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이나 사건, 행위 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중요한 일입니다. 기존에 있는 단어를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그 뉘앙스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어떤 큰 사고가 나거나 살인사건이 나면 단순히 피해자 이름이나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엔 주로 사고나 사건의 행위자 이름을 붙이거나 행위를 함께 표기하는 분위기인 듯합니다. 이런 분위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겠죠.
‘나영이 사건’이 아니라 ‘조두순 사건’인 이유는 피해자 이름으로 사건을 호칭할 경우 잘못 없는 피해자의 이름이 계속 회자하며 피해자 측의 고통이 커질 수 있으니 그보다는 가해자의 이름을 더 기억하고 조심하자는 뜻이 아닐까요. ‘윤 일병 사망사건’이 아니라 ‘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이라 부르는 이유는 윤 일병이 그냥 자연히 사망한 게 아니라 제28보병사단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폭행을 해서 사망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가 아니라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호 원유 유출 사고’라 부르는 것 역시 태안에서 기름이 그냥 쏟아진 게 아니라 잘 항해를 해야 할 두 배가 침몰한 게 원인이기 때문이겠죠.
JTBC 뉴스룸을 진행하는 손석희 앵커는 ‘무상급식’ 혹은 ‘의무급식’이란 표현 대신 ‘보편적 급식’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보편적 급식’이란 표현이 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 중에 바꿔 쓰면 좋을 표현들이 뭐가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혼자 궁리한 생각이라 적절치 않은 예가 섞여 있을 수 있음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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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뉴스도 아래 예시에 대해 큰 고민 없이 쓴 표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표현을 골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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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vs. 노동자
근로자란 근로(勤勞)하는 자입니다. 근로의 사전적인 뜻은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함”입니다. 그럼 노동의 사전적인 뜻은 뭘까요? “몸을 움직여 일을 함”입니다.
부지런하지 않다고 해서 게으르다고는 할 수 없음에도 정부나 기업은 ‘노동자’라는 표현보다 ‘근로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모두 부지런히 일하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일까요? 영어로 따지면 ‘worker’가 아니라 ‘hard worker’, ‘diligent worker’가 한국의 기본 단어라는 겁니다.
노동자는 돈을 받은 만큼 일을 하면 됩니다. 반대로 고용주는 일한 만큼 돈을 주면 됩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고용주 혹은 사장을 “근(勤)고용주”, “미덕(美德)사장”, “선(善)대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고용주, 사장, 대표라고 하죠.
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막 열심히, 부지런히 이런 단어를 끼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랍니까?
MAKE SURE THIS DON'T APPLY 2U pic.twitter.com/KYqjpJUqgF
— PC (@PCManpower) October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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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퇴근 vs. 퇴근
한국은 퇴근 시간에 제때 퇴근하면 눈치를 보는 회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칼퇴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퇴근은 퇴근일 뿐인데 말이죠.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퇴근하면 조기퇴근(조퇴), 정시에 퇴근하면 칼퇴근이라고 하면서, 정작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퇴근하는 말을 부르는 표현은 없습니다. 밤까지 일해야 겨우 ‘야근’이라고 불러줄 뿐입니다.
혹시 한국 사회는 늦게 퇴근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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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 여검사, 여직원, 여OO…
위의 ‘칼퇴근 vs. 퇴근’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여고생·여대생·여검사 등은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지만, 남고생·남대생·남검사 등의 단어는 쉽게 볼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영미권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는 별 이유 없이 성별을 지칭하거나 직업에 성별이 명시되는 일을 점점 줄여가고 있습니다. 파이어맨이 아니라 파이어파이터, 폴리스맨이 아니라 폴리스 오피서 등 성-중립적인 호칭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는 이야기는 학교 수업 시간에도 나올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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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값 vs. 뇌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떡값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설이나 추석 때 직장에서 직원에게 주는 특별 수당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공사 입찰 따위에서, 담합하여 낙찰된 업자가 이에 관련된 다른 업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담합 이익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바치는 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국어사전의 뜻을 보면 1번을 제외하고는 뇌물에 해당하는 뜻입니다. 즉, 불법적인 행동이라는 거죠. 하지만 ‘떡값’이라는 단어를 들어서는 그 불법성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뇌물을 뇌물이라 칭하지 않고 비유적인 느낌을 주는 ‘떡값’으로 호칭하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국가를 위해 공무를 보는 분들과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나라를 위해 큰 사업 하는 분들의 행동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던 시절의 관행이 굳어진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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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예우 vs. 전직 공무원 횡령
‘전관예우’라는 단어도 참 희한한 표현입니다. 주로 부장급 이상의 판사나 검사 출신 변호사 등을 대상으로 많이 이용하죠.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재임 때와 같은 예우를 베푸는 일.
