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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은 코로나19가 중국 바깥에서 대규모로 확산한 최초의 국가 중 하나였다. 2월 19일 역사적 성지 곰에서 최초로 공식적인 확진자가 확인되었으며, 이들은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채 3주가 지나지 않아 확진자는 1천 명에 달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했다. 하지만 이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수치였기에,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훨씬 더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있으며 정부가 의도적으로 축소 발표하고 있다는 폭로가 뒤를 이었다.

정부가 진실을 말했건 하지 않았건, 이란의 상황이 빠르게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3월 12일, 이란의 확진자가 1만 명을 돌파하면서 중동 지역의 주요한 감염 중심지가 되었다. 이란은 교도소 내 집단 감염을 막고자 죄수들을 대규모 사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4월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이란의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찾아보기 힘들다. 봉쇄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기하급수적 감염폭발은 가까스로 막긴 했으나, 확진자는 9만 명에 이르고 6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가 확산된 나라에서 그 나라가 지닌 고유의 문제들을 부각시켰다. 이는 이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음 질문들이 이란 안팎에서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1. 왜 이란은 중동에서 처음으로 감염 중심지가 되었는가?
  2. 왜 이란 정부는 사태 초기에 빠르게 대처하지 않아 감염 폭발을 초래한 것인가?
  3. 이란 정부의 적극적 대응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주로 최근 10년 동안 이란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정치적, 사회적, 지정학적 문제와 관련 있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바이러스가 제기한 의문은 바이러스가 사라지더라도 이란에 계속해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이란의 특수성, 이란은 해외여행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미 내부에 코로나19가

왜 이란은 중동 최초의 감염지가 되었나

먼저 왜 이란이 중동에서 최초의 감염 중심지가 되었는지 살펴보자. 3월에 세계의 주요한 감염 중심지로 부상했던 나라들은 모두 중국과 긴밀한 인적 교류를 하고 있던 나라였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동아시아에서는 한국, 중동에서는 이란이 각각 그들이었다.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발원했기에, 바이러스가 이들 국가를 중심으로 퍼진 것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이란의 경우,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이란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중국 노동자들이 주요한 감염원으로 지적되었었다. 이후 조사에서는, 우한과 이란을 오가는 상인이 바이러스를 실어 날랐다는 또 다른 가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감염자가 증상 없이도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도 있는 코로나19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단일 감염원을 특정하는 것은 매우 힘들어 보인다. 그보다는 이란과 중국을 오가던 복수의 감염원이 바이러스를 이란으로 퍼트렸을 것이다.

왜 이란은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 왔을까? 이는 이란이 직면한 지정학적 어려움과 중국의 지정학적 야심이 맞물려서 형성된 것이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래로 40년 가까이 지정학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란은 혁명 직후 이라크와 전쟁을 했으며, 이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제기하는 안보 위협에 대응하고자 핵개발을 시도했다.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란의 핵개발 시도는 UN에 의한 제재를 불러와 석유 수출에 의존하는 이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을 유발했다. 상황은 미국과 이란에서 단계적으로 핵을 폐기하고 제재를 철회하는 핵협상을 추진하면서 바뀌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핵협상을 추진하던 민주당이 2016년 공화당의 트럼프에게 패배하면서 이란이 국제무대에 복귀하리라는 희망은 사라졌다.

당분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란은 미국이 아닌 다른 강대국과 유대관계를 강화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이란과 같은 편에 싸운 러시아는 이란에서 영향력을 더 확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경제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이란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중국이었다. 중국은 시진핑 행정부에 들어서 유라시아 지역을 잇는 ‘일대일로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는 경제 발전으로 늘어난 중국의 에너지 수요를 위한 안전한 공급망을 확보하고, 중국의 제조품을 수출하기 위한 시장을 확보하고자 한 프로젝트였다.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편집)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편집)

이란은 풍부한 석유와 천연가스를 갖고 있었고, 육로로 중국과 연결될 수 있어 최적의 협력 대상 중 하나였다. 중국 자본과 노동자가 이란으로 들어갔고, 이란에서도 중국 상품의 수입이 늘어났다. 아마 중국과 정치적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던 이란 지도부는 바이러스로 인해 양국 관계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양자의 정치, 경제적 필요에 의해 2010년대에 깊어진 중국과 이란의 협력 관계는 이란을 중동의 최초 감염 중심국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감염 폭발의 배경… 왜 선거를 감행했을까? 

