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소풍날. 하지만 전날 밤잠을 설쳐 컨디션은 엉망이고, 소풍 당일엔 비까지 내린다. 일상다반사…“슬픔 다사”(多謝; 깊이 감사함, 정현종).

오래 손꼽아 기다리던 걸 그 애정과 설렘 때문에 망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에 관한 내 서평이 그렇다. 출판 전 초벌 원고를 다섯 번쯤 읽었고, 지금은 깔끔하게 정서(正書)된 전자책을 읽는 중이다. 그렇게 오래 기다렸고 기대했는데, 아직 한 줄도 못 썼다. 그래서 짧은 메모로 이 책 서평을 대신한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그게 영영 못 쓰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전날 밤잠 설친 비 오는 날의 소풍이긴 하지만.

1. 고마운 책

나는 매일 글을 읽는 사람이다. 때때로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더 많이 글을 읽고 편집한다. 솔직히 그게 불만일 때도 있다. 나도 보잘것없지만, 내 글을 쓰고 싶으니까. 물론 좋은 글일 때는 보람도 느낀다. 그리고 가끔은 보람에 더해 고마움마저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상헌의 이 책이 그렇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는 게 고마웠다.

2. 평양냉면 같은 책

나는 평양냉면 마니아는 아니지만, 이 책을 음식으로 표현한다면 평양냉면이 아닐까 싶다. 이상헌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이 책은 평양냉면처럼, 그렇게 이 책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 널리 오래오래 읽힐 만한 책이다.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그 담백한 맛에서 깊은 울림이 전해지는 책이다. 그러길 바란다.

3. 일하는 사람들의 교과서

이 책은 오는 6월 3일 대통령이 되는 사람에게 읽히면 좋은 책으로 추천됐다고 한다(사람들 마음은 별로 다르지 않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대통령뿐만 아니라 정책 만드는 국회와 정부부처 높은 양반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을 평범한 사람들, 아니 사실은 나와 같은 (경제적 기준으로 보면) ‘평범 이하’의 노동자들, 그러니까 ‘돈’이라는 제도권 노동의 가치로 평가받지 못하는 일하는 이들, 가령 돌봄노동을 ‘공짜로’ 수행하는 전업주부 같은 이들이 읽기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면 노동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일’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나는 이 책이 아직은 사회적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하지만 마땅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모든 ‘일하는 사람들’의 교과서가 되길 바란다. 물론 이 책 한 권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이상헌 자신도 이 책은 앞으로 이어질 ‘일하는 삶의 경제학’ 첫 번째 책이라고 말했다.

이상헌,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2025, 생각의힘)
4. 엄정한 시선, 따뜻한 목소리

이 책은 아주 친절한 책이다. 독자 한 명도 놓치기 싫어서 각 장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마무리한다. 그럼에도 경제 문외한에게는 다소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다. 그런 딱딱한 내용을 삶의 온기와 희망을 담아 부드럽게 만드는 건 저자의 철학이 담긴 시선과 목소리다. 그렇다고 이 책이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라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책을 쓰는 내내 경제학자로서의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거기에 책의 객관적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경제학 대가, 가령 애덤 스미스나 존 메이너드 케인스 그리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책과 가설 그들의 육성을 주장의 근거로 빌려온다. 하지만 그런 엄정함들이 더해져 향하는 곳은 ‘따뜻한 남쪽’이다.

이 글은 함께 꿈꾸자고, 함께 견뎌보자고 아주 낮은 곳을 향해 속삭인다. 그런데 그건 구호도 지적인 잘난 척도 세련된 교양도 아니고, 그저 진심이 된 지혜, 그저 마음이 된 경험이다. 이 책은 너무 친절해서 쉽게 쓰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자의 삶이 온전히 언어로 체화된, 쉽게 만나기 힘든 책이다.

5. 그래서 왜 좋은 일자리는 부족한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출판사가 ‘간판’으로 밀어붙인, “왜 좋은 일자리는 부족한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의 간판 제목이 ‘일하는 삶의 경제학’이길 바랐다. 각설하고, 이 책은 그 대답 중 하나로 기술 혁신의 딜레마를 말한다.

