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묵적 지수] 임명묵은 짧았던 ‘아랍의 봄’과 긴 겨울을 이렇게 결론내린다. “쇼핑몰이 광장을 이겼다.” 아사드 정권 붕괴로 본 아랍의 봄과 그 겨울. 그리고 다시 지금 거기의 모습. (⏰ 19분)
임명묵의 ‘명묵적 지수’ [ep. 03]
아사드 정권 붕괴로 ‘아랍의 봄’ 완성?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이 글은 2024년 12월 18일(수)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임명묵 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먼저 몇 가지
1. 재스민 혁명과 아랍의 봄
- 튀니지 혁명: 2010년에서 2011년까지 튀니지에서 일어난 혁명. 재스민은 튀니지 국화에서 유래.
- 아랍의 봄: 튀니지 혁명에 이어 일어난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여러 혁명. 재스민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 참고로 2011년 중국 반정부 시위도 재스민 혁명, 또는 재스민의 중국어 이름에 따라 “모리화 혁명”(茉莉花)이라고 부른다.
2. 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이슬람주의
전체 무슬림의 약 90%는 수니파다. 그리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인데, 이란이 그 중심에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예언자의 대리인)를 누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이슬람 공동체가 칼리프를 결정해야 한다는 일파는 수니파로 이어졌고,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로서 혈통적 정당성이 있는 알리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는 게 시아파로 갈라졌다. 두 종파는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중동 역사를 형성해왔다.
한편 유럽 제국주의의 충격 이후에, 이슬람교의 도덕과 그것을 구현한 법인 샤리아에 따라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근대 정치 이념, ‘이슬람주의’가 등장한다. 종교가 국가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세속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큰 사상이다.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각자가 발전시킨 나름의 이슬람주의가 있는데,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이더라도 종파적인 정체성에 따라서 대립하기도 한다.
이런 종파와 이념의 교차는 시리아 내전의 이해를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다. 몰락한 아사드 정부는 아랍 사회주의를 내건 바트당의 세속주의를 따른다. 반군(현재 신정부)은 수니파 이슬람주의 성향이 매우 짙다. 그런데 아사드를 가장 크게 후원한 이란은 호메이니가 발전시킨 독특한 시아파 이슬람주의를 따른다.
아사드 정권의 붕괴로 아랍의 봄 완성?
2010년 튀니지에서 과일과 채소 노점상을 하던 26살 청년 무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에 자신의 저울과 과일, 채소를 압수당했다. 가족을 부양할 유일한 생계 수단을 되돌려받기 위해선 뇌물을 바쳐야했지만 그럴 돈이 없었고, 항의는 경찰의 구타와 욕설로 되돌아 왔으며, 민원 제기도 소용이 없었다.
부아지지는 자신의 몸에 가솔린을 붓고 스스로 불을 붙여 자신을 불살랐다. 심한 화상을 입은 부아지지는 치료를 받았지만 다음해 1월 4일, 26살의 젊디 젊은 나이로 숨졌다. 이후 ‘아랍의 봄’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이 시작됐다.
튀니지의 불길은 아랍 세계 전역으로 번졌다. 그 속도가 어마무시해서 다양한 분석이 나왔는데, 특히 혁명에서 페이스북이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서구의 많은 미디어와 알자지라와 같은 중동 미디어의 역할도 컸다. 실제 아랍의 봄이 일으킨 충격파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집트와 같은 아랍 주요 국가의 집권세력이 전복됐고, 바레인과 시리아에서는 대규모 집회가 정치적 갈등, 나아가 내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 중동에서 클레이 셔키풍의 낭만적인 페이스북 민주주의를 누구도 논하지 않는다. 중동의 현실은 그런 낙관적인 기술결정론으로 재단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했다. 세속주의, 수니파, 시아파, 아랍, 이슬람주의, 온갖 정체성이 소용돌이 치는 혼동의 아수라장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아사드 정권이다.
그리고 지금 그 아사드 정권이 축출됐고, 붕괴했다. 자, 어쨌든 악당이 물러갔으니 이제 해피할까. 섣부른 판단을 하기 전에 아사드 정권이 물러가고 이제 온갖 세력이 끼어들어 더 복잡해진 양상을 살펴보자.
