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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코리아 칼럼] 외국인 노동자 안에도 계급이 있다.  현장노동자의 시선으로 본 ‘국적별 서열’ (천현우/용접공) (⏳4분)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한 경력이 3년 6개월. 내가 감히 언어·국적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을 대하는 한국인 노동자의 태도는 잘 안다. 적어도 제조업에선 이들의 태도가 국적에 따라 다르지 않다.

현장에서 본 외국인 노동자 차별

외국인 차별이 심하지 않다고 말하면 “무슨 소리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예시 하나 들어보자. 외국인한테 위험한 작업을 무리하게 시키는 작은 사업장의 작업반장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그를 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외국인한테 무리하게 작업시키는 사람이 한국인한텐 안 그럴까? 큰 현장은 덜하지만 중소기업만 가도 안전 장비도 제대로 지급 안하는 경우가 흔하다. 현장에선 이런 사람을 차별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안전불감증 환자라고 부른다.

제조업에서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역차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외국인 노동자 대신 한국인 노동자가 잡무를 맡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역차별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대부분 부득이한 상황이다. 잡무란 이를테면 짧은 심부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노동이다. 당연히 긴밀한 소통이 필요한 탓에 어지간해선 외국인한테 맡길 수 없다. 현장에선 이런 경우를 역차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짬 맞았다”라고 표현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국적’ 계급

정부가 바뀌면서 노동 이야기도 다양해졌다. 외국인 노동자 얘기도 하나 둘씩 보이고 들린다.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들을 다룬 콘텐츠가 차별을 선동하거나 반대로 차별하지 말라는 구호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차별 선동을 반박하긴 쉽다. 우선 산업 측면에서 헛소리다. 외국인 노동자 없인 뿌리 산업이 아예 안 돌아간다. 이들이 사라져도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가지 않는다. 대다수 중소기업은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초과해 지불할 여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인권 측면에서 반박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애초에 부도덕한 측면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짜 골치 아픈 경우는 ‘차별하지 말자’는 구호를 반박할 때다.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면, 근거와 함께 자신의 도덕관에 하자가 없다는 점까지 입증해야 한다. ‘제가 이런 이유로 차별주의자는 아닌데요…’로 대화의 운을 떼야 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논의 주제 속에 도덕이 끼어 있으면 대화의 진전이 어렵다.

이 글에선 도덕이란 커튼은 잠깐 치워놓고 철저히 현장 노동자의 시선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로 뭉뚱그려 생각하는 집단도 알고 보면 계급이 나뉜다. 계급이란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고용 시장이 선호하는 노동자의 국적 순위’다. 아무래도 계급이 높은 노동자가 좀 더 편한 일, 돈 되는 기술, 실질적 임금 상승 등에서 우위를 갖는다. 화이트 칼라 세계의 ‘해외 인력’이 아닌, 블루 칼라 세계의 ‘외국인 노동자’ 대다수는 서류 면접을 안 본다. 즉 자신이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증명할 방법이 부족하다. 자연스레 국적은 한국에서 일할 외국인 노동자에게 매우 중요한 스펙이다.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계급’을 결정하는 건 이들의 ‘국적’이다.

계급은 단순히 한국인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나라 식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국어 능력, 문화 동질성, 해당 직무에 적합한 신체 등 게임처럼 엄밀한 수치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한국인 고용주 집단의 인식 총합으로 만들어진다. 

예컨대 말도 잘 안 통하며, 문화도 상이한 인도네시아나 네팔 노동자는 대체로 계급이 낮다. 조선소 사장님들은 인도네시아인은 어지간하면 안 받고 싶어 한다. 새벽 기도한다고 출근도 안하고, 라마단( 이슬람력 9월에 있는 신성한 달로, 무슬림들이 해가 떠 있는 동안 금식하며 기도와 선행을 실천하는 기간)이라고 금식하다가 쓰러지고, 술도 잘 안 마시니 회식에도 불참한다. 음식도 따로 신경 써야 해서 골치 아파한다. 그래서인지 베트남이나 태국, 필리핀인은 용접이나 취부 등 상대적으로 고급 직무를 맡는 경우가 많다. 반면 네팔,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인은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가장 높은 계급의 외국인 노동자는 누구일까. 내 생각엔 조선족이다. 조선족 혐오가 어마어마한 나라에서 무슨 소리냐고 할 수 있겠다. 혐오와 노동 현장에서의 계급 우위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다. 인터넷 혹은 시위 현장과 일터는 아예 다른 장소다. 요즘 캄보디아 범죄 사건이 연일 이슈화되고 있는데, 현장에서 캄보디아 노동자한테 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조선족은 애초에 같은 민족이라서 문화도 비슷하고 언어 문제도 없다. 이 두 가지만으로 이미 다른 국적의 외국인 노동자와 차원이 다른 우위를 점한다. 계급이 높으면 같은 최저임금을 받아도 노동 강도가 훨씬 약한 일을 고를 수 있다. 

지방은 이미 다문화 사회

간간이 강연을 다닐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족은 거의 없냐”는 것이다. 구체적 이유는 몰라도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최우선으로 비자 문제가 있겠죠. 근데 비자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선족이 왜 여길 오겠어요. 식당에서 일해도 임금은 비슷하고 덜 힘들 텐데. 우리도 호주 워홀(워킹홀리데이)가면 밭일 안 하고 서빙하잖아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곳. 경남에 있는 진동 광암 해수욕장에는 한국 노인과 젊은 외국인 가족이 7대 3의 비율로 섞여 있다. 목포여고에 강연 갔을 땐 한 반에 학생 두세 명 정도가 이주민 2세대였다. 산업 기반이 열악한 지역일수록 다문화 가족의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지방은 이미 다문화 사회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도 당연히 있다. 

중요한 사실은 외국인 차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차별은 분명히 있다. 차별을 줄여나가려면 차별의 정도를 살펴야 하고, 해법을 말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차별 안 받는 방법은 “차별 좀 하지 말자”라고 한국인한테 읍소하는 게 아니다. 사업장을 포괄할 관리 체계 확립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규제다. 외국인 차별하지 말라는 얘긴 별 의미가 없다. 외국인을 막 대하는 사람은 한국인도 막 대한다. 그런 인간은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그냥 광인이다. 

“외국인 차별 그만”이라 외치는 이들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메시지보단 종교적 구호에 가깝다. 관념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재단하지 말자. 이들의 삶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철저히 물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념은 환율을 이길 수 없고, 인종은 국부(國富)를 넘어설 수 없다. 외국인이기 이전에 한국에 돈 벌러 온 노동자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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