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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벳과 여신
- 초월적 남자, 영적 여자: 뇌와 골반, 섹스와 출산 그리고 철분
- 살기 위해 모인 10명의 여자들: 부족과 여신의 탄생
- 어머니 살해와 희생양: 기독교 신화의 기원
- 이집트의 여신 전성시대 (ft. 남신 아몬과 유일신 아톤의 등장)
- 페니키아와 알파벳 그리고 카드모스 신화
- 구약, 여신을 지우고 야훼만을 남기다
- 그리스 문명의 이면: 여성 혐오, 강간, 동성애
- 인더스 문명과 불교: 신 없는 종교의 탄생
- 노자의 후예들, 노자를 죽이고 도교만 살리다
- 솔로몬 성전의 파괴와 복구와 파괴: 메시아 사상의 탄생 과정
- 산 예수 vs. 죽은 예수 (혹은 영지주의 vs. 바올로)
- 배제된 여신의 부활: 바울로의 삼위일체 vs. 민중의 마리아
- 고대 유럽문명의 종말(ft. 히파티아 살해)과 이슬람의 확산
- 교황은 왜 사제 결혼을 금지하였나 (ft. 교회 여성 혐오의 기원)
- 기독교가 낳은 서자들: 교황들의 타락과 로마 대약탈
- 루터와 칼뱅: 누구를 위한 종교혁명이었나
- 가톨릭의 혁신 vs. 개신교의 보수화 (ft. 농민전쟁과 재세례파 학살)
- 종교재판의 고문 기술자들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 악마들
- 잉글랜드, 종교적 살육의 연대기: 헨리 8세~찰스 1세
- 종교전쟁 혹은 대학살: 프랑스, 이탈리아, 플랜더스
- 마녀사냥: 기독교 유럽의 체계적인 ‘여성’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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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미개한’ 몽골제국의 궁궐을 방문한 유럽인들은 궁궐 안에서 다양한 종교가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서유럽의 기독교인이 유대인을 그토록 박해하는 동안, ‘야만족’이 지배하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에서는 유대인과 기독교도가 화목하게 공존했다. 독일,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피로 물들인 대규모 종교전쟁과 유혈 사태는 무슬림 세계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종교 때문에 서로 죽고죽였다는 역사기록은 찾을 수 없다. 신대륙의 그 ‘원시적인’ 인디언들도 종교적인 이유로 고문하거나 살인하지 않았다. 왜 유럽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종교라는 탈을 쓴 학살의 피날레
지금까지 ‘종교’라는 탈을 쓰고 무수한 사람들을 죽인 유럽의 역사를 살펴보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서막에 불과하다. 유럽에서 벌어진 온갖 종교전쟁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벌어진 마귀 사냥(witch hunt)이다.
마귀(witch)는 악마에게 세례를 받고 마법을 행하는 사악한 이들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마귀로 몰려 죽은 사람은 거의 모두 ‘여자’였다. 마귀로 몰려 죽은 사람들 중 여자가 80% 이상 차지했는데, 특히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100%에 육박했다.
이 기괴한 역사적 사건은 왜 일어난 것일까?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이 여자들이 가진 재산을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친구도 없는 이들이었다.