아랍의… 봄은 짧았고 겨울은 길었다
아랍의 봄은 2차대전 이후 등장한 일군의 아랍 국가들이 사회에 안정과 번영을 제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 파탄의 증거였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했고, 부패와 억압 속에서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절망감이 봉기로 폭발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이 발생했다.
1. 이슬람주의의 폭발
우선 아랍 내부에서는 ‘이슬람주의’가 폭발했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은 세속주의 독재국가가 많았다. 소련이 붕괴한 뒤로 더 상황은 어려워졌다. 초기에는 근대화와 발전을 꿈꾸는 소련식 사회주의의 지향이 있었지만, 다양한 이유로 장기 독재 정권은 부패한 정부로 타락했다. 그 와중에 냉전마저 끝나니 이들 정부는 생존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채택해야만 했다.
냉전 시대만 해도 부패하고 무능했던 정부는 국민에 다양한 사회보장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본격적인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빈곤층이 확대했고, 이들은 정치적인 불만 세력으로 확장했다. 이 와중에 7080년대에 반대 세력으로 이슬람주의가 성장하고 있었다.
사회의 타락과 부정부패는 소련식 사회주의, 혹은 미국식 자유주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행을 끌었다. 미국이나 소련은 모두 인본주의라는 점에서 중동에서 부도덕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델이었다. 대신 신의 도덕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했다. 이슬람주의는 근대적인 정당의 형태로 시작해(가령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전국적인 네트워크 구축했다.
한편 독재 정권은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구식 근대화의 비전을 믿고 있던 이들은 종교 원리가 국가 통치에 더 적극적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이념을 야만으로 치부했다. 세속주의의 수호는 정권이 장기 독재를 정당화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논리는 실제 이슬람주의가 들어왔을 때 자신들의 근대적 생활 양식이 위협 받을 것이라 우려하는 세속주의자들, 주로 중산층 이상 시민들에게 어느 정도는 통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경제가 문제였다. 경제난이 심화하면서 급기야 2008년 금융 위기와 2010년 러시아 곡물 위기가 터지면서 이런 ‘공포 마케팅’의 논리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 간단히 살펴본, 튀니지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그 아슬아슬하게 유지됐던 균형점이 붕괴하고 분노가 폭발했다.
아랍인들은 ‘언어’를 공유한다는 점에서(언어와 민족이 ‘아랍’의 조건이라서 이는 당연한 것이긴 한데) 이런 불만과 새로운 요구들은 한 나라에서 이웃나라로 쉽게 확산시킬 수 있었다. 이슬람주의 신봉자들은 이 국면을 ‘샤리아'(이슬람 공동체를 규율하는 종교법)에 입각해 나라를 통치할 기회로 삼았다.
제도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더 급진적인 요구를 했다는 점에서, 한국으로 치면 80년대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은 급진적인 이념을 모스크를 중심으로 발전시켰다. 억압적인 독재 정부 하에서, 탄압을 꿋꿋이 견디면서 유일하게 전국 조직과 이념을 확보한 이슬람주의자들은 독재가 무너지자 선거에서 쉽게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다.
2. 미국식 ‘나이브’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실패
후쿠야마(‘역사의 종언’, 1989년 저작을 가리킴. 편집자) 이후로 미국식 체제는 단순 시스템을 넘어서는 하나의 신앙이 되었다. 특히 1인1표 선거 민주주의는 가장 중요한 신화가 됐다. 1인1표의 자유 선거가 시행되면 한 국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선거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미국 안보 담당자들은 아랍의 봄으로 이집트 친미 정권이 뒤집힐 것 같아 불안해 했지만, 중동 안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관료, 지식인, 그리고 대다수 시민은 ‘아랍의 민주화’를 반겼다.
하지만 독재를 무너뜨리니까, 그걸 대신 채운 건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이슬람주의’였다. 아랍의 주요 대도시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중산층은 독재를 대신하여 ‘민주적으로’ 등장한 이슬람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세속주의 중산층의 불안감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한국으로 비유하면 주사파가 박정희나 전두환을 무너뜨리고 당장 개혁 정책이라면서 부동산을 국유화하고, 영어 사용을 막겠다고 한 느낌이랄까?
