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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인용’이란 네 글자가 비판의식과 성찰적 지성마저 마비시킨 것인가.
헌법재판소 결정문은 비록 전원일치의 파면 결정을 내리긴 했으나 그 내용에서는 ‘최소의 판결’이었으며 국민의 요구를 저버리고 기대 수준에 한참 못 미친 판결로 나는 생각한다. 권력과 자본의 공모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에 대해서는 이미 재판관 김이수, 이진성의 보충의견에 드러난바 충분히 파면사유로 성립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을 적시해놓고도 이를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의 성실 의무를 추상적이고, 방어적으로 해석하였다.
그 결과 이후의 적폐청산과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과정에 또다시 국민에게 큰 부담을 지웠다. 박근혜라는 권력자 1인과 그 측근 최순실에게 모든 책임을 지움으로써 책임져야 할 다른 대상들을 구하고 결국은 지배층 전체의 이익을 수호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문이다.
이번 탄핵 인용의 핵심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국민으로부터 직접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인정된다”
– 2016헌나1 대통령(박근혜) 탄핵 결정문 중 ’10. 피청구인을 파면할 것인지 여부’ 중에서
그러나 그것은 과연 누구의 이익이며 어떤 손실을 가리키는가. 결정문에서 ‘이익’은 ‘헌법수호의 이익’으로, ‘손실’은 ‘국가적 손실’로 표현돼 있다. 나는 그것을 ‘체제수호의 이익’으로, ‘지배 기득권층의 국가적 손실’로 읽었다. 결정문 전문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헌재의 탄핵 인용은 잘한 것이 아니고 마땅히 한 것이다. 광장의 힘에 밀려 도저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결정의 선택치 안에서 법관들은 ‘영리하게도’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내용으로 결정문을 만들었다. 지배 이념을 이토록 명확히 보여준 결정문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기득권 지배체제를 청산하자고 싸워온 시민이 이 판결을 정의의 판결이라도 되는 듯 환호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것은 지엄하신 주인님의 은혜에 감읍하여 스스로 무릎 꿇고 절하는 것처럼 치욕스럽다. 주권자는 국민이다.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이 아니라.
우리는 청원한 것이 아니라 명령한 것이다. ‘소추’의 의미는 탄핵이 될지 말지를 권위자들에게 물어보고 결정해달라고 부탁하는 의미가 아니다. 탄핵소추안 발의는 주권자 국민의 권한으로 파면을 요구하는 행위다. 결정문대로 정치적 규범적으로 이미 시민들에 의해 탄핵당한 대통령이라면 헌법재판소의 심리 과정은 일종의 사법적 추인 절차인 것이다.
최소 요구 vs. 최소 판결
그렇다면 이미 이루어진 정치적 규범적 판단에 대해 ‘최대한’ 사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결정문에 담았어야 한다. 그것이 주권자 시민이 헌법재판소라는 사법 기구에 대해 요구한 ‘최소 요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최소 판결’로 화답한 헌재의 보수화와 월권적 행위(특히 재판관 안창호의 보충의견은 심각한 월권행위라고 본다)에 대해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어떤 이들은 오히려 그 판결을 미화하여 해석하기까지 한다.
결국,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것으로 끝났으니 다 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 결정문은 이후의 과정에서 너무나 위험한 사법적 뇌관들을 남겨놓았다. 나중에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겠지만, 이 결정문은 비기득권층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국민 다수 입장에서 보자면 이후 ‘발생하는 ‘손실’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이익’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로 만들게 될 가능성도 있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결정문이 앞으로 남은 이들의 진짜 싸움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먼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유기는 기각되고, 기업 재산권과 경영권 침해는 헌법과 법률을 위배한 것으로서 탄핵 사유로 인정되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국민의 생명권보다 기업의 재산권을 더 수호하는 법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 판결은 명백히 국민의 생명권보다 기업의 재산권을 우위에 두는 판결이었으며 나는 이것을 2016헌나1 대통령(박근혜) 탄핵 심판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에서 용인되어선 안 될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친절한 해설
그런데 엉뚱하게도 헌법재판관들의 노고를 칭송하고 미화하며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결정문에 미처 담지 못한 처지와 입장까지 헤아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글이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아랫글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판결에서 세월호 사건이 사법적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유가족들께서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한 유가족의 말씀대로 생명권보다 다른 사유가 더 중요해서 세월호 사건이 탄핵의 사유가 되지 못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중략)
성실이라고 하는 개념이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개념이 상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법적인 판단을 내리는 탄핵 소추의 직접적인 판단 대상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명백히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의무임에도 법적인 판단이 될 수 없는 성실의 의무를 판단할 주체가 법원이 아니라 다른 주체, 곧 헌법 1조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이 판결문은 담담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고문은, 사법적 판단에서 탄핵의 사유로는 세월호 사건이 채택될 수 없다는 점에서 법이 가진 한계를 밝히고, 다른 한편 탄핵이라는 사법적 판단에 이르게 한 규범적, 정치적 원인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세월호 사건이었음을 역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이관후, 세월호 사건이 탄핵 판결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분들께 중에서
헌법 전문에 대한 문해력이 없어서 그 심오한 판결의 의도를 오해라도 할까 봐, 이렇게 친절한 부연설명을 덧붙여 재판관들의 고충과 숨은 의도와 마음까지 읽어주며 변론을 자처하는 것일까. 법정에서 싸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면서 법리 싸움이란 것을 처음 해봤다. 그 과정에서 판례 하나, 결정문 한 줄이 이후의 사건에서 얼마나 소중하며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처절히 깨달았다.