이란에서 바이러스는 3월이 되자 엄청난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가 최대 2주의 잠복기를 갖는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2월 마지막 주부터 전파가 이루어졌다고 미루어볼 수 있다. 2월 21일 이란 전역에서 치러진 의회 선거가 바이러스 확산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분석이 있다.

물론, 선거를 치르는 것이 반드시 바이러스 확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4월 15일 선거를 했지만, 감염폭발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정부가 선거를 통한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투표자 사이 1m 거리를 유지했고, 마스크와 장갑 착용이 필수였다.

이런 조치가 없이 치러진 선거는 분명 다량의 접촉을 유발해 바이러스 확산에 일조했을 것이다. 심지어, 최고지도자 ‘아야톨라'[footnote]시아파에서 고위 성직자에게 수여하는 칭호[/footnote] 알리 하메네이‘이란의 적들’이 선거를 방해하고자 바이러스의 위험을 과장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은 선거를 위해 이란 정부가 바이러스의 위험을 의도적으로 축소한 것에 가까웠다.

이란 이란의 제2대 '라흐바르'(지도자) 알리 카메네이(1939년 4월 19일 ~ 2020년 현재)
이란의 제2대 ‘라흐바르'(지도자) 알리 카메네이(1939년 4월 19일 ~ 2020년 현재)는 “이란의 적들이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 정부에게는 바이러스를 감수하고 선거를 강행할 이유가 있었다. 최근 2년 동안 갈수록 나빠진 이란의 경제적 상황 때문에, 이란에서는 시민들의 저항이 계속 거세지고 있었다. 2017년 12월에 전국적 시위가 있었다. 시위는 2019년 11월에도 있었는데, 이전보다 더 격렬했다. 앰네스티에 따르면 300명의 2019년 시위에서 사살당했다고 한다. 이 일련의 시위는 경제를 호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던 핵협상이 실패하고, 이란의 경제가 나빠졌기에 벌어졌다.

기후변화로 농촌 위기가 심해졌고,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적 긴장을 끌어올렸다. 이 불만이 정치적, 경제적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 정부를 향했다. 2019년 시위를 촉발한 휘발유값 인상은 그저 ‘방아쇠’에 불과했다. 2011년 아랍 봉기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사회적 긴장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었다.

상황은 2020년 1월 이란 쿠드스군의 사령관 거셈 솔레이머니 소장이 미국 드론에 의해 사살되면서 다시 돌변했다. 보수파는 반미, 반제국주의 구호를 다시 소환했다. 이란의 군사 영웅이 오랜 숙적 미국에 의해 갑작스럽게 피살된 것은 혁명 이래로 40년 동안 미국의 위협을 강조해온 보수파들의 경고를 현실화한 사건이었다.

거셈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 1957년 11월3월 11일-2020년 1월 3일, 향년 62세, 사진은 2013년 당시 모습, 출처: Tasnim News Agency, CC BY 2.0)
거셈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 1957년 11월3월 11일-2020년 1월 3일, 향년 62세, 사진은 2013년 당시 모습, 출처: Tasnim News Agency, CC BY 2.0)

솔레이머니 장군 추모 행사가 이어졌고, 이란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다시 모을 수 있었다. 이란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정부를 믿을 수 없어도 미국의 침략보다 나쁠 수는 없었다. 강경파 지도자 솔레이머니를 비판해왔던 개혁파의 목소리는 추모의 분위기에서 약해졌다.