세속주의 중산층이라고 독재 정부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독재자들은 자기 측근들에 부를 몰아주고, 능력 있는 중산층은 무능한 정부 하에서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구조를 더 개방적으로 만들기 위해 민주주의를 원했다. 하지만 이슬람주의를 원한 건 아니었다.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갈등은 이집트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다.
시리아와 예멘에서 상황은 이것보다도 더 복잡했다. 독재 vs. 시민, 세속주의 vs. 이슬람주의에 더해서, 간단히 정리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부족, 종파, 국제 갈등으로 진화했다. 독재 정부가 철권으로 감추고 있던 국가 내부의 분열상이 정부가 붕괴하자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각 집단은 경쟁 집단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격화되는 정체성 갈등 속에서 ‘같은 국민’이라는 동질감은 사라졌다. 어제까지 불편하게 공존하던 다른 종파, 종교 집단은 이제 생사를 놓고 다투는 ‘적’이 되었다. 이러한 적들에 패배한다는 것은 죽음과 동의어가 되었기에 타협이 없는 존재론적인 투쟁이 펼쳐졌다.
아랍의 봄은 2011년 절정을 찍고, 2013년쯤이 되자 사람은 ‘아랍의 겨울’을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독재 권력자가 축출됐지만, 새로운 세상은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각 나라별 상황
1. 이집트
아랍에서 인구도 가장 많고, 지금은 아니지만,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아랍의 근대 문화를 이끈 리더국이다. 이집트에서는 아랍의 봄으로 30년 독재의 무바라크 정권이 붕괴했다. 그 이후 무슬림형제단 무르시가 집권했고, 이슬람주의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집트는 나세르가 집권한 1954년 이래로 언제나 군부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나라였다.
군부가 무르시 정부에 협조하지 않으며 정치, 경제의 혼란이 본격화되었다. 무르시는 문화적으로도 억압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다. 10% 정도의 기독교 인구를 무시했고, 세속주의 중산층을 두렵게 하는 종교 정책을 실시하고자 했다. 이런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군부 지도자 엘시시는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를 축출했다.
그리고 카이로를 대표하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저항하는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한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시위대를 사살했다. 제대로 집계되지는 않지만 약 1000명 정도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말도 있다. 현재 많은 중산층이 군부에 불만을 품는다. 엘시시 정부는 무바라크 정부와 마찬가지로 더 개방적이고 효율적인 국가를 만들 의지나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혁명을 원하지는 않는다. ‘혁명 이후에 다시 등장할 무슬림형제단보다는 쿠데타 군부가 나을지도 몰라…’ 하면서 체념한다. 2013년 이래로 쿠데타 군부는 지금까지 집권하면서 위의 구도가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는 아랍의 지도국에서 미국과 사우디의 경제 지원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국가로 전락했다.
2. 리비아
리비아는 주지하는 것처럼, 카다피로 악명이 높았던 나라다. 카다피는 제3세계 반제국주의 혁명과 범아프리카주의를 이끈다는 카리스마와 이해할 수 없는 각종 기행을 모두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석유 국유화를 통해 서구의 영향력을 축출했고, 리비아를 통합했다는 업적이 있다. 하지만 장기간 이어진 카다피 독재에 불만은 쌓이고 있었고, 아랍의 봄 때 시민군이 조직되어 카다피 정부군과 싸우는 내전이 벌어진다.
