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소위 막장 드라마 전성시대입니다. 시청률 지상주의에 편승한 막장 드라마 현상은 시청자가 부추기는 걸까요? 필자는 막장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희망과 상처를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아보자고 말합니다. 마음 하나 제대로 터놓을 수 없는 답답함을 막장 드라마가 대신 털어주니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막장 드라마가 있어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집자) [/box]
저는 소위 ‘막장 드라마’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고 선정적인 성인용 오락거리도 존재하는 만큼 막장 드라마도 필요한 장르라는 걸 인정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TV 드라마 편성표가 ‘막장’으로 채워지는 건 반대하는 겁니다.
막장 드라마는 음식으로 치면 인공조미료를 많이 쓴 자극적인 인스턴트 푸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첫맛은 특이하고 맛있다고 느껴지지만 먹을수록 몸에 좋지 않고, 결국은 물리는 음식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무엇에 처음에는 짜릿함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더욱 자극적인 걸 찾게 되고 웬만한 자극에는 쉽게 무뎌지곤 합니다.
전쟁을 잘 모르던 과거 사람들은 칼싸움을 흉내 낸 사당패 놀이만 봐도 재미있다며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웬만한 액션으로는 관객들이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전투 장면이나 사람들이 끝없이 죽어 나가는 장면쯤 되야 소름이 돋았다고 평가하죠.
오죽하면 실제 전쟁터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가 아닌 ‘멋지다’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지면 어지간한 삼각관계나 불륜으로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게 되죠.
시청자 작가 연기자 방송사가 다 아는 비밀
시청자들은 왜 막장드라마를 보는 걸까. 방송국은 시청률에 막대한 자본이 걸려 있으니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서라도 수익을 올리겠다고 변명합니다. 작가와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좋아하니까 만든다고 말합니다. 시청자들 중 다수는 방송국에서 막장 드라마만 방송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소위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을 올려주는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막장 드라마 보는 이유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는 자극적이고 작위적인 설정의 결정판입니다. 작가 본인은 음식으로 중병도 고칠 수 있다며 각종 잡다한 지식을 설파하기 바쁘지만, 오로라 공주야말로 인공조미료로 범벅이 된 드라마죠.
동성애자인 남성이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성임을 깨닫고 이성애자가 되는 일이 실제로 종종 일어난다지만, 극 중 나타샤(송원근)처럼 박사공(김정도)이 결혼하자마자 변신하는 사람이 흔할까요? 오로라(전소민)에게 실연당한 설설희(서하준)가 갑자기 말기 암에 걸리는 일은 쉽게 일어나는 일일까요?
한마디로 이 모든 설정이 개연성과는 상관없는, 극 중 등장인물의 눈물 콧물 다 뽑아내 볼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쇼라는 걸 시청자도 알고, 작가도 알고, 연기자들도 압니다. 드라마는 시청자의 희로애락을 자극하기 위한 부자연스러운 설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막상 그 ‘이상한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는 시청자 중에는 일부러라도 드라마를 보고 화내고 눈물 흘리지 않으면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극 중 인물들의 감정에 빗대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거죠.
막장 드라마를 보는 이유
제가 느낀 바로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카타르시스입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은 둥글게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싫은 걸 싫다고 말하고, 좋은 걸 좋다고 말했다가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별난 사람이라며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희로애락이 분명할 정도로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는 건 세상살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서비스업 종사자는 진상 고객에게도 비위를 맞춰줘야 하고 하청업체 직원은 갑 노릇을 하는 업체에 허리를 굽혀야 합니다.
오래전부터 사회 문제로 대두한 인터넷 악플도 심층적으로 파고들면 현실에서는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편견이나 분노를 인터넷에서라도 가감 없이 털어놓고 싶은 심리가 섞여 있습니다. 슬픈 일이 있어도 드러내고 울 수가 없을 때 화나는 일이 있어도 그 분노를 표현할 수 없을 때 드라마를 보면서 대신 눈물을 흘리고 욕을 하며 쌓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죠. 과거 못된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 이야기가 유난히 많았던 것도 가족 관계에 스트레스를 받은 주부들의 바람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드라마보다 더 울컥한 댓글들
예의 막장 논란에 휩싸여 있는 오로라 공주는 아들 설설희가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설국(임혁)과 안나(김영란)가 슬프게 우는 장면이 많은 시청자에게 인상적으로 기억됐던 듯합니다. 두 분 다 노련한 연기자답게 갑작스럽게 알게 된 슬픔을 절절한 눈물로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직접 보지는 않아도 사진만 봐도 김영란 씨라면 어떻게 연기했을지 알 것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슴을 움직이는 슬픈 연기였다고 극찬했고, 막장 드라마에 아까운 배우들이라고 지적했죠.
그런데 댓글을 읽다 보니 연기만큼이나 울컥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가족이 죽어도 울지 못했지만, 드라마 속에서 슬프게 우는 연기자를 보면서 같이 운다는 내용의 댓글도 있었고 자신도 암에 걸렸는데 드라마 속 주인공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댓글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작위적인 설정이라도 좋으니 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발산하고, 또 드라마를 통해 희망을 꿈꾼다는 내용이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막장 드라마가 필요한 이유는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드라마 덕분에 희로애락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물론 이런 자극적인 내용 말고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드라마였으면 더 좋았을 테고, 우리 사회가 개인의 희로애락에 좀 더 관대했으면 좋겠지만, 막장 드라마와 시청률을 최고로 여기는 방송국만큼이나 사회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것을 즐길 권리가 있는 시청자를 위해서도 막장 드라마는 점차 줄어야 합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해소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당분간은 막장 드라마의 인기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풍요로워진 만큼이나 더 기댈 곳 없는 씁쓸한 우리 시대의 단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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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블로그인 [우리집 고양이는 TV를 본다]에도 실렸습니다. 글의 표제와 본문, 삽화 등은 슬로우뉴스 편집원칙에 따라 수정, 보충했습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