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12.] 미디어를 통해 반영·증폭·구성되는 문제적 현상과 인식을 ‘캡콜드’ 김낙호 교수가 분석합니다. 이번 케이스는 ‘미국 대선의 이미지 정치와 프레임 전쟁’ (약 20분).
인트로: 이미지와 프레임
이제는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게이 결혼을 지지한다. 19개 주에서는 게이 결혼이 합법이다. 그러나 나머지 31개 주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게이 결혼은 성경에 위배된다, 결혼의 정의 자체를 위협한다, 아이들을 동성애로 유인할 것이다, 게이 결혼은 섹스가 전부다 등의 보수적 프레임은 바뀌지 않았다. 최근의 보수주의자들은 ‘섹스’라는 단어와 ‘호모’라는 비어가 들어간 ‘호모 섹슈얼(homosexual)’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쓴다. 그리하여 동성 결혼을 호모섹슈얼 결혼이라고 한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는 사랑과 헌신, 가정과 공동체를 상대로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절대다수가 게이 결혼을 수용하고 있다. 취임 직전 오바마 대통령은 게이 결혼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진화하고 있다”며 해석을 열어놓았다. 이제 그는 ‘진화했다.’ 진화의 은유는 변화하는 정치적 맥락에 관한 적응을 암시한다.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10장 ‘결혼’은 수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중에서, 영문 2014, 한글 2015.
이미지 정치의 시대다. 프레임 전쟁의 총성이 점점 더 크게 울린다.
학급 반장이나 동네 통반장을 뽑는 ‘작은 선거’라면, 나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는 후보를 뽑는 ‘기능적’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대선 같은 ‘큰 선거’에서는 유권자가 자기 정체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후보자에게 반영하는 ‘표현적’ 성격이 강해진다. 그래서 그렇게 큰 선거에서는 내 정체성을 반영한 후보의 이미지 혹은 내 철학이 담긴 프레임이 중요하다. 나의 정체성과 철학을 반영하고, 상대방의 본질을 꿰뚫는 이미지와 프레임이 필요한 것이다.
인지언어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조지 레이코프는 정치 캠페인에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앞서 인용한 동성결혼에 관한 지적을 복기해 보자. 결혼은 단순히 일차원적 성적 결합을 넘어 사랑과 헌신, 공동체를 담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 시대의 진화 혹은 진보를 의미한다. 공화당의 가짜 프레임을 깨뜨리려면 진짜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한다. 레이코프는 그 진짜 프레임이 ‘사랑과 헌신, 가정과 공동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진화한다'(오바마)는 정치적 은유를 예시한다.
미국 대선이 점입가경이다. ‘호호 할아버지’ 바이든은 토론에서 콜록거리고, 트럼프는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 ‘역사에 길이 남는 사진’을 남겼다.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민주당 진영은 ‘바이든 아웃’을 외치고, 그 대타로 카멀라 해리스가 등장했다. 이제 해리스가 트럼프와 맞붙는다. 그야말로 전쟁이 시작됐다. 그리고 그 이미지 정치의 프레임 전쟁을 뒤흔드는 단어가, 늘 그렇듯, 우연히 출현했다.
‘위어드'(weird)
이상한, 기묘한, 기괴한, 섬뜩한
‘위어드’는 어떻게 2024 미국 대선을 뒤흔드는 단어가 됐을까. 캡콜드(김낙호 교수, 드렉셀대학교 커뮤니케이션과)에게 미국 대선의 이미지 정치와 프레임 전쟁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단어 ‘위어드’가 출현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함의를 물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12]
이미지와 프레임:
‘위어드’는 어떻게 2024 미 대선 판도를 흔들고 있나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 이 글은 미국 기준 2024년 8월 5일 오전에 있었던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 가독성을 고려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으로 맥락화하고, 김낙호 교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편집자)
충격의 2016년, 복원의 2020년
1960년 9월 26일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건 이미지와 캐릭터다. 정책 차이는 물론 중요하지만 말이다. 1960년 9월 26일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이 맞붙은 역사적인 TV 토론이 있었다. 그리고 그 ‘TV’ 토론은 케네디의 대선 승리를 견인하는 결정적 순간으로 역사에 남았다.
