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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의 북라이딩] 한 달 넘는 공포의 하락과 7월 마지막 역사적 폭등까지. 2026년 여름의 코스피에서 바라본 1929 대공황의 공포와 절망 그리고 단 한 줄로 지워진 사람들… (⌚7분)

🎠마냐의 북라이딩 📚

2026 여름 코스피에서 바라본
1929 대공황

“올해 금융업계를 둘러싼 주위 환경은 매우 우호적이다. 국가의 부는 막대하며 은행 시스템은 건전하다. 생산과 소비 모두 팽창하고 있으며 상거래 방식은 신중하다. 노동자는 높은 임금에 만족하고 수출은 증가 일로를 걷고 있다.”

1929년 1월 뉴욕타임스 칼럼의 경제 전망은 장밋빛이었다. 흥청망청했던 1920년대의 말미에 사람들은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그해 10월 증시가 무너지고 대공황이 시작된다는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1929년 주가 폭락 후 월가와 브로드 스트리트 교차로에 모인 사람들. CC0.
1931년 2월 대공황 기간 중 실업자들이 시카고에서 알 카포네가 연 수프 키친 밖에 식사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모습. CC0.

‘번영과 낙관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았는가’라는 부제의 ‘1929’는 뉴욕타임스 간판 저널리스트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진 ‘대마불사, Too big to fail’의 저자, 인기 드라마 시리즈 ‘빌리언즈’의 공동 창작자인 앤드루 로스 소킨의 책이다. 취재력과 글발로 검증된 작가가 벽돌 책으로 1929년을 다뤘다는 것도 화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거의 100년 전 상황이 오늘날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핵심이다.

붕괴 직전까지 낙관론만 보였다

1929년 1월, 주식시장은 전년 동기 대비 62% 상승했다. 저자는 “그 밑에 감춰진 불균형, 즉 미국 사회의 극심한 양분화를 완벽히 감추고 있었다”고 했다. 자동차, 냉장고, 라디오 같은 제품을 신용으로 사던 미국인들은 주식 가격의 10%만 보증금으로 내고 역시 신용으로 돈을 빌려 주식 투자에 나섰다.

다수의 국민이 그랬지만, 특히 금융 전문가들이 모여있다는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1929년이 전년보다 훨씬 더 좋은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주식시장의 예언자’로 불리던 점성술사 이밴절린 애덤스는 종목 추천으로 거금을 벌고 있었다. 그의 유료 정보지 구독자가 10만 명에 달했다. 기자들은 “현재 주가는 결코 과열된 것이 아니며 월스트리트에 폭락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일대 어빙 피셔 교수를 추앙했다.

어빙 피셔(1867-1947). CC0.

주요 인사들의 사회적 존재감과 일상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해 시대를 생생하게 구현한 책은 동시에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맨 앞장 인물 소개를 계속 살펴야 한다. 와중에 핵심 인물 중 하나는 내셔널시티 은행(현 씨티은행 전신) 회장인 찰스 미첼. 1929년 10월28일 ‘블랙 먼데이’ 그의 퇴근길 풍경이 인상적이다.

뉴욕 증시는 10월24일 ‘검은 목요일’부터 폭락 중이었다. 한 달 전 내셔널시티 은행이 합병한 은행의 주주들에게 주식 혹은 현금을 주기로 선택권을 제시했을 때는 별문제 없었으나 그새 주가가 반 토막 난 상황. 내줄 현금은 없었다. 은행이 망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예금 인출 사태인 ‘뱅크런’이 불가피했다. 당시 미국 기업 대출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초대형 은행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미첼은 앞서 1928년 3월 연준이 금리 인상을 통해 단계적으로 거품을 빼려고 하면서 시장이 급락하자 일개 민간은행으로서 ‘묻지 마! 대출’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해 분위기를 반전시켰던 장본인. 그때 시장이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미첼은 영웅이 됐지만 그만큼 1929년 10월 붕괴 폭은 훨씬 커졌다.

대공황 초기 미국에서 뱅크런이 발생한 뉴욕의 아메리칸 유니언 뱅크 앞에 모인 사람들. CC0.

