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트렌드에 무지하고, 때로는 트렌드에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내 감수성의 뿌리는 여전히 90년대에 있고, 내 온라인 정체성의 ‘시효’는 아마도 2010년대 초반까지였던 것 같다. 2010년 중반 이후로는 점점 더 시대에 겉돈다. 유효기간이 훨씬 지나버린 식빵처럼, 내 영혼의 강산, 점점 더 푸르게 푸르게 곰팡이 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트렌드를 그저 단순히 ‘유행’이나 ‘대중 소비심리’로 한정하지 않고, 당대의 사회와 경제, 문화를 꿰뚫는 시대정신으로까지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면, 트렌드와의 불화 혹은 트렌드에 대한 의식적인 무시는 현명하지 않다. 시대에 ‘아부’할 필요는 없지만, 시대를 ‘무시’할 필요도 없다. 물론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어느 시대 어느 시절을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adsense]그럼에도, 다시 강조하거니와, 시대와의 불화를 의도할 필요는 없다. 그 시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시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욕망, 공동체의 소망을 탐구하는 일은 어쩌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실천해야 할 최소한이기도 하다. 그저 고립한 외로운 개체가 아니라 ‘그때 거기’에서 함께 꿈꾸기를 소망한 ‘우리’가 있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겐 있다. 그래야 ‘스스로’ 변할 수 있고, 그래야 ‘함께’ 호흡할 수 있다.
트렌드 연구자로서 해마다 숫자가 바뀌는 ‘대한민국 트렌드’를 써내는 윤덕환 박사를 다시 만났다. 2019의 트렌드에 관해 듣기 위해서 그리고 2019년과 불화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변화하고, 함께 조화롭게 어울리기 위해서.
- 인터뷰이: 윤덕환 박사
- 인터뷰어: 민노씨
- 2019년 1월 18일 합정 인근 카페 (+ 이후 전화와 이메일로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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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공간’이다
= 두 번째 인터뷰다.
그러게.
- 참고 – “1인 체제” 개인화된 사회성의 출현 (2018. 8. 28. 첫 인터뷰)
= 새 책(‘2019 대한민국 트렌드’) 쓰느라 고생했다.
해마다 하는 일이다.
= 책 서문을 보면 ‘공간’을 강조하고 있는데.
트렌드 변화는 여러 영역에서 일어난다. 우리(트렌드 연구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동 변화와 그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는 심리적 공간을 규정하는 게 중요하다.
= 행동의 변화와 그 변화가 일어나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심리적 공간’?
그렇다. 최초의 아이디어는 사회심리학의 아버지 쿠르트 레빈(Kurt Lewin, 1890~1947)가 제안한 ‘생활공간(Life Space)’이라는 개념이다. 레빈은 인간 행동을 그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고, 그 사람의 고유한 특성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결과(함수)라고 봤다. 그리고 현대 사회심리학의 토대가 되는 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 ‘생활공간’이라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좀 더 그 개념을 설명하면?
레빈의 생활공간은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물리적 공간이면서 동시에 어떤 개인이 그 자신을 둘러싼 대상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공간’으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
= 책을 보면 저자들(마크로밀 엠브레인)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소비자의 생활공간을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렇다.
1. 생산활동을 하는 회사/조직생활의 공간
2. 일상생활의 공간
3. 문화생활의 공간
4. 한국사회라는 가장 큰 공간.
우선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발현되는 ‘직장’이나 ‘조직’이라는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속에서의 내가 투영되는 ‘일상적인 공간(가정에서의 공간)’이 있고, 자신의 이상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적인 공간’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것을 시공간적으로 포괄하며 국민 혹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발현되는 ‘한국(사회)’이라는 공간이 있다.
= 본격적인 인터뷰 전에 하나만. 중앙일보의 ‘인구 1위 오른 50대, 노후 빈곤 위험하다’는 기획 기사를 보면, 사례로 월 1,200만 원 수입의 맞벌이 부부가 나온다. 기자도 일종의 트렌드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왜 이런 ‘공감 파괴’ 기사가 나올까.