2016년, 파괴왕 트럼프 vs. 엘리트 힐러리
2016년의 충격을 다시 떠올려 보자. 트럼프가 대선에 나왔을 때 모두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이겼다. 신자유주의 강화 vs. 복지국가 강화, 보수 vs. 리버럴이라는 이념과 노선 차이보다 기성 권위를 파괴하는 파괴왕 트럼프 vs. 적폐 정치인의 이미지를 얻은 정치인 힐러리가 대비됐다. 인터넷이 완숙기에 접어들고, 모바일과 결합한 소셜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이미지 정치의 영향력은 더 급속하게 커졌다.
미디어적 관점에서는 두 가지가 힐러리에게 악재가 됐다.
우선, TV 스타 트럼프 vs. 기성 정치인 힐러리 혹은 이단자 트럼프 vs. 원숙한 정치인 힐러리라는 게 주류 언론이 바라보는 프레임의 방향성이었다. 하지만 역동적인 온라인과 모바일 소셜 미디어에서는 트럼프와 힐러리는 소위 ‘밈’(meme: 전염성이 강한 풍자적 모방, 그런 이미지나 동영상 혹은 그런 유행)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이미지의 변주를 낳고 있었다. 그리고 권위 파괴왕 트럼프 vs. 구태 엘리트 힐러리의 구도가 형성됐다.
또 하나, 민주당 당내 경선 과정에서 버니 샌더스의 돌풍도 힐러리를 더 적폐 정치인 이미지로 굳어지게 했다. 샌더스는 개혁적인 사회민주주의를 과감하게 표방했고, 힐러리는 경선에서 공격당하는 과정에서 그에 대비되는 권위적 구체제와 안락하고 모든 것을 누리는 엘리트 이미지만 강화됐다. 밈을 통해 이런 이미지는 확대재생산하고 고착되었다.
트럼프의 기적, 왜 2020년에는 반복되지 않았나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이미 대통령이었다. 더는 권위를 전복하는 파괴왕이 아니었다. 주류 언론은 기성 대통령 트럼프 vs. 옛날 방식 대통령을 복원하려는 바이든이라는 대결 구도를 만들었고, 그런 프레임으로 2020년 대선을 조명했다.
한편, 온라인 여론과 소셜 미디어의 밈 층위에서는, 트럼프가 스스로 온라인에 뿌리는 여성 차별과 이민자 차별에 관한 개별 발언들이 분열과 갈등의 이미지를 증폭했다. 반면에 이것도 미국이고, 저것도 미국이라는 바이든은 마치 호호 할아버지처럼 미국이 원래 가진 포용과 통합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장착했다. 트럼프의 막 나가는 인식에 팬들이야 열광했지만 그 이상으로 반대하는 이들이 힘을 냈고, 결국 바이든이 이겼다.
2024년, 바이든 vs. 트럼프의 프레임 대결
주류 언론의 시각은 4년 전보다 더 노약해진 ‘호호 할배’ 바이든 vs. 강한 트럼프였다. 민주당은 이런 프레이밍에서 벗어나야 했다. 우선 그간 법정에 올라간 사건들을 토대로 ‘범죄자’ 트럼프를 강조했다. 그리고 노약자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트럼프 쪽의 ‘음모론 배후 공격'(브랜든)을 역이용해서 ‘다크 브랜든’ 밈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다크 브랜든 이미지만으로는 쇠약한 노인 이미지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첫 대선 토론(2024.06.28.)에서 바이든은 트럼프에 이미지 차원에서 완패했다.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이주노동 문제와 낙태 이슈에서도 제대로 트럼프의 공격을 받아치지 못했다. 말은 어눌했고, 쇠약한 노인 이미지만 굳어졌다. 주류 언론에서도 바이든을 후보에서 교체하지 못하면 민주당의 대선은 물 건너갔다고 말했다. 특히 뉴욕타임스가 이례적일 정도로 공격적으로 기사와 칼럼들을 총동원해 바이든 사퇴와 후보 교체를 주장했다. 낙선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거기에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2024.07.13)이 터졌다. 사건의 동기는 금세 밝혀지지 않는 바람에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현장에서 사살당한 암살 미수범이 공화당원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현장의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상황과 천운으로 죽음을 피한 트럼프의 습관 따위가 화제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현장에서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 쥔 트럼프, 그 이미지가 현장에 있었던 AP 선임기자의 카메라에 의해 역사적인 사진으로 남았다. 그 사진은 미학적으로는 훌륭한 사진이다. 하지만 포토 저널리즘의 차원에서 비윤리적이다. 이런 내 지적에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지만, 트럼프 암살 미수 사건의 성조기 사진은 상징 조작에 가깝다는 게 내 해석이다(아래 박스 기사 참조).