1929년 주요 뉴스에도 들지 못했지만

10월29일, 뉴욕증권거래소 앞에는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수천 명의 소액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주가 표시기는 1시간 이상 지연됐고, 전화는 먹통이었다. 골드만삭스 공모 펀드의 경우, 몇 달 전 220달러 고점에서 3달러까지 추락했다. 11월까지 불과 두 달 만에 시장은 반 토막 났고, 500억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다. 이는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의 절반에 육박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형 은행 어느 곳도 파산하지 않았다. 증시 폭락은 뉴욕타임스 1929년 가장 중요한 뉴스에도 오르지 못했다. 대참사의 원인은 알기 어려웠다. 그저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이제는 팔아야 할 때’라고 믿었던 순간이 왔을 뿐이라고 기록한다.

그 무렵 미국을 방문 중이던 영국 정치인 처칠은 투자한 돈도 잃고 투숙했던 플라자 호텔에서 한 남자가 15층에서 투신하는 장면까지 목격했으나 낙관론을 버리지 않았다. 미국인들의 ‘황금빛 미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회복력이 그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수백만 대중과 백만장자 사이의 오랜 적대감은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대중은 백만장자를 원망하기보다 그들처럼 되기를 열망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고 기록했다.

윈스턴 처칠(1874-1965). CC0.

하지만 붕괴는 한순간에 끝나지 않았다. 주식은 1930년 한 해 동안 3분의 1 하락으로 마감했고, 이듬해 다시 반 토막이 났다. 1932년까지 주가는 1929년 정점 대비 80% 이상 폭락했다. 1만 천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1,3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양철 오두막에 살며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섰다. 노숙자들의 판자촌 이름은 후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로 불렸다.

1936년 오클라호마주 판자촌 모습. CC0.

워싱턴은 손 놓고 있었나

위기 이전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는 정부가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인물. 저자는 “자신의 임무를 세금 및 지출 삭감, 그리고 법안 거부권 행사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며 “실제로 백악관에서 보낸 6년 동안 조용히 책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시가를 피우고,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 된다고만 했다”고 전한다. 월스트리트는 그를 숭배했다. 방임에 따른 주가 급등을 ‘쿨리지 장세’라고 할 때는 책임의 포기도 포함된 말이다.

캘빈 쿨리지(1872-1933). CC0.
허버트 후버(1874-1964). CC0.

대공황을 맞닥뜨린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경우, 대중을 안심시키기 위해 경제 위기의 명칭을 ‘공황(panic)’이 아니라 ‘불황(depression)’으로 바꾼 일이 최대 실책으로 남았다.

공황의 유일한 장점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불황은 얼마나 갈지 아무도 몰랐다. 이어 루스벨트는 취임 직후 전국 은행 휴업령을 선포해 뱅크런의 확산을 막았다. 만약 후버 대통령이 이 일을 단행했더라면 절망적 조치로 보였겠지만, 루스벨트의 손을 거치자 대담한 행정 결단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월가의 도덕적 해이

카터 글래스 연방 상원의원도 책의 핵심 인물. 그는 월가의 도덕적 해이와 부실한 시스템을 추적했다. 증시 상승기에 월가의 거물들은 정관계 인사들에게 ‘특별 할인가’로 주식을 팔았다. 예컨대 실제 시장가보다 10달러 낮춘 32달러에 매수할 권리는 뇌물이나 다름없었으나 당시 쿨리지 전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거리낌없이 이를 활용했다.

찰스 미첼은 자신의 주식을 아내에게 헐값에 팔아넘겨 거액의 세금을 면제받은 뒤 훗날 주가가 반등하자, 다시 사들인 사실로 청문회에서 공격받았다. 연봉은 2.5만 달러였으나 1927~1929년 보너스를 합친 총수입은 350만 달러에 이르렀던 미첼은 절세에도 유능했다. J.P 모건의 2세 잭 모건도 1931~1932년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주식 손실을 이유로 세액 공제를 활용한 이는 한둘이 아니었다.

찰스 미첼(1877-1955). CC0.
J.P. 모건 주니어, 일명 ‘잭’ 모건(1867-1943). CC0.