기자들의 현실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사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 기사가 인구에 회자할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의도했을 것으로 본다. (= 왜?) 자신의 정체성, 자신이 지지하는 계층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기사니까. 대한민국 3%를 위한 신문사라는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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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조건
= 사회적인 역할이 공간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면서, 소비자의 행동 변화, 특히 네 가지 맥락, 즉 국민(한국), 직업인(직장), 생활인(일상생활), 시민(문화생활)이라는 역할 속에서 어떻게 개인의 행동이 변화하는지 관찰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또 중요한 개념이 있는지.
‘시간’이다. 가령 오픈마켓 장바구니에 자신이 사고 싶은 물건을 담아두는 행위는 경제적인 행위인가, 아닌가?
= 관점에서 따라서는 경제활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대개 어떤 행위의 준비(예비)행위는 실질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형법은 많은 범죄를 규정하지만, 살인죄 등과 같은 중대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예비행위(준비행위)를 처벌(형법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로 평가)하지 않는데.
과거보다 점점 더 돈보다 ‘시간’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돈’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쓰는 행위뿐만 아니라 ‘시간’이라는 점점 높은 가치를 가지는 자원을 어떻게 쓰는가도 중요하고, 그렇게 ‘시간’을 들여 준비하는 행위는 소비행위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본다. 점점 더 재화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소비자의 선택 가능성이 커지면서 시간과 관심이라는 자원이 ‘돈’이라는 자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더 중요하고 제한된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 인간의 행동 변화가 네 가지 맥락에서 바뀐다고 이야기했는데, 관련해서, 어디서 들었는지는 이젠 기억나지 않는데, 한 일본의 경제학자가 인간은 쓰는 시간을 바꾸고, 사는 공간을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중에서 가장 쓸데없는 게 ‘새로운 결심’이라고 말했다고 하는 게 떠오른다. 어떻게 생각하나.
오마에 겐이치(Omae Kenichi, 大前硏一)가 한 말이다. 중요한 건 세 가지를 동시에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오마에 겐이치, ‘프레지던트’, 2005년 1월 11일)
= 세 가지를 동시에 바꾸는 건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래서 우선순위가 필요한 것 같다. 시간, 공간,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인데. 만나는 사람은 3순위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을 바꾸면 만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뀌니까.
=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 중에서 어떤 게 더 우선순위인가.
일률적인 것 같지 않다. 시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 있고, 공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 윤 박사 경우엔 어땠나.
내 경우에는 아침에 쓰는 시간을 바꿨다. 기존에는 조금 일찍 출근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면, 지금은 회사에 도착하는 시간을 최소한 ‘2시간 반’ 이상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시간에 책도 읽고, 구상하고, 글도 쓰고. 신문 읽고, 라디오 듣고, 공부도 하고, 전화로 일본어 수업도 듣는다.
= 그래서 몇 시에 출근한다는 소린가.
6시 30분에서 7시쯤.
= (…..)
(…..)
= 그랬더니 어떤 변화가 생겼나.
기존에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저녁 남는 시간에 책을 쓰거나 하는 생산적인 일, 즉 ‘아웃풋’ 활동을 했다. 공부하는 ‘인풋’ 시간을 일과 이후로 미뤘더니 피곤해서 안 하게 되고, 심리적으로도 쫓겨서 쉬고 싶더라. 그런데 ‘인풋’하는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삼으니 내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느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 시간을 바꿔 쓴지는 얼마나 됐나.
3년 정도. 박사 학위받고 나서 바꿨다.
= 심리적인 효과 말고, 더 구체적으로 ‘지표’상 바뀐 게 있다면.
글을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 정보를 수용하는 감수성이 더 예민해졌달까. 예전에는 정보를 ‘따라다니는 느낌’이었다면, 시간을 앞당겨 쓰면서 정보를 나 자신이 통제하고, 관리하는 역량이 생겼달까.
= 통상 시간을 바꾸는 게 어려울까, 공간을 바꾸는 게 어려울까. 아니면 사람을 바꾸는 게 어려울까.
주변에서 이야기해보면, 시간을 바꾸는 걸 더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 공간을 바꾸는 건 상대적으로 쉽게 느끼는 것 같다. 개인차가 존재하는 것 같다. 사람을 바꾸는 건 인위적으로 계획할 필요가 없고, 그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같다.
= 공간을 바꿨다는 건 좀 막연하고 추상적인데, 구체적인 예를 들면.
