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사이트에는 ‘404 에러’라는 게 있다. 없는 페이지에 접근하면 뜨는 메시지다. 조 바이든(미국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캠페인 웹사이트를 공개했는데 이 사이트의 404 에러 페이지가 관심을 불러모았다.
“다크 브랜든을 찾으셨군요(You found dark brandon)”라는 메시지와 함께 레이저 빔을 쏘는 바이든의 일러스트가 등장한다. (다크 브랜든이 바이든의 어둠의 자아라는 설정이다.)
“당신을 다시 레일 위에 올려놓겠습니다(Let’s get you back on the rails)”라는 메시지에서도 꼼꼼한 디테일을 읽을 수 있다. 미국의 공영 라디오 NPR은 “암트랙에 대한 바이든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바이든은 상원의원 시절부터 날마다 아침 7시28분 또는 32분 암트랙(Amtrack; 전미 여객 철도공사) 열차를 타고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워싱턴DC까지 왕복 402km 거리를 출퇴근했다. 무려 36년 동안 하루 두 번 열차를 탔다. 자주 보는 암트랙 직원들을 집에 불러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도 했고 결혼식이나 세례식,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암트랙은 내 삶의 일부였다”고 말할 정도다.
“다시 레일 위에 올려놓겠다”는 건 홈페이지로 돌아가는 링크를 주겠다는 말이지만 궤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된다. 궤도를 벗어난다는 게 트럼프를 의미한다는 걸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이게 왜 중요한가.
- 바이든은 1942년생이다. 이미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인데 내년 재선에 성공하면 2028년 여든다섯까지 재임하게 된다. 퇴임 기준 나이로 로널드 레이건이 77세로 2위, 도널드 트럼프가 74세로 3위다.
- ‘다크 브랜든’ 짤방 몇 장이 늙고 유약한 이미지의 바이든을 강인하면서도 의외로 친근한 다크 히어로의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 단순히 새로운 선거 이벤트가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와 바이럴이 여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웃고 지나가기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다.
‘다크 브랜든’과 ‘다크 바이든’.
- ‘다크 브랜든’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 1단계: 카 레이서 브랜든 브라운(Brandon Brown)은 골수 공화당 지지자다. 경기장에서 NBC와 생방송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Fuck Joe Biden(바이든 엿먹어라)”고 외치는 걸 기자가 잘못 알아듣고(방송 사고를 수습하는 코멘트였을 거란 관측도 있었다) “‘가자, 브랜든(Let’s go Brandon)’이라고 하네요”(아래 동영상 1:09쯤)라고 한 게 인터넷 밈(meme)이 됐다. 2021년 10월 일이다.
- 2단계: 그때부터 트럼프 지지자들이 바이든을 조롱할 때 ‘가자 브랜든’이라는 그들만의 은어를 쓰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 바이든-날리면 논란 때 “태극기 휘바이든”이나 “조 날리면 대통령” 같은 조크가 유행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쉽다. 그때는 “렛츠고 브랜든”이라고 하면 누구나 “퍼큐 바이든”을 연상했다.
- 3단계: 트럼프 지지자들은 늙고 유약한 이미지의 바이든을 집요하게 조롱했다. 상대적으로 시원시원하고 터프한 트럼프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크 마가(Dark MAGA)’가 밈으로 뜬 게 2022년 3월이었다. MAGA(Make America Greate Again)는 “미국을 다시 강력하게 만들자”는 트럼프의 선거 구호였는데 ‘다크 MAGA’는 트럼프가 더 강력해져야 한다는 지지자들의 열망을 담은 구호였다. “그동안 트럼프가 너무 친절하고 관대했다”면서 “실수에서 배워야 한다는 평가”도 나왔다.
- 4단계: ‘다크 바이든’의 밈은 ‘다크 마가’보다 더 앞섰다. 2021년 3월 중국 웨이보에서 바이든을 조롱하는 웹툰 이미지가 돌았는데 그때도 바이든 지지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괜찮네”였다. “잠자는 왕이 왕좌에 올랐고 악령이 부활한다(The sleeping king ascends the throne, the evil spirit is resurrected)”는 무시무시한 설명이 붙었지만 바이든의 재발견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초창기 ‘다크 바이든’와 ‘다크 마가’는 상당 부분 사라지고 없는데 역겨운 이미지도 많았다.)