정부군의 무자비한 진압이 서구의 여론을 흔들었고, 그 결과 나토군이 직접 리비아를 공습하게 된다. 나토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해서 카다피 정부군이 공군을 쓰지 못하게 막았고, 나토 공군이 카다피군을 폭격하며 시민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결국 카다피는 반군에게 사살되면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자, 그런데 카다피 사후로 리비아 민주정이 발전했는가? 전혀 아니다. 지역적으로 동(벵가지, 토브룩) 서(트리폴리) 갈등이 시작되었고, 리비아는 통합 정부를 만들지 못하고 붕괴했다. 이 무정부적 혼란이 펼쳐지는 공간에 갑자기 IS가 들어와서 리비아판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그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 그리고 모순의 상징이 노예 시장 부활이다. 리비아의 무정부 상태에 편승한 불법 노예상인이 해안 경비가 불가능한 리비아 해안을 ‘노예’ 매매의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리비아 해안에서 배를 띄우면 이탈리아로 갈 수 있다. 아프리카 난민들은 브로커를 통해 리비아 해안에서 보트 타고 이탈리아로 가면 본국보다 몇십배의 소득을 한 번에 벌 수 있다. 그래서 사하라 사막을 건너 지중해까지 가고, 보트 하나로 바다를 건너려는 위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리비아 군벌은 이런 아프리카인 난민들을 포획해 ‘노예’로 판매하고 있다.
리비아에서는 이후 IS를 먼저 토벌하는 국제적인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IS 토벌 이후에도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동부와 서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튀르키예, 카타르가 지원하는 서부 트리폴리와 러시아, 아랍에미리트가 지원하는 동부 벵가지-토브룩 세력 간 갈등을 주축으로 일어난 2차 리비아 내전이다. 2020년에 간신히 휴전에 합의했고, 현재까지도 선거를 통해 국민 통합 정부를 만들자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3. 예멘
예멘도 상황은 비슷하다. 갈라졌던 남예멘과 북예멘은 냉전이 끝나고 통일을 했다. 여기도 통일 이후에 살레의 독재 정권이 등장했고, 아랍의 봄으로 붕괴했다. 붕괴 뒤 신정부를 꾸리는 과정에서 부족, 종파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가령, 시아파 일파인 자이드파가 우리는 못해먹겠다면서 자치정부를 선언하는 식으로. 이들이 바로 ‘후티’(Houthi 혹은 ‘안사르 알라’, Ansar Allah는 ‘알라의 지지자’라는 의미) 반군이다.
예멘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후티는 북서부 산악 지역을 근거지로 세력을 확대했고, 수도 사나를 점령했다. 하지만 남예멘 아덴 지역을 중심으로 후티 정부에 대한 반발 세력이 결집해서 계속해서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엄청난 국가 붕괴, 인도적인 참사들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특히 후티는 시아파인 관계로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 연대할 구석이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의 대외작전을 관장했던 솔레이마니 장군 같은 이들은 후티에 무기를 제공해주고, 레바논 헤즈볼라를 파견해서 양질의 군사훈련도 시켜줬다. 사실 예멘 내전에서는 이란과 헤즈볼라의 지원 덕택에 후티가 가장 강한 세력이 된 측면이 매우 크다.
후티 세력의 성장에 사우디는 편집증적으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지도로 보면 예멘은 사우디의 핵심 지역이자 이슬람이 시작된 곳인 메카, 메디나 바로 아래다. 이런 중요한 위치에 사우디와 경쟁하는 이란 세력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다. 이것을 ‘이란의 포위망 구축 시도’로 본 사우디는 후티에 대한 군사적 공격에 나섰다.
2015년에 왕가의 후계자로 낙점되며 국방장관에 오른 무함마드 빈 살만이 아랍에미리트를 끌어들여 대 후티 전쟁을 시작했다. 두 국가의 개입으로 후티는 아덴에서 철수하며 내전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국방비를 쓰는 사우디의 공격을 전부 패퇴시키며 사우디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다. 사우디는 인도주의적 위기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4. 바레인
바레인는 걸프만에 있는 작은 나라다. 걸프 지역에는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오만이라는 군주정 국가들이 몰려 있다. 이중에서 아랍에미리트나 카타르는 오일머니를 활용해 두바이와 도하로 상징되는 초현대 도시를 건설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왕가에 충성하는 이 두 국가와 달리, 바레인의 정치는 다소 불안정했다. 지배층인 왕가와 엘리트는 사우디와 친한 수니파이고, 국민 다수는 시아파이기 때문이다. 시아파 국민 입장에서는 ‘우리 왕가’가 아니라, ‘수니파들만의 왕가’로 불만을 가지기 좋았다. 그래서 바레인의 시위대는 바레인 왕정의 개혁 요구했다.