주말에 회사를 나가곤 했는데 (= 왜?) 잔업도 하고, 기타 등등…. 지금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회사에 가지 않고, 학교(집에서 가까운 모교)에 간다. 학교에 가면 훨씬 더 집중이 잘 된다.
= 사립대학을 가깝다고 (근처 사는 주민이) 들어갈 수 있나.
돈을 내면 들어갈 수 있다. (= 얼만가?) 1년에 10만 원. 고려대 기준이고, 이용하는 시설은 학교 전 시설. 다만, 졸업생 기준이다.
= 여담인데, 학교 가면 옛날 생각 안 나나.
전혀 안 난다. 학교를 굉장히 오래 다녔는데, 9년째 책을 써오고 있는데, 계속 학교에 갔기 때문에…. 계속 다녀왔던 공간이라서 익숙하고, 정리가 더 잘 된다. 항상 가는 대학원 도서관의 그 자리에서 공부하고 일한다.
= 오마에 겐이치의 말처럼 정말 ‘결심’은 부질없을까.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게 오마에 겐이치의 지론이다. ‘결심이 부질없다’는 건 그 소신을 다소 강조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의지와 행동, 인간의 의식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상호작용한다. 바꾼다는 결심이 없으면 환경이 변화할 수는 없으니까. 인간의 의지 요인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 인터뷰하면서 “책의 방향성”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썼다. 그 말을 듣다 보니 트렌드 연구자의 ‘목적’이 궁금하다. 그것은 ‘행동의 변화’를 초래하는 계몽성이랄까, 목적성까지를 포함하나. 즉, 소비자 행동을 ‘유도’하거나 ‘계몽’하려는 철학적인 지향성까지를 포함하나. 아니면 그 ‘행동의 변화’를 분석하는 것까지인가.
계몽적 목적성은 전혀 없다. 우리는 단지 소비자 행동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뿐이다. [명사들의 책 읽기]라는 방송에 출연한 적 있다. 해당 TV쇼의 진행자가 “요즘은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이야기인즉슨, 너무 유튜브에 몰입하고, 소셜미디어에 중독되면서 정작 자기 주변사람들을 챙기지 못하고 밀어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그러니 좋지 않다고. 일종의 가치평가를 한 거다. TV 토론의 진행자로서는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비자행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행동에 관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왜 유튜브에 몰입하는지를 분석하고, 그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는 것은 트렌드를 분석하는 연구자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 가치판단을 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영역은?
자연인으로서는 누구나 가치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트렌드 연구자로선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 맥락에서 나도 자연인으로서는 가치를 판단한다. 다만, 가치판단에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고, 그 가치판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특히 공적인 영역, 가령 행정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는 더 엄격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근거가 따르지 않을 때에는 그 가치판단은 소비자 개인에게 억압이 될 수 있고, 기업에도 부당한 규제가 될 수 있다.
= 시간 공간 바꾸는 얘기를 조금 더 해보면, 나 같은 사람은?
공간을 바꾸면 좋을 것 같다.
=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 대부분은 생활공간을 자신의 의지나 계획대로 ‘선택’할 수 있는 (특히 경제적) 선택권이 없다.
인정한다. 대부분 대한민국 사람들이 그럴 텐데, 최소한 머무는 공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을 거다. 그런 공간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바꿔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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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전성시대
= 그야말로 유튜브 전성시대다. 책에서도 유튜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세대마다 다르고, 연구자는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인데, 우선 나에게 맞는 ‘맞춤형 동영상’이 수없이 많다. 그 속뜻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유튜브를 많이 보는 시청자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지난 인터뷰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인간의 뇌는 ‘사회적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고립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뇌 활동’으로서는 상호 연결되어야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
= 유튜브 소비가 모든 세대에서 높긴 하지만, 10대에서 압도적이고, 중간 세대인 3040보다 50대 이상에서 상대적으로 높다는 ‘U자 소비 형태’라는 조사가 있다(즉, 10대 > 20대 > 50대 이상 > 30대 > 40대 순. 참고: 미디어오늘).
일단 3040에겐 50대 이상보다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없다. 그리고 3040은 뉴미디어에도 익숙하지만, 전통적인 미디어에도 익숙하다. 결정적으로 유튜브를 많이 보기도 하지만, 팟캐스트 역시 많이 소비하는 것 같다.
