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떠올리는 말.

“말에는 그 최초의 말도 그 최후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의미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 모든 의미는 언젠가 찬란한 귀향의 축제를 맞이할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주은선(경기대 교수)은 “연금개혁의 절반은 ‘노동개혁'”이라고 말했다. 그 구체적인 의미가 궁금했다.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에게 물었다. 연금과 정년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끝날 때쯤 ‘광장’으로 이어졌다. 바흐친의 신비로운 잠언처럼 세상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돼 있고, 그 풍경에는 끝도 시작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이 어떤 풍경으로 묶여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 징검다리들로 이어진 이야기들의 풍경이 모여 세상을 만들기 때문이다.

2025 연금개혁이 결국 모수개혁(연금 구조는 그대로 두고 숫자만 고치는 개혁)으로 결정됐다. 구조개혁이든 모수개혁이든 결국 재정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은퇴∙정년 시점에서 연급 개시 시점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노동개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어떻게’다. 영원한 디바 한영애는 이미 오래전에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이 변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고. 변하는 건 당연해. 어떻게가 중요해.” (말도 안돼)

언젠가 이상헌이 지적한 것처럼, 프랑스는 정년 연장 반대 피켓을 들고 집회하고, 우리는 정년을 연장하라고 시위한다. 그 차이는 왜 어디에서 생겨나는 걸까.

이상헌은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는 ‘묶음’이고, 우리는 ‘낱개’다.

이상헌

프랑스에서 연금과 정년은 마치 ‘실과 바늘’처럼 당연하게 묶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당연하게 묶여야 하는 ‘한 쌍’이 서로 따로따로다. 그 차이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 차이로 인해 우리는 ‘어떻게’ 연금개혁과 노동개혁의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야 할지, 그러니 연금과 정년 사이의 그 깊은 골을 도대체 ‘어떻게’ 채워야 할지… 이상헌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42]

마을은 사라지고 광장만 남았다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이 글은 2025년 3월 28일(금)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이상헌 박사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이상헌 박사가 직접 내용을 확인하고 퇴고했습니다.

연금과 정년: 묶음 vs. 낱개

결국 ‘연금개혁의 절반이 노동개혁’이라는 말, 그리고 그러기 위해 정년 연장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연금 펀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일을 오래 많은 이들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유럽의 연금 제도, 특히 프랑스의 연금 제도를 우리 연금 제도와 연결 지어선 답을 찾기 어렵다. 한국은 한국식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늘 강조하는 것, 서로 긴밀히 연결된 것들은 처음부터 통합적으로 논의하고 계획해야 한다. 연금개혁이 특히 그렇다. 연금개혁의 절반이 노동개혁이라기보다는 한국식 연금개혁에는 노동개혁, 특히 정년 논의와 (은퇴 후) 일자리 문제가 그 자체로 하나다.

프랑스 정년 연장 반대 시위. 깃발 속 인물은 프랑스 연금 기금을 창설한 ‘노동자 장관’ 앙브루아즈 크로이자(Ambroise Croizat; 1901-1951). 그의 캐리커처와 함께 ‘돌아와 주오!’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사진 Paola Breizh, CC BY. 2023.03.28.

그래서 나는 줄곧 모수개혁 방식의 연금개혁을 할 거면, 노동 시장과 일자리 문제는 처음부터 함께 통합해서 논의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이렇게 하나씩 낱개를 개별적으로 바꾸면 안 된다. 가령, 프랑스는 연금 문제를 이야기하면 당연히 고용 문제가 특히 정년 문제가 ‘묶음’으로 따라온다. 프랑스에서 연금은 곧 정년이고, 은퇴다. 그게 서로 별개가 아니다. 제도의 구조가 골격이 그렇게 설계됐다. 그런데 우리는? 연금 따로 정년 따로 복지 정책 따로, 모두 따로 논다. 그런 구조라서 논의가 계속 겉돌고 헛돈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노인 빈곤 문제를 연금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노인에게 추가적인 수입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일해야 한다. 외국에선 그게 묶여 있는데, 우리는 낱개로 떨어져 있다.

연금 문제를 산술적인 문제, 그러니까 펀드가 마르지 않도록 그 곳간을 채워야 하는 문제로만 보면, 어떤 계층(안정적인 일자리, 중장년층)은 이익을 보고, 어떤 계층(불안정 일자리, 청년층)은 손해를 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문제를 통합적으로 살피지 못하고 그렇게 ‘산수 문제’로만 보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이런 식의 비생산적인 정치적 논쟁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일자리 이야기가 쏙 빠져 있어서 그토록 큰 진통 끝에 세상에 나온 연금개혁의 출발부터 헛바퀴 돌 수밖에 없다.

정년조차 없는 사람들

프랑스에서 연금과 정년이 ‘묶이는’ 조건은 간단하다.

