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문학을 읽다 보면 국어 수업 장면이나 문학 숙제를 하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다. 고전을 한 학기 동안 읽고 리포트를 쓰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글쓰기를 연습하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에세이 시험을 보기도 하고 토론 수업이나 연구 수업도 한다.
작품 맥락상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일 때도 그런 장면을 볼 때면 늘 질투심이 섞인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곳에서 국어는 성적 취득을 위한 교과목이 아닌 사고와 언어를 배우는 영역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교육을 받는 것이 상식인 곳에서 나고 자랐다면 나의 삶과 내가 겪은 사회는 좀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이런 수업은 정말 재밌겠다. 이런 글쓰기는 정말 도움이 많이 되겠네… 이 나라의 국어 선생님들은 좋겠다 등등…
글 못 쓰는 게 당연한 삶
경력이 쌓여갈수록, 사회에서 사람들과 만나 일을 해야 하거나 북클럽에서 말과 글을 주고받는 일을 반복할수록 절절하게 더욱 안타깝게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언어가 소통의 도구일지언정 표현의 도구는 아닌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국어 점수가 몇 점이든, 이력서에 올라가는 학교가 어디든, 최종학력이 무엇이든 (심지어 전공이 어문학 계열일 경우조차 상관없이)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 능력은 ‘재능’의 영역으로만 인식된다.
말하고 글 쓰는 행위는 오로지 재능 있는 존재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멀리 떨어뜨려 놓고, 평생을 잘 말하거나 잘 쓰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국어 점수가 좋아도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문과든 이과든 상관없이.
우리는 ‘글 못 쓰는 게 당연한’ 삶을 살다가 사라져 간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나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우리는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표현된 말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무기가 되기도 하고 돈이 되기도 하고, 어떤 감정의 촉매가 되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무인도에 떨어져 있어도 사라지지 않고 누가 빼앗으려 해도 빼앗을 수 없으며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나와 함께할 내 삶의 도구는 언어다. 의사소통을 위해서만 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최고 사양의 컴퓨터를 메신저로만 사용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우리는 우리가 선물 받고 태어난 이 놀라운 재능을 얼마나 낭비하며 살아가는가. 내 안에 어떤 언어가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없는가. 분명히 내 신체의 일부인 근육도 보살피지 않으면 발달하지 않듯 언어도 내버려두면 그냥 거기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닌 채 방치된다.
바로 나의 언어.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남기다
2014년 3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사이가 벌어지고 나서 내 삶에 공허가 들어차기 시작했을 때, 난 매일매일 처치 곤란한 공허와 싸웠다. 나에게 또 친구가 생길까? 이제 쉬는 날에는 누구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지? 타향에서 새로운 인맥을 쌓는 것이 가능할까?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이 서울에서 어디로 가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그 사람들과 내 마음과 내 언어를 나눌 수 있을까 타인의 눈으로 나를 봤다면 전혀 하지 않았을 걱정을 하느라 하루하루가 불면이고 불안이었다. 꾸역꾸역 일을 하고 익숙한 장소에선 흔들림이 없는 외양을 유지했지만 흔들림이 그치지 않았던 나의 내면엔 정말 많은 언어들이 떠다녔다. 불안한 나를 누군가와 만나게 하고 싶었고 그 지겨운 공허와 여유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 당시에는 그것을 글쓰기라고 여기지 않았었다.) 그냥 누군가의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어떤 책 그룹에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책 리뷰를 그것도 아주 어설프고 짧고 부분적인 것으로 포스팅을 했고 몇 분이 좋아요를 누르고 몇 분은 댓글을 달아주셨다. 이후에 난 많은 독서가들과 페친이 되었고 더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공간을 초월한 어떤 영역에서 나를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언제나 조용히 독백하던 나, 언제나 소통에 목말랐던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그곳에선 글이 목소리였고 얼굴이었고 성격이었다. 난 글을 노출하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소통이 즐거웠다. 그렇게 한 2년이 지나고 나니 내 주변은 언어를 나누는 새로운 친구들로 가득 찼고 하루라도 심심한 날이 있었으면 할 정도로 바빠졌다.
그 과정에서 얻은 가장 가치 있는 열매는 ‘나의 발견’이었다. 글로 소통하기 이전에는 나는 나에 대해 잘 몰랐다. 글로 끄집어낸 내가 광장에 나오니 누군가가 그 광장에 나온 나를 다양한 각도로 읽어줬다. 글쓰기의 경험은 경이롭다. 언어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가끔씩 올라오는 몇 년 전 오늘의 글을 읽거나 오래된 일기장의 글을 읽어보면 부끄러워서 얼굴이 진짜로 빨갛게 변할 지경이다. 부끄러울 정도로 참 균형미 없고 감정이 과잉되거나 허세가 줄줄 흐르거나 나 같지 않은 낯선 문장들이 참으로 생생하게 그 기록 속에 살아있다. 나의 역사는 전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글들이 나를 교훈한다. 낯설고 기억도 안 나는 문장들이 또 다른 나라는 걸 알기 때문에 방어 없이 상처 없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누구보다 강한 그 공감의 파장이 나를 치유하기도 한다. 기록된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의 나를 강화한다. 글은 점점 발전하고 윤택해지고 풍성해진다. 남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글은 나아졌다. 글쓰기 연습을 난 어떻게 했나… 안 했다. 아무것도 그냥, 쓰기를 놓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날 나는 완벽하지 않아서 중간에 그만두는 버릇을 버리기로 했다. 글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개인적 글쓰기는 그렇다.) 오늘 쓰는 글이 내가 쓰는, 마지막으로 가장 못 쓰는 글이다. 그러니까 더 잘 쓰는 건 내일로 미루면 된다. 중요한 것은 썼다는 사실 자체다. 그 시간 내가 나를 만났다는 것.