물론 인류의 신화와 관습을 살펴보면, 남자들이 여자가 지닌 고유한 내적인 힘을 무서워한다는 증거는 예로부터 무수히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난 수의 여자를 살해한 문명은 존재한 적이 없다. 처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식 역시 역사적으로는 매우 드문 행위였다. 이집트도, 메소포타미아도, 페니키아도 마녀를 불태워 죽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무수한 신이 지금까지 존재했지만, ‘마귀는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신은 구약의 야훼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유대인의 역사를 통틀어 마귀사냥을 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800년 카롤루스 대제는 마법을 부렸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살인사건을 중범죄로 처벌한다. 9세기 교황 보니파시오 6세와 리옹의 대주교 아고바르(Saint Agobard) 역시 마법에 대한 믿음은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13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늙은 노파가 폭풍이나 역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을 헛소리라고 치부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와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1460년 구텐베르크의 인쇄 공장이 있던 마인츠로부터 몇십 km² 거리에 있는 하이델베르크 광장에서 여자 12명이 마법을 부렸다는 이유로 불태워진다. 이것이 공식적인 첫 마녀사냥이다. 이로부터 8년 뒤 교황은 마귀로 고발당한 사람은 재판 전에 고문을 해도 된다는 특별법을 반포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마녀사냥은 1484년 12월 5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라틴어: Innocentius PP. VIII, 1432-1492, 재위: 1484-1492)가 특별 교지(‘지고의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Summis desiderantes)를 내리면서 시작된다. 종교재판소 조사관들에게 ‘자궁에서 나오는 아기와 들판에서 나오는 열매를 말라죽게 만드는 마술을 부리는 이들이 있다’면서 이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밀고가 밀려들어왔고, 1485년 이탈리아 북부 도시 코모에서 여자 41명을 마귀 혐의로 산 채로 불태운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32년 전 일이다.

가톨릭 성직자 하인리히 크라메르(Heinrich Cramer)는 1486년 훗날 마녀재판의 지침서로 활용되는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Malleus maleficarum; 마귀 잡는 망치)을 독일 슈파이어에서 첫 발간한다. 이 책에는 인노첸시오 8세의 교지 ‘지고의 것들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복사본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교황의 칙서에는 독일 지역에 주술이 퍼져 있음을 개탄하며 하인리히 크라메르의 조사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메르는 그 칙서를 통해 이 책에 교황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책은 광신교가 쓴 두서 없는 모순으로 가득한 책이었으며,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일부 교수들은 추천이 날조됐다고 주장하거나 공증이 있는 추천사를 써준 교수들도 “내용을 대충 보고 추천했다”고 고백하거나 “추천사를 철회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참고로 이 책은 현재 공저자의 저작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공저자인 야콥 스프렝어(Jakob Spenger)는 크라메르 사후 24년 후, 책의 첫 출판 33년 후인 1519년 저자로 추가되었다.
불행한 사실은, 이 책이 이제 막 발명된 인쇄기술을 활용하여 유럽에서 가장 널리 퍼져나간 최초의 책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마녀 감별법 (via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은 마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모든 마법은 육욕에서 비롯되는데, 특히 여자는 육욕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자신의 육욕을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여자들은 악마와도 서슴지 않고 정을 통한다.” (Montague Summers, ed. and trans. ‘Malleus Maleficarum’, part 1, question 6:47)
이 책에 따르면, 마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 있으며, 곡물이 시들고 아이가 유산된다. 또한, 마녀는 기독교도의 아이를 유괴하여 악마 숭배의식을 하면서, 아이의 심장을 꺼내 구워 먹는다. 또한 마녀는 달밤에 자연 속에서 춤을 추고 섹스를 하고 출산을 한다.
사실 이러한 마녀의 이미지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고대여신들의 의례나 속성을 그대로 가져다가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뒤섞어 만들어낸 ‘가짜뉴스’에 불과했다.
마귀는 이단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단은 기독교 교리에서 일탈한 사람인 반면, 마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악마의 명령을 따른다. 교회의 권력자들은 마귀들이 자신의 관할 교구에 잠입해있다고 확신했으며, 그들을 뿌리뽑아 순진한 기독교도를 보호해야 한다는 망상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마귀 잡는 망치]는 마귀를 잡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한다.
1. 밀고
마귀사냥꾼이 마을에 들어오면 우선 밀고자들을 고용한다. 밀고자들은 마을에 이상한 질병에 걸리거나 기이하게 죽은 사람들, 폭풍우, 흉작, 가축의 죽음 등 나쁜 자연현상을 샅샅이 보고한다. 특히 갑작스럽게 ‘발기부전’을 겪는 사람들을 알아내 보고했다(발기부전은 마녀를 찾아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2. 체포
이런 현상을 유발한 주요 용의자로는 대개 과부, 노처녀, (실제로 남자를 ‘홀리는’ 힘이 있는) 섹시한 여자, 치유사들이 지목되었다. 여기에 잔소리가 심한 여자, 말이 거칠고 시끄러운 여자, 보기 흉한 쭈그렁 노파, 심술궂은 할멈들도 덤으로 체포했다.
3. 감별
이들에 대한 ’재판’은 다른 법적 절차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이 마녀인지 아닌지는 판단하는 방법은 심문이 아니라 몸에서 ‘마귀의 젖꼭지’를 찾는 것이었다. 마귀의 젖꼭지는 악마들이 이들의 몸에서 피를 빨아먹은 흔적으로, 흔히 악마의 표식(devil’s mark)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마녀로 고발당한 여자가 들어오면 마녀 감별사들은 먼저 발가벗긴 뒤 거친 손으로 온몸을 매만졌다.