굳히기 JD 밴스! 그런데 이게 웬걸!!
성조기 사진으로 대선은 이미 끝났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트럼프 캠프는 여유가 생겼다. 그런 여유 속에서 ‘굳히기’로 선택한 러닝메이트가 JD 밴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한다.
막간 토론: 트럼프의 성조기 사진에 관하여
⒈ 미학적으로는 훌륭하다. 하지만 포토저널리즘 윤리에는 반한다.
미학적으로 훌륭하다. 사진에 담긴 이야기도 풍부하다.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급박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사진을 찍은 AP 선임기자 에번 부치의 용기에도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포토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그 사진이 말하는 진짜 스토리는 무엇인가? 왜 나는 그 사진을 선전 선동이라고 말하고 있나.
⒉ 현장의 진실? 트럼프의 용기가 아니라 공포와 혼란이 현장의 진실이다.
실제 일어난 사건은 테러범이 정치인을 암살하려고 했고, 그 총알이 우연히 비껴간 것이다. 현장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공포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혼란 그 자체다. 그걸 명명백백하게 증명하는 현장 동영상이 있다. 해석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다. 현장의 진짜 사실은 트럼프의 영웅적인 용기가 아니라 공포와 혼란인 것이다.
⒊ 현장에서 보여준 트럼프의 ‘용기’도 사실이긴 하지 않나.
트럼프가 현장에서 잠깐 일어나 주먹을 쥔 건 사실이다.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포토제닉한 사진을 스스로 연출했다. 이것이 연출인 이유는 위 현장의 진실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면 넉넉하게 알 수 있다. 트럼프가 성조기를 배경으로 주먹은 쥔 그 순간 트럼프는 국가를 지킨 것도 아니고, 군중에게 비폭력을 독려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안전요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몇 초 동안 튀어 올라서 애국 영웅의 이미지를 스스로 연출한 것이다.
⒋ 에번 부치가 찍은 사진’들’
트럼프의 역사적인 사진을 찍은 기자 에번 부치에게 어떤 특정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자는 그 현장에 있었고, 전체적인 현장의 진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 가운데 현장의 진실에 가장 부합하는 사진, 그러니까 공포와 혼란을 보여주는 사진을 선택하는 대신에, 드라마틱하고 멋있는 사진을 골랐다. 사진 미학이 아니라 포토 저널리즘 윤리로 봤을 때 안 좋은 선택이다. 물론 여기에는 데스크의 편집권 같은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⒌ 나라면 어떤 사진을 골랐을까.
나라면 현장의 진실에 가장 부합하는 사진을 골랐을 거다. 그건 공포스럽고, 혼란하며 트럼프를 포함해 많은 이들의 겁먹은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트럼프를 약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게 역사적인 현장의 진실이기 때문이다. 정치 폭력을 계속 사실상 독려해 온 정치인의 집회에서 암살 시도라는 최악의 정치 폭력이 발생한 그 얄궂은 현실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이기 때문이다.
⒍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브레송은 사진을 예술의 경지로 올렸다. 기다림의 미학을 사진으로 형상화했다.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이라는 개념으로 트럼프 암살 미수 사진을 다시 해석해 보자. 보도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결정적인 순간은 어떤 순간인가. 그건 예외적으로 현장에서 연출된 누군가의 영웅적이고 폭발하는 드라마적 이미지인가. 아니면 그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적 진실인가. 미학이 아니라 진실이다. 드라마가 아니라 진실이다. 그걸 택해야 한다.