글쓰기는 문장이 아닌 사유의 문제다
책 쓰기 워크숍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그림을 그렸었는지 떠올려보면 정말 별 생각이 없었다. 다만 좋은 문장의 기교를 연습시키는 이론 수업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글쓰기 연습은 사유의 연습이다. 사유가 변하면 문장이 변한다. 자기를 다시 바라보고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느끼고 자아가 확대되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실, 참가자가 그 경험을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내 탓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이 부담되진 않았다. 누구나 자기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난 그 길에 표지판만 꽂아주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주제를 ‘내 일상의 지겨움에 대하여’로 잡았다. 자기 성찰의 첫걸음은 익숙함에 대한 낯선 시선에서 시작되고 그 눈이 떠지면 그다음부턴 각자의 몫이니 좋은 시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일상이 있고 그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지겨움이 있다.
우린 그 지겨움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워크숍 기간인 겨우 4주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을까?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아닌, 참가자들의 실천과 의지가 만들어낸 변화다. 그걸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참 고맙고 기쁜 경험이었다. 한국의 대기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지도 엿볼 수 있었고, 안정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고생을 굳이 선택하는 이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과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며 숨죽여 함께 아파하며 응원하기도 하고 내적 억압을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용기 있는 것인지를 배웠고, 외국과 한국의 교육적 환경이 다름을 통해 우리의 불행을 공감하고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대학생의 답답함이나 타인의 아픔을 받아내야만 하는 입장의 혼란스러움도 지켜봤다.
그렇다. 글을 배우고 쓴다는 것은 나를 더 많이 알아가는 과정이자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타인과 사회를 통해 나를 해석하고 발견하고 지지하고 질책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내 지겨운 일상을 써 내려갔을 뿐이지만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되어 타인과 만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그것이 표현이다. 나의 표현. 소통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건강한 글쓰기의 첫 단계.
“이런 모임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했습니다”
마지막 시간에 소감문을 쓰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 시간은 나에게 참 특별했다. 글 쓰고, 책 읽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삶 자체인 나로서는 “이런 모임을 태어나서 처음 해 봤다”는 말이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어 좋았다든 말을 듣고서야 안심이 됐다. 각자의 글이 자기를 알렸고 서로의 글이 서로에게 배움의 기회가 됐으니 작게는 성공이다. 참가자들의 소감을 짧게 정리해 봤다. 별명은 내가 글을 쓰면서 지어봤다. 당사자 마음에 들면 좋겠다. 이제 우리들의 글이 책이 되어 나온다. 관계를 얻었고 책이 남았다. 잊혀지지 않은 시간이 되어…
“좋은 콘텐츠를 만났고 힐링이 됐다. 시험이 끝나고 무의미했을 시간을 이런 값진 경험으로 채울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런 플랫폼을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린다.” (영감 님)
“생활권을 벗어난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가 재밌었다. 글을 보니까 친해진 느낌이다. 타인의 글과 삶을 나누면서 공부가 많이 됐다.” (바쁘지만 재밌어 님)
“또 오고 싶다. 글을 쓰고 읽는 장소에 가는 것을 보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신기해한다. 아버지의 일로 인한 과정을 지나오면서 도움이 됨. 삶을 관조하는 느낌. 죽음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님)
“늘 이런 워크숍을 진행하기만 하다가 참여자로서 경험하는 것이 편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 (막연한 그리움 님)
“이런 건전한 모임? 취미 생활? 태어나서 처음 해 봤다. 아내와 함께한 경험이라는 것도 좋았고 성찰이 되는 과정이었다. 글쓰기 이전보다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장과 정리의 시간이었다. 감정적 동요의 경험 등 정말 나로서는 너무 놀라운 시간이었다.” (피드백 흡수러 님)
“혼란스럽고 힘들었지만, 쓸 때마다 무언가 바뀌어 있는 것을 느꼈다.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 (변신의 귀재 님)
“이런 바깥 모임은 처음이었다. 새로운 도전이고 재밌었다. 공부가 됐다.” (금발의 데생러 님 )
“번역문을 잘 쓰고 싶어서 시작했다. 글을 쓰다 보니 역자의 서문에 대한 고통의 기억이 떠올랐고 적어도 그 울렁증은 해소됐다. 장문의 글을 썼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 소통하는 워크숍의 경험에 대한 느낌이 좋다.” (호기심 소년 님)
“글쓰기를 통한 자기인식의 목적이 있었다. 질문 고민 성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원래 책을 쓰는 것엔 관심이 없었는데 이 툴을 이용해 글을 써보고 싶다.” (알고 싶어요 님)
“내 인생 최초의 장문의 글쓰기 경험이었고 이런 모임 자체가 색다른 기회였다. 개인적 성장의 경험이다. 자기 인식의 시도를 이전에는 두려워했었는데 지금은 시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게 되어 기쁘다.” (유쾌한 걱정러 님 )
나도 이제 나만의 글을 쓰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