악마의 표식을 발견하면 감별사는 손에 감추고 있던 작은 바늘로 찌른다. 찔러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녀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감별은 대개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들이 진열된 고문실에서 이루어졌다. 소름끼치는 공간에 끌려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완전히 발가벗겨진 다음, 눈을 가리고 차가운 바닥에 던져진다. 이런 상태에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사소한 자극은 미쳐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눈속임이 더해졌다. 마녀감별사들은 마녀를 많이 찾아낼수록 돈을 더 받았다. 더욱이 사기꾼이나 건달들이 대부분 마녀감별사 행세하고 다녔다. 이들 중에는 돈을 더 벌기 위해 찌르면 뒤로 밀려나는 바늘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통해 동네에 곧바로 소문이 퍼져나갔고, 이는 마녀로 확정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마녀로 찍히는 순간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 고문
마녀로 확정되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일명; 마녀의 망치)의 지침에 따라 공범자를 캐묻는 절차에 들어간다. 마녀들은 마녀 집회(coven)에 정기적으로 참여한다고 여겨졌기에, 다른 마녀 이름을 대야 했다. 당연히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젖가슴을 집게로 잡아 뜯거나 음부를 불로 지지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아무리 굳센 여자라고 해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고한 친구나 이웃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

고문을 하느라 땀을 뺀 마녀감별사들과 성직자들은 매일 저녁 일을 마치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자신들의 업적을 자축했다. 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마녀들을 그토록 많이 색출해내는 이들을 마을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자로 대접했다.
5. 화형
모든 과정을 끝낸 마녀들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화형대에 오른다.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비명소리는 군중에게 더 깊은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산 채로 불태워졌다.

마녀화형식은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집행되었다. 화형식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마귀로 의심받았다. 특히 마녀의 자녀들은 화형대 바로 앞으로 끌려가 엄마가 타 죽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아야 했다. 아이들이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리려고 하면 똑바로 보라고 가차없이 매질을 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마녀사냥 경쟁
그래도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과 다르게 여자들을 잡아죽이는 일을 삼가하지 않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지독하게 잡아죽였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마녀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는다. 싸그리 불태워 죽여라.”
(William Edward Hartpole Lecky, “History of Rationalism in Europe’, 1:62)
칼뱅은 이렇게 말했다:
“성서는 마녀가 존재하며, 마녀는 도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느님이 주신 법이 만물의 법이다.”
(Paul Johnson, ‘A History of Christianity’, 309)
뒤늦게 광란의 발작 속에 뛰어든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이 그동안 불태운 마녀의 수를 따라잡기 위해 더 열심히 분발했다. 종교재판소처럼 체계적인 관리기구가 없었던 프로테스탄트는 더 간단한 방법으로 마녀를 감별했다.

영국에서 마녀사냥이 가장 극에 달했던 것은 1645-47년으로 퓨리턴이 영국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2년 동안 200여 명이 마녀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독일에서는 가톨릭교회가 3명을 불태울 때 프로테스탄트도 한 명 꼴로 불 속에 넣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서로 죽고 죽이는 혈투를 벌이는 동안에는 마녀사냥이 다소 잠잠해지지 않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에도 양측 모두 마녀를 사냥하고 고문하고 불태우는 일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녀사냥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돈과 자원은 항상 남겨두었다.