  1. 연금과 정년 사이의 공백이 없어야 하고
  2. 소득대체율을 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연금이 쥐꼬리만큼 는다고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노인 빈곤을 해결하려면 연금 외에 추가적인 논의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현재로선 60세 이상은 물론이고, 65세 이상 나이 먹은 이들도 일할 수밖에 없고, 그런데 그때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질 낮은’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정년 이야기를 하자면, 한국은 정년을 제대로 보장받는 사람들도 적다. 그러니까 비정규직에 해당하는 약 40%는 아예 그런 정년조차 없다. 정년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도는 다니는 소위 철밥통들 이야기다. 게다가 비정규직은 연금 액수도 대체로 적다. 그러니까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정년마저도 배부른 논의다. 아래 사진처럼 적어도 ‘공무원’ 정도는 되어야 모여서 정년 연장 시위라도 한다.

2024년 10월 30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이 정년연장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한국 노동구조의 복수(復讎; revenge)

연금개혁과 ‘묶음’으로 일자리 문제를 고민한다면, 일자리 수도 중요하지만 일자리 질을 높이는 게 일단은 중요하다. ‘4대보험’으로 상징되는 필수 사회보장제도가 보장되는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그래야 연금 펀드라는 곳간을 채울 수 있다. 여기에는 약점이 있긴 하다. 그렇게 ‘새로 생긴 일자리’조차도 대기업 경력이 있거나 중견기업에서 일했던 전문직 시니어들의 몫이 될 가능성은 크다. 그렇게 노동시장의 계층화(양극화)가 더 심화하고 이중의 격차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

여기서 연금의 본래 ‘목적’이 뭔지, 그 대전제가 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대전제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는 ‘일하지 않아도’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본래 개념, 본래 목적으로 보면 한국 연금은 역설적인 측면이 있다. 일하는 기간 동안 연금 기여분에 비례해서 그 비례분만큼 받는 구조이고, 한국은 기여 부분이 기본적으로 낮다.

연금 기여분이 적다는 문제와 그렇기 때문에 빈 곳간을 채워야 하는 문제, 그리고 일자리의 질은 서로 직접 연결된 문제다. 기여할 기회가 적고, 수입이 너무 낮아서 기여하기도 꺼리는 사람마저 있다. 이런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을 해소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한국적 노동 구조가 연금 제도에 ‘복수'(revenge)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비정규직은 계속 일할 수밖에 없고, 임금은 낮으며, 그래서 연금에 기여하는 비중도 작다.

경로와 경계

그런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 양극화, 계층화는 개인의 능력 차이나 노력의 차이와도 큰 상관이 없다. 비슷한 일을 해도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턱 없이 낮은 대우를 받고, 삶의 경로에서 한 번 그 비정규직 ‘트랙’에 들어서면 그 경로가 평생을 통해 유지되고, 고착하는 경향성을 띤다. 그리고 그런 경로의존성은 평생을 통해 강화한다.

그러니까 중간 정리를 하면, 한국에서 연금개혁은 연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일하면서 연금 펀드에 기여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람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 일용직들을 연금보험(혹은 고용보험)에 어떻게 포함시킬 수 있을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문제를 최우선으로 논의해야 한다. 적은 연금이나마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이 아니라 이들이기 때문이다.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에서는 고용보험의 50%를 대주지만 그런 제도적 혜택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연금 접근성이 낮아진다. 버는 돈도 적어서 그러니 연금을 받더라도 아주 적은 돈만 받는다. 그 돈으로는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그 ‘제도적 경계’ 밑이면 수급자가 되는 거고, 그 경계에서 조금이라도 위에 있다면 무조건 일해야 한다. 지금 여러 가지 안이 나온다. 현재의 제한적 개혁은 국민연금공단이 보는 관점에서는 합리적인 측면도 있겠고, 현실적인 노동시장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리고 연금 상황이 일시적으로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연금의 본래적인 목적(일하지 않아도 기본 생활의 영위가 가능한 그 목적)은 충족하기 어렵고, 올해 연금개혁으로 일해야 하는 노령층의 부피가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하는 일은 비슷해도, 정규직은 ‘개꿀’, 비정규직은 ‘독박’이다. 그리고 그 경로는 한번 정해지면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다.

재정? 공공? ‘사회적 가치’를 고민해야

윤석열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재정을 확대하고 공공일자리를 늘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희망근로식으로 해서는 임시방편이 될 뿐이다. 일 자체가 생산적이지 않고, 일자리 형식을 빌려 돈을 나눠주는 방식이다. 특별한 노하우나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

공공일자리라도 사회적인 유용성을 높이는 방식이 필요하다. 임금도 높이고, 사회적 기여도 높이는 방식이 필요하다. 생산적이라는 게 무슨 물건을 더 만들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공공일자리를 좀 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로서 고민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일자리 ‘정책’이다. 지금은 그런 게 없다.

