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3학년 봄 여성학 수업이었다. 대형 강의였지만 돌아가며 마이크를 주고받는 둥 시종일관 자유로운 분위기의 수업이었고, 그날의 주제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내 대각선 뒤쪽 줄에서 힘차게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머리를 질끈 묶은 여성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교수님, 사실 아르바이트 하면서 당하는 성희롱을 생각하면요, 차라리 성매매는 돈이라도 많이 받는 거 같아요!”
500cc 몇 잔 사 마셨다고 당당하게 이루어지는 성희롱에 남자 사장은 손님이니까 참으라며 손님 편을 들었다고 했다. 사장은 급기야 알바생이 까다로우면 안 된다고 좀 웃으라며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했다고 했다.
“벗들, 저 시급 7,000원 받아요, 기왕 줄 거면 한 몇 억 주던가. 돈 냈다고 나한테 제멋대로 일 거면 성매매와 뭐가 어떻게 다른지 전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고백은 너무 통쾌한 나머지 유쾌했다. 강의실 창으로 햇살이 새는 봄이었다. 교수님과 200여 명 학생이 모두 활짝 웃었다. 누군가는 손뼉까지 치며 자지러졌다. 너도나도 마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 7, 8년 전인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건 어디건 저런 말을 감히 뱉을 수 없었다.

평범한 나에게도 유혹은 너무 가까웠다. 단정하고 웃는 낯의 사진을 올리면 누군가 애인 면접을 문의하곤 했다. 예식장 일일 아르바이트에서 포크를 닦으면서까지 성희롱은 따라왔다. 힘든 일을 해치워가며 돈을 번다는 자부심은 성매매 여성에 대한 경멸로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당당해, 라는 내 말엔 어떻게든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성매매와 내 인생 사이 어떤 공통점도 모르고 싶었던 시절, ‘창녀’는 여성에게 가하는 가장 심한 욕이었고, 사람을 영원히 갱생 못 할 곳으로 끌어내리는 무기였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생과 성매매 여성 사이 닮은 점에 나 역시 거의 눈물을 흘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날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 장면은 지금까지 남아 봄마다 재상영된다. 강의실을 나가던 학우들의 경쾌한 발걸음을 보며 깨달음은 쾌에 있다는 걸 몸소 깨달은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과제를 위해 조모임 장소로 갔다. 나와 단발인 여자애 하나가 10분 정도 미리 도착했다. 편입생이라던 그 친구는 학교 분위기에 아직 적응이 어렵다며 조장인 내게 귀띔해왔다:
“이런 발표 하면 드센 취급 받아요, 언니.”
그는 남녀공학 타 대학에 있다 왔다고 했다. 그 사이 하나둘 조원들이 도착했다. 수업의 여운으로 흥분한 이들은 밖에서는 말 못 할 이런저런 주제를 내뱉었고, 그럴 때마다 말을 아끼던 편입한 단발 조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애는 팀 리포트 점수를 받고서야 사회의 창녀들이나 할법한 그런 ‘말’들이 자신을 지옥으로 끌어내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가끔 학교에서 우연히 그애를 스칠 때마다 괜히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괜찮아, 그 말들은 우리를 해치지 못해, 언니가 장담해, 더 말해도 돼.’
창녀가 아니라 대응하던 날들을 지나온 이 봄날 나 그냥 창녀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고용했다고, 데이트 비용을 냈다고, 결혼 자금을 댈 거라고, 그깟 돈으로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려던 사람들에게 나는 창녀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고 속삭여주고 싶다. 내가 창녀라는 사실로 너의 무엇도 더는 보호받지 못할 거라고. 어떤 욕이 무력해지는 이렇게나 명쾌한 봄날 그 창녀는 더 싸울 준비를 하겠다.
#나는창녀고너는가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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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저는 이 글 편집자입니다. 슬로우뉴스 동인 중 한 분이신 노모뎀 님께서 이 글을 추천하셨습니다. 바로 필자께 이 글을 발행하고 싶다고 청했습니다. 필자께선 승낙했지만, 이 글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 잠 못 이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글이 성노동 여성과 맞닿은 지점이 있어 혹여 2016년 무렵 ‘나는 창녀다’ 해시태그 운동과 비슷한 양태가 될까 봐 써놓고 머리 아파하던 중이었습니다. ’16년에 트위터 등지에서 해시태그 “#나는창녀다”를 달며 성착취 경험을 공유하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직접 보진 못했으나 그 운동 역시 제가 이 글을 쓴 이유와 어떤 면에서 비슷한 동기였을 걸로 생각해요.
다만 제 경우엔 n번방사건 관련 ‘내가_가해자면_너는_창녀다’ 라는 태도에 대한 반발이란 맥락이 껴있습니다. ‘창녀’라는 단어를 무력으로 사용하는 이들을 무력화시키고 싶었어요. 애초에 창녀로 취급받는 여성이든 실제 성노동자 종사 여성이든 대한민국 여성 대다수는 직업이나 성별 비하 단어인 ‘창녀’라 불리는 데서 자유롭지 않아요.
그들이 저지른 죄와 동일한 무게로 선택한 단어 창녀는 도리어 n번방을 만든 현실을 노출시켰고, 많은 여성의 일상적 경험은 그 증거로 기능합니다. 우리가 그걸 인식할 때 더 단단하게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노동자 여성이 아닌 이들의 #나는창녀다 운동은 당사자성이 없고, 성노동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며, 무엇보다 그런 사고 자체가 자발적 성노동 여성을 구원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모욕적 사고라고 비판받았던 바 있습니다.
저는 성노동자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정말 싫어하는 한편 성노동과 그걸 양산하는 시스템에 반대해 그들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을 보고 듣고 겪는 여성 사이 삶의 공통점으로 연대해 상황을 돌파할 힘을 만들고 싶었으나, 창녀 취급을 당한 이와 성노동에 실제 종사하는 이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겠죠.
글이란 자주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글을 써도 되는지 혼자 계속 생각하다 보니…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물음표에 빠진 느낌입니다. 물론 제 입장이 모든 걸 다 포용할 수 없지만요. ” (임지은)
저 역시 이 글의 모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은 님께서 쓰신 글은 자신의 체험적 진실에 바탕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객체화하고, 또 동시에 주체화한 글이고, 그런 점에서 아주 용감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그 글이 담고 있는 ‘지식’의 수준이 아니라, 그 ‘마음’의 진심이 전해지는 글이라서 제가 일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저로선 전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논리적인 완결성이나 실체적인 진실, 그 근거로서 통계적 사실이나 과학적 적합성이 중요한 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그런 글과는 결이 달라 자신의 체험적 진실을 깨닫는 과정에서 자기 성찰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글에 아주 공감했고, 이 글에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체험을 공적인 의미로 객관화하는 글, 즉 ‘칼럼’으로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그 소재나 주제를 좀 더 넉넉하게 허용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체험의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영역에 속한 이런 글은 필자의 자유가 더 넓고 깊게 허용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독자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혹시 이 글이 불편한 독자들도 계실 텐데요. 이 글에 동의할 수 없더라도 각자의 서로 다른 체험이 가지는 ‘차이’를 존중하며 토론하고 대화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 하나가 세상 모두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글 하나가 세상 모두를 구원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마음들이 겹치고, 쌓이면, 우리가 진심으로 희망을 꿈꾸는 일도 영영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