그러나 1월 8일 우크라이나 항공기를 미국의 공격으로 오인해 이란군이 격추하면서 상황은 또 뒤집혔다. 캐나다를 오가는 이란인들이 우크라이나 항공기의 주요 승객이었다. 자국민을 격추시킨 혁명수비대가 처음에는 사고에 의한 추락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도 드러났다. 솔레이머니 추모로 고조된 반미 분위기는 갑자기 사라지고 반정부 정서가 고조되었다.

다시금 시위가 일어나면서 정치적 분위기가 롤러코스터처럼 움직였다. 트럼프 행정부와 마주하는 이란의 지정학적 곤경과 갈수록 심해지는 경제적 곤경은 40주년을 맞이한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하메네이를 비롯한 권력을 쥐고 있는 보수파는 반대파의 도전에 직면해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권력 기반과 지지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고, 가장 좋은 수단은 2월 21일에 열릴 의회 선거였다.

따라서 코로나19의 확산은 이미 이란 지도부를 괴롭히고 있던 문제들을 자극함으로써 이슬람 공화국을 더욱 위기에 빠트릴 수 있었다.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이란 제재가 여전히 유효하기에, 이란은 의료 물품을 수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바이러스 확산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중국과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해 초기 대응을 포기한 점, 체제를 방어하기 위한 선거 때문에 바이러스의 위협을 과소평가한 점 등 이란 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부조리한 행동은 정권에 대한 반발을 더욱 키울 소지가 컸다. 반대자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며 정치적 불안정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를 막아야 했다.

유일한 지원국 중국 

바이러스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퍼져나가자, 결국 이란은 전례 없는 위기를 인정하고 전면적인 대응에 돌입했다. 도시 간 이동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봉쇄를 명령했다. 감염 확산의 온상이 될 수 있는 모스크와 같은 공공시설이 폐쇄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항공기를 격추시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혁명수비대가 다시 전면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코로나19와 함께 찾아온 급격한 유가 하락으로 그들의 주요 경제적 기반이던 석유 부문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판데믹에 대한 대처는 강력한 국가 권력의 힘을 세계 각지에서 소환하였고, 이란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혁명수비대는 시위 진압과 치안 유지 활동에 함께 하던 준군사 조직인 바시지와 함께 치료소를 건설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바이러스 검사를 진행하며 이란 국민의 ‘보호자’로 다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란 정부는 지속되는 미국의 제재에 맞서 외교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있었다. 먼저, 이란 정부는 인도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제재를 해제하지 않는 미국을 비난하며 국내적 지지를 동원하고자 했다. 그다음, 이란은 판데믹에 맞선 전투를 위한 다른 동맹을 찾아야 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란에 있어서 사실상 유일한 지원군은 중국이었다.

이란 중국

바이러스의 진원지로서 중국은 초기 대응 실패로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나, 우한을 봉쇄하고 신속히 상황을 통제함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새로 정립할 수 있었다. 그들은 더하여 마스크와 진단키트를 비롯한 의료물품을 바이러스가 퍼진 국가에 보냄으로써 해당 국가들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자 했다. 이란 입장에서는 미국에 대한 공동 전선을 유지하고 긴급히 필요한 의료물품을 수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른 강대국을 통해 미국의 제재를 우회하고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슬람 공화국의 전략은 코로나19를 맞이해도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대내적, 대외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란 정부가 코로나19로 인해 다시 점화된, 체제의 기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의 제재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중국만의 도움으로 이란이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바이러스 위기는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계급에 더 심하게 작용한다. 이미 한계 상황에 몰려 있던 이란의 빈곤층에게 바이러스가 초래한 보건 위기, 경제적 위기는 체제에 대한 반감을 더욱 늘릴지도 모른다. 초기 대응 실패로 더욱 심해진 신뢰 위기도 체제의 위험 요소이다. 그렇기에, 이전부터 이어져 온 이란 국가와 사회의 긴장은, 판데믹을 맞이하여 기존의 구조를 유지한 채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 나라의 불확실성도 심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아파 네트워크 

더하여 바이러스가 이란에서 확산하면서 확고한 인문지리학적 모습이 두드러졌다. 바로 시아파 네트워크의 지리적 분포다.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국명에서 드러나듯이 국민 대부분이 이슬람을 믿는다. 이슬람에는 두 가지 주요한 종파가 있는데, 하나는 90%의 무슬림이 믿는 수니파(=순니파[footnote]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에서는 ‘순니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는 ‘무함마드의 모범(순니)’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footnote])고 다른 하나는 나머지 10%가 믿는 시아파다.

