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 ]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이상헌 박사의 ‘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box]
터키의 광산은 예전부터 악명이 높았다.
악명 높은 터키 광산, 소마(Soma)
국제노동기구(ILO) 통계를 보면 지난 2001~2012년 1천172명의 광산업계 관계자들이 숨졌다. 광산 사고로 인해 연간 평균 100명꼴로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산업안전이 정치적 쟁점으로 곧잘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터키 서쪽에 있는 ‘소마(Soma)’라는 광산촌이 특히 문제였다. 한 달 전에는 야당에서 공식적인 조사를 요구했지만, 집권당은 간단히 무시했다. 대신 노동부 장관이 나와서 조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었노라고 선언했다.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광산의 소유주가 집권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며칠 전에 바로 그 광산에서 폭발사고가 났다. 301명이 목숨을 잃었고(5월 17일 자 로이터통신 보도 기준), 아직 수백 명이 실종 상태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그리고 노조까지 가세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터키 총리, “이런 일은 생기기 마련입니다”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현재 총리이자 실권자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나서서 한마디 했다. 워낙 역사적인 발언이라 충실히 번역해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사고는 광산에서 늘 생깁니다. 사고 없는 일터라는 건 없습니다. 과거의 영국을 생각해 보세요. 1862년에 광산 붕괴가 생겨 20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1866년에는 361명이 죽었고요, 1894년에는 폭발 사고로 290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과 같은 사고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생기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런 일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걸 ‘사고’라고 부릅니다.”
이런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과학적 정의를 늘어놓은 다음에,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이런 사고와 같은 사태를 악용하고 사람을 선동해서 정부를 공격하려는 그룹들, 그런 극단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국민 통합과 평화를 위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무시해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터키에서 만난 또 하나의 세월호 “사고 아니라 살인”
이런 똑 부러지는 발언을 하고 터키 총리는 사고 현장을 찾았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다”라고 외치는 유족들과 시민들이 그를 맞았다. 그가 우려한 ‘극단주의자’들이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진행되어, 그는 시위대 속에 갇혔다가 겨우 슈퍼에 몸을 숨겼다가 우여곡절 끝에 빠져나왔다. (총리가 슈퍼마켓에 숨어들었을 때 한 소녀가 총리를 가리키며 ‘당신은 살인자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잘난’ 총리 참모, 성난 시민에게 발길질하다
그의 참모진들도 많이 당황했다. 영국 SOAS(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박사과정까지 한 ‘명석한’ 참모 한 명은 경찰에 끌려가는 시민에게 거세게 발길질했다. 보스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보스의 엉덩이를 찬 꼴이 되었다. 터키 수상은 사면초가다. 오는 8월이 선거다.
터키 정부는 문제의 광산 ‘소마’를 2005년에 민영화했 다. 그 이후로 각종 규제를 완화하면서, 더 깊은 곳에서도 채광할 수 있게 해서 광부들이 늘 안전의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평소에도 퇴근 시간이 몇 분만 늦어도 전화를 걸 정도로 안전에 관해 노동자도 가족도 걱정했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참고로, 터키는 내년에 G20 회의도 개최한다.
멋진 신세계, 분노를 없애주는 알약 ‘소마’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1931)에서 ‘소마’는 분노를 없애주는 신비의 알약이다. 터키의 소마는 지금 분노의 용광로다. 하지만 분노하는 시민에게 무서운 건 정부의 폭력과 통제와 억압만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만은 이렇게 말했다.
“1984년이 다가왔고 (조지 오웰의) 예언이 들어맞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조지 오웰의 암울한 예언 옆으로 또 다른, 약간 더 오래되고 약간 덜 알려진 어두운 예언이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오웰은 외적으로 우리를 압제하는 세력에 의해 우리가 지배당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반면 헉슬리의 혜안은 사람들에게서 개인의 자주성, 성숙함, 그리고 역사성을 뺏는 데는 빅 브라더 같은 사람이 필요 없다고 내다보았다. 바로 사람들은 자신들을 억누르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들에게서 생각할 능력을 빼앗아 간 테크놀로지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오웰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지배할 것을 두려워한 반면,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망칠 것을 두려워했다.
– 닐 포스트만,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 1985) 서문 중에서 (번역: 아거)
이제 막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한 터키의 민중,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시민들, 그 최대의 적은 권력과 정부, 자본의 ‘깡패’스러움이 아니라 ‘분노를 없애는 알약, 소마’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땅에서 ‘소마’는 우리가 믿었던 KBS, MBC 등의 방송과 정부 발표만을 ‘받아쓰기’하는 거대 언론사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제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시민들은 ‘소마’가 된 지상파 방송, 통신사, 받아쓰기 신문을 피해 인터넷과 인터넷 언론을 통해 세월호 소식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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