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오래 전부터 일부 법학자 분들과 법무부 내부에서 무슨 금과옥조처럼 개정입법 방향으로 참고해 온 독일 형법의 ‘낙태죄’ 모델을 가져온 것입니다.

[box type=”info”]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의 주요 내용 

  • 임신 14주 내까지 낙태 전면 허용
  • 임신 14주~24주까지는 성범죄나 건강 경제상 이유로 낙태 가능
  • 의사의 거부권 규정(종교적 신념 등)

[/box]

[toggle style=”closed” title=”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보건복지부 자료 발췌).

1. 자연유산 유도약물 도입 근거 마련

시술 방법을 수술만을 허용하고 있는 현행 인공임신중절의 정의 규정을 약물이나 수술 등 의학적 방법으로 구체화하여 시술 방법 선택권 확대(안 제2조 제7호)

2. 위기갈등상황의 임신에 대한 사회적 상담 지원

  • 중앙 임신·출산 지원기관 설치 및 운영
  • 임신·출산 종합상담 제공기관 설치 및 운영
  • 상담원 등의 결격사유 규정 등
  • 임신·출산 지원기관 및 상담기관의 경비보조

3. 세부적 시술 절차 마련

  • 인공임신중절에 관한 의사의 설명 의무 등
  • 의사가 인공임신중절 관련 의학적 설명을 하지 않거나 서면 본인 동의를 받지 않은 경우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 제3자 동의: 심신장애의 경우 법정대리인 동의로 갈음할 수 있으며, 미성년자는 보호자 동의 대신 상담 사실 확인서 등으로 시술할 수 있도록 함.
  • 만 16세 이상 미성년자의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받기를 거부하는 등 불가피한 경우 상담 사실 확인서만으로 시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만 16세 미만 미성년자의 경우 법정대리인의 부재 또는 법정대리인에 의한 폭행·협박 등 학대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이를 입증할 공적 자료와 임신·출산 종합 상담 기관의 상담 사실 확인서 등으로 시술할 수 있도록 함
  • 인공임신중절 요청에 대한 의사의 거부권 인정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진료 거부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의사는 시술 요청을 거부하는 즉시 임신의 유지·종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임신·출산 상담 기관을 안내하도록 규정.

4. 원치 않는 임신 예방 등 지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피임 교육 및 홍보, 임신·출산 등에 관한 정보제공 및 상담, 인공임신중절 관련 실태조사 및 연구, 국민의 생식 건강(월경 건강, 생식기 질환 예방, 임신·출산에서의 건강 보호 및 의료서비스 지원 등) 증진 사업 등 추진 근거 마련(안 제12조 제3항)

5.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및 형법 적용 배제 조항 삭제 

  • 합법적 허용범위(임신주수, 사유, 절차요건) 관련 사항을 형법에서 일원화하여 규정하므로 삭제(안 제14조)
  • 합법적 허용범위에 대한 형법 낙태죄의 적용 배제 조항 삭제(안 제28조)

보건복지부는 입법예고 기간(10월 7일~10월 20일) 중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 후 개정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toggle]

독일 형법 218조, “나치 시대 법 폐지하라” 

하지만 정작 독일의 여성들은 “나치 시대의 법을 폐지하라”며 이 법과 수십 년째 싸우고 있는 중이에요. 독일 형법 218조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게 벌금 또는 최대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의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 임신 12주 이내에 상담을 받고 3일의 숙려 기간을 거친 경우가 아니면 모두 불법으로 남아 있습니다.

Bündnis für sexuelle Selbstbestimmung, CC BY NC ND (2019년 8월 22일 촬영)
독일 형법 218조 폐지 시위 장면(출처: Bündnis für sexuelle Selbstbestimmung, CC BY NC ND, 2019년 8월 22일 촬영)

게다가 작년(2019년) 3월까지 219조a 조항에 따라 임신중지를 시행하는 의사와 병원이 자신의 병원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어서 이 조항으로 처벌을 받게 된 의사의 긴 싸움 끝에 겨우 이 조항만 일부 개정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임신중지 시술을 한다’는 사실 외에는 이 병원에서 어떤 방법으로 임신중지를 하는지, 무엇이 안전한지 어떤 정보도 알릴 수가 없어요. 여성의 안전에도, 보건의료상으로도 해악이 큽니다.

2018년에 독일이나 지금 정부가 내놓은 입법예고안의 틀과 같은 방식으로 법을 개정한 아일랜드에서도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3일 전에 상담을 받았던 의사가 3일 후 재방문 했을 때 부재한 상태라면 다시 상담을 받고 3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사이 임신 12주를 넘기게 되면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 때문에 합법이던 임신중지가 불법이 되어버리죠. 아직도 수많은 아일랜드의 여성들이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로 임신중지를 하러 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독일 활동가에게 한국의 정부와 입법자들, 일부 법학자들이 독일 모델을 좋은 모델로 참고하고 있다고 전했더니 아주 개탄을 하더군요. 지금 정부가 내놓은 ‘낙태죄’의 개정 입법안은 이미 실패한 해외 법제의 종합판입니다.

