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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현재 최고의 의사 저술가라고 할 수 있는 아툴 가완디의 최신작이다.

띠지에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아마존 최고의 책 등등 화려한 문구들이 달려 있지만, 솔직히 내게는 그의 데뷔작인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보다 못한 책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세 종류의 다른 책이 하나로 묶여 있는 듯한 구성이 좀 못마땅했다고나 할까. 부분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는데 말이다.

처음 두 챕터는 노화에 대한 실용서로 볼 수 있다.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요약한 글이었다.

그다음 세 챕터는 노인 요양 시설에 대한 정책 제안으로 해석되었다. 노인 빈곤율 50%인 한국에 비해 미국 노인들은 그래도 경제적인 걱정은 좀 덜 하고 살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저자가 노인들의 경제적인 문제를 의도적으로 주제에서 빼 버렸을 수도 있다.

다음의 세 챕터는 말기 암 환자들이 겪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호스피스 의료의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두 챕터는 바로 저자 아버지의 암 투병 기간에 대해 담담히 써내려간 일종의 수기로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똑같이 암과 싸우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마지막 1년 5개월이 떠올랐다.

말콤 글래드웰로 상징되는 전형적 미국 교양서에 대한 반감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취재를 통한 저널리즘적 글쓰기와 각종 기존 연구의 소개가 잘 버무려지고, 빈곤층 출신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의 사례들도 곳곳에 배치된 그런 책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지 석 달이 넘은 지금 가장 생생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노인들이 아니라 노동자의 아들로 ‘듣보잡 대학’에서 사상 처음으로 하버드 의대에 진학한, 노인 요양원을 경영하는 의사다. 죽음에 관한 책에서 왜 이런 ‘인간 승리’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하기야 저자의 아버지도 인도의 시골에서 태어나 현지 의대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정착하여 돈을 벌고 나중에 고향 마을에 대학까지 설립한, ‘아메리칸 드림’의 또 다른 대표 사례였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치적을 깎아내려는 뜻은 아니지만, 어쨌든 뭔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언론 보도로 많이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을 책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다는 얘기다.

노인의 독립적 생활이 불가능할 때 선택할 수 있는가?

서문에서 저자는 ‘의학 교육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 꺼져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은 아니었’는데 반해,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이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고 있’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이는 노인의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졌을 때 과연 병원과 다를 게 없는 환경인, 의사와 간호사가 있는 요양원에 가게 하는 것이 최선인가 하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물론, 우리의 현실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항상 대기하는 요양원은 사치로 느껴진다.

노화는 유전자에 미리 입력된 정보대로 진행되는 질서정연한 현상인가, 아니면 그런 것 없는, 무질서한 마모 현상인가 하는 논쟁에서, 저자는 후자를 지지하는 듯하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그저 허물어질 뿐’이라는 노인병 전문의의 견해를 전하면서 말이다. 노화가 무질서하다면, 이에 대처하는 방법 역시 무질서한 ‘대증요법’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물론 의학이 발전하면서 유전자 정보를 ‘변경’ 내지 ‘조작’하여 노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인류의 수명을 확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노인의 건강에서 가장 심각한 위험은 ‘넘어지는 것’이라는 데 나는 밑줄을 쫙 긋는다. 미국에서 매년 넘어져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는 수십만의 노인 중 40%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20%는 다시 걷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넘어지는 것’의 세 가지 주요 원인은 균형 감각 쇠퇴, 네 가지 이상 처방 약 복용, 근육 악화라고 한다. 노년기의 생활에 있어서 실질적인 조언이다. 잘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미국에서조차 취약한 노인병학