= 10대와 50대 이상의 유튜브 소비는 어떻게 다를까.
10대의 세계는 50 이상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다. 가령 ‘노잼봇’이라는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는 유튜버가 운영하는 유튜브가 있는데, 구독자가 40만 명(18년 11월 기준)이다. 별다른 재미가 있는 유튜브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재미없는 유튜브의 구독자가 40만 명이다. 비교해서 뭣하지만, 널리 알려지고 영향력도 있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유튜브 구독자는 (노잼봇과 같은 시기에)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10대에게 유튜브는 나랑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소통하고 의지하는 공간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 유튜브 소비에 ‘상호 소통’의 요소가 강하다고 보나.
유튜버가 구독자의 요구(댓글)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제한적이지만 소통의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젊은 유튜버들이 굉장히 보수화됐다는 평가가 있는데.
보수적이라는 게 뭔 뜻이냐.
= 문재인 정권에 비판적인? 진보적 담론을 기본적으로 조롱하는?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인상비평이라는 전제에서 심리학적으로 보면 ‘나르시시즘’이라고 본다.
= 나르시시즘이라고 보는 근거는?
왜냐하면 사회적인 쟁점에관한 첨예한 논리의 헛점에 주목하고, 그것을 도장 깨기하듯 깨뜨리는 논리적 문제에 집착한다는 경향이 관찰된다. 대한민국 1020은 드라마 ‘SKY캐슬’이 잘 묘사하는 것처럼 특히 더 경쟁을 내면화한 세대다. 상당히 논리적으로 민감하고, 일견 능력도 있다고 보면, 텍스트의 논리적인 허점을 분석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텍스트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컨텍스트가 생략된 경우가 잦다. 텍스트에 관해 제대로 분석하려면 컨텍스트에 관한 분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맥락을 무시하거나 그에 관해 무지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 특정한 정치적인 지향은 없다고 보는 건가.
그렇다. 자유한국당을 지지하기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 일부에서는 성급한 이야기지만, 이런 유튜브 젊은 세대의 정치세력화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큰 의미 없는 논평이라고 본다.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비평하는 방식 자체가 자기모순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즉, 집단적 세력화가 불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지하는 세력을 강화하는 담론화가 없고, 잘나가는 놈들 까기에 집중한다.
= ‘문재인 정권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이 낮고, 20대 여성의 지지율과 비교하면 반 토막이라는 최근 여론조사결과(’18년 12월, 리얼미터, YTN 의뢰)가 있었다. 이에 관해선 여러 언론들의 논평과 해석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 YTN 앵커는 20대 남성이 문재인 정권의 여성정책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는 자신의 ‘해석’을 마치 조사결과인양 말하기도 하고,[footnote]그 해석의 ‘결과적’ 타당성은 별론으로 유추 해석을 마치 조사 결과인양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취지. (편집자)[/footnote] 또 어떤 여론조사 전문가는 “20대 남성, 아버지 재산 지키려고 문재인에 등 돌렸다”(‘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는 분석을 하기도 하는데. 이런 해석들에 관해선 어떻게 보나.
뭐 저렇게 보는 것도 이유가 있긴 있겠지만, 그런 발언은 해당 집단의 멘탈리티를 무의식적으로 반영한다고 본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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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보수화 그리고 불안의 재료
= 20대의 보수화 어떻게 보나. 지금까지 20대는 ‘당연히’ 진보적이었는데.
젊은이가 진보적이라는 보는 근거는 이들이 ‘변화’에 열린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조건을 보면, 20대는 세상이 변화해야 자신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19년, 20대는 변화에 우호적인가?’라고 질문하면 8090년대에는 변화를 해야 20대에게 유리했고, 그래야 그들에게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2019년 현재 20대에게 변화란 무엇인가? 사회가 변화한다고 20대에게 유리한가? 그렇게 변화해야 이들에게 미래가 생기느냐고 물으면 오히려 그 변화가 이들에게 더 큰 불안을 초래하고, 이왕에 가진 것도 별로 없지만, 그것마저 더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진 것 같다. 그래서 결국 현재의 20대가 가장 추구하는 가치는 안정과 안전이다.
= 그렇다면 20대 불안감의 사회적인 재료랄까, 그 역사적인 사건은 무엇이라고 보나.