이란은 8천만에 가까운 인구 중 90%가 시아파를 믿고 있어 세계 시아파 인구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16세기 시아파를 믿는 사파비 제국이 성립되면서 시아파는 이란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파비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강력한 정치적 권력의 지원과 오랜 역사적 전통에 힘입어 이란은 세계 시아파의 지도국으로 자리 잡았다. 1979년에는 시아파 성직자들이 권력을 장악해 신정체제인 ‘벨러야테 파키’(velayat-e faqih)[footnote]진정한 이맘이 오기 전까지 과도기 형태로 이슬람 법률학자인 벨러야테 파키에 의한 통치에 기반을 준 이슬람 국가 통치제체로 호메이니가 주장했다.[/footnote]를 수립했다. 혁명은 시아 이슬람을 이란 정체성의 가장 중심에 놓였다.

혁명 후 이란 정권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이슬람 세계 각지의 시아파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가장 큰 시아파 국가이자 성직자가 통치하는 국가로서 시아파 종주국으로서 이란의 권위는 더욱 올라갔다. 이슬람 세계, 특히 아랍 국가들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해지자, 이란은 자국 주변의 시아파 네트워크를 활용함으로써 이란의 지정학적 영향력을 늘릴 수 있었다.

레바논, 이라크, 예멘, 바레인, 시리아가 좋은 예시이다. 이란의 지역적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이 초승달처럼 생긴 ‘시아파 초승달’을 통해 제국을 건설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실제 이란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을 잇는 긴밀한 군사적 협력 관계를 만들었다. 1월 피살된 솔레이머니 장군이 바로 이 네트워크를 관장하는 쿠드스군의 수장이었다. 이란의 이런 종교적, 정치적 위상 때문에, 바이러스는 이란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아파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중동 국가로 퍼져나갔다.

이란에서 최초의 감염 중심지가 시아파의 역사적 성지인 곰(; Qom 또는 ; Qum)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했다. 곰은 시아파 순례객을 모으는 중심 허브로서, 도시를 방문한 순례객을 통해 바이러스를 네트워크의 다른 부분으로 퍼트리는 역할을 하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시아파 무슬림이 곰에 최초로 바이러스를 퍼트린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확실한 것은 곰을 순례하고 돌아간 여행자들로 인해 이란을 중심으로 한 바이러스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바레인, 레바논, 오만 같은 나라들이 그러했다.

곰에 있는 모스크의 모습 (출처: Hamid Reza Rahmani, CC BY SA 4.0)
시아파 성지 ‘곰’에 있는 모스크의 모습 (출처: Hamid Reza Rahmani, CC BY SA 4.0)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은 물리적 공간 위의 인적 네트워크를 따라 전파된다. 따라서 전염병이 전파되는 경로는 사람들이 누구와 더 관계를 긴밀하게 맺는지 파악하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은 바이러스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던 인문지리적 현상에 진한 표시를 한 셈이다. 중국은 관광과 생산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그 길을 따라 바이러스가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란의 경우, 종파의 중심지로서 구축한 네트워크가 판데믹으로 다시금 드러났다. 시아파의 영향력 확대로 불안을 느끼고 있던 아랍의 수니파 국가들로서는 이란을 경계해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겨난 셈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란의 국내적, 외교적 도전과 종합해보자면, 국내적, 지역적, 세계적 차원에서 코로나19는 지리와 사회를 변모시키기도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는 지리적, 사회적 현상을 재생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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