하지만 우리는, 미디어는 흔히 이 단어를 전직 공무원이 자신의 예전 직위를 이용해 부당할 정도로 거액의 임금을 받거나 일자리를 얻는 것에 사용합니다. 단지 예전에 높은 직급의 공무원이라고 해서 퇴임 후에도 더 나은 연봉이나 일자리가 보장된 것은 아닌데 말이죠.
고위 공무원들이 자신이 받았던 ‘전관예우’들이 밝혀지면 사과를 하고 관직에 오르지 못하거나 수사가 진행되는 걸로 보아 분명 불법적이거나 매우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렇다면 단순 예우가 아니라 전직 공무원이었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돈이나 일자리를 횡령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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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다운 or 코드인사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인사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했던 단어는 바로 ‘코드인사’였습니다. 즉,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자신과 정치적·이념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자리에 앉힌다는 것이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등장한 표현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독단적으로 자신의 정치적·이념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은 ‘코드인사’가 아니라 ‘톱다운'(top-down) 방식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개념인데도 왜 다른 느낌이 드는 걸까요.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주고받는 인사(코드인사)라는 개념보다는 상급자가 알아서 결정 후 하명을 통해 정책을 결정한다는 느낌(톱다운)이 그나마 조금 더 낫게 느껴지는 건 단지 기분 때문일까요?
한쪽 정파에서 상대 쪽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코드인사라 하고, 체계성을 강조하려 할 때는 톱다운이라고 합니다. 혹은 언론에서도 비판의 강도가 셀 때는 코드인사, 약할 때는 톱다운이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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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대사 vs. 광고모델
공공기관에서는 자신들의 사업을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 광고를 찍습니다. 유명인이 등장하면 광고효과가 크다고 생각해서인지 점점 연예인 등 유명인을 광고모델로 기용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공기관의 광고모델은 ‘홍보대사’라는 표현을 씁니다.
물론 무보수로 홍보대사를 하는 유명인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이나 동계유스올림픽 등등에 무보수로 홍보대사 활동한 김연아 선수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델료를 받거나 교통비, 각종 물품을 사례로 받으며 홍보 업무를 수행하는 거라면 홍보대사가 아니라 광고모델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무보수로 한다면 지금처럼 홍보대사라고 부르고요.
솔직히 요즘은 각 정부기관에서 페이스북, 네이버 등 유명 인터넷 서비스에 돈을 들여 광고하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잖아요.
“공공기관이 일이나 잘할 것이지 고작 성과를 부풀리는 홍보에 국민의 세금을 들이다니!”
혹시 이런 시선 때문에 표현이 점점 이렇게 흘러간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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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뭐가 있을까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쓰지만 사실 당연하지 않은 단어들은 찾아보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의 인식체계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가 사회가 점점 밝아지거나 우리의 생활 패턴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서 다른 단어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그 변화의 방향이 우리 삶에 차별을 없애고, 우리 사회를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쪽으로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어떤 게 있을까요?
언론에서 “혈세”란 단어를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게임 중독이라는 말이 더이상 통하지 않고 근거를 찾기 힘드니까 남용되는 게임 과몰입 같은 표현이 있겠네요. 게임계에서 치를 떠는 표현입니다.
노동자 근로자 말씀하시는 거 보니 항상 생각나는게 떠오릅니다. 노조는 노동조합이라고 부르면서 일하는 사람은 근로자, 그들을 기념하는 날은 근로자의 날, 그래놓고 정부 부처는 고용노동부지요. 모두가 한 개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쩜 그리도 철저하게 갈가리 찢어놓나 싶습니다.
분명 실업 문제가 심각한데 실업자라는 표현을 회피하면서 취준생, 구직 준비자, 구직 포기자 따위로 호칭을 바꾸는 모습도 역겹습니다.
‘열정 페이’는 비아냥 내지는 풍자의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정식 명칭은 ‘임금 수탈’이겠지요.
게임 과몰입은 예전부터 게임계에서 쓰고 있는 표현일텐데… 그리고 과몰입 현상은 존재하긴 하죠. 질리거나 재미없어지면 때려치운다는 점에서 중독은 아니지만.
수탈이라 함은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인데, 임금 수탈이라 하면 계약된 임금을 주지 않거나 혹은 주었던 임금을 다른 명목으로 갈취했을 경우에 더 어울리는 단어 같습니다. 열정 페이를 다른 이름으로 한다면… 음, 노동력 착취나 노동력 수탈이 더 적절하지 않나 해요. 근데 그보다는 열정페이라는 표현이 더 여러가지 현상을 한번에 설명하는 효과가 있으니 자주 쓰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