사우디는 바레인의 상황을 이란이 또 시아파를 선동해 수니파를 흔들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었다. 바레인 왕가도 아랍의 봄 시위를 이란의 사주를 받을 ‘이란 간첩’이 하는 짓으로 프레이밍하며 사태를 돌파하고자 했다. 그래도 바레인 왕가는 아랍의 봄의 파도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긴 했다. 사우디 지원에 힘 입은 바가 크다.
현재는 왕가는 일부 개혁적인 정책을 수용하며 국민의 불만을 달래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나라와도 조금 관련이 있는데, 당시 시위 진압 과정에서 바레인이 한국산 최루탄과 시위 진압 장비를 대거 수입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에서 큰 비판이 있기도 했다.
5. 사우디의 공포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면 사우디가 느꼈던 엄청난 공포가 설명된다. 크게 두 가지다. 사우디 왕정 입장에선 ‘독재자 몰아내라’가 왕정에 공격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체로 이슬람주의는 ‘왕정’을 인정하지 않고 공화정을 추구한다. 나머지 하나는 시아파 네트워크로 뻗어나가는 이란의 대리 조직들이 사우디를 포위한다는 공포다. 그 공포 때문에 빈살만은 후티 반군과 전쟁까지 벌이는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6. 튀르키에와 카타르
튀르키예와 카타르는 수니파 이슬람의 확장을 정치적 기회로 삼는 나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튀르키에는 아랍의 봄 이후 아랍권 혁명 정부가 튀르키에를 롤모델로 삼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세속주의 독재 vs 이슬람주의 시민의 구도는 튀르키예가 원조라고 할 수 있었다.
집권 초기에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도 서구식 민주주의에 적응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여러 자유화 정책을 실시했다. 각종 종교, 문화 정책도 온건했고, 오히려 군부가 억압한 종교의 자유를 풀어준다는 인상이 강했다. 세속주의 군부에 반감은 이 자유화 조치들이 튀르키예의 EU 가입을 위한 디딤돌들이라는 논리로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EU는 튀르키예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2011년에는 유로존 위기도 시작되었다. 에르도안은 받아주지도 않고, 들어갈 필요도 없는 유럽에 매달리기보다는 이슬람의 리더 국가가 되는 게 좋겠다며 국가 방향성을 새로 설정하게 됐다.
이 프로젝트는 제한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다. 처음 이집트의 무르시는 튀르키에 모델을 참고하려고 했다. 다른 이슬람주의자들도 튀르키예 모델을 얘기하며 세속주의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물론 대다수 시도가 실패하며 무위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큰 성공은 아니었다.
카타르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와 차별화되는 국가 전략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수니파 이슬람주의를 지원하는 국가로 우뚝 섰다. 주요 이웃 왕정들이 카타르를 비난하더라도 꿋꿋하게 자기만의 전략을 밀고 나가며 자금과 미디어를 지원했다.
아사드 정권 붕괴…아랍의 겨울 그 논리적 귀결
앞서 그 맥락을 길게 이야기했지만, 아랍의 봄이 ‘겨울’로 바뀌는 과정에서 펼쳐진 귀결이 시리아다. 대규모 국가 붕괴, 사회적인 혼란의 압축판이다. 러시아와 중국도 미국식 민주주의의 진짜 모습이 이런 것이라고 정치 선동한다. 아사드 정권은 폭압적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거기에 저항한 반군은 더 급진적인 IS로 진화하고…. 그야말로 아랍의 봄, 그 진짜 얼굴이 실은 아랍의 겨울이었음을 시리아는 보여줬다.
시계를 다시 현재로 돌려보자. 아사드 정권은 악명 높은 세습 독재 정권이었다. 사실상 2014년, 2015년에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가 처음엔 이란이 지원했고, 그 다음에는 러시아가 시리아 반군을 공습함으로써 극적으로 회생했다. 아사드 정권은 구사일생으로 정권으로 유지했고, 수도 다마스쿠스와 북부의 최대 도시 알레포를 회복했다.