‘IMF’라고 생각한다. 구조조정이 일상화하면서 사회구조가 더 불안해졌다. 학벌이라는 상징권력이 구조화하면서 경쟁의식은 더 심하게 내면화했다. IMF 이후의 불확실성 증가와 학벌을 중심으로 한 계급재생산 현상의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적인 사건이 있다. 드라마 [SKY 캐슬]의 폭발적인 시청률이다.
= 사회적 불안감을 줄이는 방법은 뭘까.
가령 서울대를 폐지하고, 국립대를 네트워크화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다(가령 프랑스가 파리1대학. 파리2대학. 파리3대학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처럼). 실현 가능성은 대단히 낮지만. 정책적인 접근방식은 별론으로 핵심은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인과율을 깨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성공에는 ‘운’이라는 게 굉장히 작용하는데, 우리나라는 실패하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인과율을 깨야 한다고? 정확하게 말한 거 맞나.
유럽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다. 상황을 이기는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환경이 개인에게 주어지느냐가 인간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복지와 환경이 중요하고, 개인의 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국가 개입을 정책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론적인 배경이 된다. 우리는 그 반대다.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다. 가령 ‘니가 의지가 없어서 그래’ 이런 식이다. 그래서 노년의 경제적 불안이나 중년의 실업 문제를 개인의 ‘노력 부족’ 문제로 돌린다. 이 신화를 깨야 한다.
= 개인의 자유의지는 환상이고, 신화다?
적확(的確)하게 말하면, 개인의 자유의지만으로 성공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게 신화다. 자유의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환경과 제도니까. 어떤 인간의 사회적 성공에는 그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환경과 제도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 논리적인 맥락으로 보면, 복지정책이 강화하면 20대의 보수화라고 해석되는 그 현상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보나.
그럴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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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점점 더 개인을 통제하기 어렵다
‘의미와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
= 책에선 조직이 개인을 통제하기 점점 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는데, 그 근거는 뭔가.
조직이 개인을 통제하는 힘은 약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것은 자명한데, 왜냐하면 조직의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조직원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고용정보원의 통계만 봐도 1년 안에 42% 정도가 퇴사한다. 이직 경험자도 많고. 조직에 오래 있을 생각도 별로 없다. 10년 이상을 생각하는 사람은 열 명 중 3명에 불과하다. 사회적인 현상으로서 조직의 목표에 확실히 동의해서 자신의 목표와 조직의 목표를 일치하는 경향은 느슨해지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조직의 힘은 느슨한 개인들의 힘보다 훨씬 더 커지고 있다.
=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본인은 어떤가.
밸(균형)이 안 된다. 라이프, 휴식이 필요한데, 시간이 부족하다.
= 워라밸이 중요한 이유는.
52시간 노동시간 제한에 관한 조사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노동시간 제한을 오히려 싫어한다. 왜냐면 기존보다 더 돈을 못 벌 것 같아서. 3년 추적(16-18)한 결과를 보면 돈이 더 필요한 이유가 뭐냐면 결국은 시간이 필요해서다.
여전히 ‘시간’보다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또 역설적인 건 돈이 시간보다 더 필요한 이유는 돈이 있어야 시간 여유가 생기니까다. 돈도 결국은 시간을 얻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돈을 잃으면 시간을 잃는다는 답변이 최근에는 67%까지 올랐다.
시간의 의미가 중요해졌는데, 왜 52시간 제한을 환영하지 않느냐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 남는 시간에 또 다른 전문성을 배우려고 다시 재투자한다. 결국 다시 돈을 벌기 위해서. [인타임]이라는 영화를 보면 시간이 자본이 되는 미래를 그리는데, 굉장히 탁월한 비유인 것 같다.
= 노동시간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윤 박사 본인도 아까 새벽에 출근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노동시간이 최상위다. 새벽에 출근한다는 게 일견 부지런하다는 긍정적인 느낌도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일 중독’ 같아 보이기도 한다. 노동시간을 ‘더’ 줄여야 하는 사회적 요청과도 좀 반하는 것 같은데.
