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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2015년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새로움은 그저 시간이 흘러가고, 숫자가 바뀐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지만 지난 과거를 응시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성찰과 돌아봄의 연속선 위에서만 새로운 출발은 가능합니다.

슬로우뉴스가 바라본 2014년을 ‘미디어, 정치, 사회, 테크(IT), 경제/노동, 문화, 사람’으로 나눠 돌아봅니다. 각 영역을 상징하는 키워드와 편집팀이 선정한 10대 뉴스를 정리하는 ‘돌아봄’으로 2015년 새해를 맞이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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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積弊): [명사]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 중 하나가 ‘적폐’다. 그동안 쌓인 폐단이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사고를 낳았고,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대체 어떤 적폐를 해소해야 하며, 어떤 적폐가 해소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물론 대통령조차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적폐’ 운운은 왜 이토록 공허한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바로 그 박 대통령이 적폐의 심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대국민담화 (2014년 5월 19일) (사진: 청와대)

조용한 퇴보의 시대였다. 어떤 반동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수많은 것들이 퇴보했다. 국정 교과서 논란이 그렇고, 서북청년단 재건위 따위가 그러하며, 2014년을 맺은 땅콩 회항 논란 등이 또 그렇다.

어떤 평범한 봄날 전해졌던 세월호 침몰 사고는 사회에 큰 충격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불러일으켰지만,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고, 지방선거의 구호가 되고, 그리고 그리 많은 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우리의 사회적 합의란 우리가 지금 위치한 지점보다도 훨씬 뒤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통령과 함께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천천히 퇴보하는 일종의 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게 우리의 적폐다.

Eva the Weaver, "Rootface", CC BY NC SA https://flic.kr/p/9sAcnP
Eva the Weaver, “Root face”, CC BY NC SA

1. 세월호 참사

어떤 평범한 봄날, 이런 뉴스가 전해진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 한 척이 가라앉았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모두 구조되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감상은 금세 반전되었다. 이는 터무니없는 오보였고, 이 사고는 무려 300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그중 250명은 학생이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을 믿고 대피할 기회조차 잃어버린 채 그들은 차가운 바닷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참담하고 비극적인 사고 앞에 사람들은 슬퍼했고 또 분노했다. 총체적인 무능과 비도덕이 사고를 키웠음이 속속들이 드러났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최초의 ‘전원 구조’ 오보는 상징적이다. 그만큼 모든 것이 엉터리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과 분노는 가라앉았고,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논란이 커졌다. 유가족들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대한민국의 2014년을 상징하는 이 거대한 사고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 분노의 목소리가 결국 무엇을 바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으라는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https://www.facebook.com/leepary
“거꾸로 된 건 너희들이 아니라 우리들인 것 같다. 거꾸로 된 세상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글/그림: 최남균)

2. 극우세력의 전면 등장: 일베, 서북청년단 재건위, 사제폭탄 테러 등

어떤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일베를 굳이 그리 분석하려 하는 까닭은, 자유와 평등, 인권을 부정하고, 특정 지역과 성별, 성향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목소리가 이토록 지배적인 공론장을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기 뜻에 맞는 이야기를 곧 ‘팩트’로 여기는 태도 앞에 시비를 따지는 논리는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시사IN의 표현처럼 “산업화의 아이들이 돌아왔”으나, 그에 대응할 방법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일베충의 일기 중에서
일베충의 일기 중에서

3. 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군대라는 작은 사회에서, 윤 일병을 둘러싼 사회 전체가 가해자였다. 부대를 통제하고 부대원을 보호해야 할 간부조차도 가해자였다. 윤 일병은 군대라는 사회에 갇혀 외부와 접촉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가족 면회조차도 차단당했다. 그는 이 작은 사회에서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사망했다.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은 “바른 인성과 창의력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길러내는 게 우리 교육의 목표가 돼야 한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또다시 셀프 개혁안을 주문했고, 일회성 인권 교육 따위의 무의미한 대책이 나왔다. 이 공허한 목소리들 속에, 폐쇄된 작은 사회 그 자체를 열고자 하는 시도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Luca Rossato, CC BY NC ND  http://www.flickr.com/photos/funky64/7000442183/in/photostream/
Luca Rossato, CC BY NC ND

4. 땅콩 회항

처음은 해프닝에 가까웠다. 물론 엽기적인 일이었지만, 한 재벌 3세의 철없는 난동 정도로 취급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조사가 진행될수록 일이 커졌다. 회사는 피해자의 증언을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국토부는 공정한 조사를 자신했지만 부질없었다. 조사관이 회사 측에 조사 내용을 알려준 혐의로 구속되었다.

엽기적이지만 그리 치명적이진 않았던 부조리 하나에서 갑의 횡포, 회사 자원의 사적 유용, 심지어 정경 유착까지 온갖 사회의 모순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아주 작은 틈에서도 이토록 많은 부조리가 튀어나온다면, 사실 이 세상에 부조리란 얼마나 또 일상적이고 흔한 것일지.