역사적 통계로만 보면 기술 혁신, 가령 현재 기준으로 AI 혁명, 과거 기준으로 자동화(포디즘), 인터넷 혁명(WWW), 모바일 등 디지털 혁명의 과정에서 일자리 부피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게 팩트다. 그러니 언론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기술 혁신 자체가 일자리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기술 혁신은 어떤 곳의 일자리는 줄이지만, 또 어떤 일자리는 늘리고, 전체 노동 생태계에서 이 증감은 대체로 평형상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기술 혁신이 지나간 자리에는 일자리 양극화라는 거친 생채기가 남는다. 더 높은 봉우리와 더 깊은 골짜기가 생긴다. 기술 혁신의 파도에 올라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지지만, 그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은 더 질 낮은 일자리로 이동한다. 파도에 올라탄 사람들의 수는 적지만 더 많은 것들을 차지하고, 파도에서 휩쓸린 사람들의 수는 훨씬 더 많지만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일자리 양극화와 노동의 계층화(계급화)는 기술 혁신이 거듭할 때마다 더 심화한다.

이 책은 그 자명한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에 어떻게 대답(대응)해야 하는지를 모색한다. 그 격차가 낳은 격한 생채기를 어떻게 보듬어야 할지,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탐색한다. 실업급여와 최저임금 논의가 그렇고, 모두가 동의하지만 실효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재교육의 문제가 그렇다. 그중에서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엉터리라고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지는 ‘유토피아’ 속 노동 시간 줄이기(일자리 나누기)를 소개하는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토머스 모어(1527), ‘유토피아’ 초판본(1516) 삽화.
6. 돌봄노동의 가치: 작은 노동에서 더 거대한 일의 세계로

모든 노동은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이 노동은 아니다. 가령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가족을 위한 전업주부 A 씨의 돌봄노동은 기업이 임금을 지급하거나 노동부에서 정책적으로 고민하는 ‘제도권’ 노동이 아니다. 기업과 정부는 ‘의도적’으로 그 노동을 비공식화한다.

좀 더 거시적인 구조로 말하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그런 노동을 의도적으로 제도권 바깥으로 지워버린다. 물론 그 비용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서. 그 노동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고 사회를 위해 더없이 필요하고 가치 있는 노동이지만, 무급인 채로 제도권 바깥으로 추방당한다. 그렇게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인 돌봄노동의 가치는 외면받고 소외된다.

그런 무급 돌봄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조 달러 정도. 전 세계 GDP의 약 13%에 해당하는 액수다(ILO, 2024., 참고로 책에선 같은 취지지만, 다른 자료를 인용한다).

이 책은 노동과 일의 개념적 차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차이를 인식하는 일이 본질적인 변화의 시작이라는 걸 매 순간 암묵적으로 강조한다. 이상헌에게 일이란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는 모든 행위’다. 그러니 제도권 노동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과제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발굴하고 걷어 올려서 세상 속으로 감싸안는 일이다. 그래야 그 일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테니까.

세상에서 외면받는 일을 세상 속으로 길어 올리면, 그렇게 일의 가치를 공식화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자부심과 그 일을 바라보는 정부와 기업의 시선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상헌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사회가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공식적으로 ‘일’이라 인정하면,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는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가 된다. 그와 동시에 돌봄노동의 가치를 온전히 평가해서 보상해야 한다.”

이상헌,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2025
7. 로제타와 마리엔탈 그리고 유토피아

이 책은 벨기에 하층 노동자 로제타(영화)로 시작해 예술의 나라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마리엔탈로 끝난다.

책이 전한 로제타의 이야기는 이렇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하나뿐인 친구마저 배신하지만 삶은 제자리걸음이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엄마도 여전하다. 결국 로제타는 죽기로 결심하고 가스를 틀지만, 요금이 연체돼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래도 기어코 죽겠다고 가스통을 사러 가지만, 그 가스통은 로제타가 들고 오기엔 너무 무겁다. 그런 로제타에게 누군가 다가와 가스통을 대신 짊어진다. 로제타가 배신한 바로 그 친구다. 로제타는 그 자리에서 울며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기업이 떠나고 공장이 문을 닫자 폐허가 된 마리엔탈. 절망에 빠진 주민은 굶주림의 세월 속에서 이웃집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기에 이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마 그 개와 고양이가 왜 사라졌는지 물어보지 못한다. 그 세월을 이겨내고 함께 고통을 나누는 방법을 배웠다. 마리엔탈 일자리 나누기 사업이다.

이 책에서 이상헌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전망과 예측에도 불구하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 속 일자리 나누기의 원형이 오늘날 현실적 해법에 오히려 가장 가까웠음을 지적한다.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도 유토피아를 원하고 꿈꾸고 그려내지 않으면 그 유토피아는 우리 안에서마저 사라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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