중요한 기준은 ‘자발적 선택’ 인가 아닌가다. 주말에 일하는 것, 새벽에 나오는 것을 정당화하는 임원들이 가끔 있는데, 나도 회사에서 임원이지만, 그런 임원은 당연히 비판받아야지. 하지만 자기 선택으로 일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고, 그런 경우에는 스트레스도 적다. 일반적인 회사원들이 비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 자발적 선택임을 전제로 ‘새벽 출근’은 어떤 장점이 있나.
장점은 1) 출근 시간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다. 버스 승객도 없어서 편하게 온다. 2) 아침 시간은 사람들이 없어서 혼자 음악을 듣거나 신문을 보거나 잡지를 보거나 뭘 해도 방해가 없다. 나는 태생적으로 그게 선배든 후배든,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편이라서 아무런 방해가 없는 그 시간(새벽)을 선택하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자발적 선택’이냐 아니냐는 하는 점이다. 개인적인 취향인데, 놀아도 책상 앞에서 노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다. 동료들에게 들어보면 내가 비교적 문화적 소양이 높은 편인데, 그건 내가 책상 앞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기 때문이지, 그게 일이라서 그런 건 아니다. 그걸 ‘일’로 생각하면 (새벽에 출근해서 이것저것 하는 그런 일) 못한다. 거기에 ‘재미’를 느끼기 때문에 하는 거지.
= 자발적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슬프게도. 직장은 기본적으로 ‘억압적’이지 않나.
직장에 그런 억압적 속성이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맞다. 경쟁적이고, 수직적이다. 하지만 내가 속한 부서는 ‘책을 만드는 부서’라는 차별성이 있고, 내가 이제는 임원(이사)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율성도 있다.
= 자신의 상대성은 별론으로 일반적인 ‘직장 선배’로서 조언한다면.
우선 자기 일을 숙련하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일이 익숙해지면 그 시기가 또 위기다. 보통 일이 익숙해지려면 3~5년 정도가 걸린다. 그런데 그 시기에 일을 그만 두는 친구들이 많다. 왜냐면 일을 곧잘하니 그 정도 경력을 가진 친구들에게 일이 몰린다. 그리고 그렇게 일에 치여서 직장을 그만 둔다. 그 시기를 잘 넘겨야 한다.
두 번째로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조직 내에서 ‘대체 불가능성’을 만드는 거다. 대략 이런 과정이 또 3년~5년 정도 걸린다. 그렇게 7~10년차가 되면 회사 내에서 자기 시간이 생긴다. 이걸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7~10년차가 되면 조직생활과 일상생활을 조화할 수 있는 워라밸이 가능해진다. 그 단계에 올라가면 나를 시간에 맞추는 게 아니라 나에게 시간이 맞춰진다.
워라밸이 제도로서 시스템적으로 주어져야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역량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야 자기가 스스로 주도하면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
= ‘대체 불가능성’은 비교적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일반 사무직이나 단순 노무직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예로 들면, [골목식당]의 핵심 메시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가 ‘자기 중심성 깨기’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쓰는 트렌드 책이 바로 자기 중심성을 깨고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살펴보려는 거니까.
두 번째로 중요한 포인트는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거다. 즉, 시간을 통제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업무를 빨리 파악하고, 내 손에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을 장악하려면, 일을 익숙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시간을 통제할 있다. 어떤 단순한 업무라도 그 업무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과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단순 노무직이나 전문직이나 할 것 없이 통용되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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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보면 창업에 관한 조사결과가 인상적이다.
창업하고 싶어 하는 비율은 2013년부터 추적조사했는데, 대체로 60%후반으로 아주 높은 편이다. 창업하는 사람들보다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더 번다. 그럼에도 창업하려는 의향이 계속 높게 조사되는 이유는 결국은 돈을 못 벌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대단히 재밌는 동기 변화가 포착되는데, 그동안 행동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큰 동기 변화는 처벌이나 보상이냐, 당근이냐 채찍이냐 두 가지를 가지고 인간의 행동을 동기화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1980년대 에드워드 대시(Edward Deci, 책 163쪽)는 자율적인 행동 동기가 있다는 걸 밝혔다. 보상과 통제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다람쥐의 존재가 그런 행동의 동기를 입증했다. 그렇게 행동주의 심리학을 넘어서는 더 큰 패러다임이 형성됐고, 결국 인간의 행동을 자율적인 행동과 그렇지 않은 행동으로 양분하게 됐다.