‘공공’이라는 걸 생각하거나 고민한다고 했을 때, 그걸 정책이라고 하려면, 그 정책을 통해 우리 공동체가 그 새로 생겨난 일자리로 인해 더 나은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은 공무원 개개인은 아주 뛰어난데, ‘정책’ 차원에서는 그런 노력을 굉장히 귀찮아하는 것 같다. 아니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공공일자리 전체를 새롭게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

노인들이 자신의 체험과 노하우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게 청년과 경쟁적으로 겹치는 것도 아니다. 가령,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일을 생각해 보면, 그런 일자리를 통상 청년은 원하지 않는다. 그런 디테일한 일자리 디자인과 관리를 위해서 공무원을 증원하고, 노인에게도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자리를 늘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관계가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정책 디자인’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서로 그저 ‘돈’을 전달하는 방식일 될 뿐이다.

미래 세대를 약탈한다는 표현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너무 부당한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어느 정도는 말이 되는데, 일자리의 가치를 ‘돈’으로만 보고, 그걸 제로섬 게임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돈’에 관한 제로섬 게임으로만 연금을 생각하니 그런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방식이 자연스럽다.

물론 노인에게 질 좋은 일자리를 공급한다는 게 쉬운 문제는 아니다. 정말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일할 수밖에 없는 노인의 현실, 그런 노동시장의 구조를 인정한다고 하면, 지금 방식으로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일자리의 질을 높여서 연금 의존성을 줄여 갈 건지 그 큰 방향을 일단은 정해야 한다. 그리고 일자리에 관한 디테일한 디자인은 그다음 문제일 수 있다.

경력이 없어도, 기술도 없어도 일할 수 있는 공공근로. 그건 어쩌면 정부의 ‘귀차니즘’은 아닐까… 경력과 기술을 살리는 공공근로, 더 나아가 재교육을 통해 사회에 좀 더 가치 있는 노동을 제공하는 공공근로는 불가능한 걸까.

한국과 일본, 같은 점과 다른 점

우리나라는 이번 연금개혁 보험료율이 13%(소득대체율은 43%)인데, 일본은 현재 18% 정도다. 물론 한국은 일본만큼 초고령사회는 아니다. 초고령사회 기준은 65세 인구의 비중인데, 20%가 넘으면 초고령사회다. 일본은 현재 약 30%고, 한국은 작년(2024)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다(참고로 고령사회 7년 만에 초고령사회 진입. 편집자).

그러니 당연히 지금 상황에서는 보험료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고, 인구 구성을 고려하면 청년은 줄고 노인은 점점 더 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청년의 부담은 구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는 이주노동자도 기여를 높여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은 이민이나 이주노동자를 통한 인구 문제 해결이 적극적이지 않은 전 세계에서도 거의 둘뿐인 나라다.

이민이나 이주노동자를 통해 인구 정책을 해결하지 않는, 자국민으로만 인구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책을 펼치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뿐이다.

다만 이주노동자 숫자를 높이지 않았다는 점은 한국과 일본이 유사하지만, 일본이 한국과 아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돌봄이다. 일본은 돌봄에 관해선 ‘마을 단위’ 해법이랄까, 지역 공동체가 아주 잘 돼 있다. 행정 단위의 지자체도 아주 잘 돼 있고. 우리는 이주노동에 마스터 플랜이나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 공동체가 잘돼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역은 점점 더 해체돼 가고 있다.

노년과 청년의 갈등도 훨씬 일본보다 더 강한 것 같다. 일본은 노인들끼리 지역에서 서로서로 보살피며 산다. 그래서 청년 그룹에 부담이 덜 된 달까, 접점이 적달까 서로 부딪힐 일이 많이 없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렇다. 일본은 마을이든 지자체 단위든 공동체를 위한 섬세한 제도들이 존재한다. 그런 게 한국엔 없다. 일본은 지역정당이 활발하다. 중앙 정치에는 오히려 관심이 적지만, 지역정당과 지역정치는 여전히 활발하다. 동네의 해법이랄까, 그런 게 일본의 공동체 저력이다.

