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영국은 어떻게 ‘공통의 휴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영국 크리스마스 규제가 한국 새벽배송에 던지는 질문 (조현재/데이터 분석가) (⏳5분)
영국에서 유학 중인 필자에게 가장 낯선 장면 중 하나는 크리스마스 기간에 ‘도시가 멈춘다’는 사실이다. 학교 커뮤니티에는 마트가 문을 닫으니 미리 식료품을 준비하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명절에도 극장과 마트가 문을 열고, 새벽배송이 멈추지 않는 한국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가게와 식당, 심지어 크리스마스 당일엔 대중교통까지 멈추는 영국의 연말 풍경은 놀라움을 넘어 이상하게까지 느껴졌다.

성탄절엔 도시 멈추는 영국 vs. 명절에도 24시간 한국
영국에 거주하면서, 이곳 사람들은 한국보다 더 여유롭고 덜 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노동시간(Hours worked) 지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취업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한국이 1872시간인데 반해 영국은 1542시간에 그친다. OECD 평균은 1742시간이다.
이 차이를 단순히 문화나 규제의 차이로 설명하다보면 한계가 뚜렷하다. 영국의 낮은 노동시간은 주당 근로시간 상한, 법정 휴가, 규제 등 여러 제도가 결합된 결과이지만, 그 이면에는 구성원들이 같은 시간에 쉬지 못한다면 누구도 제대로 쉬기 어렵다는 공통의 감각이 있다. 가족이 함께하는 연말에도 누군가는 계속 일해야 한다면, 그 휴식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이자 공동체의 문제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셈이다.
최근 한국에서 새벽배송을 둘러싼 논쟁이 심화되고 있다. 대형마트 강제 휴무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해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도시가 멈추는 수준의 ‘공동의 휴식’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공통의 휴식’이라는 감각
영국의 일요일 영업 논쟁은 공동체의 리듬을 어떻게 제도화할지에 대한 긴 실험이었다. 종교의 영향이 강한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요일이 쉬는 날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는 당위적인 선언일 뿐, 영국에서도 노동시간이 계속 늘어나던 시기가 있었다. 1950년, 영국은 상점법(Shops Act 1950)을 통해 일요일 영업을 제한했지만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1986년 대처 정부 시기에는 오히려 일요일 거래 제한을 폐지하고, 휴일 노동을 자유화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해당 개정안은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 종교계 등 각계각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90년대, 영국 사회에서는 일요일 영업 제한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이때 제시된 중요한 논거 중 하나는 구성원들이 ‘같은 시간’에 쉬어야 가족과 지역 공동체가 실제로 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이 논쟁의 핵심은 특정 산업군 노동자에게 휴식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리듬(동시성)을 지키는 문제로 간주되었다.

물론 공동의 휴식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일을 해야만 한다. 특히 공공 서비스가 그렇다. 영국에서도 병원, 치안 등의 핵심 서비스는 휴일에도 계속 운영되고, 소형 매장도 명시적인 규제 대상에서는 제외된다. 따라서 당시 논의는 일요일 영업에 대한 허용 또는 금지나 모두가 휴식해야 된다는 규칙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다수가 공유하는 여가 시간에 대해 침범할 수 없는 최소한을 규정하고자 했다.
기업·노동조합·종교계·소비자 단체 간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자, 각 진영은 저마다의 해법과 모델을 제시하며 맞섰다. 정부는 단일 해법을 밀어붙이기보다 전면 규제·전면 자유화·부분 자유화라는 3가지 선택지를 한 법안에 담아 의회가 선택하도록 했다. 의회도 당론투표가 아닌 자유투표를 통해 쟁점을 좁혀 갔다. 최종적으로 부분 자유화가 채택되면서 1994년 일요일 거래법(Sunday Trading Act 1994)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280㎡를 초과하는 대형 매장에 대해 일요일 10시~18시 사이 연속 6시간에 한해 영업을 허가했다. 즉, “다 같이 쉰다”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환경에서, 영국(잉글랜드·웨일즈) 사회는 구성원 다수의 공유 시간이 무제한으로 잠식되지 않도록 일요일 저녁 무렵이라는 최소한의 공통 시간대를 만들고 그 시간만큼은 지켜내는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했던 것이다.
주목할 점은 영국이 일요일 영업을 규제하면서 단순히 영업 금지나 휴식권 보장뿐만 아니라, 동시에 노동자가 일요일 근무를 거부할 권리 및 이에 따른 불이익 금지를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장치는 사회가 동시성을 지킴으로써 새롭게 발생하는 비용이 노동자에게만 전가되지 않도록 선택권을 보장하는 목적을 지닌다.
크리스마스는 이 논리가 매우 강력하게 작동한 사례다. 일요일 규제로 ‘공동의 휴식’에 대한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졌음에도, 2000년대 초 경쟁이 심해지자 일부 대형 매장들이 크리스마스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2004년, 잉글랜드·웨일즈는 크리스마스 데이(거래)법(Christmas Day (Trading) Act 2004)을 통해 크리스마스 당일 대형 매장 개점을 금지했고, 그 배경에는 노동조합의 문제 제기와 여론의 우호적인 반응, 정부의 지지가 있었다.
영국의 휴일 논쟁이 던진 질문
한국의 새벽배송과 대형마트 강제 휴무 논쟁을 살펴보면, 새로운 비즈니스가 만들어 놓은 구조를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몹시 어렵다는 점이 드러난다. 소비자들은 편의성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구조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에 기반해 운영되는 여러 산업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사례를 참고할 때, 새벽배송과 대형마트 휴일 영업 문제는 특정 비즈니스에 대한 금지·허용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구성원에게 보장할 최소한의 휴식이 어느 정도인지, 공동체가 동의하는 시간의 규칙을 먼저 설계하고 이에 대한 합의를 모으는 것이 우선이다. 이 최소선이 설정되어야 비로소 그에 따른 비용을 산정할 수 있고, 그 비용을 소비자·기업·노동자·개인사업자 등 주요 이해관계자가 얼마나 분담할 것인지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간의 규칙
시간의 규칙이 만들어지면 누군가는 불편을 겪을 것이다.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자영업자, 아이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는 원하는 시간에 배송을 받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은 소득이 줄어들 수 있고, 기업은 수익이 줄어들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새로운 규칙으로 발생하는 비용이 특정 집단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도 이 점을 감안했고, 그 결과 휴일 노동에 대한 긴 교착 상태를 해결하고, 실효성 있는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새벽배송과 대형마트 휴무 논의는 시간의 규칙을 합의하기 위한 유의미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영국 사회의 선례처럼 ‘시간의 가치가 다르다’는 감각과 더불어 공동체가 함께 비우는 시간, 노동자가 일하기 위험한 시간, 소비자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시간이 있다는 점을 명확한 제도와 관행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이재명 정부에서도 주요 의제로 제시되었다. 모쪼록 새해에는 새벽배송과 대형마트 휴무를 둘러싼 논쟁이 허용 대 금지, 사용자 편의 대 노동자 건강을 넘어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시간을 어떤 비용으로 운영할지에 대해 더 깊이 논의할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