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반짜이(Phan Văn Chạy, 62세)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베트남의 제일 남쪽 까 마우(Cà Mau)에서 한국을 찾아와 한 달 반째 머물고 있다. 평생에 외국 땅에 이렇게 오래 머물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하셨을 할아버지가 안산합동분향소와 팽목항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큰딸은 2005년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사위 권재근 씨는 몇 년을 힘들여 준비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 제주도로 이사를 하기로 하였다.
세월호 참사로 가족 잃은 베트남 할아버지
4월 16일. 세월호의 침몰로 가족은 비극을 맞았다. 사위와 딸 그리고 손자가 배와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손녀 권지연 양만이 차오르는 물살에 쫓겨 간신히 탈출하던 사람들 손에 구조되었다. 사건이 나고 며칠 후 할아버지는 둘째 딸 판록한씨와 부랴부랴 팽목항에 도착했다.
4월 23일. 딸이 차가운 시신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가족이 모두 돌아오지 않았으니 마지막 한 사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직까지 사위와 손자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5월 20일. 참사가 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고 있던 때, 내가 함께하고 있는 페이스북 그룹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모임”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한 한국일보의 기사가 링크되었다. 모임에서는 어떻게든 돕자는 말들이 오갔고 나는 여기저기 연락을 시작하였다. 글을 쓴 기자분과 연락을 하는 사이 안산이주민센터에서 할아버지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센터에서는 지금 할아버지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통역이라고 하였다. 시민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구수정 님께서 베트남에서 한국에 와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 응우옌 응옥 뚜옌 (Nguyễn Ngọc Tuyền) 씨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며 연결해 주었다. 나는 뚜옌 씨를 안산이주민센터와 연결해 주었다.
구조 중단 소식에 피켓 들기로
5월 28일. 할아버지와 연락이 된 뚜옌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위와 손자를 찾는 일인데 지금 구조가 중단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들으니 절망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함께 피켓을 들고 호소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나는 피켓을 만들 재료를 준비하고 가겠다고 하였다. 베트남 유학생은 모두 일곱 명이 온다고 하였다. 그 사이, 안산이주민센터에서도 두 분이 오신다고 하였고, 시민모임을 같이 하는 최호림 님도 오시겠다고 하였다. 한겨레에도 할아버지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이때까지도 할아버지의 이름은 판만차이로 알려졌었다.
5월 31일. 약속한 초지역에서 유학생들을 만나 합동분향소까지 걸었다. 무척 무더운 날이었다. 합동분향소에는 유가족 몇 분과 자원봉사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조문객은 눈에 띄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간간이 오는 조문객들을 보며 우리는 피켓을 만들었다.
“끝까지 찾아 주세요”
유학생들은 정성 들여 한 글자씩 피켓에 써 나갔다.
“끝까지 찾아 주세요.”
“외면하지 마세요.”
“나약한 부모에게 힘을 주세요.”
태극기와 베트남기를 그려 넣고, 큰 글자엔 색을 칠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먼저 분향소에서 조문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한국에 있는 유일한 친척인 처조카 루엔록마이(한국명 배수정) 씨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처조카 역시 한국으로 시집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뒤 할아버지는 사위와 손자를 찾는 피켓을 들고 다가왔다. 이 무더운 여름날 파카를 입고 있었다. 몸이 아주 좋지 않다고 하였다.
안산이주민센터에서도 사람이 나오고 한국 여기저기에서 사는 베트남분들이 모여 만든 베트남공동체에서도 여러분이 소식을 듣고 왔다. 국민대책회의에 소속되어 있다는 인권활동가도 서너 분이 오셨다. 일단은 급한 대로 모두 피켓을 들고 분향소 출구 앞 게시판에 줄지어 섰다. 할아버지께 정말 필요한 것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라 이야기하며 나란히 피켓을 들었다.
곁에서 함께 한 사람들
잠시 뒤 몇 사람이 다가왔다. 뉴시스 기자가 취재를 나왔다. 지난번 제주도에서 생계대책비를 준 일이 보도가 나간 뒤 불필요한 오해를 받았다며 가족들은 인터뷰가 또 잘못되지는 않는지 경계하였다. 이날 나온 뉴시스의 기사는 할아버지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였다.
잠시 뒤에 안산시청에서 할아버지의 통역 도움을 알아봐 주겠다며 찾아왔다. 베트남공동체에서 오신 분이 우리가 통역은 도움을 드릴 수 있으니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면 안산이주민센터로 말씀해 주십사하고 연락처를 드렸다.
점심을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오랜만에 베트남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유학생 가운데 한 명이 꼭 고향의 조카를 닮았다며 자꾸 이야기하고 또 하였다. 유학생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 사이 도움을 주겠다고 모인 사람들도 인사했다. 모두 서로 초면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활동하는 곳을 간략히 소개하고 역할을 나누었다.
이주민 실종자에게도 관심을
일단 안산이주민센터가 모인 사람들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고 할아버지의 요청을 전달하기로 하였다. 베트남 유학생들은 조금 있으면 기말고사이지만, 방학 때라도 할아버지의 일에 계속하여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다. 나는 나대로 할아버지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을 계속하여 알아보기로 하였다.
오후에 다시 피켓을 들고 얼마간 서 있으니 이따금 방문한 조문객들이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얼마간 시간이 흘러 유학생들은 돌아가기로 하고 피켓을 접었다. 피켓은 처조카댁에서 보관하였다. 다시 분향소에 들어갔다 나오는 유학생들은 다른 조문객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나왔다. 국적이 달라도 누구나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돌아오는 길에 유학생들에게 할아버지의 이름이 베트남어로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베트남어는 성조가 있어서 한글로 적힌 것만으로는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뚜옌 씨가 할아버지의 이름은 한국 신문에 난 ‘판만차이’가 아니라 ‘판반짜이’(Phan Văn Chạy)라고 알려주었다.
우리 주위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우린 아직 이름 하나 제대로 받아쓰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이런 일에서도 소외를 당하기 쉬운 위치에 있다.
[box type=”info”]판반짜이 할아버지를 돕고 싶은 분께서는 안산이주민센터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031-492-8785)[/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