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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과거에는 ‘소장’ 개념에서 ‘저장’으로 바뀌더니 ‘소모’되기 시작했다.” (가수 이승환)

사람이라는 게 과거로부터 축적된 존재다. 달리 표현하면 경로 의존적 존재다.

인간은 현재만을 살 수 있지만, 그 현재는 과거에 빚지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인식 능력을 결정적으로 구별하는 차이는 패턴 인식 능력이다. 그 패턴이라는 것 역시 달리 표현하면, 과거의 시행착오를 통해 규칙과 문법, 일상어로 표현하면, 습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빌려온 존재다.

현재만 소비하는 인간의 통조림화

페이스북이든 트위터든 ‘과거’를 지워버리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 설계는 아주 의도적이다. 특히 페이스북은 끊임없이 ‘현재’ 혹은 ‘아주 가까운 과거’만을 소비하게 한다.

얼마 전 김정철 얼리어답터 편집장과 페이스북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김 편집장은 페이스북의 이런 속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이라는 시대 정신을 드러낸 것으로 보더라.

Maria Artigas, CC BY ND https://flic.kr/p/4jPFYW
Maria Artigas, CC BY ND

하지만 나는 김 편집장의 견해(해석)에 아주 공감하면서도 정반대로 해석하는 편이다. 페이스북은 현재만을 소비하게 함으로써 과거로부터 빌려온 존재로서의 인간을 조금씩 지워버린다. 인간의 과거는 페이스북의 ‘규격화한’ 컨텐츠 UI를 통해 수치화한 데이터로 변환힌다. 페이스북은 개성 혹은 실존이라는 인간의 속성을 지우는 대신에 인간의 통조림화(계량화)에 집중한다.

Damien du Toit, CC BY https://flic.kr/p/Muhk
Damien du Toit, CC BY

‘좋아요’ 혹은 ‘아무것도 아님’

(문자) 텍스트에 비해 시각적 요소가 강조되는 인물 사진과 음식 사진 그리고 여자들의 셀카와 피키캐스트, 세웃동으로 대표되는 정체불명 웃동, 대체로 되도 않는 선문답식의 멋스러운 처세주의와 지적 허영, 비슷비슷한 신변잡기, 시공간만을 달리하며 터지는 절망스런 뉴스들은 페이스북의 지배적인 정서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좋아요’만 있는 세계에서 죽음도 슬픔도 기쁨도 기괴함도 아이러니도 모두 ‘좋아요(like)’ 또는 ‘아무것도 아님(nothing)’의 이분법적 세계 속에 가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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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이 설계하는 인간 

대신 페이스북은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취향과 욕망을 프로파일링함으로써 상품 소비 도구로서의 인간을 이상적으로 설계한다. 김 편집장은 전 세계를 망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시스템 안에서 펼쳐지는 ‘신기원’, 그리고 그 서로 다른 수억 개의 이야기들이 진행하는 ‘전인미답’의 경지를 페이스북이 개척했다고 평가한다. 물론 정당한 평가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동시에 전 세계를 하나의 획일적인 디자인 속에 가둬버렸다.

Duncan Hull, CC BY https://flic.kr/p/91WV5b
Duncan Hull, CC BY

더불어 인간의 오프라인과 경쟁할 수 있는 규모의 웹/모바일 제국을 만들어 낸 페이스북은 한마디로 인간이 오프라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페이스북 속에서 함축한다. 그럼으로써 페이스북은 오프라인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행위들은 모두 가능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요구받는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여기에 가장 중요한 정책, 다른 모든 행위들은 가능하더라도 ‘상행위’와 ‘광고’는 ‘허락 받고 할 것’이라는 원칙과 정책으로 답한다.

이제 프로슈머는 없다 

페이스북 속에 있는 인간은 더는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소비자)가 아니다.

'프로슈머'라는 표현은 [제3의 물결](1980)에 처음 등장한다. [부의 미래](2006)에서 앨빈 토플러는 '월드 와이드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와 같은 자발적인 창조자/참여자들이 프로슈머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면서 이들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릴 것으로 봤다.
‘프로슈머’라는 표현은 [제3의 물결](1980)에 처음 등장한다. [부의 미래](2006)에서 앨빈 토플러는 ‘월드 와이드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와 같은 자발적인 창조자/참여자들을 프로슈머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면서 이들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릴 것으로 봤다.
프로슈머를 가능하게 했던 웹이라는 공유지는 이제 갇힌 웹/모바일/앱의 대륙인 페이스북으로 수렴한다. 페이스북에서 인간은 무한대에 가깝게 복잡해지는 데이터 더미 속에서 좀 더 정교하게 프로파일링되는 광고 타킷이며 잠재 소비자다. 페이스북을 통해 생산되는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은 상품 소비의 촉진을 위해 도구화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공감과 토론과 대립과 대화는 ‘좋아요’인가 아닌가로 귀결한다. 이건 마치 장사꾼이 우리에게 ‘살거요, 말거요’라고 물어보는 것 같다. 이렇게 명료한 세계를 본 적 있는가.

페이스북
페이스북은 기본적으로 ‘좋아요’ 혹은 ‘아무것도 아님’의 세계다. 마치 ‘살거요, 말거요’라고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 팔리지 않는 이용자는 ‘아무것도 아님’의 세계 속으로 남겨 진다. 물론 ‘좋아요’로 팔린 물건(인간)도 쉽게 지워지긴 마찬가지지만.

소모만 유효한 단계 

처음 이승환이 했다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소장, 저장, 소모의 3단계에서 소모만 유효한 단계로 돌입한 음악과 마찬가지로 페이스북에서 인간의 삶(온라인 실존/모바일 실존)은 현재만을 끊임없이 소비함으로써 원본 없는 복제의 욕망(마치 매일 올라오는 야식이나 매일 올라오는 그녀의 비슷비슷한 셀카를 관음하는 것처럼), 인간을 지워버리는 ‘소모’를 무한 확장하고 구조화한다.