⒎ 기자나 편집자에게도 어려운 선택인 건 안다. 하지만…
그 사진을 찍은 순간, 퓰리처상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거다. 기자로서도 편집자로서도 트럼프의 성조기 사진 대신 현장의 진실에 좀 더 부합하지만, 덜 드라마틱한 사진을 선택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미학이나 드라마 대신에 진실을 선택해야 했다. 포토 저널리즘으로선 높게 평가받아선 안 되기 때문에, 좋은 저널리즘을 기리는 상인 퓰리처상은 받지 않았으면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회고: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2016) 왜 실패했을까?
트럼프 등장 이후 주류 언론의 대응
트럼프 등장 이후 소위 주류 언론도 현실의 모순을 제대로 조명하는 더 나아간 보도 윤리랄까 방법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가령, 트럼프식의 여성 차별, 인종 차별을 이것은 미소지니(Misogyny: 여성혐오)고, 레이시즘(인종차별)이라고 직접적으로 대응하고 꼭 짚어 표현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인권적 차원에서 문제라거나 인종적 측면에서 문제라는 식으로 에둘러 언급했다.
왜 그랬을까? ‘낙인’ 찍기를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중함일까, 아니면 비겁함일까. 아무튼 그런 경향이 언론에 팽배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명백한 여성 차별과 인종차별 현상과 발언이 있었음에도 거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런 언론의 ‘고상한’ 대응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것에 이르렀다.
미셸 오바마의 ‘품위 있게’ 전략은 왜 실패했을까
낙인찍기를 회피하는 주류 언론의 태도는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펼친 미셸 오바마의 유명한 연설 ‘저들이 저열하게 가면,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를 연상시킨다. 맞는 말이긴 한데, 효과적이진 못했다. 방법론적으로 실패했다.
트럼프는 흑색선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령, 트럼프의 정치적 수사는 최근 이런 것이 있다. ‘이민자들이 와서 흑인용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이민자 차별에 더해서, 흑인들은 저임금 저숙련 일이나 하는 종족이라는 함의까지 담긴 것이다. 이런 차별적 선전, 저열한 선동에 고상하고 품위 있게 대응하는 방법은 뭘까. 나도 알고 싶다. 트럼프에 대응하는 방식은 대체로 저런 더러운 선동에는 끼어들지 않는다는 수동적 소극적 방식으로 수렴했다.
결국, 미국의 소위 ‘리버럴’은 트럼프와 함께 똥 밭에서 함께 뒹굴 수 없다, 이전투구(진흙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하지 않겠다는 고상한 방식으로 갔다. 한마디로 똥(트럼프)이 더럽다고 피했다. 앞서 상대방에게 낙인찍는 행위를 회피하려 하는 주류 언론의 태도를 지적했는데, 대표적으로 뉴욕타임스 방식이 그랬다.
비정상의 정상화
그래서 역설적으로 트럼프의 저열한 이미지 프레이밍이 마치 정상적이고 평범하게 사회에서 논의해볼만한 것으로 인정되는 쪽으로 ‘현실화’하고 ‘정상화’했다. 트럼프가 주장하는 온갖 비정상적인 것들이 일상적인 시민성을 획득한 것이다. 그래서 ‘고상하게’라는 방법론이 지속적으로 망한 거다. 말만 놓고 보면 이상적이고 도덕적으로도 옳지만, 결국 이런 사정들 때문에 실패한 거다. 지금도 말 자체의 울림이야 강력하게 남아서, 바이든이 낙마하자 그 대안으로 미셸 오바마가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성과로서는 허무했다.
해리스, 민주당의 희망으로 솟아오르다
다시 2024년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서, 바이든 낙마 이후 뉴욕타임스가 총대를 매고 강하게 푸시한 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까 해리스가 압도적으로 민주당 후보로서 대선 도전권을 획득했다. 민주당의 영향력 있는 ‘빅 네임’들이 24시간, 48시간 안에 해리스 지지를 선언했다. 굉장히 빠르게 민주당은 바이든 낙마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해리스 중심으로 단합했다.