하다못해 한 개인의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에서도 그러한데,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의 결정문이 갖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이 헌법재판소 판결이 향후의 모든 사법적 판결에서 어떻게 인용되고 참고되며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정말 예상치 못한단 말인가.
“국민들은 이겼어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 당시의 직무유기는 대통령의 가장 큰 탄핵 사유다. 자본과 권력 사이의 상호 이권 거래보다 국민 목숨을 내팽개친 것이 더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다. 그것을 단죄하기 위해 거리의 투쟁을 통해 국민적 의지를 모아냈고, 그것을 헌재까지 보냈다. 이후의 어떤 대통령도 자기의 첫 번째 사명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걸 판례로 남기고 법에 새기라고 국민은 국회를 압박하여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정치적 규범적 탄핵은 이미 국민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을 존중해서 사법부가 그에 대한 법적 판단은 내리지 않은 것이라고? 그게 세월호 유가족을 존중하는 사법부의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국민들이 이겼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 아빠들은 오늘 이기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탄식을 보면서도 과연 그런 말이 나오는가.
헌재 결정문의 논리 구조를 옹호하는 이관후의 글은 형식적으로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고, 국민의 아쉬움을 달래는 듯 보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철저히 헌재의 입장을 배려하고, 옹호하면서 배제된 주권자들의 생명 권리에 대한 정당한 항변을 봉쇄한다. 이런 글을 읽고 위로를 받기보다 화가 나는 건 그 때문이다. 헌재 결정문에 대해 너무 서운해 말고 아쉬워 말라고 하는 이 기만적 위로에 대해 나는 지금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법리를 몰라서가 아니다. 증거가 충분히 입증되지 못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당신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법리를 설명해주고, 증거주의 원칙과 헌법적 최소주의의 필요성을 설명해주는 지식인이 잘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이 사건은 탄핵심판사건이다. 헌법재판소는 민법과 형법에 따라 피고의 구체적 범죄 사실 행위를 입증하여 형을 선고하는 곳이 아니라 —그것은 다른 법정에서 하게 될 것이다— 청구 대상의 ‘위헌성’을 심판하는 곳이다. 즉, 이번 탄핵심판사건은 ‘피고'(민사)나 ‘피고인'(형사)으로서 박근혜의 구체적 범죄 사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피청구인 대통령에 대한 헌법위반 사실을 판단하고, 그것을 근거로 탄핵을 결정하는 것이다.
식자층의 오만과 오류
그런데 결정문 안에 이미 피청구인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으로서의 헌법상 의무를 다하지 않았음을 김이수, 이진성은 보충의견에서 충분히 피력한다. 나는 대통령의 성실 의무 위반을 입증하는 두 법관의 논리전개에 대해 어떤 반론과 반증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논리와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두 재판관의 소수의견으로만 인용되었고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 판단은 분명 정치적인 판단이었다.
그에 비해 재판관 안창호의 보충의견이 포함된 것 또한 헌재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그 내용은 이번 탄핵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이며 재판관 개인의 정치적 견해에 따른 제언일 뿐이다. 재판관이 그런 의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대통령제라는 제도의 문제는 국회에서 제출한 탄핵사유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일 뿐이다. 그런 개인의 사견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의 결정문에 보충의견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법기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종래의 기득권 정당 간의 권력분점을 꾀하는 정치권의 개헌론과 사실상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아니나 다를까 탄핵심판이 끝나자마자 정국 농단의 실체였던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은 이를 ‘헌법적 아우라’로 동원하여 개헌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앞으로도 이 보충의견은 ‘헌법재판소’의 사법적 권위를 가지고 종종 인용될 것이다.
법적 용어와 법리를 동원해 헌재의 결정문을 조목조목 반박하지 못한다고 해서 일반 사람들이 그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식자층의 오만이고 오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헌재의 결정문은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지배자의 언어였다.
만약 어떤 지식인이 그 언어를 해독할 수 있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 지배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지배자의 입장을 설명하여 납득시키는 일일까, 아니면 민중의 언어를 알아듣지 듣지 못하는 지배자에게 민(民)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시키는 일일까. 많은 지식인이 오히려 진실의 목소리, 민중의 목소리보다 법 논리를 더 우선 잣대로 이번 판결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그 판결을 옹호하는 지식층의 해석도, 모두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