이 세계는 과거를 성찰할 수 없는 세계(검색을 거의 지원하지 않는 세계)이고, 오직 현재만이 의미있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 현재는 오직 어떤 것이 너의 “좋아요”인지를 묻는다. 페이스북은 점점 더 수동적인 관음적 쾌락으로 길들여진 이용자에게 끊임없이 ‘좋아요’만 질문하는, ‘즐거운 취조’의 세계, 끔찍하게 즐거운 지옥, 그 자체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상 최초로 (…중략…) 공유, 균등, 안정이 실현된 것입니다.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2)(이덕형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1998), p 13 중에서

James, Brave new world, CC BY https://flic.kr/p/8QapU1
James, Brave new world, CC BY

페이스북은 놀랍게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 지구적인 차원의 ‘공유, 균등, 안정’을 실현할 가능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용자는 웹과 모바일을 망라한, 페이스북이라는 ‘멋진 신세계’ 속에서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실시간으로 전 세계 모든 ‘페친’들과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있다는 있다는 착각을 끊임없이 학습 받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어떤 존재의 기쁨과 슬픔과 웃음과 눈물을 ‘좋아요’ 또는 ‘아무 것도 아님’으로 판정할 수 있다는 신적인 우월감, 심판자로서의 만족감을 내면화한다.

페이스북 세계의 ‘진짜 규칙’ 

하지만 보라. 페이스북 세계의 ‘진짜 규칙’은 당신에게 어떤 질문도 어떤 승낙도 구하지 않는다. UI와 디자인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뀐다.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는 페이스북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길들여 진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변덕스런 페이스북의 규칙을 쫓아서 페이스북을 학습하는 충성스런 신하, 착한 백성일 뿐이다.

근사한 식당의 폼나는 음식과 해외 여행에서 만났던 멋진 거리 풍경, 새침하거나 귀여운 그녀들의 셀카를 끊임없이 관음하고, 또 욕망하면서 언제 바뀔지 모르는 페이스북에 ‘스마트하게’ 길들여지는 것이 세칭 ‘스마트 문명’의 진실이다.

그러는 사이 당신, 아니 우리는 진짜 인간의 대화, 그 관계의 기억을 서서히 잊어버린다. 인간의 목소리를 잊는다.

Matthias Ripp, CC BY https://flic.kr/p/opGxp5
Matthias Ripp, CC BY

귀향의 축제를 위하여 

나라고 다를까.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당신에게 그리고 이 멋진 신세계에서 당분간은 빠져나올 수 없는 나에게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심으로 고하노니, 현재를 마음껏 즐겨라!

“말에는 그 최초의 말도 그 최후의 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 모든 의미들은 언젠가 찬란한 귀향의 축제를 맞을 것이다.”(미하일 바흐친)

하지만 언젠가 맞이할 그 모든 의미의 찬란한 귀향, 그  축제를 위해 조금 더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진짜 인간의 말, 그 목소리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페이스북이 없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걸 상기해볼 필요도 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친구에게, 멀리 있는 부모님께 페북이나 카톡이 아닌 전화를 건네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당신이 더 오래 기억해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도 좋으리라. 실천은 아주 작은 일로 시작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늘 그랬듯,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르놀트 횔링크스)

Ubi nihil vales, ibi nihil velis. (Arnold Geulin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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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1. 으잉
    페이스북 같은 SNS 을 하지 않으니 몰랐는데
    본인의 글이나 지인들의 이전 글을 찾기 힘든 건가요?

    컴퓨터 쓰는 이유 중 가장 매력적인 게 연역적 검색(기억력과 감정 보완)이라서 믿기 힘드네요… 이걸 빼면 불편한데 어찌들 감당하시는 지 대단합니다

    아무튼 현재에 집중하라는 의미는 좁게 해석할 필요는 없겠지요
    현재에 집중하면서 곧 과거가 될 오늘을 더 충실히 살 수 있고, 다시 되돌아보기도 쉽죠~ 흐릿하게 보내는 것보다 집중하며 보내면 같은 시간이라도 느끼는 강도가 다르다고 느낍니다.
    또한 현재에 집중하려면 결국 앞으로의 일을 예견할 수 밖에 없고, 놓친 생생한 것들과 예상했는데 역시나 생생한 과업에서 치열하게 생활해야 하는 건 똑같겠죠
    단순히 극히 짧은 시간에 속하는 현재만 보라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본인의 글이나 지인의 글을 확인하기 힘들면 미리 대비를 해야겠네요. 쓴 글은 미리블로그에 작성하고, 지인이나 관심있는 글들도 따로 체크해놓고… … 모바일 인터넷 환경에서 쉽게 될런지 모르겠네요. 데스크 환경에서는 나름 시간을 비워두고 정성어린 선택과 섬세한 조작이 필요하니 귀찮음도 견뎌야 하네요 ^ -^

  2. 페이스북의 검색창에 “궁금한 친구나 장소를 검색해보세요”라고 써 있어도 그게 그냥 소셜서비스니까…..하고 말았는데, 정말 키워드로는 검색이 안되는 걸 알고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쓴 말도 검색이 안되고요. 심지어 자기가 쓴 글도 검색이 안됩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찾아야 하죠.

    트위터도 검색은 정말 단순하고요. 뭔가 내부에서 처리하는 게 있는지 검색이 안될때가 많습니다.

    소모하는 사회 = 모바일 사회…. 인 것 같습니다.

  3. 정말 잘 읽었습니다…하지만 기사 마지막에 저도 모르게 페북 좋아요를 누르며 아이러니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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