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숙의 새필드] 대중 문화를 연구한 필자가 미디어에 비친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추가할 새 필드는 수전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와 ‘은유로서의 질병’ 그리고 ‘마스크걸’과 ‘서브스턴스’ (⌚7분)
젊은 날의 손택, 그리고 중년의 나
나는 스무 살 무렵의 나를 기억한다.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들고 카페에 앉아, 마치 지적 여성의 초상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졌던 시절이다. 그때의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지성인이 되고 싶다”고 믿었고, 손택의 냉철한 문장을 인생의 지침처럼 외웠다.

그러나 지금, 중년의 내가 다시 읽는 손택은 완전히 다르다. 『여자에 관하여(On Women)』(윌북, 2025)는 젊은 날의 나에게는 추상적인 페미니즘 선언처럼 보였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여성으로 살아남는 일의 피로와 품격”에 관한 고백으로 읽힌다. 손택의 미발표 에세이를 모은 『여자에 관하여(On Women)』가 한국어로 번역·출간되었다.
📔 번역에 관하여
이번 윌북판은 손택의 여덟 편의 에세이와 인터뷰를 모은 국내 최초의 단행본이다. 번역 품질은 전반적으로 균형 있으나, 일부 문장에서 손택 고유의 건조하고 리드미컬한 리듬이 매끄럽게 유려화되면서 ‘거친 질감’이 사라진 감이 있다. 손택의 글은 본래 마찰과 균열로 읽히는 언어다. 그녀의 사유 방식은 정돈보다 균열을 통해 의미를 산출한다. 번역 텍스트가 그 불협화음을 지워버릴 때, 그의 비판적 리듬은 다소 약화된다. 따라서 향후 학문적 독해에서는 영문판과 한국어판의 언어적 편차를 교차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쓰인 그의 글은 반세기를 건너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손택이 사망한 지 20년, 미디어와 젠더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는 여전히 “불편할 정도로 정확하다.” 손택이 말했던 여성의 모순 — 아름다움을 강요받으면서 동시에 지성을 증명해야 하는 이중의 압력 — 은, 2020년대의 중년 여성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나는 손택의 글을 ‘사유의 텍스트’로만이 아니라 ‘삶의 거울’로 읽는다. 젊은 시절의 손택이 반항의 언어였다면, 지금의 손택은 생존의 언어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 언어 사이의 틈에서 살아가고 있다. 손택의 글은 단순히 여성의 경험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자’라는 이름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시각적·언어적 코드로 통제되는지를 폭로한다. 따라서 『여자에 관하여』는 한 시대의 페미니즘 선언이자, 동시에 지금도 유효한 인식론적 장치다.
여자라는 이름의 무게 ― ‘보이는 나’와 ‘진짜 나’
손택은 썼다. “여성은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가 된다는 일이다.” 그 문장은 지금의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그대로 살아 있다. ‘마스크걸’의 김모미는 그 문장의 현대적 구현체다. 낮에는 ‘못생긴 여자’로 평가받는 사무직원, 밤에는 마스크를 쓴 ‘섹시한 BJ’로 변신하는 그녀는, 손택이 말한 “시선 속에서 구성된 여성”의 극단적 버전이다.
손택이 반복해서 문제 삼은 것은 ‘아름다움(beauty)’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덕목이 아니라 의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여성을 사회적 승인과 자기 부정 사이에 가두는 구조적 장치다. 이 진단은 단순한 외모 담론이 아니다. 손택은 미학과 권력의 관계를 해부한다. “아름다움은 타인의 시선에서만 완성된다”는 명제는 미디어 사회에서 여성 주체가 어떻게 대상화되는지를 설명하는 미학적·사회학적 원리로 확장된다.

손택은 『여자에 관하여』에서 여성의 존재가 외부의 시선, 특히 남성의 욕망을 반사하는 거울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분석했다. 김모미는 그 시선을 체화한 인물이다. 그녀의 자의식은 카메라 렌즈 속에서만 존재하고, 스스로의 얼굴을 부끄러워한다. 마스크를 벗는 순간, 그녀의 존재는 사라진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거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엔 카메라 속 ‘나’를 선택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년이 된 지금, 사진 속 내 얼굴은 더 이상 나의 선택이 아니다. 사회는 여전히 여성을 외모와 나이의 스펙트럼으로 평가한다. 손택이 “여성에게 아름다움은 의무이며, 지성은 혐의다”라고 했을 때, 그 문장은 1970년대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이다.
‘마스크걸’의 폭력성은 단지 범죄의 서사가 아니라, ‘보여짐의 윤리’를 강요받는 여성의 자의식이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드러낸다. 손택의 언어로 말하자면, “여성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환상이며, 스스로를 파괴하면서만 실체가 된다.” 김모미의 파국은, 손택이 경고했던 그 ‘시선의 감옥’의 현대적 버전이다. 손택이 말한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여성”은 이제 SNS 플랫폼에서 ‘추천되기 위해 존재하는 여성’으로 진화했다. 아름다움의 규율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플랫폼 자본주의의 구조적 요구다.

사유하는 여자, 피로한 여자 ― 손택의 고립과 나의 일상
손택은 자신을 “지성의 사람”이라 불렀지만, 그 말은 동시에 ‘고립의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지성계에서 인정받으려 했지만, 그 안에서 언제나 ‘특이한 여자’로 불렸다. 그녀는 여성 해방운동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이름에 갇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독립은 고립이었다.
그녀가 평생 싸웠던 것은 타인보다 자기 자신이었다.
나 또한 글을 쓰며, ‘여성 연구자’라는 이름에 스스로를 구속시키는 순간이 많았다. 연구자로서, 작가로서 —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 속의 나’를 의식했다. 손택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지적인 여성으로 보이고 싶었지만, 그 욕망 속에는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중년이 된 지금, 그 불안은 다른 형태로 변한다. 젊을 땐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지금은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 손택이 『여자에 관하여』에서 여성의 삶을 “지속의 예술”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말이 너무나 실감난다.
『여자에 관하여』의 중심에는 ‘늙음’의 문제, 즉 여성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소거되는가에 대한 통찰이 있다. 손택은 “남자는 나이를 먹으며 권위를 얻지만, 여자는 나이를 먹으며 사라진다”고 썼다. 생각하고 쓰고, 돌보고 견디는 일. 그것이 중년 여성인 내가 ‘지금’ 살아남는 방식이다.

