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의회 칼럼] 동물과 숲, 바다, 하늘과 미래세대가 기후위기 헤쳐나갈 혁신적인 대안 내놨다! (⌚7분)

‘사물의 의회’, 인간과 비인간을 대변하는 시민들
인간 및 비인간 존재를 대변하는 시민들이 ‘사물의 의회’를 열어 ‘기후생태헌법’ 제정과 ‘기후정의기금’(가칭) 설치를 촉구했다. 또한, 미래세대와 비인간 존재의 대리인이 참여하는 ‘기후시민의회’ 구성, ‘불편을 감수할 의무’의 법제화 등 기후·생태 위기에 대응하는 혁신적인 방안을 제안했다.
사물의의회조직위원회(위원장 김환석) 그리고 경희대 기후-몸연구소, 녹색서울시민위원회 환경교육분과는 11월 1일부터 2일까지 서울시청 서소문1청사 13층 대회의실에서 ‘사물의 의회’를 개최하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대정부 10대 요구안을 최종 확정,발표했다.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제안한 ‘사물의 의회’(Parliament of Things)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동등하게 모여 협상하는 숙의 기구다. 현재의 기후·생태 위기가 인간 중심적 자연 착취에서 비롯됐다는 인식 아래,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던 비인간 존재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기후 민주주의’라는 모토로 개최된 이번 사물의 의회는 지난 9월 20일 첫 모임을 시작으로 기후·생태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방법을 논의했고, 11월 1~2일 본회의를 열어 최종 숙의를 벌였다.
사물의 의회에는 △기업가 △노동자 △농민 △미래세대 △사회적 약자 등 인간 5개그룹 그리고 △대기 △숲 △해양 △동물 △기술 등 비인간 5개 그룹 등에 지원한 약 100명의 의원(대변인)과 조직위원, 조정자 등이 참여했다.

가장 높은 지지 받은 ‘기후생태헌법’ 제정
본회의 첫날인 1일에는 각 그룹이 자신의 관점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요구안을 만들고 그룹 간 토론을 통해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둘째 날인 2일에는 심층 토론과 그룹 대표자들의 병합·수정 작업을 통해 총 36개 요구안을 도출했으며, 전체 의원의 투표를 거쳐 10대 요구안을 선정했다.
가장 많은 지지(7.3%)를 받은 요구안은 ‘기후생태헌법 제정’이었다. 기후생태헌법은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고려하여 구성원들의 번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기후위기 대응 및 생태계 보호 의무 △미래세대 및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들의 존엄한 권리 인정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고 의원들은 밝혔다.
뒤이어 기후·생태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마련하는 기금 설치안(6.9%)이 꼽혔다. 의원들은 “기후·생태 위기는 인간 사회 공동의 책임”인 만큼 “생태계 회복, 기후 피해 보상, 정의로운 전환, 미래세대 지원에 (기금을) 우선 사용하여 후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로는 기후 재난에 취약한 이들을 위한 ‘맞춤형 재난 대응 매뉴얼 보급’과 ‘기후정의 및 생태 전환을 담은 의무 교육 체계 구축안’(6.0%)이 꼽혔다.
기후·생태 정책을 숙의하고 결정하는 ‘기후시민의회 설치안’(5.7%)은 네 번째로 많은 지지를 얻었다. 기후시민의회는 일반적인 대의 기구와 달리 지역·성별·나이 등에 따라 무작위 추첨된 시민으로 구성하되, 현행 대의기구에서 대변되지 않는 미래세대와 비인간 존재들의 대리인이 참여하는 점이 특징이다.
‘불편할 의무’ 법제화, ‘생태 법인’ 제도화 주장도 채택
‘불편할 의무’를 법률에 명시하자는 제안도 10대 요구안에 포함됐다. 현행 환경정책기본법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과 환경훼손을 줄이고, 국토 및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하여 노력”(제5조)하는 의무를 국민에게 지우는 데 그치지만, 기후·생태위기 극복과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을 위해선 구체적인 불편을 감수할 의무 또한 져야 한다고 의원들은 밝혔다.

비인간 동물과 자연에 ‘법적 사람’(legal person)의 지위를 부여해 권리를 보장하는‘생태 법인’을 제도화하자는 주장도 채택됐다. 생태법인은 강, 숲, 동물 등 자연 존재가 법정 후견인(법인)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구제받도록 하는 법적 장치다. 뉴질랜드의 황거누이강 등 일부 국가에서는 자연과 생태계 일부가 법인으로 지정됐고, 국내에서는 남방큰돌고래를 법인으로 지정하는 제주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돼 있다.
법인안은 당초 숲, 해양, 대기 그룹 등에서 개별적으로 제안됐다가, 그룹 간 협상 과정에서 ‘기후생태헌법’ 요구안에 통합되었던 안건이다. 그러나, 최종 논의 과정에서 비인간 존재의 법적 지위가 확보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국토개발법 및 도시개발법 개정안(비인간 대리인의 의사 결정 참여)과 함께 별도 안건으로 상정되어 최종10대 요구안에 선정됐다.
인간 그룹의 요구안: 농민기본법, 공공 돌봄, 산불특별법
인간 그룹이 제시한 요구안도 높은 지지를 받았다. ‘농민기본법’을 제정해 농민의 권리와 식량 주권,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10대 요구안에 올랐다. 식량 위기가 현실화하는 상황에서 개발 면적 대비 일정 수준 이상의 농지를 확보하여 미래세대가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기후위기가 돌봄의 위기로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공공 돌봄을 확대하여 기후정의를 실현하자는 주장도 공감을 얻었다. 최근 국회를 통과했으나 난개발 논란에 휩싸인 산불특별법도 산림의 생태적 회복과 모든 존재의 안녕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도 10대 요구안에 포함됐다.

