미래 지향적 시스템을 실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무엇보다 많은 스포츠인이 ‘안국희’라는 사람을 기억할 때 스포츠 분야의 발전을 위해 소신 있게 활동하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며 추진했던 사람이 될 수 있길. 그리고 누군가 ‘안국희 선생 덕분에 내가 발전할 수 있었다’라는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 만한 최고의 영광과 행운은 없지 않을까.

안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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