하지만 주요 거점인 북동부의 쿠르드족은 자치 정부(로자바 혹은 YPG)를 만들었다. 수니파 반군들은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으며 북서부의 이들리브에 거점을 차렸다. 거기에 시리아 남부에는 미군까지 주둔하기 시작했다. 일단 큰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 전으로 돌아간 것은 절대 아닌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아사드 정권(집권 바트당)은 겉으로는 내전의 승리자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세 지역의 통제권을 잃어서 커다란 손실을 보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무역을 할 수가 없었다. 나라 경제의 기틀이 되어줄 주요 유전과 곡창 지역은 정부군의 통제 영역 바깥에 집중됐다. 따라서 아사드는 경제적으로도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자원을 집중 하며 시리아를 우선순위에서 내려놓았고, 이란도 이스라엘과 싸우면서 누구 도와줄 처지가 아니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아사드 정권은 이란의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견제하고, 다시 아랍 세계에 복귀하고자 사우디에 유화책을 쓰기 시작했다. 2023년에 사우디와 이란이 전격적으로 화해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으나 이란 입장에서는 심기가 완전히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존 우군인 이란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후원국으로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와 관계 회복을 진행 중이던 와중에 정권이 갑자기 붕괴한 거다. 아사드 정권의 시리아는 이미 국민을 학살한 혐의로 아랍 연맹에서 배제된 상태였는데, 얼마 전에 다시 전격적으로 복귀하며 조금씩 그 위상을 회복하던 상황이었다.
아랍의 봄 이후 13년 간 버티면서, 미국 제재와 반군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정권을 안정화시키려고 노력했는데, 이미 완전히 비어있던 곳간이 기대만큼 빠르게 차지는 않았다. 그때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은 이들리브 반군이 급작스럽게 남진하며 거의 일주일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란과 러시아도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수도인 다마스쿠스까지 점령되었고, 아사드는 러시아로 도피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내전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아사드 정권은 여전히 철권 독재와 외국의 지원에 의지하며 간신히 유지되던 체제였다. 그리고 아사드가 전통적인 우군이었던 이란과 러시아를 스스로 거부한 측면이 있고(전략적인 선택이었지만), 새로운 우군을 찾으러 나서며 균형이 불안정해졌을 때. 그때를 노린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며 순식간에 무너진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13년 버틴 게 용하다 용해
시리아 내전이 시작됐을 때, 아사드 정권의 무력 진압에 맞서 시민군이 반군으로 진화했다. 2013년부터 본격화했는데, 시리아는 원래가 여러 가지 정체성이 혼재한 나라다. 수니파가 다수(대략 75%)지만, 시아파의 여러 종파가 공존하고, 기독교들도 꽤 많이 산다(약 10%). 여기에 쿠르드인, 투르멘인, 체르케스인, 팔레스타인, 아르메니아인 등이 함께 공존하는 나라다.
그러니 소수 종파 입장에서는 독재 권력의 폭압 정치와 세속주의가 오히려 종교적인 획일성을 강제하는 정치세력보다는 ‘차악’일 수 있었다. 이들은 아사드 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되어주었다. 실제 시리아 내전은 처음엔 민주화 시위로 시작했지만, 각 종파 간 내전으로 그 성질이 변했다. 여기에 여러 외국의 지원에 따른 국제전 양상까지 보였다.
아사드를 지원하는 나라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진짜 문명을 수호하는 것이고, 반군을 지원하는 국가들이 야만을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아사드는 그래도 근대적 가치와 다양한 정체성의 공존을 추구하는 정권인데, 반군은 수니파 이슬람주의의 가혹한 종교법으로 소수자를 짓밟는, 마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같은 이들이다.
서구에서는 러시아가 제기하는 이런 주장을 독재자의 궤변으로 치부했지만, 실제로 시리아 반군 중 일부가 2014년 무렵에 IS(이슬람국가)로 진화했기 대문에 이런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획득하기도 했다.