해리스 중심 단합에 성공한 가장 큰 요인은 뭘까. 우선 해리스의 이미지다. 그동안 트럼프에게 수세에 몰린 바이든과는 여러모로 정반대 이미지였다. 젊고, 도전적이며, 진취적이고, 인도계 자메이카계 혼혈인 다인종 여성. 그리고 민주당 내 인사들과 관계를 친근하게 잘 관리했다고 알려졌다. 그렇게 해리스는 순식간에 대권 후보가 자격을 잡았고, 기세를 올렸다.
비호감 부통령 시절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해리스는 그렇게 인기 있는 부통령은 아니었다. 백악관은 의도적으로 부통령 자리를 돋보이게 하지 않았다. 유능한 바이든으로 이미지 메이킹해야 했기 때문에 해리스 부통령의 역할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숨겨왔다. 시민과의 직접 접촉이 적었고, 해리스 자체도 적지 않은 자중지란을 겪어왔다. 스태프를 좀 지나치게 쪼는 성격이었다는 구설도 있었다. 추론컨대 검사 출신이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자신의 팀과 원활하지 못했다. 특히 초기에는 스태프 교체가 심했다.
해리스가 담당한 과업도 잘 보이지 않는 배후 업무가 많았다. 가령, 남쪽 이민이 증가하는 원인을 중남미 정치 상황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게 해리스에 맡겨진 일이었다. 가령 해리스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면, 그런 연구보다는 이민국 개혁 같은 걸 맡겼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가끔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는 에피소드라는 어느 공식 행사 연설 중에 자기 옛날얘기를 하며 혼자 민망하고 경망스럽게 웃었다더라. 그런 비호감 이미지만 쌓였다.
“우리 엄마가 야단치면서 하시던 말인데요. ‘요즘 젊은 애들은 왜 그런다니. 자기가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진 줄 안다’고. 하하하! (잠시 정적) 어떤 사람들이든 존재하려면 맥락이 있기 마련이죠.”
카멀라 해리스, 2023.05.10. 히스패닉 청소년의 교육 기회에 관한 한 행사 연설 중에.
하지만 해리스 지지를 선언하면서 바이든이 퇴장하고,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예상 밖의 정치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민주당을 규합한 해리스를 사람들은 달리 보기 시작했다.
해리스는 말괄량이!
유능한 참모진의 단호한 대응
공화당은 해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해리스를 남쪽 국경 문제 책임자로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런 공격이 사실에 기반한 것도 아니어서 구체적인 문제점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트럼프는 인종차별, 성차별 등으로 다시 회귀해 버렸다. 해리스에 대한 인종차별과 성차별도 자행했는데, 해리스 선본이 아주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미셸 오바마식으로 ‘고상하게’ 대응하는 게 아니라 트럼프식의 저열함에 딱 그 수위에 맞게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가령 트럼프의 ‘뻘짓’에 대해 단호하고 직설적이지만, 유머러스한 성명을 발표했다. 트럼프라는 상대를 직접 욕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트럼프가 ‘후졌다’는 걸 알 수 있도록 직설적이고 단호하게 대응한 것이다. 마치 2003년 ‘불판론’으로 화제를 일으킨 노회찬처럼, 정치의 언어를 바꿔버렸다. 아래 벤다이어그램이 그런 해리스 이미지를 반영하는 소셜 밈이고, 그런 게 히트했다.
카멀라는 말괄량이(BRAT)
해리스의 출현으로 이제 노인 이미지는 바이든에서 트럼프로 옮겨갔다. 예전에는 비호감이었던 경망스러운 웃음소리가 이제 쿨하고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기 좋은 쾌활함으로 바뀌었다. 요즘 젊은 층에 유행한 ‘브랫'(brat) 씩씩한 말괄량이 이미지인데, 이 브랫 밈이 그야말로 대히트했다.