참혹한 숫자들
유럽의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녀사냥꾼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야만 했다.
1510년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에서 마녀 140명이 불 태워진다. 브레시아에서 10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코모에서는 1510년부터 4년 동안 300여 명이 불에 태워진다. 이 작은 호반의 도시의 당시 인구가 5,000명도 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것이었다.
1589년 퀘들린부르크에서는 단 하루 동안 133명이 마녀로 몰려 처형되었다. 엘왕엔에서는 1611년부터 7년 동안 390명이 불태워졌다. 아이슈탯에서는 1629년 한 해에만 274명이 불태워졌다. 이 작은 도시는 1590년, 1603-30년, 1637년 세 차례에 걸쳐 가혹한 마녀사냥의 불길이 휘감았다. 오펜부르크와 그 주변지역에서는 102명이 불태워졌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화형당한 이들의 숫자에 불과하다. 고문을 당하다 죽거나 자살한 사람들, 고문 중에 미친 사람들도 많았다.
예수회 사제 페테르 빈스펠트(Peter Binsfeld)는 종교재판관들과 함께 트리어 인근 마을 두 곳을 돌며 마녀를 사냥했는데, 그들이 떠난 뒤 이 마을에 남은 여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모든 어머니, 아내, 할머니, 이모, 사촌, 딸, 누이가 싸그리 몰살된 것이다. 마을사람들 모두 고아가 되고 홀아비가 되어 남겨졌다.
마녀사냥 초창기에는 그나마 임신한 여자는 고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호의도 1576년 뉘른베르크에서 끝난다. 더 나아가 몇몇 종교재판소에서는 마녀가 낳은 아이들, 특히 딸에게 관심을 돌렸다. 마녀가 어둠의 기술을 딸에게 전수해준다는 망상이 공식화된 것이다. 실제로 1623년부터 1631년까지 뷔르츠부르크에서는 6-11살 소녀 41명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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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동족 여자는 물론 아이들까지 고문하고 살해할 만큼 미친 집단은 인류 역사상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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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2년 폴란드에서 처형당한 여자가 ‘공식적인 기록상’ 마지막 마녀다. 앤 루엘린 바스토우는 [마녀열풍; Witchcraze]이라는 책에서, 재판 기록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마녀사냥으로 목숨을 잃은 이는 10만 명이 넘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최근에는 100만 명이 넘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50만 명 정도가 마녀 혹은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처형됐다고 본다.

여성에게 각인된 끔찍한 트라우마
15세기 시작되어 300년 동안 자행된 이 가혹한 테러정치는, 살아남은 여자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을까? 마녀사냥은 어느 지역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유럽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다. 산 사람을 불에 태우는 장면을 평생 한 번이라도 직접 목격한다면, 극심한 심리적 쇼크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마녀사냥은 여자끼리의 우정을 극도로 위험한 것으로 만들었다. 가끔 만나 수다를 떨던 옆집 친구가 체포되는 순간, 고문과 협박 속에 자신의 이름을 불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유럽 여자들은 온순하고 조용하고 거슬리지 않는 몸가짐을 익혀야 했다. 다른 여자와 절대 교류하지 않고 집안에만 붙어있어야 했다. 불에 달군 뜨거운 집게에 젖가슴이 잘려나가지 않으려면 남편에게 순종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마녀사냥이 극심한 기간에 강간 사건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가 반항하거나 고발하더라도, 여자에게 홀렸을 뿐이라고 주장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고문실로 끌려갔다.
고대로부터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아 온 여자들의 지혜―약초나 자연에 관한 풍부한 지식―는 ‘마녀’라는 딱지와 함께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300년 동안 지혜로운 여자들을 몰살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서양은 인류가 수만년 동안 쌓아온 소중한 문명의 절반을 불태워버렸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마녀다!’라는 외치는 순간, 여자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남자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다. 이후 여자들은 미치광이들이 고문 기구를 들고 쫓아오는 꿈에 시달리며 매일매일 불안 속에 살았다. 골수 깊숙이 스며든 여자들의 이러한 불안은 무미건조한 통계 수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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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출판사 크레센도와의 협의 하에 [알파벳과 여신: 여성혐오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했는가?] (레너드 쉴레인)에서 발췌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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