출처: 대한항공 광고
출처: 대한항공 광고

5. 서울시 인권헌장 거부 사건

누군가를 악마로 치부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악마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긴 어렵다. 한때 인권변호사였던 박원순은 ‘성적 지향’ ‘성적 정체성’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했다는 이유로 성 소수자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한 서울인권헌장 공표를 거부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 소수자의 인권 보장이 시기상조라며 박 시장의 뜻에 의견을 같이한다. 이에 대해 마틴 루터 킹의 서신을 일부를 인용한다.

그는 “악의를 가진 사람들의 절대적 몰이해보다 더 힘 빠지는 것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어설픈 이해”라며, “인류의 진보는 필연성의 바퀴 위에서 굴러가지 않으며, 신과 함께하는 이들의 쉴 틈없는 노력을 통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 자체는 사회의 퇴보와 같은 편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박원순 (서울시 홈페이지 '함께서울') http://mayor.seoul.go.kr/page01_01
박원순 (서울시 홈페이지 ‘함께서울’)

6. 국정교과서 논란

교학사 교과서 논란이 교학사 교과서가 문제가 된 까닭은 이것이 단순히 뉴라이트의 사관에 기초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교과서는 사실관계에서조차 수많은 오류를 뱉어낸 것은 물론 네이버 블로그나 구글 이미지 검색, 위키 따위를 출처로 표기할 정도로 엉터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역사관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나온 교학사 교과서가 철저히 외면받은 뒤,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들고 나온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국정교과서는 획일적이고 경직적이며, 정권의 입맛을 대변하기 십상이다.

바로 최근까지 인혁당 사건은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발언으로 모두를 경악시킨, 유래없이 역사의식이 부실한 대통령이 그간 역사 바로 세우기를 거듭 주문해왔음을 생각해 보자면, 이를 기우로만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잊소리 교과서

7. 의료법인의 자법인 허용 추진 논란

정부의 의료법인의 자법인 허용 추진은 흔히 의료민영화의 초석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논란거리가 되어 왔으나, 사실 이는 낭떠러지 앞에 있는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를 땜질하여 의료민영화를 막으려는 꼼수에 가깝다.

의료기관은 영리행위를 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지만, 의료행위 자체의 기반이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큰 불편을 체감하지 못할 것이다. 소형 병원과 의원들은 더 힘들어지고 1차 의료기관의 붕괴는 끝내 국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오겠지만, 실제로 그 부담이 실제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진짜 시사점은 여기에 있다.

세간에 도는 의료민영화 괴담처럼 극적인 변화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의료의 공공성은 아주 느리게 훼손될 것이다. 부정적인 변화는 느리게 찾아오는 법이다.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말이다.

Ceci Newton, CC BY NC SA https://flic.kr/p/nnawqE
Ceci Newton, CC BY NC SA

8. 비리 사학재단 대거 복귀: 상지대 등

사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물론 사학을 설립자의 이념과 떼어 놓을 수는 없으며, 설립자의 이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것 또한 사학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공공성이다. 일 년에도 수천 명의 학생들이 들어오는 학문의 요람을 한 사람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자주성과 공공성의 조화는 사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며 사립학교법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그 자주성이 비리와 전횡으로 점철됨에도 불구하고 사학의 자율만을 강조한다면, 공공성은 산산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교육부 앞에서 비리재단 복귀 상경투쟁을 벌이던 상지대 학생들이 연행되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진관장  노조지부장. (2010년 8월 9일)
교육부 앞에서 비리재단 복귀 상경투쟁을 벌이던 상지대 학생들이 연행되자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진관장 노조지부장. (2010년 8월 9일)

9. 판교 참사

세월호 사고가 채 기억에서 잊히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판교에서 축제를 즐기며 환풍구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이 환풍구가 파손되며 무더기로 추락한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한 안전불감증을 얘기했고, 환풍구 위에 올라선 사람들의 책임을 얘기했지만, 당장 보도 한가운데 뚫려있는 그 많은 환풍구들을 먼저 얘기하지 않고, 사람들이 환풍구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그 어떤 장치도 없었음을 먼저 얘기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의 책임부터 묻는지가 의아하다.

그런 각자도생의 사회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곳을 나라라 부를 수 있을까.

판교 참사 현장 (사진: 최미니 제공)
판교 참사 현장 (사진: 최미니 제공)

10. 신해철 의료사고 논란

그는 90년대를 상징했던 음악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죽음이 음악을 사랑하던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것이야 굳이 두 번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사소하다면 사소하다 할 수술에서 비롯된 의료사고 혹은 의료과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병원은 낮은 보험료와 수가 제도로 인해 미용, 성형 등의 비급여 진료가 비대해지고, 경쟁적으로 환자를 유치하며 광고와 상행위에 골몰한다. 모두가 의료민영화를 의심하지만, 사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의료민영화를 의심할 징후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공공의료라는 칸막이 뒤에서 곪아가는 의료시장이다.

이 사건은 이런 왜곡된 의료제도의 한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신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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