개인의 해법, 마을의 해법, 국가의 해법

한국에 그런 지역의 해법, 마을의 해법이 있을까. 개인의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개인의 문제들조차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마을의 해법’이 필요하다. 적어도 마을 단위의 공동체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물론 한국은 국가 단위 해결책을 모색하는 걸 잘한다. 정책 실험도 활발한 편이다. 하지만 그 단위가 너무 크고 그래서 그 해법의 그물이 너무 헐겁다. 결국 그래서 그 그물에서 빠져나간 개인에게 개인의 해법을 요구하는 게 한국이다. ‘각자도생’은 그런 한국적 특성을 상징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인 ‘가족’마저 해체해서 결국은 ‘국가’만 남은 게 한국이다. 그물을 치긴 했는데 그게 너무 넓게 치는 바람에 다 빠져나간다. 그물의 크기는 다른 나라보다는 클 수 있지만, 그물 하나하나의 구멍은 너무 헐겁다. 결국은 개인의 책임을 강제하고, 그 벌칙마저 크다. 국가의 헐거운 그물에 포섭∙편입되지 못하면, 평생을 ‘비정규직 트랙’ 같은 차별적이고 경로의존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문화나 관습이나 제도가 모두 패자에게는 혹독하고, 패자부활전이나 두 번째 기회 같은 건 드물다.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측면으로 봐도 ‘패자부활전’이나 ‘두 번째 기회’와 같은 것에 인색하다. 개개인으로서는 따뜻하지만 집단으로는 냉혹하고 잔인하다. 사진은 고(故) 이선균.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마을의 삶’을 배제한 정책, 세계화

영국의 고민도 비슷하다. 우리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세계화’에 관해 다시 복습해 보자.

  1. 세계화의 황혼, 포퓰리즘
  2. 세계화의 열매, 대도시 엘리트
  3. 세계화를 견디며, 스위스 직업 훈련
  4. 세계화의 딜레마, 탈출을 꿈꾸는 청년

사람의 일자리, 그 사람의 삶, 구체적인 지역과 위치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쉽게 움직이기 힘들다. 거기에 삶이 ‘묶여’ 있고, 그 조건들 위에서 사람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법이라는 게 그 지역, 위치에 묶여 있는 사람과 삶을 고려하지 않으면, 그런 노동 정책은 실패한다는 게 폴 콜리어의 생각이다.

그런 실패한 정책을 전 세계적인 단위로 확대한 게 세계화고, 미국 민주당이라는 게 콜리어의 비판이다. 그리고 그런 정책의 실패가 포퓰리즘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을의 삶’을 배제한 거시 정책이라는 건, 결국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소외와 고립을 낳고 결국은 증오를 낳는다.

가령, 영국에서 동네 ‘펍'(선술집)에서 맥주 마시는 노동자가 뉴스를 보는데, 갑자기 트럼프 관세 때문에 미국으로 공장을 옮겨야 한다고 하고 우리 마을에서 공장을 빼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매년 열었던 축제를 내년에 열 수 있을까 맥주 마시던 노동자는 걱정하기 시작한다. 가정이지만, 트럼프가 그런 측면에서는 미국에서 인기가 아주 좋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했던 전미자동차노조(UAW, 진보적인, 우리나라로 치면 금속노조의 위상을 가지는 미국 최대 자동차 노조)가 트럼프를 지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미시간주 웨인 카운티에서 전미자동차노조(UAW) 피켓 행렬에 합류해 연대를 표명한 바이든(당시 미국 대통령). 2023년 9월 26일. 백악관 유튜브 캡처. 그 전미자동자노조(UAW)가 2025년 3월, 트럼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마을은 사라지고 광장만 남았다

지자체는 행정 단위다. 사회적 관계로 형성 숙성된 개인들의 공동체가 그 행정체와 ‘묶여야’ 비로소 시너지가 난다. 한국은 행정 단위는 있지만, 사회적 관계의 공동체는 이미 오래전에 붕괴(산업화)했고, 최근에는 그런 지역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많지만, 쉽지 않은 것 같다.

우선 수도권 집중이 너무 심하다. 제도적인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문화와 정서가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적 정치적 공동체라는 게 마을 공동체가 다 무너지고 나니 ‘광장’이 그 공동체 역할을 대신한다. 그 광장은 마을의 작고 정겨운 광장이 아니라 더 크고 광활한 대도시의 광장이다.

물론 광장에는 좋은 의미도 많지만, 광장이 너무 커지고 집중화한 측면이 있다. 광장의 핵심은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 의해 나를 규정한다는 데 있다. 중앙집중화한 광장에서 삶의 다양성이나 지역의 문화는 표현되기 힘들다. 한국의 정당도 일종의 광장이다. 결국 내부적으로 대화를 통해 해결되지 않으면 광장으로 나온다.

그래서 모든 게 광장이다. 거대한 도시의 광장, 집중화된 광장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강력한 힘을 주지만, 작은 마을의 광장과는 의미가 다르다. 마을의 작은 광장에는 거기 사는 사람의 삶이 있고, 마을의 고유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도시의 광장, 중앙집권화된 광장은, 거기에도 물론 긍정적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그 광장을 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텅 빈 광장을 떠나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곳은 구체적 삶이고, 그런 삶이 담긴 마을이다. 그런데 그런 마을마저 이미 무너져 있다.

관련 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