‘브랫’ 밈은 영국 가수 찰리XCX가 자기 X 계정에 해리스를 직접 호명하면서 시작됐다. 카멀라가 쿨한 이미지를 얻는 순간이었다. 찰리XCX가 6월에 발표한 앨범 ‘브랫’은 틱톡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찰리XCX가 해리스를 직접 호명했으니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kamalaharris 태그는 단 일주일 만에 틱톡 1억 뷰를 달성했다. 참고로 찰리XCX는 브랫(‘BRAT’)을 “약간 정신없고(messy), 파티를 즐기며 가끔 바보스러운 말을 하기도 하는 애. 무너질 때도 있지만, 파티하며 이겨내는 정직하고 솔직한 여자애”라고 설명한다.
“카멀라는 말괄량이(Kamala is BRAT)”
찰리XCX
해리스 팀은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문화 현상을 아주 빨리 포착해 수용하고 선순환하는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브랫’ 밈은 그 대표적 예.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빠르면 빠르게, 그때그때에 맞춰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위어드의 탄생
“그 사람들 좀 이상해요” (팀 월즈)
‘위어드'(weird: 이상한, 기괴한)라는 단어는 이제 2024년 미국 대선을 관통하는 “정치 트렌드”(CNN)다. 미네소타 주지사 팀 월즈는 전국구 스타는 아니었지만, 친근하고 말에 위트가 있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동네 아저씨 이미지에 아주 명석하고 명언 제조기에다 꾸준히 진보적 정책을 추진해 왔다.
“영 이상한 사람들 같아요.”(These are weird people)
트럼프 같은 사람들에게 말려들면 안 되지 않느냐는 취지로 팀 월즈는 ‘위어드’라는 표현을 종종 인터뷰에서 사용했다. 언론 보도를 참고하면 2024년 7월부터 인터뷰에서 종종 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바이럴을 타고 거대한 소셜 밈이 되어 그야말로 대히트 중이다. (참고로 이 인터뷰는 팀 월즈가 해리스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기 전에 했는데, 인터뷰를 정리하는 지금은 해리스-월즈 민주당 대선팀이 결성됐고, 월즈는 이미 전국구가 돼버렸다! 편집자)
위어드가 절묘한 세 가지 이유
그런데 이 위어드가 아주 절묘한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표현 수위가 절묘하다. 아무리 트럼프라고 해도 악마, 쓰레기, 폐기물 등으로 표현하면 너무 극단적 느낌이다. 그런데 위어드는 선악 개념도 아니고, 뭔가 상대방을 최악으로까지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위어드’는 ‘쟤 좀 위어드(이상한) 하지 않니?’ 그런 묘하게 기분 나쁜 그런 이미지다. 광장에서 정신 나간 헛소리 설교를 하는 사람이든, 오랜만에 모인 가족 모임에서 정신 나간 사회관을 펼치는 삼촌이든 간에 그런 포괄적으로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불쾌한 느낌을 잘 살렸다.
둘째, 적당히 모호하다. 가령 파시스트라거나 인종차별주의자로 부르면 너무 지칭하는 행동의 범위가 좁아진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부르면 뭔가 되게 나쁘다는 느낌만 있지, 파시즘의 정의가 무엇인지, 평생 당해온 입장이 아니면 인종차별이 실제로 사회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우리 쪽이든 상대방이든 단결하기에 별로 좋지도 않다. 그런데 위어드는 이런 모든 단점이 없다.
셋째. 위어드는 지칭하는 대상이 정말 많이 미쳤음이 분명한데도 그래도 ‘정중하게’ 순화시켜 표현해주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을 느끼게 해준다. 어쨌든 예의가 있구먼, 이런 느낌이랄까. 월즈가 이걸 뉴스 인터뷰에서 쓰자, 해리스 팀은 이 위어드를 아주 기민하게 보도자료에 이용했고, 온라인에서도 대히트했다.
JD 밴스의 막말은 보너스
앞서 JD 밴스는 ‘암살 미수 성조기 사진’으로 대선 가도에 여유가 생긴 트럼프가 ‘굳히기’용으로 내세운 부대통령 후보라고 했는데, 믿었던(?) 밴스가 계속 구설에 휘말리고 있다. 밴스는 [힐빌리의 노래]라는 자전적 에세이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성공한 사업가로 소외된 노동 계층을 대변하는 흙수저 엘리트의 상징 같은 인물이었다. 트럼프를 “힐빌리(백인 촌놈)의 마약”으로까지 비판했던 밴스는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게 되자 트럼프에 정치적으로 전면 투항(?)했고, 결국 트럼프의 러닝메이트로까지 정치적 출세 가도를 달렸다.