신권력 HTS의 과제
반군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IS가 국제 공조로 무너졌다. IS가 아사드를 월등히 뛰어넘는 잔혹성을 보였기 때문에, 러시아와 이란은 당당하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할 수 있었다. 반군이 거의 토벌되어가던 무렵에, 튀르키예가 개입하면서 북서부 이들리브에 반군의 거점을 마련해주고 아사드군과 러시아, 이란으로부터 보호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 이들리브에서 주도권을 잡은 조직은 HTS(하야트 타흐리르 알샴)였다.
수니파 이슬람주의 계열인데, 그 수장은 아메드 알샤라(엣 가명은 아부 무함마드 알 졸라니)다. 알카에다와 관련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알샤라 자신은 알카에다와는 결별했고 이제 현실 정치세력이 되고자 하니 믿어달라고 하지만, 이들이 정말 온건한 정치세력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탈레반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이들 HTS가 내세우는 건 수니파 이슬람주의가 그 첫 번째다. 그것 빼고 솔직히 와닿는 건 별로 없다. 주변국과 관계 속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연착륙’할 수 있을지가 정치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우군이라고 할 수 없는 (전쟁했던 나라인) 러시아와 이란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를 그 핵심 과제로 볼 수 있다. 지금도 물밑에서 관계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가 많긴 하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기존 아사드 정권을 지지한 이유 중 하나였던 흐메이밈 공군기지와 타르투스 해군기지를 유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할 테고, 이란 입장에서는 이란과 헤즈볼라를 연결해주던 시리아의 통로를 얼마나 보장할 것인가 핵심 쟁점이다.
국제적으로는 튀르키에와 이스라엘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이스라엘에 대해선, 적(이란)의 적(시리아 반군)은 친구라서 시리아 반군을 이스라엘이 지원했다는 소리도 있긴 한데, 일단 명시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싸울 생각 없고, 잘 지내겠다는 게 기본 입장이지만, 이스라엘로서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은 아사드 정부가 무너지자 자신들이 1967년 이후 점거하고 있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 고원에서 더 깊숙한 시리아 영토로 군대를 진격시키고, 아사드가 남기고 간 무기고를 폭파시키면서 시리아 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시리아에는 대부분 아랍인이 살고 있지만, 북동부에 쿠르드족 문제가 있다(참고로 쿠르드족 전체 인구는 전 세계에 걸쳐 약 4천만 명 정도로 나라 없는 민족 중에서는 가장 큰 민족이다). 이란이나 터키에선 강력한 정부들이 어떻게든 쿠르드족을 통치하지만, 후세인 사후 정부가 약화된 이라크에서는 쿠르드 자치정부다. 튀르키예는 쿠르드 분리주의와 게릴라, 테러리즘으로 골머리를 오래 썩혀온 나라라서, 국경 바깥 쿠르드족의 움직임에도 매우 민감한 나라다. 이중 이라크 내 쿠르드는 튀르키에가 포섭했는데, 시리아 내 쿠르드는 통제할 수가 없어 튀르키에가 시리아에 개입한 측면이 있다.
시리아 쿠르드 자치정부는 또 미국과 친밀하다. 이 점은 미국과 튀르키예 관계 악화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당시 IS 토벌에 쿠르드가 큰 역할을 했는데, 미국이 이들을 IS에 맞서는 전사들로서 후원하면서 우호적 관계를 쌓게 되었다.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미국과 관계 악화를 감수하고 시리아 쿠르드를 제압하자는 말도 많다.
즉 HTS 정부는 국내적으로는 아사드를 지지했던 소수 종교인, 소수 종파, 세속주의자들을 다루면서도, 자신의 이념인 수니파 이슬람주의를 추구해야 하고, 최대 후원국인 튀르키예가 북동부 쿠르드 지역에 자꾸 간섭하려 드는 것을 다뤄야하고, 이스라엘이 남부에서 군사 작전을 펼치는 것에 대응해야 하고, 자신들과 싸웠던 러시아와 이란과도 새로운 관계를 쌓아야 한다.