임신중지 결정 시기가 늦어지는 조건에 있는 여성들—임신 사실을 늦게 인지하게 되는 여성들—특히 청소년과 장애인, 이미 다른 자녀를 돌봐야 하는 여성들, 직장에 다니고 있는 여성들, 폭력이나 학대 상황에 있는 여성 등 더 힘든 조건에 있는 여성들에게 ‘너가 왜 힘든지를 입증하라. 안 그러면 처벌받는다’며, 상담 먼저 받고 하루를 기다려서 다시 병원을 찾아가라, 그런데 의사는 널 거부할 수도 있으니 알아서 또 병원 찾아가라 하는 내용이에요.

존치되는 낙태죄는 특히 청소년, 장애인, 직장여성 등
존치되는 낙태죄는 특히 청소년, 장애인, 다자녀 여성, 직장여성, 피폭력 피학대 여성 등 더 힘든 조건에 있는 여성들을 더 힘들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따져 처벌하겠다?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형법 269조 1항과 270조 1항의 처벌 조항을 형법에 그대로 존치하겠다는 것입니다. 낙태 허용 요건(270조의2 신설)을 제시하였다고는 하나, 그에 앞서 처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toggle style=”closed” title=”낙태죄 헌법불합치(2019)“]

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

전원재판부 2017헌바127, 2019. 4. 11., 헌법불합치

판시사항:

임신한 여성의 자기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자기낙태죄’)과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경우를 처벌하는 같은 법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의사낙태죄’)이 각각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헌법불합치 의견 (4인: 유남석, 서기석, 이선애, 이영진)

자기낙태죄 조항은 모자보건법이 정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임신기간 전체를 통틀어 모든 낙태를 전면적ㆍ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벌을 부과함으로써 임신의 유지ㆍ출산을 강제하고 있으므로,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

자기낙태죄 조항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당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이다.

임신ㆍ출산ㆍ육아는 여성의 삶에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ㆍ사회관을 바탕으로 자신이 처한 신체적ㆍ심리적ㆍ사회적ㆍ경제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全人的) 결정이다.

현 시점에서 최선의 의료기술과 의료 인력이 뒷받침될 경우 태아는 임신 22주 내외부터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한편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려면 임신한 여성이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하여 전인적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실행함에 있어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이하 착상 시부터 이 시기까지를 ‘결정가능기간’이라 한다)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후략)

단순위헌 의견 (3인: 이석태, 이은애, 재판관 김기영)

헌법불합치의견이 지적하는 기간과 상황에서의 낙태까지도 전면적ㆍ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형사처벌하는 것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점에 대하여 헌법불합치의견과 견해를 같이한다.

다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른바임신 제1삼분기(first trimester, 대략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에는 어떠한 사유를 요구함이 없이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낙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점, 자기낙태죄 조항 및 의사낙태죄 조항(이하 ‘심판대상조항들’이라 한다)에 대하여 단순위헌결정을 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헌법불합치의견과 견해를 달리 한다. (…중략…) 적어도 임신 제1삼분기에 이루어진 낙태에 대하여 처벌하는 부분은 그 위헌성이 명확하여 처벌의 범위가 불확실하다고 볼 수 없다. 심판대상조항들에 대하여 단순위헌결정을 하여야 한다.

합헌 의견 (2인: 조용호, 이종석)

태아와 출생한 사람은 생명의 연속적인 발달과정 아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존엄성의 정도나 생명 보호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태아와 출생한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태아 역시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입법목적은 매우 중대하고,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사처벌하는 것 외에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다 덜 제한하면서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을 동등하게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공익의 중요성은 태아의 성장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없으며, 임신 중의 특정한 기간 동안에는 임신한 여성의 인격권이나 자기결정권이 우선하고 그 이후에는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한다고 할 수도 없다. (후략)

[/toggle]

이런 법이 만들어지면, 여성의 건강권과 평등권, 자기결정권은 온전한 헌법상의 권리로서 보장받지 못합니다. 정부 입법예고안대로라면 여성의 권리는 가의 허락에 의한 ‘조건부’의 권리가 됩니다. 여성에 대한 처벌을 끝내 유지하며 정부가 여성의 권리 자격을 심사하겠다는 거죠.

왜 여성의 권리를 국가가 승낙하고 제한해야 합니까?
임신중단은 여성의 권리입니다. 왜 여성의 권리를 국가가 승낙하고 그 기간을 제한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보건복지부 입법예고안은 여성의 자기낙태를 ‘더 구체적으로 따져서 처벌하겠다’는 셈입니다. 낙태 허용 기간의 제한이 있으면 임신중지를 더 일찍 하고, 낙태 허용 기간에 제한이 없으면 임신중지를 늦게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몸에 관한 선택을 법적 제약에 따라 결정해서도 안 되고요. 기간의 제한 없이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도대체 여성들을 뭘로 보고 있는 걸까요. 30~40년 전 만들어진 법 때문에 전 세계의 여성들이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를 위해 수십년 째 싸우고 있습니다. 2020년인데, 우리의 출발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낙태죄’의 완전한 폐지와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법’의 제정만이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