한국 사회에서 이 동기가 중요한 것은 3년 동안 자발적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상이나 통제로 움직이지 않는, 재미나 의미로 움직이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 유튜브와 관련해선 어떻게 봐야 할까.
유튜버와 팟캐스터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돈이 안 되도 자기 시간을 투자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 지금 당장은 돈을 못 벌지만, 앞으로 벌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하는 사람이 많은 거 아닌가.
그런 기대감도 있긴 하겠지만, 당장 돈 벌려고 진입하려는 사람보다는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의미와 재미’가 중요해졌고 본다. 일인체제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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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는 거부하지만, 여전히 멘토는 필요하다
= 책은 ‘꼰대 거부 현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왜 그럴까. 사회적인 롤 모델이랄까, 전범이 부족해서?
롤 모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탈이다. 그런데 너무 ‘올드’하다. 지금 세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거지. 이건희나 이재용, 스티브 잡스가 롤 모델이겠나. 일부 그런 사람들을 롤 모델로 삼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많이 변한 것 같다.
= ‘꼰대’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국어사전에는 ‘나이든 사람을 비꼬는 말’ 정도의 의미로 규정돼 있다. 직접 조사하면서 연구자로서 그 실체적인 의미를 파악한다면, 후배의 인생에 권위적으로 개입하는 사람, 선배. 그런 인간들을 꼰대로 부르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 젊은 꼰대도 가능하겠네?
자기 확신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꼰대’로 본다면, 젊은 꼰대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 꼰대 거부 현상은 강화할까?
그럴 것으로 본다. 권위자들이 지시하는 방향이 틀릴 가능성이 커졌다. 교수, 부모, 성공한 선배들의 조언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예를 들자. 지금 초등학생의 희망직업 5위로 유튜버가 떠올랐다. 교수, 부모, 성공한 선배의 조언이 유튜버가 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런 조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 자신에게 꼰대적 속성이 있다고 보나.
자기 확신이 강한 분야가 있긴 하니까 그런 꼰대 성향이 있겠지. 하지만 직업적인 특성상 그 확신을 강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꼰대스러운 일방적인 훈계와 선배로서의 진심어린 조언, 그 경계는 뭘까.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조언하더라도 그것을 강요하느냐 아니냐의 차이. 두 번째는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느냐 아니냐의 차이.
= 꼰대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쓸데없는 훈계나 늘어놓는가인 것 같다. 일종의 기능론적인 접근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멘토랄까, 선배랄까, 스승이랄까…. 그런 존재들은 점점 더 필요한 것 같다. 나만 봐도.
동의한다. 과거에도 앞으로도 필요한 역할이다. 과거에는 자기가 선행한 경험을 알려주는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굳이 수치화한다면, 그 중요도 비중이 예전에는 7:3이었다면, 지금은 3:7인 것 같다.
= 꼰대와 멘토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인턴] (2015)이라는 영화는 꼰대와 현대적 멘토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극 중 로버트 드 니로는 나서서 조언하지 않고, 우선 듣고, 상황을 지켜본다. 젊은 사장이 원할 때, 요구할 때 비로소 자기 생각을 짧게 이야기한다.
= 한국에 멘토 시장은 있나.
97년 직후에 대기업 퇴사자가 쏟아지면서 멘토 시장이 생길 뻔했던 적 있다. 지금은 그런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 수요가 없으니까. 이렇게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 그런 시장은 없다.
= 영화 [인턴]에서 로버트 드니로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혹시 있나.
없다. 그런 사람은 영화 속에서만 있다.
=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나. 시민단체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는데.
물론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는 하지만…
= 멘토 시장이 활성화할 가능성은 있다고 보나.
55~63년생 베이비부머 1세대는 멘토 시장을 형성하지 못했다. 64~75년 사이에 출생한 2차 베이부머 세대가 멘토 시장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긴 하다. 응답하라 94 세대들. 1차 베이비부머 세대보다는 좀 더 유연한 사고를 하니까.
= 끝으로 독자에게.
앞서도 [골목식당]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지만, 누구나 살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중심성’이 생긴다. 그런데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점점 더 그런 경향이 강해지는 것 같다. 자기 중심성을 깨고, 자기만의 우물에서 벗어나려면, 주변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실수를 줄이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트렌드에 관한 관심과 정보가 필요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