다만 글래스 의원의 월가 저격은 선택적이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친분 있던 JP모건의 해체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북부의 금융계와 맞서 남부 농업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글래스의 법안은 예금자 보호를 추진한 헨리 스티걸 법안과 합쳐져 ‘글래스-스티걸법’으로 통과되어 예금과 대출을 관장하는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의 증권과 투자 업무까지 못 하도록 했다. 이 법안은 월가의 대대적 로비와 규제 완화 열풍으로 빌 클린턴 정부에서 폐지되는데, 이후 금융사들이 고수익 상품에 앞다퉈 뛰어들면서 2008년 경제위기를 불렀다는 분석도 있다.

역사의 뒷장에서

시장 폭락 때 ‘백기사’처럼 행동해 영웅이 됐던 리처드 휘트니는 1930년 41세 최연소로 뉴욕증권거래소 회장이 됐으나 끝내 거래소 공제 기금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갔다. J.P 모건의 회장이 된 형 조지 휘트니는 동생이 훔친 돈을 대신 갚았다. 허버트 후버는 구호 활동으로 명성을 회복, 존경받는 원로 정치인으로 삶을 마감했다. 처칠은 재정 손실로 1930년대 내내 사실상 파산 상태였으나 총리를 거쳐 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재정 안정을 누렸다.

대공황 때 폭락에 승부수를 걸어 떼돈을 벌었던 리버모어는 이후 또다시 대담한 베팅을 감행했다가 모든 것을 잃었다. 리버모어를 제외하면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후일담은 대체로 평탄하다. 월가 자본가들이 시장 폭락에도 끝내 회복하는 장면에 씁쓸한 뒷맛과 함께 당시 삶이 무너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워졌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책은 화려한 이들의 현란한 행각을 쫓아가고 있어 피해자들은 한 줄 처리된다. 8년 동안 썼다는데 승자의 역사만 남았다.

1929년 미국 대공황 당시 증시 폭락을 정확히 예측하고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취해 약 1억 달러(현재 가치 수십억 달러)의 거대한 부를 쌓으며 ‘월가의 큰 곰’으로 명성을 떨친 제시 리버모어(1877-1940). 사진은 1940년 당시 모습. CC0.

2026년의 코스피는 어떻게 평가될까. 역대급 상승장과 역대급 급락이 엇갈리면서 변동성이 극대화된 것은 여름까지의 일. 하반기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얼마 전 공항에서 건너편에 앉은 고등학생들이 서로 폰을 들여다보며 투자수익률을 분석하고 있었다.

책에는 케네디 전 대통령 부친이 구두닦이 소년의 종목 추천을 거품 붕괴 신호로 인식, 손실을 피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대중이 무분별하게 뛰어들면 곧 호구가 된다는 공식은 투자 책임을 온전히 대중에게 돌린다. 자본가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자본가를 꿈꾸면서, 자본가에게 털리는 대중만 잘못일까?

‘투매’, 과도한 공포로 주식을 내던지지 말자. 우르르 쫓아가는 방식으로는 언제든 털린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장기 전략을 세워보면 좋겠다는 것은 말이 쉽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남은 질문들

그때
  • 번영과 낙관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달았는가, 설득되나요?
  • 인상적인 팩트 혹은 장면이 있나요?
  • 시스템의 문제였을까요, 결국 사람이 문제인 걸까요
  • 선샤인 찰리, 평가가 엇갈리는데 어떻게 봅니까?
  • 주식시장에 대한 인상이 독서 후 달라진 게 있나요?
지금
  • 왜 우리가 1929년을 들여다보는 데 합의한 것일까요?
  • 2026년 한국 증시는 100년 전 미국 시장과 닮은 점이 있나요?
  • 삼전닉스 나만 없나, FOMO 겪어 보셨나요?
  • 대마불사, 개미만 독박쓰는 구조, 자본주의 기본값일까요? 개미에게도 기회가 있었으니 괜찮아요?
  • 이 시장의 룰은 대체 누가 결정했고, 동의했으며, 이익을 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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