이런 얽히고 설킨 난제를 생각해보면 아사드 이후의 시리아를 낙관하기에는 아직은 이르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튀니지를 생각한다
다시 아랍의 봄을 열었던 튀니지로 돌아가자. 튀니지는 이 모든 난장판의 와중에서 2011년 이후 민주주의를 성숙시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유일한 국가였다. 내전도 없고, 외국 개입도 없으며, 쿠데타도 없고,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까지 했다. 그런데 2021년 당시 대통령인 카이스 사이드가 정부 해산하고 친위쿠데타를 벌였다.
아랍의 봄이냐 겨울이냐, 그 비유가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무엇이 봄이고 무엇이 겨울인가. 애초에 왜 아랍의 ‘봄’을 봄으로 불렀던 건가. 봉기와 정정 불안을 ‘봄’이라고 부른 이유는 ‘민주주의 신화’였고, 1인1표 선거 신화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겨울을 통과하면서 내전을 겪고 있는 나라들, 거기에 다시 반군이 승리하거나 유신과 같은 친위쿠데타가 펼쳐지는 이 아수라장을 보면서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게 아니었던 셈이다. 정권을 바꿨지만, 불평등은 확대했고, 청년 실업은 심화했으며, 부패의 악취도 더 심해졌다. 민주 정부가 들여온 신자유주의는 모순을 해소하지 못한 채 그 모순을 확산하고 심화했다. 그 와중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는 시민의 욕구가 생겨났고, 친위쿠데타가 ‘아랍의 봄’이 촉발된 튀니지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아사드 정부 붕괴를 ‘아랍의 봄’에서 끝까지 남았던 독재자 축출로 평가하며 단순하게 좋아할 일이 아니다. 어떻게 아사드 정권은 버틸 수 있었는지, 아랍의 봄 이후 아랍 국가들은 어떤 고통스러운 ‘겨울’을 거쳐왔는지… 진지하게 종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아랍의 봄 이후의 교훈은 (형식적) 민주주의만으로는 해결되는 일은 매우 한정적이고, 민주주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수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고, 효율적인 경제 재건이 필요하다.
쇼핑몰이 광장을 이겼다
이란과 사우디의 경쟁, 외국 세력의 개입, 쿠데타… 아랍의 봄은 이슬람주의를 폭발시켰고, 구 체제는 무너졌지만, 그 체제를 채운 형식적이고 나이브한 선거 민주주의 낙관론은 곧장 그 한계를 노출했다. 이슬람주의의 폭발은 세속주의적 근대화에 대한 강한 반작용이었다.
아랍 독재 권력의 서구식 세속주의, 엘리트주의는 어느 정도는 국민을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문화적으로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정책을 펴면서 대중의 반발을 초래했고, 세속적 근대화론에 대항해 민중은 이슬람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주의의 역량을 축적해왔다. 그 결집된 힘이 폭발하면서 분출한 게 아랍의 봄이었고, 그 폭발로 독재 정권이 눌러왔던 갈등, 종파 갈등, 민족 갈등, 세력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아랍의 봄의 ‘맨얼굴’은 이런 것이다.
이제 아랍의 청년들은 혁명(아랍의 봄)뿐만 아니라 이슬람주의, 세속주의, 서구화 등의 ‘이념’, 그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회의를 품게 됐다. 아랍의 ‘겨울’을 통과하면서 아랍의 청년들은 개인화, 비정치화, 일신의 안위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 2010년대 이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이 탈이념화의 기반 위에서 경제 성장과 서구화 문화와 이슬람의 공존을 이루는 것을 보면서 강력한 모델까지도 등장했다.
‘어제’의 페북 청년, ‘오늘’의 인스타 청년
이들 걸프 왕정 국가에서 하급 이주노동자는 인도와 필리핀 등지에서 온다. 하지만 중간 관리직들은 아랍어 능력이 중요할 때가 있기 때문에, 시리아,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 등 아랍 전역에서 노동력을 수급해야 한다. 유능한 인재들은 걸프로 가서 신세를 고칠 수 있다. 이들이 카타르와 아부다비, 두바이에서 번 돈을 본국으로 송금하며 본국 청년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페이스북에서 혁명을 이야기했던 ‘어제’의 청년은 ‘오늘’ 인스타그램에서 두바이 쇼핑몰을 보여주며 본국 청년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