또한, 한국과 세계의 기후 대응이 1.5도를 지키기 위한 탄소 예산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영역별·전주기별·연도별·지역별로 탄소예산을 설정하고, 계획된 예산을 초과하는 모든 행위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탄소예산이란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 전 지구가 배출할 수 있는 온실가스 허용량을 뜻한다.
생태파업권, 물의 이동권 등도 눈길
최종 10대 요구안에 선정되지 않았지만, 주목할 만한 제안도 많았다. 노동자 그룹은 노동자가 생태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작업을 거부할 수 있는 ‘생태파업권’을 요구했다. 기업가 그룹은 “기업은 전환의 동반자”임을 강조하며, 정부에 “예측 가능한 기후에너지 정책을 제시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라”고 요구했다. 정부에 따라 기후에너지 정책이 바뀌면서 기업 활동의 애로가 많다는 것이다.
해양 그룹은 탄소 흡수 등 자연순환 극대화를 위해 ‘물의 이동권’(대기-강-연안-대양간 흐름 보장)과 공해(公海)를 지구 구성원의 ‘공동 유산’으로 인정하는 등 ‘해양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025 사물의 의회 10대 요구안
1.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고려하여 구성원들의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기후위기 대응 및 생태계 보호 의무를 포함하고, 미래세대 및 지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들의 존엄한 권리를 인정하는 기후생태헌법을 제정한다.
2. 기후·생태 위기가 인간 사회 공동의 책임임을 인식하고, 사회적 비용을 그 책임과 형평성에 따라 차등적으로 부과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생태계 회복, 기후 피해 보상, 정의로운 전환, 미래세대 지원에 우선 사용함으로써 기후불평등을 해소한다.
3. 기후재난에 취약한 이들의 맞춤형 재난 대응 매뉴얼을 보급하고, 모든 존재들의 안녕을 위한 전체 사회 구성원의 전생애 기후정의 및 생태전환의무 교육 체계를 구축한다.
4. 기후·생태 위기 대응 및 주요 정책의 숙의와 결정을 위해 지역·성별·연령 등을 고려하여 무작위 추첨된 일반 시민과, 미래세대 및 비인간 존재들의 대리인으로 기후시민의회를 구성한다.
5. 개발 및 정비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비인간 존재, 미래세대 존재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대리인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국토개발법과 도시계획법을 개정하고, 생태법인을 제도화하고 협치법을 제정한다.
6. 기후위기로 인해 더욱 심화될 돌봄의 위기를 극복하고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공공 돌봄을 확대한다.
7. 농민의 권리와 식량 주권 실현,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농민기본법을 제정한다.
8. 인간 종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공존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의무를 진다.
9.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안녕과 산림의 생태적 회복을 보장하기 위해 산불특별법을 개정한다.
10. 과학적·국제적 책임을 반영한 전영역별, 전주기별, 연도별, 지역별 탄소 예산을 설정하고, 계획된 예산을 초과하는 모든 행위를 법으로 금지한다.
사물의 의회,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국내에서 사물의 의회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브뤼노 라투르는 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제21차 당사국총회(COP21) 직전 대양·토양 등 비인간 대표단을 포함한 모의 협상 ‘협상의 극장’(Theater of Negotiations)을 진행했고, 네덜란드에서는 ‘북해 대사관’(Embassy of the North Sea)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북해 자체를 하나의 주체로 보고, 예술가, 과학자 등이 모여 북해의 목소리(동식물, 해저, 바다)를 듣고 대변하려는 시도다.
사물의의회조직위원회는 이번 10대 요구안을 국회 기후특위와 관련 정부 부처에 전달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사물의의회조직위원회, 경희대 기후-몸연구소와 녹색서울시민위원회 환경교육분과가 함께 주최하고, 가치를 꿈꾸는 과학교사모임,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성공회대 농림생태환경연구소, 신유물론연구회, 도서출판 우리학교, 참여연대가 후원했다.
김환석 조직위원장은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과 비인간은 운명 공동체다. 국내 최초로 열린 사물의 의회는 비인간에도 발언권이 있는 ‘확대된 민주주의’의 실험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사물의 의회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사물의의회 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 김환석 (국민대 명예교수), 집행위원장 김태우 (경희대 한의대 교수), 간사 재하(경희대 기후-몸연구소 연구원),조직위원 김룻(녹색서울시민위원회 환경교육 분과 위원), 김명심(덕성여대 강사), 김병수(성공회대 열린교양대학 교수), 김지연(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교수), 김주옥(서울과학기술대 조형대학 교수), 김추령(성공회대 농림생태환경연구소 연구교수), 남종영(환경경논픽션 작가), 박병상(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장), 박진희(동국대 교수), 조천호(대기과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