몸과 질병 그리고 늙음 ― 손택의 ‘아픈 몸’과 ‘서브스턴스’의 충격
손택은 후기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병의 은유화를 거부했다. “병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선언은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 은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서브스턴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스파크스는 노화한 몸을 거부한다. 그녀는 젊은 육체를 되돌려준다는 ‘물질(the substance)’을 주입받고, 다시 매혹적인 외모를 얻는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녀는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라는 지옥을 맞는다 — 젊은 자신과 늙은 자신이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를 파괴한다.
이 설정은 손택의 사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손택이 “여성의 몸은 사회가 부여한 은유의 덩어리”라 했을 때, 그 은유는 지금 ‘상품화된 젊음’으로 진화했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되찾았지만, 주체를 잃었다. 손택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그녀는 ‘이미지로 살아남았지만, 존재로는 소멸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손택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아름다움은 여성을 속박하고, 추함은 여성을 해방시킨다.”
수전 손택
하지만 그 해방은 너무나 잔인하다. 나이 든 여성은 사회적 가시성에서 추방된다. 나는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의 주름을 보며 그 잔혹한 현실을 실감한다. ‘서브스턴스’는 공포 영화지만, 중년의 여성에게는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손택의 “병의 은유를 거부하라”는 말은, 지금의 나는 이렇게 바꿔 읽는다.
나이듦을 병으로 말하지 말라.
손택 이후의 여자 ― 돌봄, 관계, 그리고 지속의 윤리
손택은 이성의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그녀의 글에는 언제나 감정이 깃들어 있다. 그녀는 세상을 분석하면서도, 그 잔혹함에 상처받았다. 『여자에 관하여』는 냉정한 철학서가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다. 나는 손택의 문장 속에서 자신을 본다. 냉철하게 글을 쓰려 하지만, 결국엔 감정으로 돌아간다. 젊은 날엔 감정을 숨겼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감정이 이성보다 더 깊은 통찰을 낳는다. 손택이 “감정의 진실이야말로 지성의 토대”라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마스크걸’의 김모미도,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도, 결국 감정을 억누르려다 파괴된다. 이들은 손택이 경계했던 ‘냉철한 여성’의 또 다른 초상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깨닫는다. 냉철함은 방패가 아니라, 가면이다. 감정은 약점이 아니라, 나를 인간으로 만드는 마지막 증거다.
1970년대 손택의 여성론이 개인의 해방을 강조했다면, 지금의 나는 관계의 윤리를 더 중시한다.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가 고립 속에서 자멸했다면, ‘마스크걸’의 김모미는 사회적 폭력 속에서 타인과 단절된 채 죽었다. 나는 이 두 인물을 보며 손택의 결핍을 생각한다. 그녀는 지적 고립 속에서 위대했지만, 관계의 회복에는 서툴렀다. 손택의 시대에는 그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중년 여성에게는, 돌봄과 관계가 생존의 조건이다.

나는 매일 반려견의 밥을 챙기고, 글을 쓰며 하루를 마친다. 그 반복의 삶 속에서 손택의 문장이 문득 스쳐간다.
“생각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이제 나는 덧붙이고 싶다. ‘돌본다는 것도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의 나는 손택처럼 세상을 바꾸려는 야망보다, 매일을 지속하려는 윤리를 택한다. ‘서브스턴스’가 보여준 젊음의 환상보다 나는 지금의 피로를 사랑하려고 한다. 그것이 손택 이후의 여성이 걸어야 할 길이다.
중년의 독서 ― 다시 손택을 읽는다는 것
나는 중년이 되어서야 손택의 문장을 ‘이해’가 아닌 ‘공감’으로 읽게 되었다. 그녀의 지성은 찬란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독이 있다. ‘마스크걸’의 카메라 렌즈, ‘서브스턴스’의 거울 — 이 두 매개체는 손택의 지성적 고독을 시각화한다. 거울 속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지만, 대신 사유의 주름이 생겼다. 손택이 “사람은 나이 들면서 더 깊어질 수 있다”고 말했듯, 나는 이제 깊이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
젊은 날의 나에게 손택은 ‘롤모델’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손택은 ‘동행자’다. 그녀는 나에게 말한다.
“지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나 감정으로 살아라.”
그 문장은 중년의 삶 전체를 설명한다.
『여자에 관하여』는 단순한 여성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여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다. ‘마스크걸’과 ‘서브스턴스’는 그 탐구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시선 속의 여성, 젊음의 강박, 몸의 공포 — 손택이 해부했던 주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손택은 여성으로서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생각하는 법을 요구한다.
중년의 나는 손택의 글을 통해 나의 일상을 해석하고,’마스크걸’과 ‘서브스턴스’를 통해 그 해석을 시각화한다. 손택의 시대에는 글이 사유의 언어였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이미지가 사유의 언어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건 같다.
‘사유하라. 하지만 감정을 잃지 말라.’
나는 그 문장을 믿으며 오늘도 글을 쓴다. 생각하고, 감정하고, 돌보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 손택 이후, 중년 여성으로서 내가 택한 ‘지속의 미학’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