노인 복지가 한국보다 잘 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미국에서도 의학 분과로서의 노인병학(geriatrics) 발전이 더디다고 하는 얘기는 꽤 의외였다. 노인 건강 보험 시스템인 메디케어에서 심박 조율기나 관상동맥 스텐트 같은 첨단 의료 장비 비용은 부담하는 반면 노인병 전문의의 특별한 치료는 커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미국 전체에서 매년 배출되는 노인병학 전문의가 300명도 채 안 된다고 한다.[footnote]찾아보니 한국에는 아예 노인병학 전문의 제도 자체가 없다[/footnote] ‘인간 중심 의료’가 어렵다는 것, 나라를 막론하고 현대 의학의 공통적인 고민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노인병학 전문의로 등장하는 사람이 무려 82세까지 현장에서 진료를 했다는 대목이었다. 아무리 노인병학 전문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해도 그렇지, 80세 넘은 노인이 은퇴하지 않고 계속 일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우울함에 빠지지 않고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적의식’과 ‘책임감’이 중요하다는 조언, 역시 뻔해 보이지만 꼭 기억해야겠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휘면 머리 역시 앞으로 숙어지게 되고, 그래서 앞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쳐들게 되니 음식이 목에 잘 걸린다는 것 역시 처음 듣는 실용적 조언이었다. 지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20년쯤 지나면 생생하게 느껴지려나… 실은, 처음의 두 챕터뿐 아니라 이 책 전반에 걸쳐 담담하게 묘사된 노인들의 일상이야말로 앞으로 다가올 노년기에 대비한 최고의 실용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요양원의 대안, 그리고 개혁

이제 저자는 현행 노인 복지 시설인 양로원이나 요양원의 문제점을 분석한다. 이러한 시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고, 역시 전에 본 적이 없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관리를 받는다. 한마디로 감옥이나 병실과 같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설이라는 얘기다.

현대의 요양원이 생긴 것이 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실에 몰려드는 노인들을 요양원으로 보내 병실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메디케어의 도입으로 ‘날림’ 요양 시설이 급증했다는 대목은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을 가져오기도 했다.

요양원의 목적은 병실을 비우고 가족의 부담을 줄이며 노년층의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독립적인 삶이 불가능해진 노년층도 가치 있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진 출처: 미국 보훈부 홈페이지

요양원의 대안으로 저자가 소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이다. 무엇보다 노인들이 ‘잠글 수 있는 현관문’을 가진 개별적 주거 공간에서 살게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간호사 등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노인의 생활 공간에 들어갈 때 항상 타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지며, 이성 친구를 재우게 하는 등 본인의 생활을 스스로 주도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안전성과 독립성이 충돌할 때 소송 우려 등에 의해 결국은 안전성 쪽으로 기울게 된다. 노인 본인이 아닌 자녀가 이 시설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서비스 등 ‘소프트웨어’보다는 호텔식 외관 등 ‘하드웨어’ 위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

결국 ‘어시스티드 리빙’은 집에서 요양원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르는 사실상의 ‘시설이 훌륭한 요양원’으로 전락하고만 듯하다. ‘노인 본인이 만족하는 노인 복지 시설’을 만들기가 미국도 참 어려운 것 같다.

위에서 이야기한, 하버드 의대를 나와 요양원을 운영하는 의사도 요양원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요양원에 없는 요소가 바로 ‘생명’이라고 생각하여, 동물, 식물, 어린아이들을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관성을 타파하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잉꼬 백 마리를 새장도 없이 주문했다는 대목은 현실성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렇게 노인들을 살아 있는 생명과 같이 지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위에서 노인병학 전문의가 조언했던 ‘목적의식’과 ‘책임감’ 혹은 자신을 넘어선 대의에 대한 ‘충성심’을 느끼게 해서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이다. 요양원도, ‘어시스티드 리빙’도 아닌 그냥 일반적인 노인 공공 임대 주택이 운영자의 노력으로 독립성과 안전성을 잘 조화시킨 훌륭한 노인 복지 시설이 된 예를 들기도 한다.[footnote]73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에 대기자가 200명 이상이라는 것이 문제이지만.[/footnote]

미국의 노인 요양 시설 얘기가 등장하는 이 대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한국의 노인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미국의 노인들도 부유하지는 않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령 연금 제도의 미비로 노인 빈곤 문제가 적어도 다른 OECD 국가들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은 최악의 노인 빈곤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픽 출처: KDI 경제정보센터 – Click경제교육)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일단 한국은 아직도 가족들이 노인과 같이 살면서 보살피는 경우가 많고, 이제는 같이 사는 것이 ‘효도’보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더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독립성이나 자율성 이전에 최소한의 안전이나 생존이 잘 보장되지 않는 ‘독거 노인’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한마디로, 이 책에 등장하는 노인 요양 시설을 노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도록 개선하자는 주장이 한국적 맥락에서는 일종의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기초연금을 대폭 올리고, 노인의 주거 환경을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수준으로 개선하는 것이 우선 과제가 아닐까. 특히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노인이 걱정된다.