밴스는 고뇌하는 작가에서 정치적 출세를 위해 극우화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이들이 나름의 함의를 논하며 기대감을 남겨뒀던 인물인데, 부통령 후보가 되면서 주목도가 더 높아지다 보니 과거의 문제 발언들이 발굴돼 이미지를 구기고 있다. 갑작스럽게 우익 스타덤에 오르다 보니 극우방송에 출연해 지지층에 어필할 필요가 있었는데, “자식 없는 비참한 캣맘”이라는 막말로 해리스를 포함한 민주당 인사들을 공격한 것도 이때다.
그런 나쁜 이미지가 쌓이다보니 “[힐빌리의 노래] OO페이지를 보면 밴스가 소파 틈새에 라텍스 장갑을 끼워넣고 자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더라”라는 (물론 거짓이다) 농담을 누가 트위터에 썼는데 ‘밴스 녀석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라며 사람들이 믿어버리고 AP가 팩트체킹 기사까지 냈다가 철회한 소동 아닌 소동마저 벌어졌다. 그런 밴스를 트럼프와 함께 묶어 ‘이상한 사람들'(위어드 피플)이라고 표현하니까 그야말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거다.
위어드, 미 대선 판을 흔들다
마법 같은 정치 전략, ‘위어드’
“누가 이 메시지(‘위어드’)를 생각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의를 표합니다.”
데이비드 카프(조지워싱턴대학교 커뮤니케이션과), AP, ‘해리스와 민주당이 트럼프와 밴스에게 계속 ‘이상하다'(weird)고 말하는 이유. 2024.08.01.
앞서 주류 언론, 가령 뉴욕타임스와 같은 권위지조차 트럼프 진영의 인종차별이나 여성 차별을 있는 그대로 부르는 것을 ‘낙인찍기’를 염려해 회피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트럼프류의 비정상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현실 속에서 유통했는데, 그런 차별이 마치 정상처럼 현실화하는 흐름을 ‘위어드’가 깨뜨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던 본능적인 불쾌함을 표면화해서 통쾌하게 깨뜨림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는 마법의 단어가 바로 ‘위어드’다. 해리스 캠프가 영민하게 월즈의 ‘위어드’를 대선 캠페인의 일환으로 흡수했고, 이제 미 대선을 상징하는 하나의 프레임으로까지 그 위상이 커졌다. 민주당 해리스 캠프는 ‘위어드’ 덕분에 공화당의 저열한 선전선동을 효과적으로 맞받아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밀리던 주가 격전주가 되는 경우도 늘고, 해리스 우세주도 늘고 있다.
‘위어드’, 감정에 호소하는 동시에 객관적 사회 인식을 위한 프레임
위어드라는 건 감정에 호소하며 좀 더 보편적인 사회적 합의와 그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프레임이다. 예를 들어서 실제로 현대 미국에서 총기 규제 강화에 60~70%가 찬성하고, 동성애 결혼도 20여 년 동안 인식이 개선돼서 많이 찬성하고, 임신 중단권도 찬성 비중이 아주 커졌다.
이미 생활 속 감각이나 주관성은 이만큼이나 진보했는데, 이게 우익이다 좌익이다 이게 레이시즘이냐 아니냐 그런 틀(프레임)로 보면, 역설적으로 생활 속 감정이나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정치적 정체성을 위주로 사회 현상을 인식하면 현실 판단이 왜곡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지난 7~8년 동안 특히 그랬다.
위어드는 이것이 상식이냐 아니냐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도와주는 기준, 구호 같은 역할을 한다. 최종적으로는 정책 중심, 인권 중심으로 가기 위한 좀 더 정교한 인식론적 도구가 필요하겠지만, 지난 7~8년 동안 축적된 문제와 모순을 바로잡고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위어드’가 수행하기를 바란다.
