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나는 한 언론사 대표이사를 보좌하고 있다. 가끔 대표이사의 일정을 수행하다 보면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가보는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 괴한의 공격으로 각 일간지 1면을 피투성이로 장식했던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 그 대사 아들인 ‘제임스 윌리엄 세준’의 백일잔치에 대표이사 ‘+1’ 자격으로 다녀왔다.

루퍼트 대사가 다쳐 병원 신세를 졌을 때 우리 사회는 솔직히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우려와 관심을 보여주었다. 병원 앞에서 회복을 기원하는 공연을 하고 단식과 석고대죄를 하며 사과를 하는 것이 내 눈에야 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것이 미국에 대한 우리 사회 다수의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경험한 한국의 정에 감동했는지 루퍼트 대사는 아들의 100일 잔치를 전통 한국식으로 열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

흥미롭거나, 유용하거나, 중요하거나

“그거 뉴스 되냐?”

뉴스를 만들기 전, 보고할 때 선배들이 묻는 말이다. 미국대사 아들의 백일잔치가 기삿거리가 될까? 신문협회의 연례 보고서 따르면 ‘흥미롭거나, 유용하거나, 중요하거나’ 의 세 범주 중 어느 하나에든 들어가면 써볼 만한 기삿거리다. 세준이의 백일잔치는 아마 ‘흥미롭거나’의 범주에는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백일잔치를 가본 사람 또는 치러 본 사람이라면 최근 화제가 되었던 외국인이 한국식으로 치르는 잔치가 어떨지, 관심을 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편집장도 같은 의견인지는 모르겠다. 그럼 기본 정보를 토대로 정리해보자.

주한미국대사 아들 세준이의 한국식 백일잔치

2015년 4월 25일 오후 5시 30분, 세준이의 백일잔치는 덕수궁길에 있는 미 대사관저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 정원에서 가든파티 스타일로 진행되었다. 사전에 알아보니 100여 명 정도를 초대했다고 한다.

세준이 백일잔치 전경

대사의 지인, 대사가 다쳤을 때 치료해준 병원 관계자, 정부인사 등이 주를 이뤘다. 언론사 관계자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세준 백일,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사는 걸출한 인물이 되리라."

미국식 파티가 으레 그렇듯 처음 도착하면 다들 스탠딩 테이블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사이사이로 웨이터가 와인, 주스, 물 등을 담은 쟁반을 들고 지나다닌다. 가까운 사람끼리 오랜만에 만났는지 등을 두드리며 웃고 인사하는 그룹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적당히 감춘 채 진지한 표정으로 엊그제 신문에서 본 이야기를 건네기도 한다.

도착하니 정원 안쪽에서 리퍼트 대사와 그의 아내 로빈이 세준이를 안고 다가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오는 순서대로 간단한 환담을 나누고 기념촬영을 했다. 전통 한국식 꼬마 도령 복장을 한 세준이는 반쯤 감긴 눈으로 엄마 품에 안겨있었는데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아 사람들마다 어쩜 저리 순하냐며 한마디씩 했다. 전속 사진사 말로는 집안에서는 칭얼대는데 밖에 나오면 얌전하다고 한다.

세준 백일잔치에 놓인 사진

관저 앞에는 돌상 비슷하게 상을 차려 놓았다. “Happy 100th day 세준”이라는 글자를 새긴 떡 케이크와 경단, 과일이 놓인 옆에 실, 엽전, 쌀 등의 돌잡이가 놓여있었다.

Happy 100th Day 세준 케익

탁자 한편에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슈퍼 히어로들의 피규어를 줄지어 세워 놓은 것이 특이했는데 그것도 돌잡이에 속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세준이 백일잔치에서

세준 백일잔치

음식은 미국식과 한국식을 섞어놓았다. 바비큐한 고기를 넣은 햄버거, 구운 또띨라칩과 디핑소스, 또띨라 소고기롤, 시저샐러드가 메인이었고 후식은 떡과 과일이었다.

고픈 배를 다독이며 인사를 다녔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인, 장관, 기업인의 얼굴이 곳곳에 보였다. 외교부 쪽에서 대거 출동했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도 보였다. 한쪽에서 한미 관계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면,

“이러지 말고 북미 담당관에게 직접 물어보지요, 뭐.”

하면서 북미 담당관을 불러다 놓고 질문을 하기도 하고, 협상이나 국가 원수 순방의 뒷이야기도 오갔다. 혼자 듣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어이구 오랜만이네! 이쪽으로 와서 인사 좀 하지. 요즘은 뭐해?”

“구단 맡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정)의선이랑 식사 한번 했습니다.”

불편해도 자주 봐야… 적응하고 배우고 관계가 쌓인다 

드라마에서 들어본 대사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내가 속한 매체사의 성향과는 별개로 나 자신은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고, 불평등의 감소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와 있는 사람들 중에 소위 ‘진보’로 분류될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초대를 받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초대를 받았어도 ‘내가 거기를 왜 가느냐’며 거절한 것일까? 가끔은 진보진영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판단해버린 사람들과는 애초에 만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번에도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런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해서 그냥 오고 싶지 않은 것일까?

사실 나는 시끄럽게 떠들고, 민중가요를 부르고, 누군가가 술자리를 주도하고,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후배라면 쉽게 말을 놓는 문화가 불편하다. 그래도 간다. 적응하려고 또 배우려고 간다. 관계를 쌓아가기 위해서는 불편해도 자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진영의 큰 약점 중 하나가 안보와 외교 분야다. 내가 전략담당이라면 이런 자리에 일부러라도 찾아와 인맥을 쌓으라고 하겠다. 진보는 약한 부분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내가 모르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참, 집에 가는 길에는 기념품으로 빨간색 상자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세준 백일기념’이라고 새겨놓은 야구공이 들어 있었다.

세준 백일기념 선물 (야구공)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