- 5단계: 이 ‘다크 바이든’ 밈이 1년 뒤 ‘다크 마가’를 만나서 ‘다크 브랜든’으로 바이럴을 탔다. 처음에는 사악한 바이든을 강조하려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언젠가부터 민주당 지지자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역시 “생각보다 괜찮네”란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2022년 7월 미국 정부가 알카에다 지도자 아이만 알자와리히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을 때도 ‘다크 브랜든’ 밈이 쏟아졌다. 중국 누리꾼들이 바이든을 조롱할 때 썼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서 “다크 브랜든은 멈추지 않는다”는 캡션을 붙인 트윗에 리트윗이 쏟아졌다.
- 6단계: 민주당 의원들이 ‘다크 브랜든’ 밈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백악관 공식 트위터 계정에도 등장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붙었다는 이야기다. 바이든이 마리화나 단속을 강화할 거라고 발표했을 때도 ‘다크 브랜든’ 밈이 쏟아졌다. 2023년 4월 백악관 만찬에서는 바이든이 직접 농담을 치기도 했다. “나는 어떤 농담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하지만 다크 브랜든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 7단계: 바이든 캠프는 아예 다크 브랜든을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기로 한 모양이다. 아예 캠프 웹사이트에서 다크 브랜든 굿즈를 팔고 있다. 32달러짜리 티셔츠와 22달러짜리 머그컵이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더 깊이 읽기.
- 지난 2020년 선거에서 바이든은 제대로 된 온라인 바이럴을 만들지 못했다. 바이든 캠프에서 일했던 한 직원이 “바이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를 이기는 것이 전부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직원은 데일리비스트와 인터뷰에서 “소셜 바이럴로 재미를 본 건 오마바 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 복스는 “바이든은 너무 침착하고 단정해서 밈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면서 “오죽하면 ‘새러데이 나잇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에서도 패러디를 만들지 못할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그랬던 바이든이 달라졌다. 이미지 변신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 같다는 분석이다. 복스는 “다크 브랜든 밈이 여든 살 노인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평범한 인물에서 더 흥미로운 인물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제시카 마이릭(펜 주립대 교수)는 다크 브랜든 현상을 샤덴 프로이데로 설명했다. ‘샤덴 프로이데는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걸 말한다. “바이든의 승리는 보수 우파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걸 의미한다. ‘다크 브랜든’이 유행하면 할수록 트럼프 지지자들은 괴로워할 것이고 민주당 지지자들의 기쁨은 배가된다.”
- 슬레이트는 “‘다크 마가’와 ‘다크 브랜든’은 모두 미국의 과열된 정치 환경의 산물”이라면서 “좌파가 우파의 언어를 채택하고 적응하는 방식은 우스꽝스럽다”고 지적했다.
-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담겨 있다. 실제로 초창기 ‘다크 브랜든’은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뿌리를 둔 네오 나치에 가까웠다. 혐오와 폭력에 뿌리를 둔 밈을 주류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긍정적인 이미지로 뒤바꿨으니 괜찮은 것일까.
- ‘다크 브랜든’은 바이든에 대한 우파의 경멸을 비꼬는 전략일 수도 있고 트럼프 지지자들을 조롱하는(샤덴 프로이데) 전략일 수도 있다. ‘다크 마가’가 트럼프의 무능함을 감추는 수단(실제로는 능력자라는 메시지)이었다면 ‘다크 브랜든’은 바이든의 유약함을 감추는 수단(강인하고 남성적인 이미지)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 에이자 로마노(복스 문화전문기자)는 “인터넷 밈을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이면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극단주의적 기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면서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인터넷 트롤과 극우 세력의 목표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다크 브랜든’을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밈의 확산이 차별과 혐오를 퍼뜨리는 극우 세력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 ‘다크 마가’를 보면서 지난 대선의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를 떠올린 사람 많을 것이다. 이준석(당시 국민의힘 대표)이 원희룡(당시 선대위원장)과 만든 쇼츠 영상이 상당한 흥행을 거뒀는데 이재명 캠프에서는 이에 맞설 강력한 바이럴을 만들지 못했다. 우스꽝스러운 걸 넘어 부담스러운 영상이었지만 윤석열 특유의 무겁고 경직된 이미지를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가도 많았다.
- 정책 대결이 사라진 자리에 짤방과 움짤, 쇼츠가 난무한다. 이미지 정치가 핵심 쟁점을 뒤덮고 짤 하나가 선거 판도를 바꾼다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불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