솔직히 이 두 번째 부분, 요양원 문제가 다루어진 부분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뜬금없는 심리학 이론 얘기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말콤 글래드웰의 ‘짝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자의 전문 영역인 의학을 벗어난 사회 복지 정책의 영역이라 그러했을 것이다. 저자가 서문에 시사한 대로,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은 의학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고, 아무리 저자가 ‘인문 사회과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그 혼자 다루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위한 케어

마지막 세 챕터에서 저자는 다시 ‘호스피스 의료’ 즉 의학의 영역으로 돌아온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첫머리의 주장이 바로 호스피스 의료의 기본 명제가 아닐까. 노인이 아닌 30대의 젊은 암 말기 환자의 사례가 등장하면서 글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메디케어 비용의 25%가 삶의 마지막 1년에 들어선 5%의 환자에게 사용되고, 그 가운데 대부분은 효과가 거의 없는 최후 1~2개월에 집중된다’, ‘죽음은 오고야 마는데, 어느 시점에 치료를 멈춰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의학적 투쟁 끝에,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조차 없이 마지막을 맞는다’는 내용과 함께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실질적 도움을 주는 의료 복지 시스템을 만들자’는 주장이 차례로 나온다.

물론 ‘죽음을 앞둔’ 환자에 대한 의학적인 처치를 중단하는 결정은 결코 쉽지 않다. 환자와 가족들은 이에 대해 ‘죽음 위원회를 통한 의료 배급’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 시도한 것이 바로 호스피스 의료에 대한 보험 적용, 즉 ‘동반 케어 프로그램’으로, 시행한 결과 총 의료비가 줄어든 것은 물론 질병에 따라서는 생존 기간이 늘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오래 살려는 노력을 멈춰야 더 오래 산다’는 역설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케어를 받기 원하는지에 대해 의사들과 실질적 대화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건강보험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 사망자의 45%가 호스피스 의료를 받았다고 한다. 찾아보니 우리나라도 2016년 7월부터 말기 암 환자의 호스피스 완화의료에 대해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족의 마지막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맨 끝 두 챕터는 저자 아버지의 암 투병과 저자가 담당한 환자의 암 투병을 병렬하면서 역시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사부곡(思父曲)의 성격을 가진 수기인 셈이다.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목격한 것이 이 책을 쓰는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점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 의학(의사)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죽음을 앞둔 환자의 투병 과정에 큰 혜택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조언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안락사라는 ‘좋은 죽음’을 허용할 경우 오히려 ‘좋은 삶’을 위한 완화의료 프로그램이 발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저자의 아버지도 호스피스 의료를 받았고, ‘평화로움’을 느끼며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4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수술이 어려운 말기 암 진단을 받으신 뒤 마지막 1년 5개월 동안을 떠올려 본다. 아쉬운 점이 많다. 저자의 아버지처럼 ‘의사 결정을 공유하는’ 주치의를 만났을 수는 없었을까.[footnote]종양내과 전문의의 차갑고 짜증스럽기까지 한 표정이 떠오른다.[/footnote]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스스로 써내려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하지 않았을까. 항암치료 덕분에 1년 넘게 생존하실 수 있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받아보시게 할 생각은 왜 못 했을까.[footnote]물론 그 이유는 뻔하다.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footnote] 어머니가 가져오신 갖가지 민간요법 음식들을 못 드시게 막을 수야 없었겠지만, 그래도 당신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질문드릴 수는 있지 않았을까.

이 책에 나온 암 환자들의 고통과 비교해 볼 때, 그래도 아버지는 항암제의 부작용도 조금은 덜 겪으시고, 모르핀 주사 한 번 맞지 않으신 채, 편하게 가셨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도 다행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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