위어드는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 개념처럼, 현상을 제대로 묘사함으로써 그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한 사례다.
2024 미 대선 키워드 ‘위어드’
위어드는 2024 미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기대한다. 언론도 위어드가 만들어내는 변화의 흐름을 전부 수용하지는 않더라도 이미 위어드에 관한 분석 기사나 소개 기사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적극적으로 이 흐름에 올라타진 않고, 훈수하고 평가하는 평론이 많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위어드는 각자가 느끼는 주관적인 경험이라서, 사실 중심 작업을 해야 하는 미국 저널리즘의 전통과 방법론으로는 수용하기 어렵기도 하다.
트럼프 캠프의 ‘위어드’ 파훼법?
지난 두 주 동안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인터뷰 2024.08.05. 기준). 그야말로 수세로 몰리고 있다. 방어하기 아주 어려운데, 왜냐하면 트럼프는 물론이고 미국 공화당의 보수 정치 전반이 지난 8년여간에 실제로 아주 이상하게(위어드!) 극우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강성 지지자들, 예를 들면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도 사회관 피력하는 것을 보면 볼수록 아주 영 이상한 사람이고. 물론 공화당 사람들의 원래 키워드인 ‘애국’ ‘강한 나라’ 이런 걸 반복하겠지만, 민주당 해리스 캠프보다 쿨한 이미지를 이제 와서 시도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본다.
남은 백일 동안 ‘남쪽 이주자’ 공포 마케팅이 남은 유일하고 가장 강력한 카드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알겠고… 그럼 우리는?
우리나라 정치 프레이밍
민주화 vs. 독재 대결 구도로 지난 70~80년을 달려왔다. 그런데 여전히 그걸 대체할 프레임을 찾지 못한 상태다. 그나마 새로운 프레임을 시도했던 게 ‘부자 되세요'(2001.12)와 같은 IMF(1997) 이후의 시대정신을 차용한 ‘성공하세요’ 같은 성공신화, 성공서사를 시도한 17대 대선이다(2007.12). 하지만 이명박 정권조차 뒤로 갈수록 더 우익화하면서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인 독재적 잔재로 인해 다시 또 정치 프레임은 독재 대 민주로 원상 복귀했다.
한국은 다른 프레임이 시도될 것 같다가도 역시나 독재 대 민주라는 프레임으로 반복하고 회귀하는 측면이 강하다. 당장 이번 보수 정권만 해도, 자꾸 유사 독재스러운 국정 운영 방식을 펼치고 옛날에 악명을 떨치고 나간 사람들을 국정 업무 일선에 복귀시키면서 독재 대 민주 프레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그래서 더 새로운 프레임이 나오기 어렵다.
이제 ‘선진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고민할 시간이다
차기 대선은 ‘선진사회’ 프레임으로 갔으면 좋겠다. 인권이 중심이다. 지금보다 제대로 더 잘살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보편적 인권이다. ‘선진국’이 아니라 ‘선진사회’인 이유는 GDP 같은 경제적 수치만 강조되어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경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선진국 운영체계로서 선진사회는 더 중요하다. 그 원리는 개방성과 발전 가능성을 포괄하는 인권을 핵심으로 해야 한다. 더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 다양한 인권 조례, 노동권의 협상력 강화 같은 세부 토픽이 자연스레 이어질 필요가 있다.
똥은 똥이라고 말해야 한다
신중한 건 좋다. 외골수적인 고집도 때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걸 위해 명백한 잘못을 정상화해선 안 된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그걸 배워오면 좋겠다. 브랫으로 대표되는 발랄한 유행보다도, 밴스 같은 젊은 엘리트를 발탁할 줄도 아는 보수 정치 뭐 이런 것보다도, 중요한 건 그거다.
역진적이고 잘못된 정책을 ‘비정상'(위어드)으로 규정하고, 제대로 이야기하는 프레이밍 방법론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럴 역량이 충분하다. MZ세대라는 엉터리 조어조차 이토록 멀쩡하게 유행시킬 수 있는 나라 아닌가(물론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